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움 - 김대중 잠언집
김대중 지음, 최성 엮음 / 다산책방 / 2007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올해처럼 국내외로 유명 인사들이 숨을 많이 거둔 해가 있을까. 우리나라에서는 전 대통령 두 분이 돌아가셔서 그런 생각과 허전함이 더하는지도 모르겠다. 죽음 앞에서 삶을 다시 생각해본다고 하지만, 안타까운 죽음이었기에 서민들이 느끼는 상실감도 크리라 생각된다. 그나마 그 분들의 삶의 흔적을 남긴 책들이 출간 되어서 허전함을 느끼는 독자들에게는 약간의 위로가 되어 줄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접 찾아서 읽을 정도의 열정이 내게는 없었는데, 아무래도 안타까움이 더해지리라는 생각에 지레 겁을 먹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내게 지인이 선물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잠언집 한 권이 도착했다. 책을 보기만 해도 안타까움 때문에 언제 읽게 될지 모르겠다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삶을 모두 그려나간 것이 아닌 잠언집이라고 하기에 편안히 읽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잠들기 전 펼친 책이었는데, 흐트러진 자세를 고치고 정독을 하게 만드는 힘을 만나고 말았다.
 

  잠언집이라고 하기에 구구절절한 한 사람의 삶이 단편적으로 그려지지 않을 거라는 생각은 큰 착각이었다. 짧은 글이 대부분이었지만, 그 안에는 경험이 바탕이 된 깨달음이 연필로 꾹꾹 눌러 쓴 것처럼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내가 지금껏 살아온 삶을 감히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견주어 볼 수도 없지만, 내가 다가갈 수 없는 엉겁의 세월을 살아온 흔적 앞에 경이로움이 느껴졌다. 인간의 가장 꼭대기에 있는 경지는 경험하지 않고 깨닫는 것이라고 어느 책에서 읽은 기억이 떠오른다. 그러나 인간이기 때문에 경험을 해야만 깨닫고, 타인의 충고를 그제야 이해하게 되는 것이 대부분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도 경험으로 인해 알아차린 깨달음이 많았다. 어느 누구와 비교할 수 없는 힘겨운 삶의 과정을 거쳐 왔음에도 그때마다 희망을 잃지 않는 모습에 마음이 숙연해지기도 했다. 보통 사람들과 출발선이 달랐고, 과정도 달랐기에 굳이 내가 언급하지 않아도 많은 사람들이 그 분의 업적을 충분히 알리라 생각한다. 이 책에는 우리가 겉으로만 알아온 그 분의 삶이 중심에서 펼쳐진다는 것이 남달랐다. 삶의 중심에 서 있었던 그 분의 내면을 파고드는 짧은 글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펼친 책장의 첫 장부터 나를 멈추게 하고, 그 문장을 기억하기 위해 메모지를 붙이게 했다. "우리는 전진해야 할 때 주저하지 말며, 인내해야 할 때 초조해하지 말며, 후회해야 할 때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 는 말은 누구를 막론하고 가슴을 울리는 말일 것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전진과 인내, 초조함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후회만을 일삼는 내게 가슴을 철렁이게 만들면서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만드는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첫 단락은 '스스로를 믿는다는 것'이란 부제목을 달고 있었는데, 그런 만큼 이 책 중에서 가장 깊은 울림을 만들어 주었던 단락이 아니었나 싶다. 내가 현재 품고 있는 고민과 번뇌들을 명쾌하게 일러주었을 뿐만 아니라 이런 생각들이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동질감을 얻을 수 있었다. 한 나라의 지도자를 지낸 분도 이런 고민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용기를 주었을 뿐만 아니라 치열한 삶을 바탕으로 일궈낸 경험이 있었기에 무심하게 훑어 내려가며 읽을 수가 없었다. 몇 번이고 다시 읽기도 하고, 그 말의 의미를 생각하기도 하고, 너무나 먼 거리의 삶의 의미가 이해가 안 될 때는 다시 읽어 보기로 하고 넘어가기도 했다. 그렇게 책을 읽어나가다 보니 짧은 책이었음에도 읽는 시간이 꽤 걸렸다.

 

  단편적인 글들로 깨달음을 응축해 놓은 책들을 좋아하지 않는 내가 이 책을 통해서 그런 책들에 대한 생각을 달리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청아한 울림을 받았다. '스스로 믿고, 나를 돌아보며, 하나의 가족으로, 더불어 사는' 의미를 전해 준 글이었기에 가능했는지도 모르겠다. 거기다 김대중 전 대통령을 곁에서 지켜본 분이 깨알 같은 메모들을 엮어서인지 더 공감이 갔다. 이 책을 엮은이도 그 메모를 보며 새로운 희망의 메시지가 되고, 누구에게서도 들을 수 없는 인생의 진실한 조언이 되기를 희망한다고 했다. 한 사람이 치열한 삶을 살아가면서 기록해 놓은 가까운 깨달음이기에 이 책에 실려 있는 시기와 때에 맞춰서 다시 꺼내 읽어도 느낌이 새로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의 가족으로 산다는 것' 이란 단락에서는 부부에 대한 깨달음이 많았으므로 결혼을 앞뒀을 때 읽어도 좋을 것 같았다. 지금 읽어도 좋지만 앞서 살아간 분이 흘려 놓은 삶의 흔적을 좇으며 깨달음을 얻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 같다.

