미셸 투르니에의 푸른독서노트
미셸 투르니에 지음, 이상해 옮김 / 현대문학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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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책을 발견한 것은 우연이었다. 무엇 때문인지 기억이 나진 않지만, 미셸 투르니에의 책을 검색하다 신간이 나온 소식을 접한 것이다. 거기다 저자의 독서 노트라고 하기에 구미가 당겼다. 책의 홍수 속에서 살아가면서, 어떠한 책을 선택해서 읽는다는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 작가 들은 과연 어떤 책을 읽을까가 궁금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미셸 투르니에고 예외는 아니었다. 이 책에 실려 있는 책들이 무조건 좋을 거라는 받아 들임보다, 책에서 느꼈던 잔상들을 들춰 볼 수 있다는 사실이 들뜨게 했다. 글을 쓰는 작가의 책에 관한 이야기. 그 자체만으로도 흥미가 생기기에 충분한 얘깃거리였다.

 

  도대체 미셸 투르니에가 좋아했던 책은 무엇이고, 이 책에 실려 있는 책들은 어떤 책들일까. 궁금증에 목차를 훑어 보면서 약간은 의아해 진다. 몇몇 작가는 익숙하지만, 대부분이 낯선 작가들이었고 생소했다. 그리고 그나마 익숙한 작가들의 작품은 청소년들이 주로 읽는 작품들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당연히 성인의 눈에서 바라볼 수 있는 작품을(굳이 연령대로 구분할 필요도 없지만) 실어 놨을 거라는 추측이 빗나가는 순간이었다. 거기다 저자는 서문으로 '이야기 하나 해주세요'로 시작하고 있었다. 보통 어른들이 이야기를 해달라고 조르지는 않는다. 아이들이 어떻게 이야기를 듣고 판단해 가는지를 설명하기 위한 서문으로 파악할 수 있지만, 미셸 투르니에 답게 방대하면서도 흥미롭다. 말의 습득에서 낭독과 구술문학까지 연결해 간다. 그러면서 낭독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텍스트 해석이 독자나 낭독자인 자신을 의미하므로, 더 맛깔나게 할 수 있다고 말한다. 특히 시의 경우에 그러한데, 아직까지도 시를 묵독하며, 읽기에 여념이 없으니 부끄러울 따름이었다.

 

  저자는 작품을 설명해 나가면서 아이들에게 들려주듯이, 또한 아이들의 반응을 관찰한 경험까지 덧붙이고 있다. 쥘 베른에서부터 루이스 캐럴, 키플링까지 자유자재로 넘나들지만, 책을 읽으면서 한 작가의 작품을 알아간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미셸 투르니에에 의해서, 새로운 이야기가 탄생하고 있으므로 소단원이 끝날 때마다 새로운 세계에서 빠져나오는 기분이었다. 그러곤 다시 세로운 세계로 여행하는 기분이었다. 옮긴이도 말했지만, 대부분의 책들이 청소년을 위한 책들인데 반해 문학적, 철학적 배경이 없으면 투르니에의 해석을 혼자서 이해하기가 어렵다고 했다. 투르니에는 그 부분을 자신의 글쓰기 재주가 부족하다고 안타까워 했다. 나 또한 투르니에가 들려주는 이야기에는 충분한 흥미가 갔지만, 직접 읽은 책들이 아니였기에 해석의 난해한 부분을 많이 만났었다. 이러한 해석도 존재하는 구나라고 느끼기에는 생소한 작품이 많았고, 작품들의 특성상 이미 커버린 뒤에는 잘 읽지 않은 분야였다(요즘에서야 어린시절에 얇은 동화책으로 읽었던 책들을 성인판(?)으로 읽기는 하지만).

