렘브란트를 만나다
메릴린 챈들러 맥엔타이어 지음, 문지혁 옮김 / 가치창조 / 2008년 11월
평점 :
절판


 가끔 이것저것 살피지 않고, 겉모습만 보고 물건을 홀랑 집어올 때가 있다. 그렇게 집어온 물건들이 좋을 때도 많지만, 역시나 너무 섣부르게 집어 온 탓에 풀어보고 나서야 실망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뜬금없이 왠 물건 얘기를 꺼내냐고 물을 수도 있겠지만, 이 책에 대한 서운함을 드러내려고 하는 참이다. 책 제목에 홀려서 아무것도 따져보지 않은 채 펼친 책이 이 책이다. 책을 읽다 말고 고개를 갸웃 거리면서 자꾸 의심을 드러냈다. 무언가가 익숙한 것 같으면서도, 자꾸만 겉도는 느낌. 그제서야 저자가 눈에 들어왔다. <고흐를 말하다>를 쓴 저자였다. 그리고 밀려오는 안타까움. 그 책을 재미나게 읽었으면 좋았으련만, 안 좋게 읽은 기억 때문에 기억하고 있던 작가였는데, 또 다시 만나고 말았다.
 

  나의 덤벙댐을 탓한 것은 렘브란트를 색다르게 만나고 싶은 욕망이 채워지지 않을 거라는 데에서 오는 안타까움이었다. 책을 다 읽기도 전에 내리는 속단일 수도 있겠지만, 전작 <고흐를 만나다>로 심하게 데여서인지 그 작가의 책은 피하고만 싶었다. 이 책의 내용이 확 바뀌지 않는 이상, 나의 편견이 깨지기는 커녕 더 굳혀질 것 같았다. 하지만 <고흐를 만나다>와 너무도 흡사했다. 책 제목에서부터 책의 구성까지 다를게 없었다. 저자는 시만 썼고, 그림에 붙은 글은 다른 사람이 썼으며, 번역도 제 3자가 했다. 당연히 그림은 렘브란트의 그림일테지만, 이렇게 짜집기 되어진 책을 정말 좋아하지 않기에 온전히 읽기를 진즉 포기해 버렸다. 아무리 전작에 대한 실망이 크다지만, 너무 하는거 아니냐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렘브란트에 대해 전혀 모른다거나 그의 그림을 보지 않았다면 몰라도, 어설픈 지식이 들어있는 내게 이 책은 통할 리가 없었다.

 

  <고흐를 만나다>도 내가 고흐를 좋아하기 때문에 읽은 책이었다. 당연히 어설픈 지식이 난무했고, 그 지식을 총동원해서 읽었지만 지금껏 만나왔던 책과는 너무도 달랐다. 고흐의 그림과 그의 인생을 겉도는 느낌. 그나마 내가 조금이나마 알고 있던 화가에 대해 색다르게 엮어진 책을 보며 당황했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이번에는 렘브란트라니! 실망감을 드러내지 않으려 애를 썼지만, 역시나 초반부터 책에게 다가갈 수 없었다. 내가 가장 거부감을 느끼는 것은 책의 구성이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한 사람의 느낌을 읽어나가도 그 느낌이 내게 전해질까 말까인데, 다른 사람의 글이 실려있다. 똑같은 그림을 보고 느끼는 색다른 단상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어느 글 하나 온전히 내 마음에 들어오지 않았다. 글 속에 렘브란트의 그림을 억지로 꿰어맞춘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그림이 실려 있고, 그림에 대한 설명 혹은 느낌과 함께 이어지는 추상적인 시.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느낄 수 없는 이질감이 가득했다. 읽고 또 읽어도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내가 알고 있는 렘브란트가 맞는지 알 수 없었다. 내가 한 명의 화가를 너무 틀 속에 가뒀는가를 생각해 보았지만, 몇 가지 수식어와 연결할 뿐, 특별한 편견은 없었다. 그러나 이 책 속의 글은 없는 편견도 만들게 하는 소통의 엇갈림이 있었다.

 

  이 책에 실린 작품들은 대부분 성서와 관련된 그림이었다. 렘브란트 하면 자화상을 빼놓을 수 없기에 자화상은 제쳐놓고서라도, 몇몇 초상화를 빼면 대부분이 성서와 연관된 작품들이다. 그가 성서의 내용을 즐겨 그렸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성서에 관련된 그림을 공통적으로 실었다는 사실만을 인지할 뿐이었다. 성경에 관한 배경 지식이 없는 독자들에게는 그림 자체만으로도 이해 불능인데, 설명도 부족했고, 개인적인 느낌이 강해서 공감할 수 없는 부분이 적어 안타까웠다. 렘브란트 하면 '빛'을 빼 놓을 수 없는 화가이기에 '빛'과 어둠을 극명하게 대비한 그림의 특징을 잘 살려서 설명한 부분은 인정한다. 하지만 그림을 바라보는 사람에게 전달되는 '빛'의 가능성은 작았다. 빛의 통과여부에만 설명이 국한되었던 것이다.