 

  너무나 많은 메모지가 붙어 있어서 그 문구를 일일이 거론하는 것이 벅찰 정도다. 개인의 삶의 방향이 다르고 성향이 다르듯이 같은 책을 읽어도 받아들이는 것이 모두 다를 것이다. 개인적으로 자신에 관한 글들이 좋았기에 틈틈이 다시 읽어보며 도움을 받으려 한다. 읽을 때마다 다르고 내가 처한 상황과 위치에 따라서 다르게 다가올 거라 생각한다. 그럴 때마다 책을 꺼내보며 고인을 생각하며 구절 속에 갇힌 숨은 뜻들을 파악해 보면 나보다 먼저 치열한 삶을 살아온 자의 지혜를 빌려올 수 있을 것 같다. 짧지만 많은 뜻을 내포하고 있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잠언집은, 한 사람의 인생이 고스란히 농축되어 있고 경험이 바탕으로 된 진실한 깨달음에 관한 책임을 의심치 않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A가 X에게 - 편지로 씌어진 소설
존 버거 지음, 김현우 옮김 / 열화당 / 2009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몸이 조금씩 아파오는 게 느낌이 좋지 않았다. 내가 약국을 다녀올 수도 있었지만, 이미 옷을 갈아입은 뒤라 조카들에게 약 이름을 알려주고 심부름을 보냈다. 집 근처에 약국에 세 군데 있어서 설마 못 사올까 싶어서 내심 안심하고 보냈는데, 휴일이라 그런지 모두 문이 닫혔다며 허탕을 치고 돌아왔다. 비슷한 위치의 약국들이 한꺼번에 문을 닫으면 다급한 사람은 어쩌라는 건지 잠시 푸념을 한 뒤, 헐레벌떡 뛰어온 조카들에게 수고비 500원을 쥐어 주고(배분은 알아서 하겠지.), 읽다만 책을 펼쳤다. 굳이 안가도 되겠다 싶은 약국을 조카들을 시켜서 가게 한 것은 존 버거의 소설에 나오는 아이다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직접 가지는 않았지만 왠지 그곳에서 아이다의 환영을 보게 될까봐, 조카의 손을 거쳐 내게 도착한 약에서 혹시나 그녀의 손길을 느낄까봐 그녀를 나의 현실로 끌어 내렸지만, 그런 바람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은 것 같아 마음이 허전하다.
 
  다른 약국을 간다는 것이 귀찮아서 그냥 잠이 들었는데, 새벽에 진탕 아파 버렸다. 데굴데굴 구르고, 토하고, 식은땀을 흘리고 나니 정신이 몽롱했다. 오전 근무만 하고 집으로 돌아와 내리 몇 시간 동안 잠만 잤는데도 아픔은 가시지 않고, 배는 고프고, 생각들이 한정되어 버리는 것에 상실감을 느꼈다. 누워 있으면 할 수 있는 것이 한정되어 있기에 책을 꺼내 읽었다. 손에 쥔 책을 다 읽었음에도 그 책에 대한 느낌을 남겨야겠단 생각보다, 어제 읽은 존 버거의 소설 속의 아이다란 인물이 자꾸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소설 속의 인물이었음에도 쉽게 간과할 수 없었던 아이다는 결국 무거운 몸을 일으켜 나를 컴퓨터 앞으로 이끌었다.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지금 남기지 않으면 사라져 버릴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녀를 모르고 지나쳐 버리는 사람들, 그녀가 한 남자에게 쓴 편지들이 묻힌다고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해서 견딜 수 없었다.
 
  아이다는 감옥에 갇힌 한 남자에게 편지를 쓴다. 그는 테러리스틀 결성했다는 혐의로 이중종신형(죽을 때까지 감옥에 있고, 그후에도 죽을 때 나이만큼의 기간 동안 시신을 감옥밖으로 내올 수 없다는 형벌.)을 받은 사비에르라는 청년이었다. 그는 새 교도소가 들어서면서 73호 감방에서 머물렀던 마지막 수감자였고, 협소한 수납 칸에서 아이다가 보낸 편지가 발견됐다. 이 책에는 부치지 않은 편지도 수록되어 있었는데, 그 경위는 밝히지 않고 사비에르가 정리한 순서를 존중해 그대로 실려 있었다. 아이다는 비교적 차분한 어투로 사비에르에게 편지를 썼다. 격렬한 감정에 휩싸여서 쓴 편지는 종종 붙이지 않았지만, 이중종신형을 당한 남자에게 쓴 편지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의 차분하고 기다림이 서린 편지들이었다. 자신의 일상을 토대로 그와의 추억을 기록해 가는 그녀는 담담해 보였다. 그러나 다양한 언어로 애칭을 바꿔가며 애정을 표시하고, 편지 중간 중간에 등장하는 '사랑해요'라는 표현은 읽는 이의 마음을 저릿하게 만들었다. 흔히 볼 수 있는 연애편지로 볼 수도 있겠지만, 아이다와 사비에르는 평범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들은 결혼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면회도 허락되지 않았고, 유일한 교류 수단은 편지 밖에 없었다.
 
