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과 불꽃과 나의 사체
오츠이치 지음, 김수현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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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어린시절, 나의 여름은 논 기억 뿐이다. 공부는 팽개치고 소꿉놀이, 물놀이, 봉숭아 물 들이기 등 어떻게 하면 밖에서 재미있게 놀 수 있을까 그런 연구만 한 것 같다. 그런데 이 책을 읽다가 나의 여름 추억 한가지가 섬뜩하게 다가오고 말았다. 사건의 발단이 된 나무위의 아지트 때문이였다. 너무나 평범한 나무였지만 그 평범함은 어느 누구에게나 다가올 수 있었기에 더 섬뜩했다. 어렸을 때 시골에서 자랐다면 한번쯤은 나무 위를 올라가 봤을 것이다. 나 또한 동네 동생과 자주 오르던 야트막하고 가지가 편안한 소나무를 한그루 알고 있어서 자주 오르곤 했었는데, 그 나무 위에서 누군가를 밀어 버리고 싶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할 수 조차 없었다). 그러나 야요이는 사쓰키를  밀어 버렸다. 자기 오빠를 좋아한다는 이유 만으로.

 

  단순히 사건의 발단이 된 곳이 나무위이고 시골이라는 데에서 오는 공통점으로 섬뜩했던 것만은 아니다. 책 속의 배경이 내가 자주 오르던 나무와 비슷했다고 해도 내가 놀랬던 건 긴장감 때문이였다. 책 속의 주인공들은 어린 아이들이다. 그렇기에 충동적인 질투심에 야요이가 사쓰키를 밀어 버렸다고는 하지만 사쓰키의 사체를 대하는 야요이와 켄 남매는 어린애 답지 않은 모습을 보인다. 순간 겁을 먹고 사스끼의 죽음을 숨기려는 마음은 이해가 가나 너무도 태연한 켄의 모습과 심리는 섬뜩할 수 밖에 없었다. 아무리 살펴도 사쓰키의 시체를 숨기는 일에 즐거움을 느낀다고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어린 아이들이 사체를 숨기는 일은 한계가 있을 터, 긴장감 있게 흘러가는 어린 남매의 사체 숨기기는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순간순간의 위기와 대상의 낯섬이 때로는 부족하게 다가 오기도 했지만 저 아이들의 죄를 숨기기도 전에 더 큰 위험앞에 서 있는 그들을 보면서 여운은 더욱 더 으스스하게 남았다.

 

  이책에는 '여름과 불꽃과 나의 사체'외에 '유코'라는 단편이 실려 있었는데 전편에 비하면 무난하게 흘러 간다고 생각했다. 식모로 들어온 키네요의 시각으로 펼쳐지는 도리고에가의 모습은 평범했다. 단, 아직 한번도 본적이 없는 마사요시의 부인 유코를 제외 한다면 말이다. 키네요는 식모로 들어왔지만 다정다감한 주인 때문에 편안하게 보낼 수 있었는데, 갈수록 유코에 대한 의문은 증폭되어 가고 자신만의 추리를 해가며 유코를 의심하게 된다. 키요네는 분명 주인이, 없는 부인을 대하며 그리움을 달래는 것이라 생각했다. 집에서 멀지않는 대밭의 무덤이며, 사모님은 2년전에 돌아가셨다는 주변 이야기도 그렇고, 키네요는 주인이 정상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런 주인을 보며 키네요는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궁금증도 일고 주인과 유코의 실체를 알기 위해서 주인의 작업실에 들어 갔다가 유코라고 불리우는 인형을 본 것이다. 키네요는 슬픔에 빠진다. 또한 주인을 구하고 싶다. 그래서 주인이 멀리 간 사이에 키네요는 인형을 불태워 버리고 만다. 마사요시가 돌아왔지만 이미 늦어 버렸다. 인형이 아닌 진짜 사람 유코는 불에 타서 죽은 후다. 마사요시가 이상한 것이 아니라 키네요가 집에서 열리는 열매를 먹고 환각상태를 일으킨 것이다. 그래서 아픈 유코를 인형으로 밖에 볼 수 없었다.