 

  나의 지나친 편견일 수도 있다.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는 시선일지도 모른다. 전작에서도 그랬으니 이번 책도 그럴 것이라는 지나침 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아끼고 좋아하는 화가의 특징을 살려내지 못한다면 그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말 그대로 자신만 간직할 수 밖에 없는 추억이 되고 소중한 기억이 될 뿐이다. 내가 감정이입을 시키지 않고 시를 읽었을 수도 있고, 이미 아는 내용이라고 그림에 대한 설명을 대충 지나쳤을지도 모른다. 그런 면이 없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이 모든 편견과 아집을 단박에 깨어줄 수 있는 새로움을 바랐던 것이다. 그 새로움을 만나지 못해, 이렇게 한쪽으로만 치우쳐서 렘브란트의 본질에 좀 더 다가가지 못함을 안타까워 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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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투를 빈다] 서평을 보내주세요.
건투를 빈다 - 딴지총수 김어준의 정면돌파 인생매뉴얼
김어준 지음, 현태준 그림 / 푸른숲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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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건투를 빈다>를 읽고 있다고, 몇몇 지인들에게 말하자 다들 아는체를 한다. 여러 매체에서 연재를 했다며 재미있다고 하는데, 내게는 도통 금시초문이다. 도대체 어떤 내용이길래 이렇게 아는체를 하는 사람이 많단 말인가. 호기심에 책을 펼쳤지만, 서문부터 불쾌해지고 만다. 불친절한 독특한 말투에 걸러지지 않은 언어(이 책을 읽고 있으면 걸러진다 것이 무의미하다.)를 쓰지만, 맞는 말을 툭툭 뱉어 내는 그가 적응이 될 리가 없다. '틀에 박힌'과는 거리가 먼 그의 글을 읽는 것이 녹록치 않을 거라는 것을 바로 간파하고 말았다. 틀에 박힌 책들만 읽어 온 나에게 쉽게 다가올 리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먼저 그의 언어가 내게 적응이 되지 않았다. 야메(이런 표현이 저자에게 어울린다. 얌전한 표현은 밍숭맹숭하다.) 상담가인(저자 스스로도 어느 정도 인정하는) 저자는 자신만의 독특함을 유감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가끔은 그 독특함에 홀려 상담에 따른 답을 듣고 있는지, 말투를 따라가며 적응하고 있는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읽지 않으면, 책을 읽다가 멍 때리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잔디에 풀을 뽑다가 멍 때린 저자와 조금은 닮은). Q&A 책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 그러므로 질문을 던진 타인의 고민과 대답하는 저자를 늘 상기시켜야 한다. 둘을 구분짓지 않으면, 누가 질문을 했고 누가 답을 하고 있는지 그것 조차도 헷갈리기 마련이다. 질문을 한 사람에게 독설을 퍼붓는 건 기본이고, 질문 속에 등장하는 인물에게도 서슴없이 욕을 해 댄다. 그런 저자를 보며 내가 민망해지고 말았지만, 그의 대답이 공감이 많이 가는 것이 많아 그런 욕쯤은 소소한 첨과물에 불과했다.

 

  아마 그가 수 많은 사람들의 질문 속에서 갈피를 잡지 못했더라면, 나도 어영부영 끌려가고 말았을 것이다. 저자가 이끄는대로, 혹은 세상 사람들이 던져놓은 질문 속으로 말이다. 하지만 독설 속에는 해결책이 들어 있었고(해결책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도 많았지만. 그 만큼 질문이 다양했고 대답하기 곤란한 것들도 많았다.), 특유의 날카로움 또한 가지고 있기에 놀랄 수 밖에 없었다. 내 옆의 누군가가 그렇게 대답을 해 주었다면 12번도 넘게 상처를 받고, 어둠 속에 파묻혀 버렸을 충고를 서슴없이 한 데서 오는 충격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질문의 본질을 꿰뚫고, 거기에 자신의 생각을 최대한 덧붙이며, 답을 찾아주려는 노력. 별거 아닌 것 같아도 삶의 경험에서 묻어나온 해결책들이 대부분이었기에 수긍할 수 있는 부분이 많았다.