  돌아올 수 없는 이에게 쓰는 편지란 어떤 기분일까. 오래 전, 군대에 있는 남자친구에게 그리움을 가득 담아 편지를 쓴 기억을 떠올려보면 아이다가 갖는 먹먹한 기분이 조금은 전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휴가, 면회, 제대라는 기다림이 있었던 반면 아이다는 그 모든 것이 단절된 상태였고, 강제로 헤어진 연인에 대한 그리움을 편지로 밖에 전할 길이 없었다. 편지 안에 그를 볼 수 없고, 만질 수 없다는 그리움만 내제 되어 있는 것만으로도 보는 이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드는데, 거기에는 아이다와 사비에르에게 처해진 현실이 적나라하게 그려져 있었다. 사비에르가 어떠한 연유로 잡혀갔는지 자세하게 나와 있지 않았지만 혼란스러운 국가, 억압당하고 강제성을 띠는 인권, 불안에 떨며 하루하루를 보내야 하는 두려움이 늘 감지되었다. 그녀도 어떤 활동을 하는 것 같았지만, 저자의 설명대로 숨겨진 의미를 찾기란 어려웠다. 사비에르를 향한 그리움, 거대한 집단 앞에 힘없이 무너지는 한 인간과 무리들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내겐 숨이 차오를 지경이었다.
 
  오랜 기간 사비에르에게 보내졌던 편지 읽기를 멈출 수가 없었다. 밤이 깊어갈수록 그녀의 그리움은 배가 되어 내 안에 맴도는 타인에 대한 그리움을 불러일으킬 정도였다. 그 마음을 주체하지 못해 잠시 책을 덮고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기도 했지만, 아이다의 상실감에 어느 것도 비할 바 못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천연덕스럽게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을 상세히 기록해가는 아이다, 큰 사건을 일상처럼 말해야 하는 아이다, 처절할 정도로 사랑하는 이의 온기를 느끼고자 자신의 손을 그려 나가는 아이다를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그들을 갈라놓은 보이지 않는 힘에 저항심이 생겼다. 그런 아이다의 편지에 수긍하는 사비에르의 편지는 없었다. 다만 그녀가 보낸 편지의 뒷편에 사비에르의 메모가 있었는데, 난해하고 그의 해설이 필요한 짤막한 그들이 대부분이었다. 그 글은 아이다에 대한 글이 아니었고, 세계 곳곳에 행해지는 반인간적인 행위에 대한 개탄과 상대성을 그린 것이 많았다. 그 낯선 이질감에 몸을 떨면서도 사비에르가 그런 글을 쓸 수밖에 없는 이유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그것 밖에 없어서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감옥 밖으로 한 발짝도 내디딜 수 없는 그는 아이다의 편지의 뒷편에 세상의 곳곳을 누비며 보이지 않는 활동가다운 호소를 한 것이 아니었을까. 그렇더라도 사비에르가 아이다에게 어떤 편지를 보냈는지 상세히 알 수 없었기에(아이다의 언급으로 조금 알게 되었지만, 소소한 것에 불과했으므로), 답답하기도 해서 그런 아이다를 어떠한 시선으로 바라봐야 할지 난감해지기도 했다.
 
  아이다가 보낸 편지의 무게가 가벼웠더라면, 사비에르의 메모가 아이다를 향한 것이었다면 편지를 읽는 나의 마음이 어떻게 변모되어 갔을까. 아마 조금은 특별한 연애편지로 보게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런 사랑이 현재에도 세계 어느 곳에서 지속되고 있다고 생각하면(저자의 의도가 내포되어 있지만.) 그냥 가볍게 읽고 지나칠 수가 없다. 약국에서 일하는 아이다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그대로 전하며, 때로 활동가로 모습을 드러내며, 자신이 알고 있는 다양한 지식들을 진부하게 늘어놓기도 하지만 사비에르 앞에서만큼은 한 사람의 여자이고 싶은 마음 또한 감추지 않았다. 아이다의 편지를 읽으며 사비에르의 메모가 무심하다 싶다가도 그가 한두 마디씩 흩뿌려 놓은 아이다를 향한 마음을 볼 때면 둘의 단절됨이 피부에 와 닿아 안타까웠다. 그들이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도 없는 단절이 왜 그들에게 일어난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내 자신에게 던져 보았지만, 대답이 돌아올 리 만무했다. 세계화를 빌미로 이루어진 폭력과 자본세계의 병폐와 만인에게 가격되어 지는 불편한 진실을 파악할 힘이 내게 남아있을 리도 없었다.
 
  그 두 연인의 단절된 상황으로 나머지 배경을 파악해 나가는 도리밖에 없었다. 아이다의 절절한 편지, 사비에르의 개탄과 비난이 섞인 메모들을 보고 있노라면 내가 살고 있는 현실이 무척 낯설게 느껴졌다. 과연 나는 행복한 것일까, 저들의 모습을 무시해도 괜찮을 것일까란 질문을 끊임없이 하게 되지만 그 둘의 단절 앞에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아이다가 얼마를 기다려야 사비에르가 돌아올지 알 수 없었고, 사비에르가 과연 감옥에서 나올 수 있을지에 대한 여부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마지막 편지의 뒷면에 그려진 '오늘 밤의 탈출 경로'를 통해 둘의 재회를 잠시나마 꿈꿔보게 되었지만, 그 또한 먹먹한 가슴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들이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그들의 목숨이 내재하든 내재하지 않던 그것은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저자의 말처럼 신께서 그들을 지켜주시기를 바랄 뿐이다. 더 이상 그들이 처한 상황들이 더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도 크지만, 그 바람은 아주 먼 얘기로만 느껴져서 내 존재가 너무나 미미하게 다가와 몸 둘 바를 모르겠다.
 
