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복 - 세상에서 제일 큰 축복은 희망입니다 장영희의 영미시산책
장영희 지음, 김점선 그림 / 비채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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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울을 보면서 스스로에게 되뇐다. 괜찮다고, 다시 힘을 얻을 수 있을 거라고 최면을 건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다친 마음을 위로할 수 없을 것 같다. 시간이 조금만 멀리 물러나 주었으면 하는 바람은 말 그대로 소망일뿐이기에, 시간마다 나 자신을 다독여본다. 이 마음을 무엇으로 위로받을 수 있을까. 사람이 힘이 들면 그것을 펼치기보다 더 안으로 들어가기 마련인데 현재의 나도 그렇다. 평소에 즐겨하던 자질구레한 소일거리도 흥미를 잃었고, 어떤 것도 나의 관심을 끌지 못한다. 내가 좋아하는 책으로 위로를 받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마음이 어지러울 때는 활자를 읽기다 더 힘들다는 것을 알기에 무조건 시간만 때우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독서도 시들해질 무렵, 리뷰를 남기기 위해 이미 읽은 <축복>을 꺼내 들었다. 책을 들춰봐야 기억을 더듬을 수 있기에, 다시 읽는 다기 보다 전체적인 맥락을 잡기 위해서였다. 그러다 메모지를 붙여 놓은 페이지를 다시 펼쳐보게 되었고, 아무 방어도 하지 않은 채 내 마음을 툭 건드려 버리는 시들을 만나고 말았다. 이미 읽은 책이기에 별 생각 없이 펼쳤을 뿐인데, 무심코 펼친 책에서 위로를 얻을 거라 생각하지 못했다. 마음이 다친 뒤라서 그런지 읽을 당시에는 큰 감흥 없이 만났던 시들이 나를 한없이 파고들었다. 마치 나의 사정을 다 알고 있다는 듯이 어루만져주고 힘을 주는 시들에 한없이 무너져 내렸을 뿐이다.

 

  저자는 일간지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던 중, 몸이 아파 항암치료를 받으면서도 영미시 연재를 중단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더 희망적인 시들을 많이 고르게 된 것 같다는 저자의 말이 떠오르면서, 비로소 그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당장 절망적인 상태에 있는데, 스스로를 위안하고자 혹은 타인을 위로하고자 희망적인 메시지를 고른다는 것은 내 경험으로도 녹록치 않다. 저자 또한 목전에 둔 치료의 고통 때문에 다른 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을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재를 계속 해 나갔다는 사실이 대단했다. 그렇게 연재한 시들이 위로가 될 거라는 희망이, 타인을 거쳐 고통에 허덕이고 있는 내게도 닿아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생일>에 이어 그동안 이름만 들어온 시인들의 시를 많이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이 우선 반가웠다. 시를 많이 읽지 않아 시의 내용은 전혀 모른 채, 시인과 제목만 기억하고 있던 시들을 직접 읽으니 감회가 새로웠다. 유명세에 비해 나에게 감흥을 일으키지 않은 시들도 있었고, 명성답게 마음을 움직이는 시들도 있었다. 그야말로 희망의 다양함이 고루 퍼져 많은 사람들에게 닿기 위해 준비를 마친 시들 같았다. <축복>의 제목의 이면에는 '세상에서 제일 큰 축복은 희망입니다.'라는 뜻이 담겨 있다고 한다. 단순하게 희망만 잔뜩 노래하는 시들로 채워졌다면, 아마 금세 시들해졌을 지도 모른다. 삶의 다양한 굴레를 드러내는 시들을 보며, 왜 희망이 축복일 수밖에 없는지를 여실히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

 

  <생일>을 읽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필요한 부분에만 원문을 참고했고, 번역된 시와 저자의 짤막한 해설, 김점선 화백의 그림을 만끽했다. 그 어울림만으로도 시는 충분히 내게 와 닿았고, 희망이라는 싹이 이렇게 곳곳에서 펼쳐질 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많은 시인들이 자신의 삶의 현장에서 희망을 토로하는 듯한 착각이 일 정도였다. 좋은 구절은 반복해서 읽기도 하고, 책상머리에 써 붙여 놓고 싶은 시들을 만날 때면 흥분이 가라앉지 않았다. 시에 대해서 잘 모른다는 두려움도, 특히나 영미시에 대한 이질감 때문에 가까이 하지 못했다는 낯섦도 모두 잊을 수 있었다. 문학의 한 가운데 존재했던 사람들이 써 내려간 '희망'으로 결속된 시는 앞으로 내가 살아내야 할 삶에 대한 감사가 저절로 흘러나오게 만들었다.