 

  하지만, 그가 제시한 몇가지 해석들은 수긍이 갔다. 쥘 베른을 접하기 전에 청소년 책으로 치부해 버리고 말았는데, 두툼한 해저 2만리를 읽고 나니 과학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청소년들이 읽기에는 벅차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투르니에는 위대한 작가 겸 지리학자라고 말하고 있었는데, 쥘 베른 컬렉션에 관심을 갖고 있는 터라 이번 기회에 쥘 베른 작품을 탐독해 봐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오래전부터 읽고 싶었는데, 투르니에의 해석을 보니 궁금증을 더 생기고 말았다. 그가 수학교수였다는 사실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옥스퍼드 대학교 학장의 딸인 앨리스에서 뱃놀이 중 들려준 이야기를 엮은 것이라는 사실부터가 흥미로웠다. 나에게 그 책은 조카들에게 읽어주던 동화책 속에서밖에 존재하지 않았는데, 작가의 그런 배경과 투르니에의 색다른 해석이라니. 루이스 캐럴은 계집아이들에게 이상한 열정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이 아이들이 여자가 되어 가면서 너무나 다른 존재로 변해 버려서 어렸을때 갖었던 우정이 예의를 차리게 되는 정도 밖에 안된다고. 투르니에는 거기에 '앨리스가 겪는 시련들을 섹스라는 암흑세계로의 추락으로 해석하고 싶은 유혹을 느끼게 된다' 라고 했다. 가끔 성장소설들을 읽다가 그 아이들이 어른이 된 모습을 보면 낯선 감정을 느끼곤 했는데, 투르니에의 이런 해석 앞에 입이 떡 벌어진다. 어쩜 나도 그런 유혹 때문에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 때문이다.

 

  그러나 꼭 저자의 해석에 따라가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 이야기는 꼬리에 꼬리를 무니 이해가 가면 가는 대로, 그 책이 흥미로우면 흥미로운대로 찾아서 읽어보고 싶다는 소소한 다짐을 해도 상관없다. 단지 저자 해석을 다른 사람의 견해로 받아들이면 생소한 이야기도 훨씬 가깝게 다가올거라 생각한다. 그 작품을 쓴 작가들의 이야기는 그들의 작품만큼이나 흥미진진했다. 글을 쓴다는 것이 어쩔 때는 지식을 총동원해야 할 때도 있지만, 일상 속에서도 쓸 수 있다는 미미한 의미를 받기도 했다. 투르니에는 '소설을 출간하는 것은 독자에게 소설의 반을 제공하고, 독자가 책을 읽어 나가면서 머릿속에서 나머지 반을 써주기를 기대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책은 저자의 소설이 아니지만, 기존 작품에 저자의 견해를 붙이고, 원 작품의 이야기를 탐독 하는 것. 그런 일련의 연결이야말로 독자들이 머릿속에서 채워갈 수 있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여기에 수록된 작품들의 대상 연령대나, 아니면 나같은 어른이나 모두다 또 다른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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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젊은이가 지나갔다
알랭 레몽 지음, 김화영 옮김 / 현대문학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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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전작 <하루하루가 이별의 날들>을 읽고 나서, 그의 작품을 더 읽고 싶었다. 검색을 해보니 <한 젊은이가 지나갔다> 밖에 번역이 되어 있지 않았다. 바로 주문해서 받은 책은, 색이 약간 바랜 초판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읽지 않았다는 걸 알고나니 조금은 씁쓸해 졌지만, 이제라도 내 손에 쥐어 있는 이 책이 친근하게만 느껴졌다. 전작을 통해서 알게된 저자의 성장과 내면의 세계가 나에게도 영향을 끼쳤기에, 새로운 책에서는 어떠한 이야기가 이어질지 궁금했다.

 

  전작에서 저자는 자신의 가족 이야기를 썼다.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는 그다지 많지 않았지만, 좋은 기억은 별로 없었다. 그런 아버지를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는데, 그 책을 읽은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쓴 글 때문에 아버지에 대한 이미지를 안 좋게 만들어 갔다. 저자는 아버지에 대한 자극적인 표현을 지우지 못한 것을 후회하면서, 자신이 얼마나 아버지를 사랑하는지를 말씀드리기 위해서 이 글을 쓰고 있다고 했다. 아버지가 몹시 그리워한 순간에, 고모의 옷장 깊숙히 들어 있는 아버지의 편지 백여 통이 발견된 것이다.

