핫 라인
루이스 세풀베다 지음, 권미선 옮김 / 열린책들 / 2005년 5월
평점 :
품절


  이 책이 출간 될 즈음에 서점에서 책을 읽고 온 기억이 난다. 그때는 서점에서 새 책을 읽고 오는 즐거움에 빠져 있던 터라, 줄거리가 흩어질까 봐 집에 바로 와서 리뷰를 썼다. 그때 쓴 리뷰를 읽어보니, 정말 짧고 줄거리조차도 부족한 내용인 것이 단박에 드러나는데도 솔직함이 배어있어 감회가 새로웠다. 이미 읽은 책을 다시 구입하기가 뭣해 열심히 다른 책을 읽다, 루이스 세풀베다의 작품을 전작하게 되면서 이제야 구입하게 되었다. 얇은 책이라 책이 도착하자마자 읽었고, 기억을 더듬듯 꼼꼼히 읽어나갔다. 두 번째로 읽으니 어렴풋이 내용이 기억나면서도, 약 5년 전에 읽었을 당시에는 무척 생소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도 루이스 세풀베다의 작품을 통해서 남미 문학이 여전히 낯선데, 그의 작품 중에서 처음으로 마주한 작품이었으니 생소할 만도 했을 것이다.

 

  최근에 루이스 세풀베다의 작품을 연달아 읽어서인지, 이미 읽은 작품을 마주하면서도 무척 설다. 어떻게 이야기가 시작될지, 내용에 대한 기억이 희미했기에 어떠한 내용을 담고 있을지 궁금했다. <핫 라인>이 탄생하게 된 배경에는 파타고니아가 있었고, 마푸체 인디오가 등장했다. 저자는 '예민한 후각의 소유자'인 마푸체 인디오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서 <핫 라인>을 쓰기 시작했다고 했다. 저자가 만난 마푸체 인디오와의 짧은 만남으로 <핫 라인>이 탄생했다는 것도,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마푸체 인디오의 활약상이 그 만남에서 비롯되었다는 것도 신선하면서도 강렬했다.

 

  시골 형사 카우카만은 온통 자연으로 둘러싸인 파타고니아에서 가축 도둑을 체포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인디오라는 신분에도 굴하지 않고, 광활한 자연 속에서 가축 도둑을 쫓는 일은 그의 적성에 딱 맞았다. 형사라기보다는 산 속에서 뒹군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문명과는 먼 삶을 살고 있었다. 거칠긴 해도 오랜 경력으로 인해 자신의 일에 자부심을 갖고 있었고 감각도 뛰어났다. 그러던 중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는 칸테라스 장군의 아들을 부상 입히는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카우카만 형사는 가축도둑을 잡는 과정에서 거친 처단을 한 것이었지만, 아버지의 지위 때문에 큰 파장을 몰고 왔다. 그 일로 인해 자연 속에서 가축 도둑을 체포하는 일을 하던 형사는 수도인 산티아고의 성범죄 부서로 좌천된다.

 

  카우카만이 산티아고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것도 여자 형사들만 있는 성범죄 전담반에서. 도시에 도착한 순간부터 숨쉬기가 힘들었을 뿐만 아니라 파타고니아에 두고 온 애마와 장비들과 광활한 자연이 눈에 아른거렸다. 그렇게 자신이 일할 곳을 돌아본 후 하숙집으로 가는 도중, 택시기사 아니타를 만나게 된다. 이미 카우카만의 일이 언론에 보도 된 터라 그녀는 카우카만을 알고 있었다. 그 만남을 계기로 카우카만은 아니타와 점점 가까워지고, 그녀가 깊은 상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상처는 카우카만이 일하고 있던 성범죄 전담반에 찾아 온 한 부부에 의해서였다. <핫 라인>이라는 폰섹스 방을 운영하고 있던 부부는 며칠 전부터 끔찍한 전화가 걸려온다며 카우카만을 찾아왔다. 카우카만은 그 부부가 들려준 테이프를 듣고, 쉽게 간과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직감한다.

 

  카우카만은 폰섹스 방을 운영하는 부부의 말처럼 전화기를 타고 들려오는 소리들이 끔찍하다고 느꼈다. 그렇지만 누군가 꾸며낸 소리라고 생각했고 의도를 짐작할 수 없었다. 그에 대한 해답을 찾아준 것은 아니타였다. 아니타는 그 소리를 듣더니 피노체트 독재 기간 때 행해진 고문소리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당시에 직접 수용소에 있었던 아니타는 그 모든 것을 경험했고, 그곳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다. 카우카만은 아티나의 말로 인해 전화를 걸어온 사람들이 독재기간 때 연관된 사람이라는 것을 추측했다. 하지만 그것이 사실이더라도 더더욱 그 사건을 조사할 수도 없다는 것도 알았다. 일개 형사가 건드리기에는 너무나 큰 거물이었다.

 

  폰섹스 방을 운영하는 부부의 집으로 찾아간 카우카만은 자신을 노리고 있는 사람들을 공격해 한 명을 인질로 잡고 협상에 나선다. 전화를 걸고 카우카만의 목숨을 위협한 것은 칸테라스 장군이 시킨 짓이었다. 칸테라스 장군의 아들도 카우카만에게 앙심을 품고 있었고,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카우카만을 손봐주고 싶어 안달을 부리다 되레 카우카만에게 약점을 드러내고 말았다. 칸테라스 장군은 사람들을 고문한 소리를 통해 자신의 치부를 드러냈을 뿐만 아니라, 카우카만이 협상을 내놓자 덥석 물어 과거의 죄가 방송국의 주파수를 통해 퍼져 나가고 만다. 결정적인 순간에서는 아니타의 수고로 독재 기간에 가족과 연인을 잃은 사람들이 도움을 주었다. 그 이후에 장군이 어떻게 되었는지, 아니타처럼 고통 받는 사람들이 어떻게 됐는지 알려주지 않았지만, 이 일로 인해 그들의 마음 깊은 곳의 상처가 어느 정도 치유되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저자는 짧은 소설을 통해서 칠레의 과거를 드러내는 것에 서슴지 않았으며, 여전히 고통 속에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간접적으로 등장시켜 상처가 씻기지 않았음을 드러냈다. 저자 또한 피노체트 독재로 인해 망명생활을 한 터라 이 소설이 주는 의미가 남달랐을 것이다. 이 소설을 통해 칠레가 가진 과오를 조금이나마 바로잡고 싶은 의도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상처를 가진 사람이 상처를 가진 사람을 보듬어 줄 수 있듯이, 카우카만과 아니타를 비롯한 비슷한 처지를 가진 사람들끼리 좀 더 나은 삶을 위해 노력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으면 한다. 인간이 집단을 떠날 수 없고, 속해있는 위치를 떠나 살 수 없듯이 그 안에서 행해지는 역사의 흔적을 서로 품어줄 수밖에 없다. 역사의 과오가 생명을 위협하고, 인간답게 살지 못하게 했더라도 공존하는 마음을 잃지 않는다면, 지금이 아니더라도 다음 세대를 지나서 언젠가 잘못된 것은 분명히 바로 잡힌다는 사실에 희망을 걸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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