 

  전편에 비하면 후편은 잔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기이하면서도 평범한 이야기는 반전을 만나면서 180도 달라지는 양상을 보였다. 도저히 17세의 나이에 썼다고 믿겨지지 않는 이야기 들이다. 전편에서 어린남매의 시선도 그렇고 반전을 가미하는 '유코'에서도 그렇고, 'zoo'를 먼저 읽고 이 책을 대했지만 저자는 이런 장르에 탁월한 감각이 있는 것 같다. 'zoo'는 10편이나 되는 단편이 있었고 끔찍한 모습도 많아 우울감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였는데, 이 책은 초기작 두편이 실려 있어 저자의 분위기를 느끼기에 충분했던 것 같다. '여름과 불꽃과 나의 사체'에서는 심리묘사와 탄탄한 구성이 돋보여 책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흡인력을 가지고 있었다. 17세의 저자의 부족함도 조금은 엿보였지만 나의 사체를 바라보는 사쓰키의 시선을 따라가며, 나의 사체는 어디에 있는지 한순간도 긴장감을 늦출 수 없었다. 너무나 태연하게 흘러갔기에 그들이 들키지 않길 바라는 마음까지 들었으니 저자 능력에 감탄을 보태도 부족하지 않으리라. '유코' 또한 전편에 비하면 소박 했지만 역시 여운이 길게 남는 이야기였다. 한편의 기담 같아서 오래도록 생각나는 분위기의 흐름은 전편과의 다른 분위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분명, 이런 장르의 책을 좋아하지 않는다. 'zoo'를 읽고 이질감에 몸을 떤 기억이 나는데 한 작가의 손에서 다른 분위기의 이야기를 읽을 수 있었던 '여름과 불꽃과 나의 사체'는 색다르게 다가왔다. 가끔은 나의 호기심을 밀어내는 장르도 읽어 봐야 겠다는 생각이 드는 책이였다. 이 여름, 오츠이치의 책을 읽는다면 순간이나마 더위를 이길 수 있으리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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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7-08-27 15: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태극취호님, 리뷰 당선 축하합니다. 오랜만에 들렀어요.^^

순오기 2007-08-27 17: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린시절, 나의 여름은 논 기억 뿐이다." 놀았던 기억 뿐이라는 말인데, '벼가 자라는 논(?)' 잠시 착각했습니다~ㅎㅎ 알라디너들의 리뷰를 통해 관심 밖의 책들을 만나는 것, 참 즐겁습니다. 이 책도 그런 즐거움을 선사하셨기에 감사 ^*^
이주의 리뷰로 뽑히신 것 축하합니다!

안녕반짝 2007-08-27 2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알라딘에서 리뷰에 뽑히다니. 꿈의 마일리지를 받았어요.. 너무 신기해요..^^
감사드립니다 혜경님.. 순오기님 저도 리뷰 올리고 보니깐 그 논을 좀 신경쓸걸 하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저 책에 정말 논에 시체를 잠시 숨기는게 나오는데.. 갑자기 섬뜩해지네요..ㅋㅋ

돌이 2007-08-29 16: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낯익은 이름이길래 들어왓더니 맞네요. 리뷰 당선된거 축하드려요~

안녕반짝 2007-09-02 2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돌이님.. 제 닉네임까지 기억해 주시고..^^
 
연암에게 글쓰기를 배우다
박현찬, 설흔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07년 7월
평점 :
절판


  책 읽기를 좋아한다면 글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번쯤은 가져봤을 것이다. 한때, 책이 좋아서 감히 그런 생각을 했던 적이 있었는데,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그런 생각 자체가 얼마나 건방진 생각이였는지 되돌아 보면 낯이 뜨겁다. 책에 대한, 혹은 글에 대한 갈망이 짙어짐에 따라 독서의 깊이도 깊어만 갔는데, 그 깊이에 허우적 대노라면 아무나 글을 쓰는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무나 쓴 책들도 없진 않지만 나의 글은 아무나가 쓴 글이 아니길 바랬던 마음이 얼마나 무모 했는지 깨달아 가고 있었다. 그래서 책을 마주할 수 있다는 것 자체에 만족을 하기로 했는데, 늘 읽은 책을 꼬박꼬박 정리하고 있으니 나의 무능력함을 여전히 드러내고 있는 셈이다.