 

  나의 다친 마음을 울컥하게 만들었던 시는 에드거 A. 게스트의 <끝까지 해보라>란 시였다. 특히나 '네가 근심거리로 가득 차 있을 때/희망조차 소용없어 보일지도 모른다./그러나 지금 네가 겪고 있는 일들은/다른 이들도 모두 겪은 일일 뿐이다.' 라는 부분이 나의 마음을 흔들었다. 왈칵 눈물이 나게 하면서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희망을 주는 시였다. 무심코 펼친 페이지에서 마주한 시가 현재의 내 모습을 반영하고 있는 것 같아, 읽을 당시보다 지금이 더 감명 깊게 다가왔다. 그렇게 메모지를 붙여 놓은 시들을 다시 훑어보며, 복잡한 나의 마음을 잠시 잊은 채 시가 주는 위로 속으로 빠져들 수 있었다. 문학으로 위로를 받을 수 있다는 사실과 조금만 손을 뻗으면 나를 다독여 줄 거리가 많다는 것 또한 깨닫는 경험이었다. 마음이 다쳤을 때는 모든 것이 민감하게 작용한다. 그럴 때 시를 만났고, 시로 위로받고 희망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저자가 이 세상에 남겨놓은 선물이라는 생각이 들어 한없는 감사가 인다.

 

 

오탈자

 

5쪽 12째 줄

 

골랐나 봐요. - 문장부호 ” 빠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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핫 라인
루이스 세풀베다 지음, 권미선 옮김 / 열린책들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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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이 출간 될 즈음에 서점에서 책을 읽고 온 기억이 난다. 그때는 서점에서 새 책을 읽고 오는 즐거움에 빠져 있던 터라, 줄거리가 흩어질까 봐 집에 바로 와서 리뷰를 썼다. 그때 쓴 리뷰를 읽어보니, 정말 짧고 줄거리조차도 부족한 내용인 것이 단박에 드러나는데도 솔직함이 배어있어 감회가 새로웠다. 이미 읽은 책을 다시 구입하기가 뭣해 열심히 다른 책을 읽다, 루이스 세풀베다의 작품을 전작하게 되면서 이제야 구입하게 되었다. 얇은 책이라 책이 도착하자마자 읽었고, 기억을 더듬듯 꼼꼼히 읽어나갔다. 두 번째로 읽으니 어렴풋이 내용이 기억나면서도, 약 5년 전에 읽었을 당시에는 무척 생소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도 루이스 세풀베다의 작품을 통해서 남미 문학이 여전히 낯선데, 그의 작품 중에서 처음으로 마주한 작품이었으니 생소할 만도 했을 것이다.

 

  최근에 루이스 세풀베다의 작품을 연달아 읽어서인지, 이미 읽은 작품을 마주하면서도 무척 설다. 어떻게 이야기가 시작될지, 내용에 대한 기억이 희미했기에 어떠한 내용을 담고 있을지 궁금했다. <핫 라인>이 탄생하게 된 배경에는 파타고니아가 있었고, 마푸체 인디오가 등장했다. 저자는 '예민한 후각의 소유자'인 마푸체 인디오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서 <핫 라인>을 쓰기 시작했다고 했다. 저자가 만난 마푸체 인디오와의 짧은 만남으로 <핫 라인>이 탄생했다는 것도,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마푸체 인디오의 활약상이 그 만남에서 비롯되었다는 것도 신선하면서도 강렬했다.