 

  그 편지들은 아버지가 모로코에서 군복무를 할 당시에 가족들에게 쓴 편지였다. 저자는 그 편지들을 읽으면서 자신의 아버지가 될 한 남자의 젊은 적 시절을 더듬어 볼 수 있었다. 아버지가 죽음에 대해서 불안에 떨때도, 현재 자신이 있으므로 그 남자가 죽지 않을 거라면서 편지를 읽어 나갔다. 그런 분위기를 타고 아버지의 편지들로 이야기를 풀어나갈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버지가 모로코에서의 군생활이 어떠했는지에 대해서 말해주고는 더 이상의 세세한 아버지의 이야기는 없었다. 그 편지를 통해 자신도 북아프리카 알제리에서 군복무를 한 것에 묘한 동질감을 느꼈지만, 대부분은 자신의 유년시절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가족의 이야기이면서, 아버지의 이야기, 자신의 이야기라고 했다.

 

  이 책은 전편의 연장선이라고 볼 수 있다. 거기에 자신의 이야기를 좀 더 추가한 것이고, 아버지의 존재를 부각시키므로써 자신의 온전함을 드러내려 했는지도 모르겠다. 아버지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 우리 가족은 이렇게 살아왔는 증거. 그리고 행복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려 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저자는 숙식을 해결하기 위해 수도원에 딸려 있는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가톨릭이었던 집안 분위기를 그대로 이어받아 신부가 되기를 꿈꾸었다. 신부가 되면 오지로 순례를 떠날 것이라고 다짐하고 있던 그에게 철학선생 샤를르 블랑셰와의 만남은 인생에서 대변혁을 가져온다. 그를 통해 문학에서부터 삶까지를 넘나들며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를 만든 것이다. 또한 캐나다로 일 년동안 종교공동체에 들어가 수련을 받는 동안 그는 점차 신부가 되겠다는 꿈에서 자신이 멀어지고 있음을 깨닫는다.

 

  또한 고등학교 시절 <알제리 전투>를 보고 충격을 받고, 군복을 입은 군인이 되지 않겠다고 다짐속에 공익요원의 자격으로 알제리로 떠난다. 그곳에서 배움에 굶주린 청소년들에게 기초를 가르쳤다. 어느정도의 속죄의 심정으로 알제리를 향한 것이었는데, 그곳은 아버지가 젊을적 군복부를 했던 모로코와 가까운 곳이었다. 그곳에서 또다른 경험을 하긴 했지만, 그가 돌아온 프랑스는 혼란스러웠다. 혁명이 휩쓸고 간 자리에 덩그러니 남겨져 있는 것 같은 느낌은 자유를 갈망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신부가 되겠다는 그의 꿈이 사라졌으니 먹고 살아야했다. 별 경력이 없는 그는 임금이 형편없는 일자리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러던 중 밥 딜런의 음악을 듣게 되고, 그는 밥 딜런에 심하게 빠지게 된다. 밥 딜런과 관계된 모든 것을 듣고, 읽던 그는 밥 딜런에 관한 글을 써야겠다고 맘 먹는다. 가정교사로 있던 곳의 하녀방에서 밥 딜런에 관한 글을 쓰기 시작한다. 의외로 그 책은 큰 반향을 일으켰고, 밥 딜런을 직접 만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기도 했다.

 

  그는 삶을 향해 전진하고 있다. 다른 욕구를 위해 자신의 삶을 만들어 가야 한다고. 그가 이 책을 통해서 아버지에 대한 애정을 얼마나 드러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이 모든 이야기는 아버지에게 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아버지를 한 순간도 잊지 않았다는 무언의 메세지를 전하는 듯 했다. 어쩌면 회한이 깊이 남아 있는 추억을 꺼내면서 많은 좌절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염려와는 다르게 저자는 꿋꿋이 자신의 삶을 이야기 했고, 삶 또한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 죄책감이나 후회보다는 아버지를 그리워 하는 모습이 더 나을 거라 생각한다. 자신의 삶 속에서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앞을 향해 나가는 것 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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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글 긴 침묵 - 개정판
미셸 투르니에 지음, 김화영 옮김 / 현대문학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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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운 겨울이면, 뜨뜻한 아랫목에서 간식을 먹으며 재미난 소설들을 읽기를 소망하게 된다. 추울 때는 밖을 돌아다니는 것보다 가만히 누워 책을 통해 다른 세상을 맛보는 것이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그런 소설이 지겨울 때면, 곧장 집어 드는 것이 산문집이다. 산문은 날씨가 스산해 질 때, 어울리는 문학이라고 생각한다. 자연의 변화를 좇으며, 흩어지려 하는 마음을 다잡아 보는 것. 반대로 변화에 따른 마음을 타인에게 의지해 보는 것. 그것이 산문을 읽는 묘미라고 생각한다. 그래서였을까. 여름내내 쳐다도 보지 않았던, 미셸 투르니에 책을 집어들었다. 올 초에 이 책을 읽다 만 흔적이 고스란히 남겨 있는 책을 다시 집어 들고 나니 만감이 교차했다. 여기까지 읽었다고 표시해 둔 앞부분이, 전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책 한권을 읽으면서 두 세개를 만나는 느낌이랄까. 꾸역꾸역 꿰어 맞춰, 읽다만 부분부터 다시 시작해 나갔다.