 

  11년째 독후감을 쓰고 있다고 자처해 왔지만(공백기를 포함해서), 갈수록 책을 읽고 난 후의 느낌을 남기는 것은 만만치 않다. 더군다나 이런 책을 만날때엔 손을 놔 버리고 싶을 마음이 그득하다. 독후감 자체 만으로도 늘 낑낑 대는데, 글쓰기를 다룬 책을 정리하다니. 늘 내키는 대로 적던 나의 형식들은 왠일인지 모조리 사라져 버린 듯한 느낌이 든다. 오류를 발견했으면 고치면 되지만, 나의 오류가 오랜 시간 이어져 왔다는 생각에 민망해서 그럴 것이다. 그렇다면 나의 독후감을 하나의 글로 바라 본다는 말도 될 터, 결국은 나의 독후감이 늘 부끄러웠다는 뜻일진대, 나의 헛점이 모조리 드러나는 책을 말해야 한다니, 상당히 당황스럽다.

 

  그러나 나의 헛점을 연암 박지원 선생이 지적해주고 가르쳐 준다고 생각해 보라. 연암의 글을 읽지 않았더라도 글쓰기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나의 모든걸 전부 드러내며 가르침을 흡수 하려고 할 것이다. 연암이라면 조선 최고의 문장가라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오지 않았던가. 그런 연암의 글을 제대로 읽지 않고 그의 명성만 치켜 세우는 것이 부끄럽긴 하지만 크게 연연해 할 필요도 없었다. 책 속의 연암을 통해 충분히 글에 대한 그의 능력을 만끽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점은 팩션에 어우려져 독자를 혼란스럽게 할 수 있으니 적절히 걸러서 받아 들이라는 것이다. 저자 후기에서도 밝혔지만 가상의 인물, 사건, 선정이 내포되어 있기에 노파심에서 하는 말이다. 그러나 책을 읽는 과정과 책을 읽고 난 뒤에는 저자와 연암이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또렷히 알게 될 것이다. 글을 체계적으로 잘 쓰는 방법, 그 방법을 제시하되, 팩션이라는 장르를 결합해 재미나게 그려 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오히려 자신들이 그런 글쓰기를 배우며 책을 써나갔다고 했지만 어찌 되었든 그 이면에는 연암이 있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 책을 통해서 글쓰기에 대한 방법을 터득 했냐고 묻는다면 나는 할말이 별로 없다. 연암의 제자 지문이 글을 배우는 과정을 너무 쉽게 봐버렸기에 내게 와 닿지 않는 것도 있었지만 피하고 싶은 열망도 있었다. 그것은 연암을 배반한 중현 같은 열등감일 수도 있고, 내 모든걸 던져 새롭게 무언가를 쌓아야 한다는 두려움에 따르는 것일 수도 있다. 그 과정이 녹록치 않았지만 지문처럼 잘해갈 자신이 없었고 내게 그러한 열정이 남아 있는지 조차 의심스러웠기 때문이다. 이러한 고민은 내가 앞으로 해 나가야 할 숙제지만 당장 지문이 터득한 것을 살펴 보자면 무척 흥미롭다. 복잡 미묘한 정치상황을 피해 연암협으로 들어온 박지원을 우연히 만나면서 지문은 어렵게 연암의 제자가 된다. 그러나 돌이라도 삼킬 수 있을 열정을 지닌 지문에게 연암이 가르쳐 주는 건 엉뚱한 것들 뿐이다. 요즘처럼 체계적인 이론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모이를 주듯 툭툭 던질 뿐이였다. 그런 상황에서 고민하며, 터득해 가는 지문은 조급해하고 자신이 어떠한 과정을 겪고 있는지 몰랐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연암이 얼마나 체계적으로 자신을 훈련시켰는지 깨닫게 된다.

 

  나 또한 연암이 글쓰는 방법에만 치중할거라 생각했기에 지문을 가르치는 방법속에 그렇게 깊은 뜻과 진리가 숨겨져 있는지 알지 못했다. 단순한 글쓰기를 유도하는 것이 아니라 본질을 깨닫고 그 깨달음을 온전히 나의 것으로 만들때, 그는 글을 쓰는 자세가 되어 간다고 생각했다. 실용소설이라고 해서 요즘의 세태에 맞게 이론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고, 연암의 가르침이 빽빽히 녹아 있는 전개는 아니지만, 여운은 깊이 남는 책이였다. 글쓰기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을 집어 넣고 이론을 따르더라도 전혀 어색함이 없는 가르침. 그것이 지금껏 연암의 명성이 이어져 내려오는 이유가 될 것이고, 진리가 살아 있기에 어느 누구에게나 대등하게 다가온다는 이점이 있을 것이다. 그 대등함 속에 나의 마음이 얼마나 열리느냐에 따라서 흡수됨은 달라질 것이다. 그렇기에 연암의 가르침을 일일이 열거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것은 개인마다 받아 들이는 것이 다르고 나 또한 그러한 과정속에 있기에 나름대로의 정리를 해보라고 권하고 싶다. 지문이 건네준 책을 통해 연암의 둘째아들 종채가 그랬던 것 처럼 말이다.