  존 버거는 개인적으로 무척 좋아하는 작가라 그의 신간이 나왔나 정기적으로 검색해 본다. 우연히 신간이 나온 것을 보고 바로 구입했는데, 그의 소설은 처음이거니와 두껍지 않은 책임에도 많은 메시지를 담고 있고, 결코 가볍지 않은 무게감을 지니고 있어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의 산문과 시, 평론을 주로 읽다 소설을 마주하게 되니 다시 한 번 그의 역량에 감탄하면서도 허공을 향해 흐릿한 시선을 거둘 수 없는 나를 자주 만나게 되기도 한다. 아이다의 편지를 온전히 이해했다고, 사비에르의 메모에 동감한다고 말할 수 없지만 존 버거가 그려낸 세계는 동떨어진 세계가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이 책을 계기로 그의 소설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고, 먹먹한 가슴앓이가 계속 이어지더라도 다른 작품을 탐독해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당분간은 아이다란 인물이 내 머릿속에서 잊히지 않을 것 같다. 좀 더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인물을 갈망하며 그의 새로운 작품을 향해 손을 내밀어 보련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뱀파이어와의 인터뷰 뱀파이어 연대기 1
앤 라이스 지음, 김혜림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9년 8월
평점 :
품절


뱀파이어 소설에 전혀 관심이 없던 내가 <트와일라잇> 시리즈를 완독하고, <수키 스택하우스> 시리즈를 두 권 읽고 보니 <뱀파이어와의 인터뷰> 또한 낯설지 않았다. 먼저 읽은 책의 소재는 같았지만 내용은 달랐기 때문에 뱀파이어 연대기가 어떻게 펼쳐질지 궁금하면서도 21권까지 나왔다는 사실에 놀랐다. 거기다 이 책을 읽은 지인에게 듣자하니 내가 읽은 두 종류의 뱀파이어 소설과는 차원이 다르다고 했다. 두 소설의 원조 격인 <뱀파이어 연대기>는 철학적이고 심오하다고 했다. 그 말에 기대를 하면서도 살짝 걱정이 되기도 했는데, 책을 읽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심오하다는 말을 공감할 수 있었다.
 

  뱀파이어하면 인간의 피를 마시며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인간과 다른 존재이기에 나와는 거리가 먼 얘기고, 허구의 세계이기 때문에 그들의 세계를 따로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내가 읽은 소설들 속에서도 뱀파이어와 인간의 사랑이 주요 쟁점이어서 그들의 고뇌에 대해서는 깊이 있게 다루지 않았었다. 그러나 <뱀파이어와의 인터뷰>에서는 인간에서 뱀파이어가 된 루이스의 존재감에 대해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었다. 대부분 뱀파이어가 된 이후의 삶에 초점을 맞추기 바쁜데 자신의 의지와 달리 뱀파이어가 된 루이스는 끊임없이 '나는 누구인가'를 생각한다. 한 젊은이가 뱀파이어 루이스의 고백을 녹음하면서 인터뷰하는 식으로 시작이 되는데, 뱀파이어가 된 과정부터 이야기해 나간다. 뉴올리언스 저택에서 어머니와 여동생, 남동생과 그럭저럭 살아가고 있던 루이스는 남동생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삶의 희망을 잃어버린다. 삶을 포기한 채 죽음만 기다리고 있던 그에게 뱀파이어인 레스타가 찾아와 뱀파이어로 만들어 버린다. 그때부터 루이스는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되며 끊임없이 자신이 이 세상에서 어떤 존재인지, 자기와 같은 동족은 과연 어디서 시작되었는지에 대해 고뇌하게 된다.

 