 

  시골 형사 카우카만은 온통 자연으로 둘러싸인 파타고니아에서 가축 도둑을 체포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인디오라는 신분에도 굴하지 않고, 광활한 자연 속에서 가축 도둑을 쫓는 일은 그의 적성에 딱 맞았다. 형사라기보다는 산 속에서 뒹군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문명과는 먼 삶을 살고 있었다. 거칠긴 해도 오랜 경력으로 인해 자신의 일에 자부심을 갖고 있었고 감각도 뛰어났다. 그러던 중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는 칸테라스 장군의 아들을 부상 입히는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카우카만 형사는 가축도둑을 잡는 과정에서 거친 처단을 한 것이었지만, 아버지의 지위 때문에 큰 파장을 몰고 왔다. 그 일로 인해 자연 속에서 가축 도둑을 체포하는 일을 하던 형사는 수도인 산티아고의 성범죄 부서로 좌천된다.

 

  카우카만이 산티아고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것도 여자 형사들만 있는 성범죄 전담반에서. 도시에 도착한 순간부터 숨쉬기가 힘들었을 뿐만 아니라 파타고니아에 두고 온 애마와 장비들과 광활한 자연이 눈에 아른거렸다. 그렇게 자신이 일할 곳을 돌아본 후 하숙집으로 가는 도중, 택시기사 아니타를 만나게 된다. 이미 카우카만의 일이 언론에 보도 된 터라 그녀는 카우카만을 알고 있었다. 그 만남을 계기로 카우카만은 아니타와 점점 가까워지고, 그녀가 깊은 상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상처는 카우카만이 일하고 있던 성범죄 전담반에 찾아 온 한 부부에 의해서였다. <핫 라인>이라는 폰섹스 방을 운영하고 있던 부부는 며칠 전부터 끔찍한 전화가 걸려온다며 카우카만을 찾아왔다. 카우카만은 그 부부가 들려준 테이프를 듣고, 쉽게 간과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직감한다.

 

  카우카만은 폰섹스 방을 운영하는 부부의 말처럼 전화기를 타고 들려오는 소리들이 끔찍하다고 느꼈다. 그렇지만 누군가 꾸며낸 소리라고 생각했고 의도를 짐작할 수 없었다. 그에 대한 해답을 찾아준 것은 아니타였다. 아니타는 그 소리를 듣더니 피노체트 독재 기간 때 행해진 고문소리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당시에 직접 수용소에 있었던 아니타는 그 모든 것을 경험했고, 그곳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다. 카우카만은 아티나의 말로 인해 전화를 걸어온 사람들이 독재기간 때 연관된 사람이라는 것을 추측했다. 하지만 그것이 사실이더라도 더더욱 그 사건을 조사할 수도 없다는 것도 알았다. 일개 형사가 건드리기에는 너무나 큰 거물이었다.

 

  폰섹스 방을 운영하는 부부의 집으로 찾아간 카우카만은 자신을 노리고 있는 사람들을 공격해 한 명을 인질로 잡고 협상에 나선다. 전화를 걸고 카우카만의 목숨을 위협한 것은 칸테라스 장군이 시킨 짓이었다. 칸테라스 장군의 아들도 카우카만에게 앙심을 품고 있었고,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카우카만을 손봐주고 싶어 안달을 부리다 되레 카우카만에게 약점을 드러내고 말았다. 칸테라스 장군은 사람들을 고문한 소리를 통해 자신의 치부를 드러냈을 뿐만 아니라, 카우카만이 협상을 내놓자 덥석 물어 과거의 죄가 방송국의 주파수를 통해 퍼져 나가고 만다. 결정적인 순간에서는 아니타의 수고로 독재 기간에 가족과 연인을 잃은 사람들이 도움을 주었다. 그 이후에 장군이 어떻게 되었는지, 아니타처럼 고통 받는 사람들이 어떻게 됐는지 알려주지 않았지만, 이 일로 인해 그들의 마음 깊은 곳의 상처가 어느 정도 치유되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저자는 짧은 소설을 통해서 칠레의 과거를 드러내는 것에 서슴지 않았으며, 여전히 고통 속에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간접적으로 등장시켜 상처가 씻기지 않았음을 드러냈다. 저자 또한 피노체트 독재로 인해 망명생활을 한 터라 이 소설이 주는 의미가 남달랐을 것이다. 이 소설을 통해 칠레가 가진 과오를 조금이나마 바로잡고 싶은 의도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상처를 가진 사람이 상처를 가진 사람을 보듬어 줄 수 있듯이, 카우카만과 아니타를 비롯한 비슷한 처지를 가진 사람들끼리 좀 더 나은 삶을 위해 노력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으면 한다. 인간이 집단을 떠날 수 없고, 속해있는 위치를 떠나 살 수 없듯이 그 안에서 행해지는 역사의 흔적을 서로 품어줄 수밖에 없다. 역사의 과오가 생명을 위협하고, 인간답게 살지 못하게 했더라도 공존하는 마음을 잃지 않는다면, 지금이 아니더라도 다음 세대를 지나서 언젠가 잘못된 것은 분명히 바로 잡힌다는 사실에 희망을 걸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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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 놀 청소년문학 28
바바라 오코너 지음, 신선해 옮김 / 다산책방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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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내가 관심을 갖고 있는 책만 보기에도 시간이 부족한 세상에, 입 소문을 타고 전해져 오는 책들을 마주하면 몸 둘 바를 모르겠다. 그 책을 읽고 싶기는 하고, 또 책을 구입하자니 경제적으로 부담스러울 때 스스로 그 책이 찾아와주면 너무 고맙다.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이 내게 올 때 다시 한 번 그 고마움을 경험했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찾았나 싶어 뒷면을 열어 인쇄 부수를 보는 순간 놀라고 말았다. 초판이 2008년 10월인데 내게 온 책은 2009년 12월에 발행 된 33쇄 본이었다. 이렇게 많이 찍어낼 정도로 사랑받고 있던 책을 이제라도 읽을 수 있다는 사실이 고마우면서도 입 소문에 절대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경험한 셈이다.