 

  그 책에는 지문이 연암을 만나게 되는 과정부터 연암에게 사죄하는 모습까지 온통 연암이 자리하고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연암의 가르침이겠지만 그것 보다는 연암과 함께한 그 자체가 더 진하게 배어 있는 것 같다. 훌륭한 스승을 만나는 것은 쉬운일이 아니지만 그 가르침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도 쉬운것이 아니기에 더 살갑게 느껴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인상깊은 구절



 

p 70. "이유담 이덕수 선생은 일찍이 이렇게 말했다. '독서는 푹 젖는 것을 귀하게 여긴다. 푹 젖어야  책과 내가 서로 어울려 하나가 된다."

 

 p 96. 문자는 다 같이 쓰는 것이지만 문장에는 쓰는 사람의 개성이 드러나는 법이야.

 

p 111. 문자로 된 것만이 책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책에 세상 사는 지혜가 담겨 있으니 정밀하게 읽을  필요가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늘 책만 본다면 물고기가 물을 인식하지 못하듯 그 지혜를 제대로 보지 못한다.

 

p 155. 붓 끝을 도끼 삼아 거짓된 것들을 찍어 버릴 각오로 쓰게나, 알겠나?

 

p 158. 독서는 책을 읽는  것이다. 그런데 증자의 제자인 공명선은 책을 읽는 대신 스승의 행동을 보고 배우는 길을 택했다. 결국 스승이란 책을 읽은 공명선은 넓은 의미의 독서를 한 셈이다. 공명선이 택한 길이야말로 독서를 창조적으로 변통한 것이었다.

 

p 271.  글쓰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글의 힘을 믿는 것입니다. 왜 글을 쓰게 되었는지 잊지 않고 기쁨과 분노와 슬픔을 글에 쏟아 붓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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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이 인 더 시티
신윤동욱 지음 / 생각의나무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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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에서 6개월 가량 살아본 적이 있다. 그러나 부푼 꿈을 안고 도착한 서울은 삭막하기 그지 없었다. 혼자서 하는 서울 생활이 녹록할거라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대도시의 그 차가움은 잊을 수가 없다. 지하철에서 만나는 무표정한 얼굴들, 다른 사람은 신경 쓰지 않는 개인주의, 비싼물가, 탁한 공기 등 내게 남아있는 서울은 상상속에 존재했던 화려함보다 피부로 와 닿는 어둠이 많았다. 그래서 대도시는 내가 살아갈 곳보다 거쳐가는 곳으로 인식되어 있다. 어둠을 뚫고 나가지 못한 나의 부진함이라고 해도 그게 나의 한계였다고 생각하면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곳이 평안하게 느껴진다. 한때는 대도시를 발판으로 세계로 뻗어나갈 꿈까지 꿨던 적이 있지만, 번잡한 도시의 지하보다 한가한 도시의 지상을 택한 나의 선택에 후회는 없다.

 