  레스타가 자신을 뱀파이어로 만든 이유는 죽고 싶어 하는 루이스의 나약해진 정신세계와 레스타의 아버지를 봉양하기 위해서 루이스의 저택이 탐이 났기 때문이었다. 레스타는 루이스를 뱀파이어로 만든 후 종 부리듯 대한다. 뱀파이어가 된 후에 인간적인 면을 거의 잃어버린 레스타와는 대조적으로 인간적인 생각과 고뇌가 가득한 루이스에게 레스타는 절대 살갑지 않은 존재였다. 레스타가 좀 더 깊이 있는 내면을 가지고 행동하며 자신의 고뇌를 알아주었다면 루이스는 레스타를 증오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복수하듯 인간의 피를 마시며, 물질에 욕구를 떨치지 못하고,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 득의양양한 모습은 루이스에게 절대 호감을 사지 못했다. 그럼에도 피를 마셔야만 생존할 수 있는 뱀파이어이기에 루이스 또한 인간의 피를 마시지 않을 수 없었다. 루이스는 그런 자신을 혐오하면서도 다른 종족을 만날 수 없어 레스타 곁에서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뱀파이어의 시초가 어디서부터인지, 신은 과연 뱀파이어의 존재를 생각하고 있는지 끊임없이 질문을 해 대지만 레스타가 알고 있는 것은 별로 없었다. 그런 문제부터 늘 레스타와 부딪히던 중 레스타는 어린아이를 뱀파이어로 만들게 된다. 피에 대한 욕구에 혐오감을 느끼고 방황하던 루이스는 죽은 엄마 곁에 울고 있는 아이 클라우디아에 대한 욕망을 이기지 못하고 피를 마신다. 그런 루이스를 지켜보던 레스타는 루이스에게 보란 듯이 클라우디아를 뱀파이어로 만들고, 루이스도 어느 정도 동조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그렇게 세 명의 뱀파이어가 함께 했지만 그들의 생활이 평탄할 리가 없었다. 아이의 육신을 가지고 있지만 레스타에 대한 생각이 루이스와 별반 다르지 않았던 클라우디아는 좀 더 과감한 생각을 가지게 된다. 루이스를 사랑하게 되지만 자신을 뱀파이어로 만든 레스타를 혐오하게 된다. 그러다 레스타를 죽이기로 마음먹고, 독을 먹인 아이를 유인해 레스타를 죽여 늪에 수장 해 버린다. 그리고 루이스와 클라우디아는 자신들의 동족을 찾아 유럽으로 떠난다. 레스타를 맘에 들어 하지 않았지만 클라우디아의 행동을 탐탁지 않았던 루이스도 일이 그렇게 돼버린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때부터 그들은 다른 뱀파이어를 찾아 헤매는데, 그 과정이 좀 진부하게 이어진다. 영혼 없는 뱀파이어를 만나다 파리에서 드디어 자신과 같은 동족을 만나고 오랫동안 자신을 괴롭혔던 존재의 근원에 대해서 궁금증을 해소할 수 있다 생각하고, 그들의 우두머리에 속하는 아르망에게 시원한 답변을 요구하지만 되레 충격적인 말을 듣는다. 루이스가 늘 고뇌하던 존재의 근원에 대해 아르망도 많은 것을 알지 못했고, 아르망은 루이스를 본 순간 자신과 함께 할 동반자라는 것을 확신할 뿐이었다. 아르망은 클라우디아의 죽음을 예견하고, 클라우디아를 떠나 자신과 함께 하자는 충고를 한다. 그러나 과연 루이스가 클라우디아를 떠날 수 있을지 자신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런 가운데 루이스와 클라우디아가 어떻게 뱀파이어가 되었으며, 뱀파이어를 만들어 준 이가 누구인지 숨기고 있었기에 다른 뱀파이어들은 그들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다. 클라우디아도 그런 분위기를 감지하고, 루이스를 놓아주기 위해 자신을 돌봐줄 만한 여인을 뱀파이어로 만든다. 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루이스를 사랑하는 클라우디아는 좀 더 컸을 때 뱀파이어를 만들어 주지 않았다고 레스타와 루이스를 원만하기도 하지만, 자신의 운명 앞에 다가온 또 다른 죽음을 예비하지 못했다. 바로 레스타가 나타난 것이다. 루이스와 클라우디아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던 다른 뱀파이어를 선동해 레스타는 클라우디아의 목숨을 노렸다. 루이스에게는 돌아오라는 부탁을 하지만 결국 클라우디아와 그녀의 보호자인 신생 뱀파이어는 그들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 클라우디아의 죽음 앞에서 망연자실하던 루이스는 다시 뉴올리언스로 돌아가서 레스타를 만난다. 복수를 위해서라기보다 레스타를 만나고 싶은 마음에 찾아가지만 이미 죽음이 레스타를 점령하고 있는 상태였다. 이 모든 이야기, 루이스의 이야기부터 그가 뱀파이어가 된 이후의 삶과 사랑, 고뇌는 끝이 났다. 그러나 그 모든 이야기를 듣고 있던 젊은 청년은 루이스의 이야기에 안타까워하면서도 자신을 뱀파이어로 만들어 달라고 한다. 루이스는 그 길고도 고통 가득한 이야기를 듣고도 뱀파이어가 되길 원하는 젊은이의 목을 깨물지만 그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다.

 

  루이스가 다른 연대기에도 등장할지 어떨지 알 수 없지만, 좀 더 긴박한 스토리를 원했던 나는 책을 읽는 내내 지지부진함을 느꼈다. 줄거리를 잡아내기에도 복잡한 이야기일 뿐만 아니라, 루이스와 고뇌와 끊임없이 자신들의 존재의 근원을 찾아 헤매는 이야기가 더 많았다. 그 반복되는 고뇌가 독자인 내게는 진부했고, 뱀파이어의 삶을 이렇게 알아갈 필요가 있는지에 대한 회의감이 들 정도였다. 인간적인 면을 많이 간직한 루이스란 인물에 어느 정도 기댔으면서도 그의 우유부단함과 방황에 지칠 때가 많았다. 인간들도 자신의 존재에 대해 늘 고민하기에 뱀파이어의 고뇌를 이해 못하는 것도 아니지만, 결국 루이스는 뱀파이어란 존재에 적응 못한 자로 남아 있을 뿐이었다. 생각한다. 인간들 삶에 동화되어 가려는 다른 뱀파이어 소설들과는 달리 인간세계에 전혀 녹아들지 못하고 존재에 대한 고뇌가 가득했던 소설인 만큼, 루이스의 생각을 따라가다 보면 현재 우리의 삶에 적용해 볼 수 있는 것들도 많았다. 그들이 던진 해답 없는 질문을 나 또한 던짐 셈이었다. 그러나 결코 녹록치 않았던 그들의 이야기를 읽어나가는 것은 즐겁지만은 않았다. 필요한 성찰도 반복되면 피하고 싶어지듯 진부함을 깨고 나오지 못한 것이 가장 아쉬웠다. 그 뒤에 이어질 뱀파이어 연대기가 조금 더 유쾌해지길 바라며 잠시 떠난 뱀파이어 세계의 여행을 마치려 한다.