 

  이 책은 크게 나, 가족, 친구, 직장, 연인 다섯 가지로 구분해서 질문과 답을 묶어 놓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분류에 포함이 되기에 공감을 많이 할 것이다. 직,간접적인 상황 속에서 마주한 질문과 답은 인간 만사는 새옹지마라는 속담이 딱 드러맞는 것 같았다. 나의 고민이 될 수도 있고, 주변에서 흔히 일어나는 고민들이 많았기에 삶의 언저리에서 뚝뚝 떨어져 나오는 듯한 생생함을 맛보았다. 그런 질문들이 다 나에게 살이 되고 피가 된다는 보장은 없지만, 명쾌한 답을 제시하고 있는 저자 앞에서는 말 그대로 한낱 고민에 불과했다. 그의 생각대로 살아간다면, 걸리적 거릴게 없어 보였다. 그 만큼 세상 이곳 저곳에서 부딪힌 경험이 많은 사람에게서 흘러 나오는 연륜(?)이라고 해야 하나? 어쩔 때는 '저게 무슨 질문에 대한 답이야' 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로 딴 소리만 하다 끝내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탁상공론만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최대한 자신의 경험을 살려 자신의 지나온 과정 속에서 느꼈던 것들을 드러내고 있었다.

 

  자신의 이야기만 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자신의 경험한 것이 타인에게 공감을 불러 일으킬 수 있음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닫기 전에는 자신의 삶의 잔상을 드러내는 그가 마뜩찮았다.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건지, 고민을 해결하는 건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반복하고 또 반복하는 내용들이 식상했다. 그렇지만 내가 질문하는 사람의 심정이라 생각하고 답을 읽을 때는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 심지어 욕 한마디까지도 위로가 되고 충고가 되고 있었다. 질문하는 사람의 절박함을 잊지 않았고, 헛점 또한 놓치지 않았다. 아마 그런 매력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질문을 던졌을 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가 한 대답이 모든 질문에 정답이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저자 또한 그런 의도로 한 것이 아닌 지극히 주관적인 대답이라고 했기에 그 안에서 건져낼 것만 건져내야 하는 것이 질문을 하는 사람과 독자의 몫이다. 저자가 뱉은 말에 상처를 받거나, 질문의 본질을 피해 간다면 그의 말은 처음의 나처럼 불쾌할 뿐이다.

 

  책 속에 담겨 있는 질문들을 한 개의 덩어리로 묶어서 표현하는 것도 불가능 하지만, 그의 대답을 쉽게 단정 짓기도 곤란하다. 처음에 서문을 마주했을 때보다 덜 불쾌하긴 하지만, 여전히 그의 말하는 방식은 나에게 거슬린다. 거기다 이런 질문과 대답으로 채워져 있는 책은 나의 취향과 거리가 멀기에, 몰입보다는 구경꾼의 위치에 있었던 적이 더 많았다. 구경꾼의 위치에만 있어도 이런 질문들이 쉴새 없이 쏟아져 나올 수 밖에 없는게 인생이라고 생각하자 치가 떨렸다. 그랬기에 대답을 하는 저자도 많이 난처하고 어려웠을 거라 생각한다. 종종 대답이 반복이 되고 겉돈다는 느낌을 받기도 했지만, 자신의 문제인냥 최선을 다해 답을 달아준 열의는 느낄 수 있었다. 책을 다 읽고 난 후에야 긍정적인 마인드를 가지고 해결책을 던져 줬음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첫 머리에 '세상사 다 행복하자는 수작이 아니더냐' 라며 '이 책이 작은 도움을 줄 수 있다면 바랄 게 없다'던 저자의 노고를 잊지 않으면 된다. 질문과 답 사이에 명확한 선을 긋지 말고, 가끔은 뛰어 넘으며 정면돌파를 해보는 것이야 말로 저자가 이 책 구석구석에 던지는 메세지일지도 모르므로.

 

•  서평 도서의 좋은(추천할 만한) 점

- 살아가면서 한번쯤은 부딪히는 고민과 해결책이 들어있다!


•  서평 도서와 맥락을 같이 하는 '한핏줄 도서' (옵션)

- 무엇이든지 대답해 주는 질문 상자 - 다니카와 슌타로


•  서평 도서를 권하고 싶은 대상

- 나, 가족, 친구, 직장, 연인에 대한 고민이 한 가지라도 있는 자!