 

  손에 책이 쥐어지는 느낌이 너무 산뜻해 금방 읽을 수 있을 거라는 예감은 빗나가지 않았고, 책 제목처럼 어떻게 하면 완벽하게 개를 훔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 중점을 두고 읽어 나갔다. 갑자기 아빠가 사라져 버리고, 차 안에서 엄마와 남동생과 생활해야 하는 조지나의 관심은 온통 집세를 구하는 것에 맞춰졌다. 집세를 내지 못해서 쫓겨난 조지나의 가족은 아빠를 원망할 틈도 없이 비좁은 차 안에서 생활해야 했고, 엄마는 하루 종일 일하느라 피곤에 절어 있었다. 모든 것이 엉망이라 제대로 된 생활을 해 나가지 못하자 조지나와 동생 토비의 몰골은 점점 흉해져갔다. 학교에서 아이들의 시선과 친한 친구의 따돌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조지나는 어떻게 하면 개를 훔칠 수 있을 것인지에 골몰한다.

 

  그러다 차창으로 날아든 한 장의 전단지를 보게 된다. 오래 된 전단지였는데, 강아지를 찾아주면 500달러의 사례금을 준다는 내용이었다. 그 전단지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조지나는 강아지를 찾아주는 조건으로 충분한 돈을 낼 수 있는 주인을 물색하게 된다. 강아지를 무척 사랑하는 사람이어야 했고 부자여야 했다. 그때부터 조지나의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은 개시되었고, 하루하루 계획을 세우며 행동에 임한다. 그렇게 동생 토비와 함께 강아지를 물색하다 번듯한 집에 살며, 주인에게 무척 사랑받고 있는 강아지를 발견한다. 나름대로의 계획을 통해 그 강아지를 훔치는 데 성공하지만 현실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강아지를 숨겨둘 곳부터 먹이 등 미처 생각하지 못한 문제들이 따라왔다. 그럼에도 조지나는 포기하지 않고, 소신껏 뒤처리를 해 나간다.

 

  조지나는 꿈꾸고 또 꿈꾸었다. 강아지를 훔치면 전단지가 붙을 것이고, 강아지를 찾아주는 척 해서 500달러의 사례금을 받아 집을 구할 수 있을 거라고 말이다. 하지만 강아지를 훔친 지 이틀이 지나도록 전단지는 보이지도 않았고, 급기야 개 주인하고 맞닥뜨려 강아지를 찾아주겠다는 어처구니없는 약속을 하고 만다. 열한 살 소녀인 조지아가 강아지를 훔쳐서 집을 구하겠다는 생각 자체는 허술할 뿐만 아니라 황당하기까지 했다. 차에서의 생활이 지긋지긋하고, 조지나의 가족에게 처한 상황이 너무 좋지 않았기에 조지나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방법이 그것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점점 꼬여가는 현실 앞에서 조지나의 심경은 더 복잡해져만 갔다.

