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에 내가 죽은 집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이영미 옮김 / 창해 / 2008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오랜만에 마주하는 히가시노 게이고 작품이다. <용의자 x의 헌신>을 이후로 국내에 히가시노 게이고 열풍이 불어올 때도 그의 책을 선뜻 읽을 수 없었다. 이런 장르를 좋아하지 않음에도 그의 작품에서 뿜어져 나오는 매력에 취했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의 책을 직접 구입 해서 읽기에는 무리였다. 여러 핑계들이 있겠지만, 역시나 추리물을 좋아하지 않는 나의 성향 탓일 것이다. 책이 나에게 안겨야만 읽을 수 있는 억지스러움을 가지고 있는 작가였다. 궁금하지만 쉽게 다가갈 수 없는 처지에서 책이 먼저 내게 다가와 주었다. 겉표지를 보면서 꿈자리가 뒤숭숭할까봐 약간의 걱정을 했지만, 너무나 순식간에 책 속으로 빨려들어 버렸다. 이렇게 나를 쉽게 매료시킨 책이 얼마만이던가.

 

  히가시노 게이고 작품을 두번 째로 읽지만, 그의 작품을 읽고 감탄하는 부분은 탄탄한 스토리와 완성도이다. <용의자 x의 헌신>을 읽고, 다른 건 몰라도 내가 읽은 추리물 중에서 완성도에 높은 편이라고 소문을 낼 정도였다. 이번 책도 그런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한정된공간에서 두 명의 인물 밖에 등장하지 않는데도 이런 소설을 쓸 수 있다는 것이 놀라울 뿐이었다. 그런 상황이기에 주인공인 '나'는 추리력이 뛰어나야만 할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평범한 인물을 등장시키므로써 거부감을 없애준다. 이를테면 '너무 똑똑하잖아','직업이 저러니 그럴 수 밖에' 등등의 푸념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옛 연인에게 걸려온 한 통의 전화로 낯선 집을 방문하게 되는 '나'는 그 집에서 그녀의 기억을 찾게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 추리라고 하면 범죄와 연관이 되어 있다고 생각하기 마련이지만, 두 인물을 실질적인 범죄에 가담되어 있다고 생각할 수 없다. 오히려 드러나는 진실에 의해 옛 연인 사야카는 범죄의 피해자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6년을 사귀고, 헤어진지 7년만에 걸려온 그녀의 전화. 고교동창 모임에서 다른 친구에게 전화번호를 물었다는 그녀는 딸이 하나 있는 평범한 주부로 변해 있었다. 그녀의 전화에 야릇한 상상을 하기도 했지만, 그런 일로 전화를 건 것은 아닐꺼라고 생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는 오래된 열쇠 하나를 보여주며, 자신과 함께 어떤 집에 가줄 수 있겠냐고 한다. 앞뒤 정황은 설명해 주지 않은 채, 부탁을 하는 그녀에게 쉽게 마음이 갈 리가 없었다. 하지만 '나'는 어떠한 끌림에 의해 가기로 결정한다. 그녀가 잃어 버렸다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어떤 것인지 궁금했다. 사야카의 아버지의 낚시 가방에서 나온 지도와 열쇠는 유품이 되어 버렸지만, 그 유품의 궁금증을 풀어야만 했다. 그것으로 인해 사야카의 어린 시절의 기억이 돌아올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지도에 나온 집에 도착한 두 사람은 기괴한 집 구조에 놀라고 만다. 별장촌에 숨겨져 있다시피 한 그 집은 지하로만 들어갈 수 있게 지어져 있었다. 사야카의 혼란은 그때부터 시작한다. 분명 낯이 익은 집임에도 어떠한 기억도 없기에 그 집을 조사해 보는 수 밖에 없다. 방 하나하나를 탐색해 가면서 사야카의 흐린 기억을 의지해 가는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집은 생각외로 이상한 집이었다. 분명 사람이 산 흔적은 있었지만, 순식간에 모든 것이 정지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집 안에 있는 교과서와 책들은 제조일이 23년 전이었고, 그 외의 책들도 20년전에 발행된 것이었다. 23년 전에 모든 것이 멈췄고, 동시에 사라져 버렸다고 밖에 상상할 수 없었다. 집안에 몇개 되지 않은 시계들도 같은 시각에 멈춰 있었고, 전기며 수도는 기대할 수 없었다. 촛불과 손전등에 의지해서 살펴볼 수 없는 상황에서 몇개의 수확물을 건져낸다. 초등학교 6학년 남자 아이가 살았음직한 방에서 일기가 발견된 것이다. 4학년 때부터 써 온 일기장에서 조금씩 그 집의 비밀을 풀어간다.

