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하루가 작별의 나날
알랭 레몽 지음, 김화영 옮김 / 현대문학 / 2001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읽을 책을 쌓아두고서도 서점을 기웃 거리는 이유는, 나를 설레게 할 새로운 이야기를 만날 기대감 때문일 것이다. 나에게 문학은 책에게 다가가게 해주고, 책 읽기를 즐겨하게 된 바탕을 만들어 주었다. 소설을 읽는게 뭐가 재미있냐는 핀잔을 듣기도 하지만, 새로운 이야기를 만날 기대감을 갖는 것은 삶의 일부가 되어 버렸다. 그날의 기분과 금전적인 여유에 따라서 책을 고르는 양상이 달라지긴 하지만, 서점을 기웃거릴 수 밖에 없는 이유인 것이다.

 

  <하루하루가 작별의 나날>을 번역한 김화영님은 파리의 서점에서 책이 얇아 만만해 보여, 집어 들었다고 했다. 한 달 간의 휴가를 마치고, 비행기 안에서 읽을 책을 고르다 그만 비행기를 타기도 전에 다 읽어 버렸다고. 내가 이 책을 집어 든 곳은 헌책방이었다. 헌책방은 괜찮은 가격에 좋은 책들을 구입할 수 있을까 하는 기대감이 그득한 곳이다. 김화영님이 번역했고, 출판사가 낯익다는 이유로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집어 들었다. 파리에서 우연히 집어든 책을 번역까지 하게 되고, 그 책을 나는 헌책방에서 만나게 된 것이다. 일련의 우연들로 맺어진 책과의 인연. 하지만 책 내용은 내 마음을 많이 아프게 했다. 우수수 떨어지는 낙엽만 보아도 스산한 가을의 막바지에 이 책을 만나게 되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자신이 어린 시절을 보냈던 숲을 떠나면서 샤토브리앙의 [무덤 저 너머의 회상] 에서 읽은 '하루하루가 작별의 나날' 이라 글귀를 떠올린 것. 거기에서 저자의 자전적 소설이 아닐까라는 느낌을 받았다. 더불어 자기치유적인 회상들로 써내려간 어린시절의 이야기는 심연의 아픔을 쿡쿡 찔러 대고 있었다. 자신의 가족이 복닥 거리며 살던, 추억이 잔뜩 묻어 있는 집이 팔렸다는 소식으로 시작하는 책은 깊은 회한을 드러낸다.

 

  열 명의 대 식구는 그동안 단칸방 생활을 접고, 방이 세 개인 집으로 이사한다. 그 전에도 이사는 있어 왔지만, 지은이의 기억에는 없다. 태어나지 않았거나, 너무 어려 기억이 없었을 것이다. 지은이가 태어나기 전에 식구들은 전쟁의 고충을 겪기도 했다. 어머니가 포탄 파편에 맞기도 했지만, 무사했고 죽음을 넘어 살아남은 가족들은 이사를 한다. 아이들은 계속 태어나고, 식구가 많은 집, 독특한 집안분위기를 가진 집으로 어디서건 사람들의 눈에 띈다. 아이들이 커나갈 수록 한 명씩 집을 떠나 기숙사에서 생활을 하는 집안의 의식 같은 것이 진행된다. 큰 형이 떠나고, 누나가 떠나고 자신의 차례가 되어 우울한 기숙사에서 생활을 해보니 집이 못견디게 그리웠다. 고향의 냄새부터 추억, 모든 것이 머리속에서 피어났고, 방학을 맞아 집으로 향할때면 그 기쁨은 형언할 수 없는 들뜸으로 나타나곤 했다. 형제자매들이 모여 웃고 떠들며 파티를 하는 모습은, 가난하지만 너무나 즐거워 보였다. 적어도 집안의 또다른 어두움을 드러내기 전까지는 말이다.