  겉표지가 상당히 예뻐서(겉표지가 주는 이미지에 벗어나는게 쉽지 않다.) 이런 느낌일거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제목을 대충 읽고 지나친 나의 부주의함도 있지만 내 안에 잠재되어 있던 도시의 차가움이 꼬물꼬물 일어나는 계기가 되고 있었다. 그런 도시에서 적응하지 못했다는 열등감도 내재되어 있겠지만 저자의 신랄함, 자유분방함, 걸쭉한 언변은 내가 가지고 있는 도시에 대한 어둠을 파헤쳐 주지 못했다. 어느 정도의 공감은 이끌어 냈지만 나와는 다른 세계를 살고 있는 듯한 느낌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의 글의 주제는 다양했다. 사회, 문화, TV, 영화 개인적인 뒷담화까지 막힘없이 펼쳐지는 언변은 실로 놀라웠다. 지극히 주관적인 시각에서 써내려간 글들이지만 그가 바라본 관점은 약간 달랐다. 남들이 정면을 보고 넋을 잃고 있다면 저자는 사이드와 뒷문을 통해 바라봤다고나 할까? 저자의 그런 시선이 낯설었지만 나쁘지 않았다. 그의 언변이 놀라웠다는 것은 말을 잘한다는 것도 포함되겠지만 그것 보다는 막힘 없이 줄줄이 써가는 것이 신기한 것도 있었으리라.(그 글들을 쓰기 위해 자신의 머리를 쥐어 뜯었다 해도. 혹시 그래서 머리숱이 줄어든게 아니였을까.ㅡ.ㅡ) 그러나 그의 막힘없는 말들 속에는 상당히 거칠고 시대의 흐름을 알아야 이해할 수 있는 용어가 많았기에 수긍하는 고갯짓 보다 갸웃하는 머뭇거림이 많았던 것도 사실이였다. 인터넷을 사용하지 않으면 인터넷 용어를 모르듯이 내가 모르는 용어가 많아 낯설었다. 또한 클럽에 자주 간다는 저자는 그런 클럽의 영향인지 아니면 원래부터 존재했던 기질인지 모든것에 벽을 두고 있지 않다는 느낌도 들었다. 특히 동성애에 대한 그의 피력은 애정(?)이 넘칠 정도 였는데, 그의 글에 몰입하다 보면 내 주위에 동성애가 없는 것과(내가 모를지라도.), 동성애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는게 이상할 정도로 동화되어 가고 있었다.

 

  분명 그의 글은 거침없고 막힘없는 반면 짙은 깊음을 주는 것은 아니였지만 어느 정도의 울림을 주고 있는 것은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그가 내뱉는 글에 혼란스러워하고, 당황하고, 나도 모르는 동화를 이끌어 갔다고 해도 한편의 희비극을 보는 듯한 느낌은 지울 수가 없었다. 나와는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듯한 저자, 동떨어짐으로 구분될 수 밖에 없는 저자와의 만남은 갈수록 설명이 모호해져 갔다. 그의 글을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그의 사고방식과 신랄한 시각에 동의하지 않음에도 이끌림이 유발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랬기에 나의 혼란스러움은 더해갈 수 밖에 없었다. 그의 글에서 느껴지는 것은 즐비하게 늘어선 도시의 높은 건물들처럼, 솟아남과 사이사이의 뛰어넘음이였다. 여전히 내게는 익숙치 않았다. 하고 싶은 말을 다 내뱉는 저자, 부모성을 같이 쓰기를 실천하는 저자(그래서 이름이 신윤동욱. 나도 실천하고 싶지만 내 이름은 괴물이 되어 버린다. 장강선아? 켁.), 무엇이든지 거림낌이 없어 보이는 저자, 그런 저자의 삶의 양상이 내심 부럽기도 했지만 나는 그럴 용기가 없는 것 같다.

 

  한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에 내가 무슨 용기를 내야 하냐고 의심할지도 모르지만, 나에게는 용기가 필요한 것들이였다. 그렇다고 그런 용기라는 것이 대단한 것들에 초점이 맞춰지는 건 아니였다. 그러면서도 겉으로 보여지는 저자의 직업, 그에 따르는 부수적인 것들을 부러워 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저자의 드러냄을 탐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자신의 생각을 낱낱이 고백하는게 더 부끄러운 시대다. 그런 현실에 저자는 기죽지 않고 자신의 모든 것을 드러냈다. 타인의 시선보다 내 자신에게 먼저 솔직해 지는 것. 그 드러남을 필두로 삼는 직업을 가졌다고 해도 어느 정도의 용기가 필요하다고 본다. 그런 용기의 결과물이 부드럽고 희망적인 요소가 부족하다고 해도 그걸 다듬어 가는 건 저자의 몫인 반면 우리의 몫이기도 하다. 그를 어디에서 바라 보느냐에 따라서 그의 날개짓은 다양한 바람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부디 그가 저은 한 번의 날개짓에 부러지지 말지어다.