•  마음에 남는 '책속에서' 한 구절

- 자신의 무능과 태만과 불안을 '꿈'이란 단어로 포장해 현실로부터 도피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6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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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 내가 죽은 집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이영미 옮김 / 창해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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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오랜만에 마주하는 히가시노 게이고 작품이다. <용의자 x의 헌신>을 이후로 국내에 히가시노 게이고 열풍이 불어올 때도 그의 책을 선뜻 읽을 수 없었다. 이런 장르를 좋아하지 않음에도 그의 작품에서 뿜어져 나오는 매력에 취했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의 책을 직접 구입 해서 읽기에는 무리였다. 여러 핑계들이 있겠지만, 역시나 추리물을 좋아하지 않는 나의 성향 탓일 것이다. 책이 나에게 안겨야만 읽을 수 있는 억지스러움을 가지고 있는 작가였다. 궁금하지만 쉽게 다가갈 수 없는 처지에서 책이 먼저 내게 다가와 주었다. 겉표지를 보면서 꿈자리가 뒤숭숭할까봐 약간의 걱정을 했지만, 너무나 순식간에 책 속으로 빨려들어 버렸다. 이렇게 나를 쉽게 매료시킨 책이 얼마만이던가.

 

  히가시노 게이고 작품을 두번 째로 읽지만, 그의 작품을 읽고 감탄하는 부분은 탄탄한 스토리와 완성도이다. <용의자 x의 헌신>을 읽고, 다른 건 몰라도 내가 읽은 추리물 중에서 완성도에 높은 편이라고 소문을 낼 정도였다. 이번 책도 그런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한정된공간에서 두 명의 인물 밖에 등장하지 않는데도 이런 소설을 쓸 수 있다는 것이 놀라울 뿐이었다. 그런 상황이기에 주인공인 '나'는 추리력이 뛰어나야만 할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평범한 인물을 등장시키므로써 거부감을 없애준다. 이를테면 '너무 똑똑하잖아','직업이 저러니 그럴 수 밖에' 등등의 푸념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옛 연인에게 걸려온 한 통의 전화로 낯선 집을 방문하게 되는 '나'는 그 집에서 그녀의 기억을 찾게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 추리라고 하면 범죄와 연관이 되어 있다고 생각하기 마련이지만, 두 인물을 실질적인 범죄에 가담되어 있다고 생각할 수 없다. 오히려 드러나는 진실에 의해 옛 연인 사야카는 범죄의 피해자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6년을 사귀고, 헤어진지 7년만에 걸려온 그녀의 전화. 고교동창 모임에서 다른 친구에게 전화번호를 물었다는 그녀는 딸이 하나 있는 평범한 주부로 변해 있었다. 그녀의 전화에 야릇한 상상을 하기도 했지만, 그런 일로 전화를 건 것은 아닐꺼라고 생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는 오래된 열쇠 하나를 보여주며, 자신과 함께 어떤 집에 가줄 수 있겠냐고 한다. 앞뒤 정황은 설명해 주지 않은 채, 부탁을 하는 그녀에게 쉽게 마음이 갈 리가 없었다. 하지만 '나'는 어떠한 끌림에 의해 가기로 결정한다. 그녀가 잃어 버렸다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어떤 것인지 궁금했다. 사야카의 아버지의 낚시 가방에서 나온 지도와 열쇠는 유품이 되어 버렸지만, 그 유품의 궁금증을 풀어야만 했다. 그것으로 인해 사야카의 어린 시절의 기억이 돌아올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지도에 나온 집에 도착한 두 사람은 기괴한 집 구조에 놀라고 만다. 별장촌에 숨겨져 있다시피 한 그 집은 지하로만 들어갈 수 있게 지어져 있었다. 사야카의 혼란은 그때부터 시작한다. 분명 낯이 익은 집임에도 어떠한 기억도 없기에 그 집을 조사해 보는 수 밖에 없다. 방 하나하나를 탐색해 가면서 사야카의 흐린 기억을 의지해 가는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집은 생각외로 이상한 집이었다. 분명 사람이 산 흔적은 있었지만, 순식간에 모든 것이 정지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집 안에 있는 교과서와 책들은 제조일이 23년 전이었고, 그 외의 책들도 20년전에 발행된 것이었다. 23년 전에 모든 것이 멈췄고, 동시에 사라져 버렸다고 밖에 상상할 수 없었다. 집안에 몇개 되지 않은 시계들도 같은 시각에 멈춰 있었고, 전기며 수도는 기대할 수 없었다. 촛불과 손전등에 의지해서 살펴볼 수 없는 상황에서 몇개의 수확물을 건져낸다. 초등학교 6학년 남자 아이가 살았음직한 방에서 일기가 발견된 것이다. 4학년 때부터 써 온 일기장에서 조금씩 그 집의 비밀을 풀어간다.