 

  일련의 줄거리만 살펴보면, 가족 많은 집의 어린시절의 추억을 회상하는 정도로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문장과 문장 사이에 녹아 있는, 내면을 비집고 올라오는 깊은 슬픔을 어떻게 드러낼 수 있을까. 기억들이 지워질까 빠르게 써 내려 간 듯한 글을 따라 가면서, 감탄과 탄식을 자아내는 아픔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옮긴이는 '하마터면 수십 년 동안 참았던 울음을 퍽, 하고 터뜨릴 뻔했다' 고 고백했다. 수십 년 동안 참았던 울음이 뭘까. 그건 어린시절 안에 감추어 있던 환희와 함께 버무려진 나름대로의 성장의 고통이 아니였을까. 세상에 나혼자만 던져진 것이 아니라, 가족 안에서 구성원으로 존재해야 했던 배부른 불평에서 오는 번뇌가 아니였을까. 이 책을 읽으면서 내내 가슴이 먹먹했던 이유는 나의 어린 시절이 떠올라서였을 것이다. 우리집과 너무나 닮아있던 어린 시절. 많은 가족, 가난, 차레차례 집을 떠나가는 자녀들의 행렬. 저자는 열명의 자녀 중 여덟번째였다. 나는 대가족의 막내였기에, 그가 누렸던 추억과 종종 엇나갈 때가 있었다. 늘 누군가가 떠나간다는 두려움이 있었고, 혼자 남겨진 나는 외로움을 많이 탔었다. 언니와 오빠들이 주말에 다녀갈때면 눈 만난 강아지마냥 좋아 폴짝폴짝 뛰다가도, 일요일이 되어 모두들 떠나가면 우울함이 나를 덮쳐왔다. 지금껏 고백해 보지 않은 나의 어린시절을 샅샅이 훑고 지나가며 파헤치는 듯한 저자의 고백. 그 고백들이 아플 수 밖에 없었다.

 

  가난했지만, 화목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도 있었다. 어린시절의 추억이 그다지 나쁜 것만은 아니었지만, 부모의 사랑이 기울어짐에는 아이들도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저녁이면 전쟁을 몰고 오는 아버지 앞에서 가족과 어머니는 속수무책이었다. 그런 아버지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하며 자랐으면서도, 막상 아버지가 병들어 죽음을 앞두고 있자 '바야흐로 우리는 그를 사랑한다는 말을 하고 싶은 심정이 되어버렸다' 라고 말한다. 결핍된 사랑을 받으면서도 자연스레 흘러들어가는 사랑을 어쩔 줄 몰라했던 가족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어머니에게 모든 짐이 드리워지고, 그런 어머니마저 병들어 돌아가시자 남아있는 건 형재자매들 뿐이다. 많은 가족이었기에 동떨어짐을 느끼진 않았겠지만, 각자의 가슴에 간직되어 있는 외로운 존재감을 나는 이해한다. 한 부모에게 나온 자녀들이지만, 결국은 혼자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하는 고충. 그런 고충을 인식하기도 전에 고향집은 사라지고 있었다.

 

  '전쟁을 끝내기 위해 이 책을 썼'고, '산 사람들, 그리고 죽은 사람들(아버지,어머니, 누이), 그를 모두와 평화롭게 지내고 싶다'고 고백한 저자. '어린 시절은 치유되지 않는 법이다. 지상낙원의 기억은 치유되지 않는다' 라고 회상하던 그는 무엇과 평화롭게 지내고 싶어 했을까. 정말 죽은 가족들과의 단순한 평화만을 원했을까. 기억 속에 저장되어 있는 어린시절의 추억을 좀 더 평안하게 지키고 싶어했던 것은 아니였을까란 생각이 든다. 그런 느낌 때문에 자기치유적인 소설이라는 조심스런 추측을 해보지만, 그로인해 나의 어린시절에 대한 기억도 많은 위로를 받았다. 왈칵 울음을 터트릴 정도의 회한이 깊이 자리하고 있진 않았지만, 가슴이 먹먹해지며 한 없이 서글퍼지는 마음은 가눌 길이 없었다. 헌책방에서 우연히 집어든 책 한권이 이런 느낌을 가져다 줄 것이라곤 상상하지 못했다. 옮긴이의 손에 붙들려 먼 길을 향해 온 한 권의 책. 하루하루가 작별의 나날이라는 제목이 그제서야 서글프게 다가온다. 이 이야기는 얼마나 많은 이별을 겪고 내 곁으로 왔던 것일까. 이별의 하루를 살고 있는 나지만, 잠깐이라도 그 아픔을 보듬어 주고 싶다. 내 품에서 편히 쉬라고, 펑펑 울음을 터트리라고 위로해 주고 싶다. 그 대상이 단지 이 책의 주인공에게만 국한되지 않음을 내 자신이 무엇보다 잘 알고 있음을 고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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