 

  미셸 투르니에의 산문을 두 번째로 접하고 나니, 그의 글이 조금 익숙하지만 더 광범위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일상의 자질구레한 것에서부터, 인간 본성의 깊이까지 파고드는 역량은 놀라웠다. 그가 철학 공부을 공부 했다는 사실이 수긍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자유자재로 가벼움과 무거움을 넘나들며, 사유를 유도하는 것은 미셸 투르니에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그가 얘기를 꺼내면, 납득을 하기도 했고 의아하기도 했다. 하지만 쉽게 지나쳐 버리는 소재들에서 끌어내는 다양한 시선들은, 모든 것을 정지시키고 생각하기에 알맞았다. 책을 읽다가 잠시 멈춰서서 생각에 빠지기도 하며, 저자가 써내려간 글을 통해 다른 식으로 접근해 보기도 했다.

 

  이 책은 8가지 주제로 나뉘어 진다. 집, 도시, 아이들 등 어떻게 보면 쉽게 접하지만 깊이 있는 생각은 해 보지 않는 것들이다. 거기다 그렇게 광범위한 재료들을 어떻게 요리해야 할지가 더 난감한게 사실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들을 피력하면 되는 것이지만, 왠지 주제만 살펴보면 하나의 정의가 만들어야 한다는 듯 살짝 부담감이 가기도 했다. 이런 경솔한 생각은 무너져 버렸지만, 주제를 정해놨다고 해서 그 안에서 국한되는 글들은 아니다. 묶음이라는 표현이 적절하도록 비슷한 이미지들이 들어가 있는 글들이었다. 또한 피상적인 연결들도 흥미로웠다. 예를 들자면 '손'이라는 글을 살펴보면, 인간에게 두 손이 달린 모습을 설명하면서 손으로 행할 수 있는 것을 같이 드러낸다. 손이 우리의 신체에서 어떠한 역할을 하는지, '수음하다' 까지 범위를 두며 겉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다 거미에게 손의 의미를 부여할 때는 '몸에서 잘려진 채로 악몽 속에서처럼 재빠르게 움직이는 능력을 부여받은 메마른 작은 손을 닮았다' 라고 표현한다. 또한< 책>이라는 제목에서 저자는 '왜 쓰는가'의 대답으로 읽혀지기 위해 쓴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나 자신은 책이라고 하는 시장에 내놓을 이 제품을 방안에 들어 앉아서 만들고 있는 수공업자' 라고도 말한다. 이처럼 저자는 하나의 재료에서 사유를 맘껏 끌어내고 있었다.

 

  때론 너무 깊이 들어가는 그의 글이 어렵게 느껴지기도 했다. 나와는 다른 세계에서 생각하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고 헤메기도 했다. 저자에게 익숙한 주제들을 말할 때는 그에 대한 배경 지식이 없었기에 멀뚱멀뚱 읽기만 하고 있었다. 훗날, 그때 미셸 투르니에가 한 말들이 다른 글과 연결 되어 깨달을지도 모르겠다. 설사 그럴지라도 산문을 읽는 재미는 사색하는 묘미가 있기에 모호함 속을 헤메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위에서도 말했듯이 저자의 글은 방대하다. 마치 수 백년 된 나무처럼, 굵은 몸통을 두고 아래로로는 뿌리를, 위로는 가지를 마음껏 펼쳐 나가는 것 같다. 어떠한 가지와 뿌리를 만나든지 그것은 한 몸통에서 나온 것이면서 각자의 위치가 있으므로, 꼭 연결 짓지 않아도 된다. 자유자재로 돌아다니며, 맘껏 흡수하며 가끔 다른 개체를 통해 이동을 하면 된다.

