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언
산도르 마라이 지음, 김인순 옮김 / 솔출판사 / 2001년 12월
평점 :
절판


  산도르 마라이의 <열정>을 읽고, 저자의 흔적을 더 느끼고 싶어서 <유언>을 구입했다. <열정>처럼 하룻밤 이야기를 담고 있어 비슷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작년 9월에 구입해놓고 여태껏 방치하다 순식간에 읽어 버렸다. 이렇게 무엇에 홀린 듯 읽게 되는 책들을 만날 때마다, 책장에 묵혀둔 시간들이 민망할 때가 많다. 아직 소화할 단계에 머무르지 못해 묵혀둔 책들도 많지만, 너무나 많은 책들의 쏟아짐에 정신을 못 차리고 쌓아두는 경우가 더 많다. 신간에 정신이 팔리다가도 나의 관심사대로 모아둔 책들을 종종 꺼내서 읽게 되면, 내 책장의 책들이 참 풍부하다는 생각을 다시 한 번 하게 된다.

 

  <유언>을 읽고 나서, 세계 문학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이미 내 책장 안에 열려 있음을 깨달았다. 손만 뻗으면 각 나라의 대표 작가를 만날 수 있고, 마음껏 여행할 수 있다는 사실이 무척 신기했다. <유언>을 읽을 때는 소설의 배경이 되는 나라의 특성까지 생각하며 읽으며 비슷한 나라의 저자를 찾아보기도 했다. 그런 독서를 하며 책장에서 연관된 책을 찾아 볼 때는 감당하기 힘들만큼 쌓아둔 책들이 고마워지곤 한다. 그러나 이런 마음이 끝까지 갈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산도르 마라이라는 작가에 관심을 두고, 두 번째 작품을 손에 쥐며, 이 작품이 괜찮으면 전작을 하겠노라고 마음먹었건만. <유언>의 주요인물인 라요스의 방자함에 저자까지 야속해지고 말았다.

 

  <슈피겔>지는 '<유언>은 <열정>에서처럼 기다림과 좌절의 변증법을 보여준다.' 라고 했다. 한 줄의 의미가 이토록 명확하게 다가온 적이 없을 정도로 주인공 에스터가 기다렸던 라요스는 좌절을 넘어 분노를 살 만한 행동을 서슴없이 해대고 있었다. 이십 년 만에 만나는 옛 연인인 라요스의 전보는 에스터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많은 표현을 하지 않고, 어떠한 원망도 없었지만 내심 그녀를 만나러 온다는 라요스의 의중이 무엇일까 설렘으로 기다렸던 것이 사실이다. 왜 이십년 간 연락이 닿지 않았는지, 그와 어떠한 관계 속에서 헤어지게 되었는지는 라요스를 기다리는 가운데, 모든 사연은 무덤덤하면서도 낱낱이 펼쳐졌다.

 

  라요스는 에스터의 오빠의 친구로, 둘은 깊이 사랑했었다. 그러나 라요스는 언니와 결혼해서 떠나 버렸고, 그 이후로 친척인 누누와 함께 작은 집을 가꾸며 살아가고 있었다. 결혼할 기회가 있었음에도 결혼하지 않고, 누누와 근근이 살아가는 에스터는 중년에 이르렀고 평범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라요스가 방문하겠다는 전보를 치기 전까지, 그리고 조카의 입을 통해 듣게 된 세 통의 편지에 관한 이야기까지 에스터에게 이런 잔인한 일 닥칠 거라 생각하지 못했다. 책을 읽어가면서 짜증을 다스리지 못해 한숨을 쉬게 된 책이 없었다면, 아마 이 책이 최초가 될 것이다. 짧은 책임에도 간결한 언어로 인간의 내면을 유희적으로 엮어가는 가운데, 에스터와 라요스의 과거와 편지에 대한 에피소드는 너무나 진부하게 펼쳐졌다. 무엇보다도 이십년 만에 연인 앞에 나타나 뻔뻔함을 넘어서는 라요스 덕분에 나의 짜증은 배가 되고 말았다.

 

  이십년 만에 옛 연인이 찾아온다고 하면 어느 누가 설레지 않겠는가. 또한 무슨 말을 하러 오는지 온갖 추측을 하게 되고, 지나온 세월을 되돌릴 수 있다는 희망을 품는다고 해서 누가 비난을 던지겠는가. 에스터의 고백을 통해 라요스가 거짓말쟁이에다 위선적이고, 얼마나 가식적인 허풍선인지를 알게 되었지만 여전히 그를 사랑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더라도 언니와 결혼해서 떠난 라요스를 에스터는 용서하고 있을까. 용서를 떠나 과연 그를 이해하며, 다시 한 번 이야기 할 기회가 생길 때 둘은 소통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그렇게 지난 세월을 추억하며 라요스와 대화할 시간을 고대하고 고대했는데, 그의 입에서 들려오는 내용은 지난 과거의 용서와 화해, 앞으로의 행보가 아닌, 에스터가 살고 있는 집의 물질적인 가치에 대한 질문이었다.

 

  에스터는 조카를 통해 라요스가 언니와 결혼식 전에 에스터에게 진심을 담은 편지를 쓴 것을 알게 되었다. 에스터를 질투 한 언니가 그 편지를 빼돌렸고, 결국 라요스는 언니와 결혼하고 에스터 곁을 떠나 버렸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 어긋난 운명에 몸부림쳐질 정도로 답답했는데, 나를 짜증스럽게 만든 것은 라요스의 태도였다. 가보로 내려오는 반지를 빼돌린 것도 모자라 뻔뻔하게 그것을 찾으러 왔으며, 에스터의 마지막 보루인 작은 집을 차지하러 왔다. 그것도 부족해 에스터에게 오히려 빚진 것처럼 행세했고, 새로운 연인의 빚 때문에 에스터를 찾아온 것이다. 오히려 전달되지 않은 편지에 관해서만 언급하고 말았더라면, 어긋나버린 운명에 한탄이라고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전달되지 않는 편지는 분노조차 일으키지 않았고, 라요스의 밑바닥만 더 드러냈으며, 그런 라요스를 위해 모든 것을 줘버리는 에스터를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곧 죽을 것을 예감하고, 유언처럼 라요스가 해달라는 것을 모두 해 줘버린 에스터에게 남은 것은 무엇일까. 징후조차 보이지 않는 죽음을 염두에 두었다고 해도 세상에 관해 모든 것을 초탈한 듯, 홀연히 라요스에게 집을 넘기는 모습이 답답했다. 잇속을 챙겨서 자신의 앞길을 닦아놓아도 시원찮을 판에, 해달란 대로 모두 해주는 에스터를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라요스와 에스터가 함께 할 수 없다는 사실은 확연히 드러났고, 둘은 너무나 많은 시간을 다르게 살아왔기에 옛 마음을 다시 살린다는 것도 허무맹랑했다. 어떤 식으로 결론이 내려지던지 간에 서로가 사랑했다는 기억만 부여안은 채, 둘이 하나 되는 것은 애초부터 무리였다. 그렇더라도 오랜만의 해후가 이런 식으로 이뤄지리라 생각하지 않았기에, 소설 속에 녹아 있는 또 다른 가치를 떠나 답답하고 짜증스러운 마음을 다스릴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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