 

  평범한 초등학생 유스케의 일기는 별 특징이 없는 듯 했다. 하지만 그의 일기 속에는 이 집에 대한 단서가 곳곳에 들어 있었다. 그들 뿐만이 아닌,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도 복선을 발견할 수 있는 곳이 일기장이었다. 초반에 무심코 읽고 지나쳤지만, 그 뒤에 발견 하는 유스케 아버지의 편지와 꿰어 맞출 수 있기 때문이었다. '나'와 사야카도 그 일기장의 내용과 편지를 꿰어 맞춰 가면서, 집 안의 또 다른 흔적을 발견하면서 비밀을 풀어갔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서 저자의 빈틈없는 역량이 발휘되는 곳이다. 곳곳에 단서를 뿌려놓고, 퍼즐 조각을 맞추듯이 전개를 풀어가는 과정. 다른 작가들도 그런 구조로 이야기를 써내려 가지만, 히가시노 게이고는 더 빈틈없이 옥죄어 가는 느낌이다. 그가 흩뿌려놓은 단서 하나를 끝까지 쥐고 있다가 만약 이것이 결말에 설명되지 않는다면, 빈틈을 여지없이 폭로(?)해 버리겠다는 나의 포부와는 달리 그는 끝까지 철저했다. 내가 쥐고 있던 단서 하나도 간단하게 처리하고 설명해 주는 저자 앞에서 할 말을 잃어 버렸다. 그만큼 독자는 물론 스토리까지 모조리 꿰고 있다 서서히 풀어 내는 능력이 탁월했다.

 

  그렇지만 그들이 비밀을 풀어가면 갈수록 비극의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것을 눈치 챌 수 있을 것이다. 사야카와 23년전의 유스케가 무슨 연관이 있을까란 생각을 하고 있을 즈음, 유스케의 일기장에 드디어 사야카가 등장한다. 그녀의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면, 이 집에 드나들며 어느 정도 생활을 했는데 조각 조각 흩어진 기억은 모아지지 않았다. 자신의 이름이 등장하고, 엄마의 이야기도 나오지만 여전히 사야카는 이방인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더욱 더 의문이 드는 것은 책 제목이다. 분명 '옛날에 내가 죽은 집'이었는데, 책을 읽다 보면 제목을 잊어 버리기 일쑤다. 제목을 잊지 않고, 책을 읽어나가다 보면 좀 더 일찍 사야카의 비극을 예견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두 사람의 추리에 빠지다 보면 끝에서 만나게 되는 반전에 충격을 받는다. 유스케의 일기장과 유스케 아버지가 보관하고 있던 편지에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한 관계가 숨겨져 있었다. 작은 단서 하나로 그 집의 정체까지 추리해 가는 능력에 감탄을 자아내기도 했지만, 차라리 그 기억을 사야카가 잊고 살았으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렇지만 사야카는 자신이 잃어버린 기억 때문에 정체성 혼란을 겪고 있었다. 결혼 생활도, 아이의 양육도 제대로 할 수 없는(학대까지 일삼는) 그녀에게 잃어 버린 어린 시절의 의미는 그만큼 중요했다. 그 과정을 '나'와 함께 한 이유는 '나'가 쓴 칼럼 때문이기도 했지만, 사야카를 있는 그대로 봐주었던 둘 만의 시간(6년의 사귐)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시간이 흐른 뒤 사야카에게 짧은 엽서 한장이 온다. 이혼을 했고, 아이는 남편이 키운다는 소식과 함께 '나는 역시 나 이외에 다른 누구도 아니라는 걸 믿고, 앞으로도 살아갈 생각이야' 라는 내용이었다. 그 뒤로 그녀를 만날 수 없었다는 말로 소설은 끝을 맺는다. 추리소설이긴 하지만, 사야카를 지켜 보면서 자신의 상처를 들춰내는 힘든 과정을 겪은 여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든지 감추고 싶은 상처 하나쯤은 있게 마련이고, 성장해 오면서 겪은 상처들이 꽤 오래감을 여러 사례들을 통해서 알 수 있다. 나 또한 책을 읽으면서 그런 나의 상처를 발견했고, 그것을 과감히 드러내지 못해 유감스럽게 생각했다. 언젠가 나의 상처를 드러낼 날이 오겠지만, 옮긴이의 말처럼 이 책에서 나오는 '집'의 의미는 '오래전에 스스로 죽인 또 다른 내가 있게 마련' 인 상징물이며, '자아찾기'의 한 갈래로도 해석할 수 있다고 했다. '집'의 의미에서 여러가지 뜻이 갈라져 나옴을 나 또한 인정하며, 자신의 상처를 들춰내더라도 비극이 아닌 희망적인 결말로 각자 마무리 지어보길 권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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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은혜 - 맥스 루케이도
맥스 루케이도 지음, 정성묵 옮김 / 가치창조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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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심한 감기가 걸리고 나니, 건강했던 며칠 전이 무척 그리워 진다. 맘껏 책을 보며 뒹굴거렸는데, 지금은 무엇 하나 제대로 하기가 힘들다. 미지근한 물과 뜨거운 차를 연거푸 들이마시고 있는 나를 보고 있자니 '건강할 때 지킬걸' 하는 후회가 든다. 건강할 때는 다른 생각들이 내 머릿속을 비집고 들어오더니, 몸이 아프니 오로지 건강했던 시절만 그리워 진다. '몸만 아프지 않았더라면'을 전제로 하루 스케줄을 상상해보지만, 여전히 마음만 앞서가고 몸은 따라주지 않는다. 내일도 빡빡한 일정이 기다리고 있는데, 이렇게 아프면 어쩌나 하는 마음에 안절부절이다. 그런 마음 가운데 나를 스쳐가는 단어는 '감사'이다. 건강할 때 건강한 몸을 주신 것을 감사하지 못하고, 건강한 몸을 제쳐두고 다른 걱정에 얽매이느라 효율적인 시간을 보내지 못했다. 여전히 경험을 해야만 깨닫는 얇팍한 마음을 지닌 나였다.