 

  이 책의 끝무렵에는, 번역가 김화영님과 미셸 투르니에와의 만남을 정리한 대담이 실려 있다. 대담을 통해서 저자의 집과, 저자의 글의 세계를 살펴 볼 수 있었다. 대담으로 인해 좀 더 다가갈 수 있었고, 머나먼 프랑스의 한 세제관에서 살고 있는 고령의 저자에게 친근감을 느끼기도 했다. 그곳에서 글이 탄생하고, 사제관에서 계절의 변화를 느꼈다고 생각하니 포근했다. 앞으로도 소설과 산문을 병행으로 출간하는 저자의 행보가 계속 이어지길 바란다. 머나먼 땅에서도 그를 기억하고, 그의 글을 만끽하며 사색에 빠지는 독자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 주면서, 늘 건강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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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실 비치에서
이언 매큐언 지음, 우달임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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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을 뜨니 방이 캄캄했다. 날씨가 흐린가 보다 하고 창문을 여니, 비가 내리고 있었다. 월요일 아침부터 내리는 비는 왠지 모를 착찹함을 가져온다. 하루가 더 길 것이라는 무언의 예감 때문이다. 가방을 주섬주섬 챙기며, 오늘 쓸 리뷰 책을 골랐다. <체실 비치에서>를 집어 들다, 책 내용이 떠올라 손길이 무거워지고 말았다. 책 겉표지를 한참을 바라봐도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우울함이 그득했던 책. 내가 접해 있는 세계와 결코 엮고 싶지 않았고, 동떨어진 이야기라고 치부해 버리고 싶었다.

 

  일생에서 새로운 전환점이 될 수 있는 결혼. 서로를 보는 것만으로도 설레고, 기쁨에 넘쳐야 할 둘 만의 결혼 첫 날. 에드워드와 플레렌스에게는 가장 최악의 날로 기억되고 말았다. 도무지 문제가 뭐냐고 말하기에 애매모호한 그들의 하루.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답답하고 숨이 막혔다. 책의 시작은 그들이 결혼을 해서 묵게될 호텔에서부터 시작한다. 저녁 식사를 하며 일련의 회상들로 이루어져 있는 시작은 평탄해 보였을지 몰라도, 왠지 모를 불안이 서려 있었다. 어느 젊은이들의 인생의 전환점을 지켜본다는 것으로는 대답이 될 수 없는 불안감. 그런 불안감은 조금씩 드러나고 축약되어 터트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터졌을 때는, 씁쓸하고 우울할 뿐이었다. 안타까움보다 책을 읽는 내내 가지고 있었던 답답함이 조금 가라 앉는 정도였을 뿐, 마음이 한없이 시려지고 있었다.

 

  그들은 결혼 첫날에 헤어졌다. 최고의 순간인 동시에, 최악의 순간을 모두 맞이한 날이었다. 무엇 때문에? 과연 무엇 때문에 그들은 헤어졌던 것일까. 겉으로 드러나는 표면적인 이유는 간단했다. 첫날 밤이 순탄하게 진행되지 못했다. 서로 사랑 했지만, 감정 표현 방식과 원하는 것이 달랐다. 그렇게 간단하다면, 한낱 에피소드로 치부해 버리고 어깨를 으쓱하며 지나쳐 버릴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의 내면으로 들어갈수록 꼬여만 가는 각자의 단상들이 숨막혔다. 그럴꺼면 왜 결혼을 했냐는 악다구니는 통하지 않는 답답한 상황이었다. 지금처럼 남녀의 관계가 자유분방하지 못한 시대적 배경이라는 것은 이해가 가지만, 서로의 생각을 서슴없이 털어놓지 못한 것까지 배경 탓을 하고 싶지 않다. 일부러 상처를 주며 결별을 해놓곤, 서로를 그리워 하는 것까지 철저히 모르게 살아간 두 사람 앞에서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난감했다. 아름답다, 가슴아프다, 안타깝다라는 수식어는 내 안에 존재하지 않았다. 좀 더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이 존재했음에도 행하지 않는 그들이 매정하다고 생각한다. 감정만으로, 생각만으로 되는 것이 사랑이 아님을 알지만, 그렇기에 더 답답함을 느끼는 지도 모르겠다.