 

 

오탈자

 

440쪽

 

타닥타닥 타오르는 불꽃과 솟국치는 연기가 내 감각을 마비시킬 것 같았다. -> 솟구치는

 

452쪽

 

그래, 나는 그를 사랑하다. -> 사랑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셜록 홈즈 전집 1 (양장) - 주홍색 연구 셜록 홈즈 시리즈 1
아서 코난 도일 지음, 백영미 옮김, 시드니 파젯 그림 / 황금가지 / 2002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주변이 소란스럽거나 무언가에 집중할 수 없을 때, 재미난 책을 펼쳐든다. 그런 소음과 컨디션을 무시할 수 있는 건 역시 나를 다른 세계로 이끌고 갈 흥미진진한 소설이다. 무수한 소음과 집중 저하로 점점 짜증이 솟구치려는 찰나 추리소설을 읽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추리소설이라면 지금 나의 기분을 말끔히 씻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지난 달 지인에게 선물 받은 셜록 홈즈 전집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음은 말할 것도 없다. 1권이 비교적 얇아서 부담이 없어 금방 읽을 수 있을 것 같아서 책을 꺼내는 내 손길이 가벼웠다.
 

  책장 높은 곳에 자리한 셜록 홈즈 전집을 꺼내고 나니 잠시 힘에 부쳐 헉헉대면서도 고운 자태에 반해 조심스레 책을 읽었다. 드디어 나도 셜록 홈즈에 입문을 한다고 생각하니 감회가 새로웠다. 추리소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음에도 다른 책들을 통해서 셜록 홈즈를 알게 됐고, 추리소설에 매력을 느꼈다. 셜록 홈즈에 궁금증이 솟을 때 적절한 시기에 와준 전집 때문에 약간의 애정을 담아 책을 읽을 수 있었다. 역시 흥미진진하게 책을 읽어나갈 수 있었고, 셜록 홈즈의 활약을 만끽할 수 있었다. 셜록 홈즈 전집 중 첫 번째 책인 <주홍색 연구>는 왓슨과 셜록 홈즈의 만남을 다루고 있었기에 그들의 활약상이 다른 책에서 어떻게 펼쳐질지 궁금증을 불러 일으켰다. 첫 만남이어서 그런지 셜록 홈즈와의 만남과 사건 해결들이 왓슨의 회상으로 기록되어 있다.

 

  왓슨 박사는 아프가니스탄에서 군의관으로 지내다 부상을 당하고 피붙이라곤 아무도 없는 영국에 와서 지내게 되었다. 그곳에서 하숙인을 구하다가 우연히 같이 근무했던 스탬포드를 만나고 그로부터 셜록 홈즈를 소개 받는다. 셜록 홈즈도 마침 하숙인을 구하고 있었고, 스탬포드가 다소 괴팍한 데가 있다고 설명을 해줬음에도 홈즈를 만나고 나서 그와 같이 하숙 생활을 하기로 맘먹는다. 그렇게 둘의 하숙생활은 시작 되었고, 왓슨은 셜록 홈즈를 나름대로 파악해 본다. 셜록 홈즈가 관심 있는 분야에 대해서는 무척 해박하지만, 교육을 통한 기본적인 지식이 부족한 경우도 있었다. 그런 점을 지적해 주었음에도 셜록 홈즈는 개의치 않는다. 홈즈는 자신이 하는 일이 탐정 자문이라고 밝히면서 쌓고 있는 지식에 관해 나름 의견을 피력하기도 한다. 그러던 중 기이한 살인사건이 발생했고, 영국 경찰은 셜록 홈즈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자신이 사건해결에 도움이 되어도 결과는 모두 경찰에게 돌아간다는 사실을 푸념하면서도 홈즈는 왓슨이 놀랄만한 기민함과 추리로 사건 해결에 일조를 한다.

 

  폐가에서 한 남자가 고통스런 표정으로 죽어 있는 현장을 다녀온 뒤 살인범이 어떠한 인물인지, 그 남자가 어떤 사인으로 죽었는지를 추측해 내지만 주변 사람들은 통 믿지 않는 눈치다. 그러나 살해당한 남자와 동행했던 또 다른 인물이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사건은 다시 미궁 속에 빠진 듯 했다. 그러나 홈즈만의 독특함으로 결국 범인을 잡고 그 범인이 왜 그런 살인을 저질렀는지에 대해서는 2부에서 상세하게 펼쳐진다. 상당한 페이지를 할애한 그 이야기 속에는 미국 서부 개척 시대 모르몬교도의 대이동 속으로 흘러간다. 그 안에서 행해지는 종교적인 억압과 탄압은 결국 범인인 제퍼슨 호프의 약혼녀와 그녀의 아버지의 목숨을 뺏어갔고, 그로인해 수십 년 동안 복수를 하기 위해 쫓고 있었음이 밝혀진다. 비극은 2부의 초반부터 예견되었기에 잠시 추리 소설이라는 사실을 잊고, 이야기에 빠져들고 있었다. 모르몬교도들에 의해 사막에서 구출된 훗날 제퍼슨의 약혼녀가 되는 소녀와 그녀의 양아버지는 모르몬교의 병폐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목숨을 구출해 주었기에 순종하고 살아가고 있었지만, 그들 앞에 나타난 제퍼슨을 모르몬교도들은 인정하지 않았고 결국 도망치다 추격을 당해 그녀의 아버지는 살해당하고, 그의 약혼녀는 억지 결혼을 당하고 얼마 후에 죽고 만다. 그 일을 행한 자들에게 대한 복수심에 불타 수십 년간 그들 뒤를 쫓으며 복수한 이야기는 살해 된 두 남자의 결말로 이어졌지만, 제퍼슨의 비극과 모르몬교의 병폐는 씁쓸한 기분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제퍼슨은 두 사람을 살해했기에 죄의 대가를 치러야 했다. 그러나 그는 오래전부터 앓던 지병이 있었고, 그는 감옥에서 목숨을 잃는다. 비극적인 결말이었지만 제퍼슨은 복수를 했기에 맘 편히 잠들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사건의 원인이 밝혀지기 전에는 오로지 홈즈만 보였던 시선이 제퍼슨의 과거행적으로 옮겨가면서 많은 감정을 느끼게 했다. 제퍼슨도 나름 흔적이 남지 않는 범행을 저질렀지만, 홈즈 앞에서는 그의 범행이 낱낱이 밝혀질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 왓슨의 기록이기에 모르몬교, 제퍼슨의 이야기가 많이 포함되어서인지 잠시 추리소설의 흐름이 끊겼다가 이어진 점에 대해서 낯설어 하기도 했다. 그러나 왓슨과 셜록 홈즈의 만남, 셜록 홈즈의 활약상을 보면서 앞으로 이어질 그들의 행보에 주목하게 되었다. 이런 식으로 홈즈를 만나다 보면 전집 마지막을 읽을 때쯤에는 홈즈에 대한 시선과 애정이 상당히 달라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 시기가 언제가 될지 알 수 없지만 차근차근 셜록 홈즈를 읽어나가면서 즐거움을 만끽하려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빅마우스 앤드 어글리걸 블루픽션 (비룡소 청소년 문학선) 35
조이스 캐롤 오츠 지음, 조영학 옮김 / 비룡소 / 2009년 8월
평점 :
절판