 

 

오타발견

 

 p 232. sbs의 <개그콘서트> -> kbs 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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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리시스 무어 6 - 첫번째 열쇠 율리시스 무어 6
율리시스 무어.피에르도메니코 바칼라리오 지음, 이현경 옮김 / 웅진주니어 / 2007년 6월
평점 :
절판


  혼란스럽다. 5권에서 도저히 다음권이 완결일거라 상상할 수 없었는데 어쨌든 6권을 완결로 막을 내렸다. 그러나 5권에서 예상했듯이 지금껏 펼쳐진 의문들이 속시원히 풀린 것은 아니였다. 억지로 끼워 맞추는 것보단 어느 정도의 열린 결말이 낫다는 생각은 하지만 아쉬움이 많이 남는 것도 사실이다. 율리시스 무어의 정체는 그렇더라도 빌라아르고를 비롯해 킬모어 코브 마을 구석구석에 감추어진 문들에 대한 의문, 수수께끼 같은 몇몇 마을 인물들의 궁금증이 너무 쉽게 풀려 버렸다. 거기다가 지금껏 오랜시간 궁금했던 것들을 지나가는 말로 다 해버리니 허무하기도 했다. 마치 모든 문을 열수 있는 첫번째 열쇠 존재를 모르고, 오로지 한 문만 열 수 있는 열쇠를 쥐고 전전긍긍하는 모습이 되어 버린 것 같다.

 

  너무나 많은 일들이 벌어져서 어디서부터 정리를 해야 할지 모르겠다. 가장 커다란 궁금증은 율리시스 무어가 살아 있느냐, 살아 있다면 누구냐는 의문일 것이다. 쌍둥이들이 어려움에 빠지고 릭은 눈치를 채고 네스터 할아버지를 추궁해서 열쇠들에 얽힌 이야기를 듣게 된다. 오래 전 위대한 여름의 추억으로 네스터 할아버지를 비롯한 미나소, 피터 다이달로스 등 그들의 비밀 이야기를 펼쳐 가는데, 결국 열쇠의 비밀들을 지키지 못하고 위험에 빠졌기에 아이들을 통해 시간의 문과 킬모어 코브를 지키고 싶었던 것이다. 열쇠들을 각자 하나씩 나눠 갖었지만 열쇠들이 다른 사람 손으로 흘러가면서 위험에 빠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열쇠들을 회수해서 비밀이 새어 나가지 않게 하고 싶었지만, 이미 여러곳에 비밀이 새어 버렸고 아이들은 처음부터 추적해 나가는 과정이였으니 결말에 와서 진이 빠져 버리는 건 당연했다.

 

  또한 결말 답게 새로운 사실들이 많이 드러났는데, 그러한 사실을 담담히 받아 들이기가 힘들었다. 볼케이노의 딸이 오블리비아 뉴턴이라는 것과 릭의 아빠가 첫번째 열쇠를 찾다 죽었다는 것, 페넬로페와 살기 위해 네스터 할아버지의(율리시스 무어) 아버지가 18세기 이탈리아로 갔다는 것 등등 의문을 풀어 주기 위한 새로운 사실들은 한꺼번에 드러났다. 그러한 사실들이 쉼없이 드러나면서 제이슨과 줄리아가 다른 곳에서 고생 하는 것이 불필요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들이 의도해서 그렇게 낯선 도시로 간것도 아니고, 볼케이노를 찾아 첫번째 열쇠를 찾으려고 했던 것이지만 첫번째 열쇠는 결국 엉뚱한 사람이 갖고 있었다. 그리고 그 열쇠는 지금껏 릭의 엄마가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이 당황스러웠다. 릭의 아빠의 목숨과 바꿀만한 그 열쇠를 엄마가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아무도 몰랐던 만큼 어쩌면 처음부터 첫번째 열쇠가 목적이 아니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시간의 문을 누가 만들었건, 시간의 문의 열쇠를 누가 가지고 있건 그 비밀을 아이들에게 알려 지키게 하려 했던 건 아니였을까. 오블리비아 뉴턴처엄 나쁜 의도를 가지고 있긴 했지만 아이들이 그런 의도에 맞서 잘해 줄거라 믿었기 때문에 그랬던 건 아니였을까.