 

  자신이 훔친 강아지 윌리의 주인은 강아지를 끔찍이 아꼈지만 돈이 없었다. 그 모든 것을 지켜보는 조지나는 초조해지면서도 점점 양심의 가책을 받게 된다. 나쁜 짓을 했고 강아지 주인인 카밀라 아줌마를 슬프게 만들었다는 사실 앞에 사례금 따위는 이미 떠나가 버렸다. 거기다 윌리를 숨겨 둔 숲의 허름한 집에서 만난 무키 아저씨와의 대면 때문에 더 힘들었다. 무키 아저씨는 노숙자의 행색을 하면서도 행복해 보이는 사람이었다. 그런 무키 아저씨에게 윌리의 존재를 얼버무리긴 했지만, 조지나의 부추김으로 카밀라 아줌마가 붙인 전단지가 붙기 전부터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조지나를 질책하지 않았으며, 비유적인 말로 충고를 했을 뿐만 아니라 몰래 차동차를 고쳐주기도 한다. 그런 상황에서 조지나는 결정을 내려야 했다. 자신이 한 행동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그리고 집을 구하겠다는 이기적인 생각 때문에 다른 사람이 고통 받는 것을 지켜보는 것은 힘든 일이었기 때문이다.

 

  조지나는 윌리를 카밀라 아줌마네 집으로 데려다 준다. 너무나 사랑스런 강아지였기에 정이 잔뜩 들어 버린 터라 윌리의 귀향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카밀라 아줌마에게 가서 모든 것을 사실대로 고백한다. 아줌마는 잘못을 되짚어 주긴 했지만 그런 조지나를 너그러운 마음으로 품어준다. 그 부분에서 나는 헛된 망상을 꿈꾸었다. 모든 사정을 다 들은 카밀라 아줌마가 조지나네와 함께 살 거라는 희망. 그러나 그건 나의 바람일 뿐이었고, 현실은 냉정하지만 희망적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조지나의 엄마는 살 집을 구했고, 고생은 그것으로 끝이 났다. 조지나는 지금껏 자신과 함께 한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을 적은 노트에 개를 훔치는 것은 좋은 아이디어가 아니라는 글을 적음으로 행복감에 젖은 채 황당한 계획은 마무리 된다.

 

  조지나에게 처해진 현실이 얼마나 처절했는지, 학교생활과 내면을 보면서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엄마와 동생, 친구에게도 솔직하게 털어 놓을 수 없는 상황에서 집을 구하기 위해 강아지를 훔칠 생각을 한 조지아가 대견해 보이기까지 했다. 나라면 그런 상황에서 내면의 벽을 친 채 모든 것을 단념하고 현실에서 도피해 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조지나는 도망가지 않았고, 현실을 철저히 받아들였고 잘못 된 방법일지언정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았다. 그리고 그 경험을 통해 많은 것을 깨닫고, 잘못을 뉘우쳤으며, 다시 안정적으로 돌아온 현실에 만족했다. 조지나는 강한 아이었다. 허점투성인 그 아이의 노트를 볼 때부터 실패로 돌아갈 것이라는 것을 예감했지만 더 값진 것이 돌아올 거라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 경험이 그 아이의 내면에 단단히 뿌리박고 자리해, 건강하고 올 곧게 자라주길 바라는 마음이다. 어쨌든 팍팍한 현실 속에서 최선을 다한 조지나가 무척 기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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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외
루이스 세풀베다 지음, 권미선 옮김 / 열린책들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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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책장에 쌓아둔 루이스 세풀베다의 책을 다시 꺼냄으로써 저자에 대한 재발견이 이루어지고 있는 요즘이다. 모든 작품이 소설인 줄 알고 있던 나의 무지를 깨치듯 자전적 에세이와 기행문, 짧은 이야기들이 또 다른 매력을 뿜어내고 있었다. 한 작가의 소설과 에세이가 모두 좋은 경우에 독자는 풍부한 문학의 세계를 느낄 수 있어, 이런 작가를 만나면 혼자만 간직하고 싶은 욕심까지 들기 마련이다. 그러면서 독서를 통한 발견의 기쁨을 누리게 되는 것이고, 이런 행위를 멈출 수 없는 것이다. 루이스 세풀베다의 책을 접함으로써 생각의 뻗어감이 마냥 즐거울 정도로 현재 나의 독서는 무척 즐겁다.