컵라면을 먹다 시계를 보니 새벽 2시. 이 시간까지 내가 지금 뭐하나 싶어 잠시 낯선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러다 손에 쥐고 있는 책 때문에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인지할 수 있게 됐다. 초반에는 조금 지지 부지하던 스토리가 흐름을 타더니, 나의 관심을 끌면서 도저히 책을 놓을 수 없어 늦은 시간을 무릎 쓰고 간식을 먹으며 책을 읽었다. 책을 읽으면 왜 그렇게 배가 고픈지. 저녁을 먹고 11시에 계란 두 개를 삶아 먹고, 책을 읽다 보니 또 배가 고파 결국 컵라면을 새벽 2시에 먹고 말았다. 컵라면을 먹고 마저 책을 읽고 나니 그제야 후련한 기분이 들었다. 궁금증을 해소 시켰다는 개운함이 밀려와 편히 잠들었는데, 아침이 되니 눈은 안 떠지고 또 배가 고파왔다.
 

  자기 직전에 읽고 잔 책이 여서 그런지 꿈속에 맷과 어슐러가 나온 것 같기도 했다. 비교적 개운하게 눈을 뜨긴 했지만 온 몸이 뻑적지근한 게 어슐러와 농구 한 판이라고 한 것 같은 기분이다(절대 180cm 거구랑 농구할 일이 없지만.). 그러면서도 이제 다 잘 해결 되었으니 괜찮다는 느낌이 들어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16살 청소년들이 겪기에는 좀 무게감 있는 사건들이었던 것 같아 되레 내가 한껏 늙어버린 기분이 든다. 인생의 절반을 살아버린 듯 세상을 보는 시선이 달라진 것은 비단 나뿐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관계라는 것이 얼마나 미완성이고 부서지기 쉬운지 맷의 일화를 통해서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세상에 막 눈뜨기 시작한 청소년들에게 그런 모습을 비춰주어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하지만, 잘 이겨낸 맷과 어슐러에게 장하다고 말하고 싶을 정도다.

 

  사건의 전말은 이랬다. 맷이 점심시간에 친구들과 한 농담을 누군가가 신고해 버려 테러리스트로 몰리게 되었다. 사복 경찰들이 찾아왔고, 아무리 설명해도 맷의 말을 믿어주지 않고 어느 누구 하나 변호해 주지 않아 맷은 취조를 당하고 3일 정학까지 당하게 된다. 맷이 한 말들이 분명 농담이라는 것을 다 알았음에도 경찰까지 찾아오자 친구들은 누를 당할까봐 모두 맷을 피해 버린다. 그때 농구부의 주장이자 거구에 못생긴 소녀 어슐러 럭스는 맷이 테러리스트로 몰리는 일이 아주 웃기다고 생각한다. 우연히 지나치다 맷이 하는 이야기를 들었고, 친구들의 반응이 어땠는지 보았기 때문이었다. 급기야 뉴스와 신문에까지 나오자 어슐러는 맷의 농담이 일파만파 오해된 것에 대해 분노를 터트린다. 맷의 주변의 패거리들은 물론, 교장선생님까지 맷을 변호하기보다 조사 중이라고만 했기에 어슐러가 나서기로 했다. 맷에 대한 특별한 마음이 있어서라기보다 진실 앞에서 피해버리는 사람들이 싫었다. 친구에게 물어 맷의 이메일 주소를 알아낸 다음 자신이 당시에 그곳에 있었다는 사실을 밝히고 증언이 되어 주겠다고 말한다.