 

  그들의 상황을 생각하면서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는 나를 뒤로한 채, 저자는 비교적 담담하게 써 내려가고 있었다. 그런 담담함을 지켜 보는 것 조차 맘에 들지 않았던 그들의 사랑, 처지. 어쩌면 자신은 담담하게 지켜보는 척 하면서, 뛰어난 정밀 묘사로 인해 독자들에게 감정이입을 모두 시켜버린 건지도 모른다. 지켜보는 입장에 익숙한 나같은 독자는 이야기의 흐름에 따라 새로운 감정이 들어올때면, 흥분하고, 우울해하고, 책을 덮어 버리고 싶은 충동을 자주 느꼈으니 말이다. 서로가 갖고 있는 생각들의 상반됨과, 성장 배경의 다름들이 때로는 서정적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에서 그들이 당면한 현실을 비켜갈 수 없었다. 첫날 밤을 어떻게 치를 것인가. 신랑은 순수한 걱정을 하고 있는 반면, 신부는 남녀관계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와 혐오감을 가지고 있는데. 그 현실이 어떠한 이야기를 만나더라도 잊혀질 수 없게 했다. 그들의 사랑이 순탄하지 않음을 예감하면서도, 결말로 가고 싶지 않고, 멈추고 싶지도 않은 복잡한 심정이었다.

 

  나의 복잡한 심정은 에드워드와 플로렌스가 느낀 감정이었을 것이다. 저자는 그 감정을 내게 이입시켜 버렸고, 나는 직격탄을 맞았다. 이해하고 싶지 않은 그들의 첫 날밤과, 내면적인 이유를 설명해 가기 위해 꿰어맞춰진 이야기 속에서도 기운을 찾지 못했다. 그들이 헤어졌다는 사실이, 서로를 그리워 하는 것을 서로가 모른다는 사실보다 더 치명적으로 다가왔다. 이들은 아프게 이별했고, 그 이후에는 더 아픈 사랑을 하며 삶의 환희를 만끽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허무감이야말로 삶에서 의지를 떨어트리는 치명적인 경험이다. 모든 이야기를 마쳤을 때는 세월이 허무할 정도로 많이 흐른 뒤였다. 그 뒤의 인생은 너무나 간결하게 드러나 있었기에 씁쓸한 감정에 짐을 더 드리울 뿐이었다.

 

  어쩌면 나는 그들이 재결합 하지 못한 것에 대해 화를 드러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좀 더 깊은 대화를 하지 못한 그들에게 질타를 하고 있고, 용기를 내어 다가가지 못한 행위에 비난을 하고 있는 것이다. 무엇때문일까. 나는 왜 이렇게 책 내용이 우울하다면서 그들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것일까. 대리만족을 얻으려 했던 사랑의 달콤함에서 쓴맛을 맛보았기 때문에? 그것보다는 그들이 신혼여행을 떠난 체실 비치에서의 기억이, 서로의 마음 속에 깊이 각인되어 있는데서 오는 처절함 때문이다. 플로렌스가 흐릿한 점이 될 때까지 사라져 가느 모습을 지켜보던 에드워드. 에드워드를 남겨 두고 뒤 돌아 보지 않고 자갈길을 걸어 갔던 플로렌스. 그때부터 이미 그들은 체실 비치에서 무언가를 두고 왔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것은 서로가 좀 더 따뜻하게 드러내지 못했던 사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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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하루가 작별의 나날
알랭 레몽 지음, 김화영 옮김 / 현대문학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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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읽을 책을 쌓아두고서도 서점을 기웃 거리는 이유는, 나를 설레게 할 새로운 이야기를 만날 기대감 때문일 것이다. 나에게 문학은 책에게 다가가게 해주고, 책 읽기를 즐겨하게 된 바탕을 만들어 주었다. 소설을 읽는게 뭐가 재미있냐는 핀잔을 듣기도 하지만, 새로운 이야기를 만날 기대감을 갖는 것은 삶의 일부가 되어 버렸다. 그날의 기분과 금전적인 여유에 따라서 책을 고르는 양상이 달라지긴 하지만, 서점을 기웃거릴 수 밖에 없는 이유인 것이다.