 

  평범한 초등학생 유스케의 일기는 별 특징이 없는 듯 했다. 하지만 그의 일기 속에는 이 집에 대한 단서가 곳곳에 들어 있었다. 그들 뿐만이 아닌,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도 복선을 발견할 수 있는 곳이 일기장이었다. 초반에 무심코 읽고 지나쳤지만, 그 뒤에 발견 하는 유스케 아버지의 편지와 꿰어 맞출 수 있기 때문이었다. '나'와 사야카도 그 일기장의 내용과 편지를 꿰어 맞춰 가면서, 집 안의 또 다른 흔적을 발견하면서 비밀을 풀어갔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서 저자의 빈틈없는 역량이 발휘되는 곳이다. 곳곳에 단서를 뿌려놓고, 퍼즐 조각을 맞추듯이 전개를 풀어가는 과정. 다른 작가들도 그런 구조로 이야기를 써내려 가지만, 히가시노 게이고는 더 빈틈없이 옥죄어 가는 느낌이다. 그가 흩뿌려놓은 단서 하나를 끝까지 쥐고 있다가 만약 이것이 결말에 설명되지 않는다면, 빈틈을 여지없이 폭로(?)해 버리겠다는 나의 포부와는 달리 그는 끝까지 철저했다. 내가 쥐고 있던 단서 하나도 간단하게 처리하고 설명해 주는 저자 앞에서 할 말을 잃어 버렸다. 그만큼 독자는 물론 스토리까지 모조리 꿰고 있다 서서히 풀어 내는 능력이 탁월했다.

 

  그렇지만 그들이 비밀을 풀어가면 갈수록 비극의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것을 눈치 챌 수 있을 것이다. 사야카와 23년전의 유스케가 무슨 연관이 있을까란 생각을 하고 있을 즈음, 유스케의 일기장에 드디어 사야카가 등장한다. 그녀의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면, 이 집에 드나들며 어느 정도 생활을 했는데 조각 조각 흩어진 기억은 모아지지 않았다. 자신의 이름이 등장하고, 엄마의 이야기도 나오지만 여전히 사야카는 이방인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더욱 더 의문이 드는 것은 책 제목이다. 분명 '옛날에 내가 죽은 집'이었는데, 책을 읽다 보면 제목을 잊어 버리기 일쑤다. 제목을 잊지 않고, 책을 읽어나가다 보면 좀 더 일찍 사야카의 비극을 예견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두 사람의 추리에 빠지다 보면 끝에서 만나게 되는 반전에 충격을 받는다. 유스케의 일기장과 유스케 아버지가 보관하고 있던 편지에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한 관계가 숨겨져 있었다. 작은 단서 하나로 그 집의 정체까지 추리해 가는 능력에 감탄을 자아내기도 했지만, 차라리 그 기억을 사야카가 잊고 살았으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렇지만 사야카는 자신이 잃어버린 기억 때문에 정체성 혼란을 겪고 있었다. 결혼 생활도, 아이의 양육도 제대로 할 수 없는(학대까지 일삼는) 그녀에게 잃어 버린 어린 시절의 의미는 그만큼 중요했다. 그 과정을 '나'와 함께 한 이유는 '나'가 쓴 칼럼 때문이기도 했지만, 사야카를 있는 그대로 봐주었던 둘 만의 시간(6년의 사귐)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시간이 흐른 뒤 사야카에게 짧은 엽서 한장이 온다. 이혼을 했고, 아이는 남편이 키운다는 소식과 함께 '나는 역시 나 이외에 다른 누구도 아니라는 걸 믿고, 앞으로도 살아갈 생각이야' 라는 내용이었다. 그 뒤로 그녀를 만날 수 없었다는 말로 소설은 끝을 맺는다. 추리소설이긴 하지만, 사야카를 지켜 보면서 자신의 상처를 들춰내는 힘든 과정을 겪은 여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든지 감추고 싶은 상처 하나쯤은 있게 마련이고, 성장해 오면서 겪은 상처들이 꽤 오래감을 여러 사례들을 통해서 알 수 있다. 나 또한 책을 읽으면서 그런 나의 상처를 발견했고, 그것을 과감히 드러내지 못해 유감스럽게 생각했다. 언젠가 나의 상처를 드러낼 날이 오겠지만, 옮긴이의 말처럼 이 책에서 나오는 '집'의 의미는 '오래전에 스스로 죽인 또 다른 내가 있게 마련' 인 상징물이며, '자아찾기'의 한 갈래로도 해석할 수 있다고 했다. '집'의 의미에서 여러가지 뜻이 갈라져 나옴을 나 또한 인정하며, 자신의 상처를 들춰내더라도 비극이 아닌 희망적인 결말로 각자 마무리 지어보길 권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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