 

  맷은 그야말로 비참한 상황이었다. 글쓰기를 좋아하는 맷이기에 대본 이야기를 하다가 장난삼아 말 한 것인데 테러리스트로 몰린 것이다. 그런데 자신을 변호하고 나설 줄 알았던 친구들은 물론, 선생님, 경찰까지 자신을 믿어주는 눈치가 아니었다. 맷은 학교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정학을 당한 터라 집에서 답변 없는 메일을 친구들에게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답답함 때문에 미칠 지경이던 맷에게 어슐러의 메일이 도착한다. 어슐러의 메일은 맷에게 구원 같았다. 초등학교 때 같이 학교 다녔지만 얘기를 해 본적도 없었고, 특히나 그녀의 외모가 위압적이었다. 그런데 그런 어슐러가 자신을 변호해 주겠다고 나섰으니 맷으로서는 고마움을 넘어 없던 우정이 샘솟을 정도였다. 어슐러는 교장 선생님을 만나 맷의 무죄를 말했고 어슐러의 행동에 교장 선생님도 놀라는 눈치였다. 아무도 맷을 변호하려 하지 않았기에 어슐러의 등장에 멈칫 하면서도 내심 안심하는 눈치였다.

 

  그렇게 사건이 일단락되는 듯 했다. 맷은 다시 학교로 돌아왔고, 학교와 동네를 시끄럽게 했던 그 사건은 잊힌 듯 했다. 그러나 예전의 맷으로 돌아갈 수 없음을 가장 빨리 깨달은 사람은 맷이었다. 친구들의 태도에 묘하게 경계가 느껴졌고, 자신이 당한 일에 대해 어느 누구도 나서주지 않은 것에 대한 실망감이 교차하고 있었다. 맷은 예전처럼 썰렁한 농담을 일삼는 일도, 클럽 활동을 하는 것도 무의미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맷은 상처를 받은 것이다. 평범한 고등학생에 지나지 않았던 소년이 테러리스트로 몰리고 다시 복귀했음에도 사람들의 시선은 예전 같지 않았다. 유일하게 어슐러만이 자신을 변호해 주고 나서 그녀에게 다가가려 했지만 어슐러도 맷에게 살갑게 굴지 않아 맷은 우울한 아이로 변해갔다.

 

  어슐러에게 메일을 보내도 답장이 없고, 부모님은 고통을 견디지 못해 학교를 상대로 고소를 했다. 그 뒤로 어슐러를 바라보는 시각이 더 악화되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학생들에게 폭력을 당하고, 동네 사람들에게 돈만 밝히는 가족이라는 오해가 덧입혀진다. 맷은 무엇이 잘못 된 것인지 알 수 없는 가운데 자신이 즐겨 산책하던 곳에 간다. 그곳은 바위투성이 산이었는데 한 순간 맷은 그 아래로 떨어지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그 절제절명의 순간에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어슐러였다. 우연히 산책하러 나온 맷을 발견하고 어슐러는 구원의 손길을 펼쳤다. 그리고 맷은 한 순간 품었던 생각을 떨쳐버린 채 어슐러의 손을 잡고 산을 내려온다. 그리고 그 뒤로 둘은 급속도라 가까워진다. 이메일로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고, 산책을 하며, 여러 곳을 함께 다닌다. 학교에서는 둘이 사귄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둘은 개의치 않았다. 농구를 잘하는 소녀지만 거구에다 못생긴데다 늘 무뚝뚝해서 친구가 없는 어슐러와 쾌활하고 평범한 소년 맷이 친구가 되었다. 결코 가볍지 않은 사건으로 인해 둘은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 주게 되었으니 어떠한 친구들보다 애틋해 질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직 사건이 해결 된 것은 아니었다. 분명 맷을 신고한 사람이 있었고, 그 사람이 누구인지 밝혀진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그러나 맷이 아끼던 개 펌프킨이 납치되는 소동이 일어나고, 어슐러와 함께 개를 찾는데 일조한 둘은 잠깐 있었던 오해를 풀게 되며, 맷이 학교에서 수업을 받던 중 또 다시 폭파 신고 전화가 걸려온다. 전화를 추적한 결과 동네에서 인심 사납기로 소문난 목사였고, 그 두 딸이 맷의 대화를 듣고 아빠에게 전해 신고를 하게 된 것이다. 목사는 체포 되었고, 부모님은 고소를 철회하고, 모든 일이 해결된 가운데 맷과 어슐러는 드디어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게 된다. 이렇듯 녹록치 않은 사건으로 인해 원만하게 해결이 되긴 했지만 그 과정 속에서 너무 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받았다. 고등학생인 맷은 인생의 몇 년을 훌쩍 살아 버린 듯 큰 고통의 과정을 맞이했고, 다행히 어슐러를 통해서 어둠의 터널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러나 외모로 판단하고 모두들 멀리했던 어슐러나 오해로 비롯된 사건에 언론과 폭력, 왕따가 합세해 궁지에 몰렸던 맷, 어른들의 부조를 쉽게 지나칠 수 없다. 학창시절 누구나 그런 경험을 가지고 있을 것이며, 그것이 잘못인지도 모른 채 대중을 따라가는 우리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비슷한 처지였기에 어슐러와 맷이 가까워진 것이 아니라 사람을 진실 되게 바라보는 시각을 발견함으로써(주변상황에 굴하지 않고 선뜻 행동에 나선 어슐러가 그랬다.) 그들이 가까워진 만큼 이런 만남이 흔하지 않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이 책을 읽는 청소년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사건의 단면만 보지 말고 그 안에 저자가 흩뿌려놓은 메시지를 감지하며, 소신껏 삶을 사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갖길 바래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