 

  몸이 아플 때까지도 '감사'에 대해 생각하지도 않았다. 몇 권의 책을 통해 알게 된 맥스 루케이도 목사님의 신간 <주의 은혜>를 마주하고 나서야 드는 생각이었다. 책을 처음 읽었을 당시에는 몸이 아프지 않았기에 별 다른 느낌없이 휙휙 읽어갔다. 그렇게 대충 읽는 모습이 못 마땅했는지 감기가 내게 들어왔다. 그것도 온 몸을 마구 훑고 지나가는 지독한 감기였다. 그런 상태에서 책을 펴니 글자가 눈 앞에서 뱅뱅 돌았지만, '감사'가 생각이 났던 것이다. 

 

  목사님은 짧은 문장을 좋아하신다고 하셨다. 그래서인지 이 책은 짧은 글과 간단한 성경말씀, 감성을 풍부하게 만드는 사진 한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새로운 세상이 펼쳐지는 것 같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아름다운 광경을 보는 것 같았다. 사진들은 자연을 그리기도 하고, 추상적인 것, 아름답고 감동적인 것들을 그려내기도 했다. 그 사진에 어울리는 성경말씀과 목사님의 글을 보고 있으면 편안했다. 굳이 신앙과 연관된 책이라고 인식하지 않고 읽어도 좋을만큼 부담이 없다. 하나님께 감사함을 느낄 수 있는 내용이었지만,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보다 진하게 배어 나온 책이었다.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목사님은 하나님의 마음을 글과 사진, 말씀을 통해 보여주었다. 사람들이 하나님이 나를 상상 이상으로 사랑하시는 것을 믿지 않자, 그에 대한 증거를 들이미는 것 같았다. 일상에서 하나님을 만날 기회가 얼마나 많은지,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는 기회가 얼마나 많은지를 여실히 나타내고 있었다.

 

  사랑, 기도, 축복, 은혜 이 네가지의 주제가 이 책의 중점이었다. 모두 '예수님처럼'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을 정도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느낄 수 있도록 보여 주었다. 언젠가 설교시간에 그런 말씀을 들은 적이 있다. 하나님께 구하지만 말고, 나를 알아달라고 떼만 쓰지 말고, 하나님을 알아가도록 노력해 보라고 말이다. 그 당시에는 그 말이 적지 않은 충격으로 다가 왔었다. 따지고 보니 하나님은 나에 대해서 모두 아시고 계시는데, 나는 하나님에 대해서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그리고 하나님은 나와 대화를 하고 싶어서 기도라는 수단으로 고백하게 만드셨는데, 나는 떼를 쓰고 때로는 협박까지 하고 있었으니 충격일 수 밖에 없었다. 그런 기억이 떠오르자 이 책에서 말하고 있는 상대는 독자인 '나'라고 생각되어 졌지만, '하나님'을 알아가기 위해 '나'를 집어 넣어 관심을 끌려는 마음이 아니였을까 하는 생각에까지 미쳤다. 얼마나 '나'가 하나님을 알아가려고 하지 않았기에 친절히 하나님을 알리셨을까. 친절히 알려도 하나님의 존재를 오해하고, 부정하는 무리들이 있으니 얼마나 안타까웠을까. 인정하기 싫지만 그것이 나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런 부분을 마음에 담아 둘 필요는 없다. 그 모든 것을 한 순간에 다 받아 들이라는 뜻이 아니라, 짧은 시간 동안 틈 나는 대로 하나님과의 교감을 나누다 보면, 자연스레 많은 감정들이 이입 된다. '우리의 기도는 반드시 열매를 맺'으므로 들으시는 하나님에게 힘이 있다는 말씀. 하나님의 목표는 '우리가 원하는 게 아니라 필요한걸 주신'다는 말씀. '하나님은 당신을 포기하느니 독생자를 포기하는 편을 택하시리라'는 말씀. 이렇게 다양하게 우리의 마음밭에 떨어지는 말씀을 잘 묻었다가 다시 싹이 돋게 하면 되었다. 하나님이 나를 위해 마련해 놓은 편지라고 생각되어 질 정도로 나의 마음을 잘 알고 계셨다. 내가 실천할 수 있는 것들은 실천하고, 하나님께 온전한 기도를 드리며, 은혜를 구하면 되었다. 내게 와 닿는 말씀을 듣고 깨닫고 실천한다면 그야 말로 금상첨화였다. 그런 믿음이 있을 때라야 감사가 나오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귀한 시간을 '주의 은혜'를 통해 느껴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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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의 상속
키란 데사이 지음, 김석희 옮김 / 이레 / 2008년 10월
평점 :
절판