 

  <하루하루가 작별의 나날>을 번역한 김화영님은 파리의 서점에서 책이 얇아 만만해 보여, 집어 들었다고 했다. 한 달 간의 휴가를 마치고, 비행기 안에서 읽을 책을 고르다 그만 비행기를 타기도 전에 다 읽어 버렸다고. 내가 이 책을 집어 든 곳은 헌책방이었다. 헌책방은 괜찮은 가격에 좋은 책들을 구입할 수 있을까 하는 기대감이 그득한 곳이다. 김화영님이 번역했고, 출판사가 낯익다는 이유로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집어 들었다. 파리에서 우연히 집어든 책을 번역까지 하게 되고, 그 책을 나는 헌책방에서 만나게 된 것이다. 일련의 우연들로 맺어진 책과의 인연. 하지만 책 내용은 내 마음을 많이 아프게 했다. 우수수 떨어지는 낙엽만 보아도 스산한 가을의 막바지에 이 책을 만나게 되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자신이 어린 시절을 보냈던 숲을 떠나면서 샤토브리앙의 [무덤 저 너머의 회상] 에서 읽은 '하루하루가 작별의 나날' 이라 글귀를 떠올린 것. 거기에서 저자의 자전적 소설이 아닐까라는 느낌을 받았다. 더불어 자기치유적인 회상들로 써내려간 어린시절의 이야기는 심연의 아픔을 쿡쿡 찔러 대고 있었다. 자신의 가족이 복닥 거리며 살던, 추억이 잔뜩 묻어 있는 집이 팔렸다는 소식으로 시작하는 책은 깊은 회한을 드러낸다.

 

  열 명의 대 식구는 그동안 단칸방 생활을 접고, 방이 세 개인 집으로 이사한다. 그 전에도 이사는 있어 왔지만, 지은이의 기억에는 없다. 태어나지 않았거나, 너무 어려 기억이 없었을 것이다. 지은이가 태어나기 전에 식구들은 전쟁의 고충을 겪기도 했다. 어머니가 포탄 파편에 맞기도 했지만, 무사했고 죽음을 넘어 살아남은 가족들은 이사를 한다. 아이들은 계속 태어나고, 식구가 많은 집, 독특한 집안분위기를 가진 집으로 어디서건 사람들의 눈에 띈다. 아이들이 커나갈 수록 한 명씩 집을 떠나 기숙사에서 생활을 하는 집안의 의식 같은 것이 진행된다. 큰 형이 떠나고, 누나가 떠나고 자신의 차례가 되어 우울한 기숙사에서 생활을 해보니 집이 못견디게 그리웠다. 고향의 냄새부터 추억, 모든 것이 머리속에서 피어났고, 방학을 맞아 집으로 향할때면 그 기쁨은 형언할 수 없는 들뜸으로 나타나곤 했다. 형제자매들이 모여 웃고 떠들며 파티를 하는 모습은, 가난하지만 너무나 즐거워 보였다. 적어도 집안의 또다른 어두움을 드러내기 전까지는 말이다.

 