 

  <소외>는 저자가 소설가로써 뿐만이 아닌 사회 비평가, 다큐를 다루는 면모까지 지니고 있다는 것을 드러나게 해준다. 제목처럼 소외된 것들에 대한 서른다섯 편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소외라는 사전적인 의미를 알더라도, 막상 하나의 이미지로 그려지지 않는 광범위함에 갈피를 잡을 수 없게 된다. 책은 저자가 유대인 수용소를 방문해서 수용소의 한쪽 구석의 돌멩이에서 처절한 글을 보게 되는 것으로 시작된다. <나는 여기에 있었고, 아무도 내 이야기를 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문장을 보는 순간, 이 책이 어떠한 이야기로 채워져 있을지 짐작할 수 있었다. 세상에 소외된 것이 얼마나 많은지 깨달을 수 있었고, 저자가 쓴 이야기 이외에도 수많은 소외가 여전히 존재하며, 그런 소외를 관심으로 돌리는 것이 우리의 할 일임을 조금씩 인식해 갔다.

 

  많은 페이지를 할애하지 않는 짧은 이야기들은 분명 존재하고, 존재해 나가는 사람들의 단상이었다. 단지 그들의 삶에 관심 갖지 않았으며, 함께 뒤엉키기를 거부했을 뿐이다. 자신의 인생조차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면서 타인의 삶에 어떻게 관여할 수 있냐는 핑계도 소외된 이야기들 앞에서는 부끄럽기만 했다. 너무나 소소한 사람들의 이야기라서 입김을 불면 책장의 글들이 사라짐과 동시에 그들의 이야기도 뿔뿔이 흩어져 버릴 것만 같았다. 그런 이야기들이 소소하더라도 행복하고, 기쁨에 넘친 이야기들이 많았으면 나의 마음이 이토록 휑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저자가 그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대로 옮겼듯, 지켜보며 시시각각 변하는 감정의 향연에 동참할 뿐이었다.

 