   내가 맨 부커상을 주목하게 된 것은 2006년 수상작인 존 반빌의 <신들은 바다로 떠났다> 때문이다. 우연히 알게 된 존 반빌의 소설이 너무 좋아 부커상을 기억하게 된 것이다. 올해의 맨 부커(2002부터 금융기업인 맨 그룹Man Group이 상금을 지원하면서 명칭이 '맨 부커상'으로 바뀌었다.)수상작도 구입해 두었지만, 작년 수상작도 비슷하게 출판이 되어서 그 책에 먼저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2008년 수상작보다 왜 더 늦게 출판되었을까 하는 의문도 잠시, 책 두께를 보자 그럴만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상 시점에서 조금 늦게 만난 감도 없진 않지만,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김석희님이 번역을 맡아 주어서 흡족한 마음으로 책을 읽게 되었다.

 

  원래 두꺼운 책을 좋아지만, 요즘에는 읽기 보다는 내 책장에서 전시용으로 몰락(?)해 가는 것 같아 안타까움을 느끼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오랜만에 두꺼운 책을 손에 쥐게 되니, 부담도 갔지만 묵직한 느낌이 좋았다. 특히나 겨울에 읽는 장편은 추위도 잊은 채, 책 속으로 나를 끌어 들이기에 더 매력적이다. 장편은 독자의 입장에서 두 종류로 나뉜다고 생각한다. 두께에 상관없이 저자가 만들어 놓은 세계에 빠져 들게 만드는 것과 두께에 상관 있게 지루한 책으로 말이다. 어이없는 나뉨이지만, 전자의 장편을 만나게 되면 그 기쁨은 말로 형언할 수 없을 정도다. 그런면에서 <상실의 상속>은 전자에 가까운 편이었다. 온전한 것이 아닌 가깝다고 표현한 이유는 지켜볼 수 밖에 없는 안타까움이 짙게 배어 나왔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살고 있는 곳에서 피부로 와닿지 않는 내용일지라도,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임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저자는 어느 한 주제를 일관성있게 명시하지 않는다. 물이 흐르듯, 누군가의 기억을 더듬듯 드러내지만 시간을 뒤죽박죽 흐트려 놓는다. 그 흐트러짐은 기묘하다. 옮긴이도 말했지만 코믹, 진지, 낙서 같은 실없는 말, 아름다운 경치 묘사와 슬픔과 기쁨을 자유자재로 오가는 문장이라고 했다. 두께 때문에 읽기가 조금 힘들었지만 지루하지는 않았다. 저자가 제시하는 것들을 가볍다라고 할 수 없지만, 많은 것이 낯설었을 뿐 흐름을 자연스럽게 따라갈 수 있었다.

 