  일련의 줄거리만 살펴보면, 가족 많은 집의 어린시절의 추억을 회상하는 정도로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문장과 문장 사이에 녹아 있는, 내면을 비집고 올라오는 깊은 슬픔을 어떻게 드러낼 수 있을까. 기억들이 지워질까 빠르게 써 내려 간 듯한 글을 따라 가면서, 감탄과 탄식을 자아내는 아픔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옮긴이는 '하마터면 수십 년 동안 참았던 울음을 퍽, 하고 터뜨릴 뻔했다' 고 고백했다. 수십 년 동안 참았던 울음이 뭘까. 그건 어린시절 안에 감추어 있던 환희와 함께 버무려진 나름대로의 성장의 고통이 아니였을까. 세상에 나혼자만 던져진 것이 아니라, 가족 안에서 구성원으로 존재해야 했던 배부른 불평에서 오는 번뇌가 아니였을까. 이 책을 읽으면서 내내 가슴이 먹먹했던 이유는 나의 어린 시절이 떠올라서였을 것이다. 우리집과 너무나 닮아있던 어린 시절. 많은 가족, 가난, 차레차례 집을 떠나가는 자녀들의 행렬. 저자는 열명의 자녀 중 여덟번째였다. 나는 대가족의 막내였기에, 그가 누렸던 추억과 종종 엇나갈 때가 있었다. 늘 누군가가 떠나간다는 두려움이 있었고, 혼자 남겨진 나는 외로움을 많이 탔었다. 언니와 오빠들이 주말에 다녀갈때면 눈 만난 강아지마냥 좋아 폴짝폴짝 뛰다가도, 일요일이 되어 모두들 떠나가면 우울함이 나를 덮쳐왔다. 지금껏 고백해 보지 않은 나의 어린시절을 샅샅이 훑고 지나가며 파헤치는 듯한 저자의 고백. 그 고백들이 아플 수 밖에 없었다.

 

  가난했지만, 화목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도 있었다. 어린시절의 추억이 그다지 나쁜 것만은 아니었지만, 부모의 사랑이 기울어짐에는 아이들도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저녁이면 전쟁을 몰고 오는 아버지 앞에서 가족과 어머니는 속수무책이었다. 그런 아버지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하며 자랐으면서도, 막상 아버지가 병들어 죽음을 앞두고 있자 '바야흐로 우리는 그를 사랑한다는 말을 하고 싶은 심정이 되어버렸다' 라고 말한다. 결핍된 사랑을 받으면서도 자연스레 흘러들어가는 사랑을 어쩔 줄 몰라했던 가족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어머니에게 모든 짐이 드리워지고, 그런 어머니마저 병들어 돌아가시자 남아있는 건 형재자매들 뿐이다. 많은 가족이었기에 동떨어짐을 느끼진 않았겠지만, 각자의 가슴에 간직되어 있는 외로운 존재감을 나는 이해한다. 한 부모에게 나온 자녀들이지만, 결국은 혼자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하는 고충. 그런 고충을 인식하기도 전에 고향집은 사라지고 있었다.

 

  '전쟁을 끝내기 위해 이 책을 썼'고, '산 사람들, 그리고 죽은 사람들(아버지,어머니, 누이), 그를 모두와 평화롭게 지내고 싶다'고 고백한 저자. '어린 시절은 치유되지 않는 법이다. 지상낙원의 기억은 치유되지 않는다' 라고 회상하던 그는 무엇과 평화롭게 지내고 싶어 했을까. 정말 죽은 가족들과의 단순한 평화만을 원했을까. 기억 속에 저장되어 있는 어린시절의 추억을 좀 더 평안하게 지키고 싶어했던 것은 아니였을까란 생각이 든다. 그런 느낌 때문에 자기치유적인 소설이라는 조심스런 추측을 해보지만, 그로인해 나의 어린시절에 대한 기억도 많은 위로를 받았다. 왈칵 울음을 터트릴 정도의 회한이 깊이 자리하고 있진 않았지만, 가슴이 먹먹해지며 한 없이 서글퍼지는 마음은 가눌 길이 없었다. 헌책방에서 우연히 집어든 책 한권이 이런 느낌을 가져다 줄 것이라곤 상상하지 못했다. 옮긴이의 손에 붙들려 먼 길을 향해 온 한 권의 책. 하루하루가 작별의 나날이라는 제목이 그제서야 서글프게 다가온다. 이 이야기는 얼마나 많은 이별을 겪고 내 곁으로 왔던 것일까. 이별의 하루를 살고 있는 나지만, 잠깐이라도 그 아픔을 보듬어 주고 싶다. 내 품에서 편히 쉬라고, 펑펑 울음을 터트리라고 위로해 주고 싶다. 그 대상이 단지 이 책의 주인공에게만 국한되지 않음을 내 자신이 무엇보다 잘 알고 있음을 고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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