  책을 읽는 동안에는 세계 각지의 이야기를 흡수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존재하는 이야기들을 신기한 듯 바라보았고, 곳곳에서 펼쳐지는 다양한 사람들의 삶의 향연을 느끼기에 바빴다. 너무 광범위한 사람들의 이야기라 지명의 낯섦에 이질감을 느끼기도 했지만, 그만큼 내가 알지 못한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데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짧은 단락으로 이루어진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들은 중간쯤 들어서, 정치적인 주제로 글이 길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 흐름 속에는 저자의 다른 작품마다 녹아있는 또 다른 에피소드도 담겨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덮는 순간, 이야기들은 모두 흩어져 버렸다. 소외된 이야기를 읽음으로써 소외가 해소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분명 관심을 갖고 불법적으로 자행되는 행위에 대한 제재가 필요한 이야기들도 많았다. 환경파괴에 대해, 공동으로 이뤄가야 할 자연에 대해, 인간적인 대우를 받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그랬다. 그것들을 지켜보면서도 먹먹해지는 가슴을 부여잡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다. 누구의 사연을 올릴 수 있을까. 어떤 사람들의 이야기를 언급하고, 그런 자들을 돌아봐 달라고 호소해야 할까. 흩어져 버린 사람들의 이야기 앞에서 나 역시 소외당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아무도 내 이야기를 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돌멩이에 적힌 문구처럼, 내가 잊힌다는 사실 앞에서 두려움만이 엄습해왔다. 누군가에게 기억되고, 물질의 풍요가 아닌 질적인 풍요로움을 간직하며 살고 싶었던 나의 바램들은 한구석으로 밀려나 버렸다. 주목받지 못해서 서글프다는 마음보다, 이것이 인생이고 삶이라는 관념이 밀려오자 잠시 긴장의 끊을 놓쳐 버린 것 같다. 그것을 놓쳐 버렸다고 해서 뒤처진 자가 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소외된 사람들의 이야기 앞에 한 없이 마음이 서글퍼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옮긴이는 저자가 '역사에 길이 남을 영웅보다는 제도권 밖에서 진한 인간미를 풍기는 일상생활 속의 영웅들을 더 선호했다.' 고 말했다. 이 책 속에 담긴 사람들이야말로 제도권 밖에서 머무르고 있었고, 같은 제도권 밖에서 살아가고 있는 내가 그들의 이야기를 만나니 무엇을 해야 할지 확실해진 기분이다. 제도권 안으로 들어오려고 기를 쓰기보다, 제도권 밖에서 나와 같은 처지의 사람들과 보듬으며 살아가는 것이 내게 주어진 삶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산산이 흩어져 버린 이야기들을 통해서 나의 이 다짐까지 흩어져 버릴까 살짝 걱정이 되긴 하지만, 내가 알지 못했던 이야기를 그러모았다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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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언
산도르 마라이 지음, 김인순 옮김 / 솔출판사 / 200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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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산도르 마라이의 <열정>을 읽고, 저자의 흔적을 더 느끼고 싶어서 <유언>을 구입했다. <열정>처럼 하룻밤 이야기를 담고 있어 비슷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작년 9월에 구입해놓고 여태껏 방치하다 순식간에 읽어 버렸다. 이렇게 무엇에 홀린 듯 읽게 되는 책들을 만날 때마다, 책장에 묵혀둔 시간들이 민망할 때가 많다. 아직 소화할 단계에 머무르지 못해 묵혀둔 책들도 많지만, 너무나 많은 책들의 쏟아짐에 정신을 못 차리고 쌓아두는 경우가 더 많다. 신간에 정신이 팔리다가도 나의 관심사대로 모아둔 책들을 종종 꺼내서 읽게 되면, 내 책장의 책들이 참 풍부하다는 생각을 다시 한 번 하게 된다.

 

  <유언>을 읽고 나서, 세계 문학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이미 내 책장 안에 열려 있음을 깨달았다. 손만 뻗으면 각 나라의 대표 작가를 만날 수 있고, 마음껏 여행할 수 있다는 사실이 무척 신기했다. <유언>을 읽을 때는 소설의 배경이 되는 나라의 특성까지 생각하며 읽으며 비슷한 나라의 저자를 찾아보기도 했다. 그런 독서를 하며 책장에서 연관된 책을 찾아 볼 때는 감당하기 힘들만큼 쌓아둔 책들이 고마워지곤 한다. 그러나 이런 마음이 끝까지 갈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산도르 마라이라는 작가에 관심을 두고, 두 번째 작품을 손에 쥐며, 이 작품이 괜찮으면 전작을 하겠노라고 마음먹었건만. <유언>의 주요인물인 라요스의 방자함에 저자까지 야속해지고 말았다.

 

  <슈피겔>지는 '<유언>은 <열정>에서처럼 기다림과 좌절의 변증법을 보여준다.' 라고 했다. 한 줄의 의미가 이토록 명확하게 다가온 적이 없을 정도로 주인공 에스터가 기다렸던 라요스는 좌절을 넘어 분노를 살 만한 행동을 서슴없이 해대고 있었다. 이십 년 만에 만나는 옛 연인인 라요스의 전보는 에스터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많은 표현을 하지 않고, 어떠한 원망도 없었지만 내심 그녀를 만나러 온다는 라요스의 의중이 무엇일까 설렘으로 기다렸던 것이 사실이다. 왜 이십년 간 연락이 닿지 않았는지, 그와 어떠한 관계 속에서 헤어지게 되었는지는 라요스를 기다리는 가운데, 모든 사연은 무덤덤하면서도 낱낱이 펼쳐졌다.