  히말라야의 작은 도시 칼리퐁. 들어본적도 없을 뿐더러 위치 짐작도 되지 않는 산중의 집, 초오유에는 16살의 소녀 사이와 은퇴한 판사인 외할아버지가 함께 살고 있다. 사이는 부모님이 러시아에서 교통사고로 사망을 하자 기숙사에서 거의 쫓겨나듯 외할아버지 댁으로 온다. 전직 판사인 제무바이는 딸과 의절한 후, 손녀의 존재도 잊고 있었다. 그런 손녀가 불쑥 찾아온 것이 달갑지 않지만, 소설의 시작은 엉뚱한 곳에서 시작한다. 판사의 총을 뺏으로 온 불량 청소년들의 등장으로 시작부터 심상치가 않았다. 그 사건만으로도 무언가가 석연치 않고 께름직한데, 저자는 독자에게 바로 궁금증을 해소시켜 주지 않는다. 난데없이 이야기의 중심은 초오유의 요리사 아들 비주가 일하고 있는 뉴욕으로 옮겨간다. 하지만 비주의 처지도 독자를 곤경에서 끌어내어 주지 않는다. 불법 이주 노동자로 여러곳을 떠돌며, 불 이익을 받고 있는 모습이 그려졌고 인도와 뉴욕이라는 거리와 문명의 차이에서 오는 이질감이 확연히 드러났다. 초오유에서 드러나는 인도의 현 시류는 지켜보기만 해도 아찔한데, 거기다 불법 이주 노동자의 이야기까지 같이 지켜봐야 했다. 어째 우울함으로 급격히 감정이 격하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나의 예감대로 이야기의 흐름은 순탄하게 명맥을 유지해 가는 것 같지만, 반전이 기다리고 있는 결말은 의외였다. 낯선 나라의 낯선 사람들의 삶의 일부를 지켜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가 발을 헛디뎌 웅덩이에 빠진 기분이었다. 줄거리를 말하라고 하면 흐름을 묘사하고 있기에 무어라 말할 수가 없다. 오히려 책 속 인물들의 삶 속에 비춰진 현재와 과거에 대한 잔상에 대해 할 말이 많지만, 구경꾼의 입장이였기에 어디서부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중심 인물이라 할 수 있는 사이, 비주, 제무바이의 삶이 그려지긴 하지만 회한과 후회가 깃들어 있을 뿐 혼란스러웠다. 비주가 사랑에 빠지는 지안과의 관계도 시원하지 않았고, 힘들게 미국으로 건너간 비주의 삶은 비참했다. 전직 판사였다던 제무바이는 좀 나을까 싶었지만, 그가 회상하는 과거는 세 인물 중에서 가장 씁쓸하다. 권위와 허영에 물들어 이제는 무기력해져 버린 제무바이의 과거는 다시 듣고 싶지 않았다. 그가 지나온 세월의 상실들이 사이에게 혹은 비슷한 세대인 비주에게 상속이 되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속된 말로 어른들이 자주 하는 '나의 죄' 때문에 후손들의 삶도 평탄치 않음을 드러내고 있는 삶. 제무바이의 회상은 그런 상실로 그득했다.

 

  제무바이의 상실이 과거형이였다면, 사이와 비주는 현재형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부모를 잃고, 사랑을 잃고 인도인도 영국인도 아닌 삶을 살아가는 비주. 혼란스러운 인도의 사회 속에서 그녀의 정체성을 찾을 수가 없었다. 외따로이 떨어져 지내왔던 과거처럼, 그녀의 삶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은 없었다. 할아버지는 그녀에게 애착을 느끼지 못하고 오히려 애견 무트에게 애정을 더 쏟는다. 무트가 실종 됐을 때 편협함과 이중성을 드러내고 있는 사람이 바로 제무바이였으니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인가. 비주는 어떠한가. 하나뿐인 외 아들을 미국에 보내놓고, 오로지 그런 아들만 바라보고 살아가는 아버지를 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미국에서의 삶을 이어갈 수가 없었다. 길고 긴 여정의 마무리는 비주가 다시 돌아오는 것으로 마무리 되지만, 그의 모습은 더 초라하다. 금의환향은 아니더라도 가져간 것을 잃지는 말아야 하는데, 미국으로 갈 때보다 더 비참한 모습으로 돌아온다. 마치 우리 윗 세대들의 삶에 서려 있는 한恨을 지켜본 것 같았다.

 

  저자는 한 인터뷰에서 "서구적인 요소가 비서구적인 나라에 도입 될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두 세계 사이의 불균형은 사람의 생각과 느낌을 어떻게 바꾸는지, 이 변화는 나중에 개인적인 영역과 정치적인 영역에 어떻게 나타나는지"에 대해 쓰는 것이었다고 밝혔다. 소설 속의 인물과 그들이 살아가고 있는 시대를 잘 조율한다면 쉽게 발견할 수 있는 부분이기기도 하다. 이런 무거운 주제를 방대하면서도 독특한 문체로 이루어진 소설 속에 담아놓았다. 그 안에서 현재 우리가 살아가면서 느끼는 여러 사회문제들이 보완되지 않고 더 격렬해져서 안타까웠다. 독자를 우울함 속으로 밀어 넣지는 않았지만, 역사의 한 순간에 설 수도 없을 만큼 나약하고 힘 없는 개인의 삶을 통해 통해 국경과 인종을 넘어 현 세계가 안고 있는 문제와 개인의 고충까지 간접경험을 할 수 있는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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