 

  라요스는 에스터의 오빠의 친구로, 둘은 깊이 사랑했었다. 그러나 라요스는 언니와 결혼해서 떠나 버렸고, 그 이후로 친척인 누누와 함께 작은 집을 가꾸며 살아가고 있었다. 결혼할 기회가 있었음에도 결혼하지 않고, 누누와 근근이 살아가는 에스터는 중년에 이르렀고 평범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라요스가 방문하겠다는 전보를 치기 전까지, 그리고 조카의 입을 통해 듣게 된 세 통의 편지에 관한 이야기까지 에스터에게 이런 잔인한 일 닥칠 거라 생각하지 못했다. 책을 읽어가면서 짜증을 다스리지 못해 한숨을 쉬게 된 책이 없었다면, 아마 이 책이 최초가 될 것이다. 짧은 책임에도 간결한 언어로 인간의 내면을 유희적으로 엮어가는 가운데, 에스터와 라요스의 과거와 편지에 대한 에피소드는 너무나 진부하게 펼쳐졌다. 무엇보다도 이십년 만에 연인 앞에 나타나 뻔뻔함을 넘어서는 라요스 덕분에 나의 짜증은 배가 되고 말았다.

 

  이십년 만에 옛 연인이 찾아온다고 하면 어느 누가 설레지 않겠는가. 또한 무슨 말을 하러 오는지 온갖 추측을 하게 되고, 지나온 세월을 되돌릴 수 있다는 희망을 품는다고 해서 누가 비난을 던지겠는가. 에스터의 고백을 통해 라요스가 거짓말쟁이에다 위선적이고, 얼마나 가식적인 허풍선인지를 알게 되었지만 여전히 그를 사랑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더라도 언니와 결혼해서 떠난 라요스를 에스터는 용서하고 있을까. 용서를 떠나 과연 그를 이해하며, 다시 한 번 이야기 할 기회가 생길 때 둘은 소통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그렇게 지난 세월을 추억하며 라요스와 대화할 시간을 고대하고 고대했는데, 그의 입에서 들려오는 내용은 지난 과거의 용서와 화해, 앞으로의 행보가 아닌, 에스터가 살고 있는 집의 물질적인 가치에 대한 질문이었다.

 

  에스터는 조카를 통해 라요스가 언니와 결혼식 전에 에스터에게 진심을 담은 편지를 쓴 것을 알게 되었다. 에스터를 질투 한 언니가 그 편지를 빼돌렸고, 결국 라요스는 언니와 결혼하고 에스터 곁을 떠나 버렸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 어긋난 운명에 몸부림쳐질 정도로 답답했는데, 나를 짜증스럽게 만든 것은 라요스의 태도였다. 가보로 내려오는 반지를 빼돌린 것도 모자라 뻔뻔하게 그것을 찾으러 왔으며, 에스터의 마지막 보루인 작은 집을 차지하러 왔다. 그것도 부족해 에스터에게 오히려 빚진 것처럼 행세했고, 새로운 연인의 빚 때문에 에스터를 찾아온 것이다. 오히려 전달되지 않은 편지에 관해서만 언급하고 말았더라면, 어긋나버린 운명에 한탄이라고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전달되지 않는 편지는 분노조차 일으키지 않았고, 라요스의 밑바닥만 더 드러냈으며, 그런 라요스를 위해 모든 것을 줘버리는 에스터를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곧 죽을 것을 예감하고, 유언처럼 라요스가 해달라는 것을 모두 해 줘버린 에스터에게 남은 것은 무엇일까. 징후조차 보이지 않는 죽음을 염두에 두었다고 해도 세상에 관해 모든 것을 초탈한 듯, 홀연히 라요스에게 집을 넘기는 모습이 답답했다. 잇속을 챙겨서 자신의 앞길을 닦아놓아도 시원찮을 판에, 해달란 대로 모두 해주는 에스터를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라요스와 에스터가 함께 할 수 없다는 사실은 확연히 드러났고, 둘은 너무나 많은 시간을 다르게 살아왔기에 옛 마음을 다시 살린다는 것도 허무맹랑했다. 어떤 식으로 결론이 내려지던지 간에 서로가 사랑했다는 기억만 부여안은 채, 둘이 하나 되는 것은 애초부터 무리였다. 그렇더라도 오랜만의 해후가 이런 식으로 이뤄지리라 생각하지 않았기에, 소설 속에 녹아 있는 또 다른 가치를 떠나 답답하고 짜증스러운 마음을 다스릴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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