 

  책을 읽고나서 허무함에, 혼란스러움에 당황했던 기억이 아직도 또렷하다. 마지막 권에 대한 기대와 궁금증이 증폭되어 설레임으로 책을 대했는데, 뚜렷한 정리 없이 독자들에게 상당부분 맡겨 버리니 그럴 수 밖에. 결말이 뜨뜻 미지근해서 속편이나 다음권이 나오지 않을까 책을 샅샅이 뒤지기도 했던 나의 모습이 지금은 우습다. 시간이 지날수록 어찌 되었든 최선의 결말을 찾으려 애썼구나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자꾸 생각하게 하고 의문을 갖게 함으로써 작가의 뜻을 파악해 보려하는 의도가 있었더라도 책을 다 읽고 난 후는 그럴 여유가 없었다. 작년부터 거의 일년동안 다음 이야기를 기다렸던 기대감이 컸기에 그랬던 것 같다. 거기다 결말은 완벽함을 보여주고 동심의 세계로 데려다 줄거라 생각 했었는데 결국은 어른들의 옛 약속 때문에 아이들이 끼여들게 된 것이다. 아이들이 모험을 하게 된 것은 아이들의 의지였지만, 온전한 아이들의 세계를 맛본다기 보다는 모험에 초점을 맞춰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길고 길었던 모험이 끝이 났다. 아직 많은 의문들과 앞으로의 행보를 예측하고 파악할 순 없지만 지금껏 만났던 모험들이 헛된 것이 아니였다고 생각하려 한다. 아이들을 보면서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위험을 무릅쓴 모습과 자신들의 판단하에 모든걸 행했던 모습이 기특했다고 생각한다. 소설이라는 설정을 떠나 기나긴 시간 모험 속으로 데려다 줬다는 사실은 내게도 추억이 될 것 같다. 이젠 줄리아와 제이슨, 릭이 빌라아르고와 킬모어 코브를 잘 지켜 줄 거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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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루몽 7
조설근 외 지음, 안의운 외 옮김 / 청계(휴먼필드) / 2007년 1월
평점 :
품절


  장편소설 홍루몽을 참 더디게 읽지만, 내용 연결에는 문제가 없다고 6권 리뷰에서 말했었다. 그 말을 또 한번 실감하게 된 것은 7권을 읽고 나서다. 순식간에 읽어버릴 만큼 흡인력 있게 다가옴에도 불구하고, 왜 이렇게 더디게 읽는지 의심이 간다. 아마도 한권한권 읽어 나갈 때 마다 잠시 쉰다는 것이 너무 쉬어 그런 것일 테다. 거기다 완결을 향해 조금씩 다가갈 때마다 드는 아쉬움도 무시 못할 것이다. 그런 아쉬움 속에는 빨리 완결을 읽어야지 하는 마음도 내포되어 있지만 오랜시간 함께한 홍루몽을 놓는다는 것은 후련함보다 아쉬움이 더 깊게 밀려온다. 그래서인지 읽어나가면 나갈수록 즐거움은 더해가는 것 같다. 각권마다 미묘한 특징을 발견하기도 하고 어느 정도의 흐름을 파악하는 것이 조금은 용이해졌다고나 할까?

 

  그런 특징을 파악해 보자면 7권에서는 가씨 집안에서 도통 기를 못펴는(?) 것 같은 남자들이 바람을 일으켰다고 말하고 싶다. 여자, 남자를 나눈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긴 하지만 지금껏 가씨 집안의 남자들이 잠잠했던 건 사실이였다. 듬직한 바람막이 같은 사람도, 존경하고 신뢰할만한 사람도 눈에 띄지 않아서 가씨 집안의 몰락을 예견하는 것도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가씨 집안의 남자들이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기에 그들은 늘 곁다리 일수 밖에 없었다. 집안의 조화를 위해 존재해야 할 그들이지만 적잖은 파장을 일으키는 것도 사실이였다. 특히 7권에서 그들의 바람을 일으켰다고 했는데, 그 바람은 고운 바람이 아니였다.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는 그들은 술과 여자들의 틈바구니에서 진탕하게 놀기 바쁜 가운데, 가진과 가련 형제는 우삼저와 우이저 자매와의 스캔들을 터트린다. 그러나 가련이 희봉 몰래 우이저와 혼인을 하면서 일은 꼬이고 만다. 더군다나 자신의 집이 상중에 있음에도 우이저의 미모에 홀려 법도를 어기고 결혼을 했으니, 그것 만으로도 기가 찬대 희봉 몰래했으니 희봉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그러던 중 우삼저의 절개를 얕본 상련이 우삼저와의 혼인을 깨트리자 우삼저는 자결을 하고, 상련 또한 충격에 휩싸여 출가를 하고 만다. 그런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우이저는 혼자가 될 수 밖에 없었는데 가련이 다른 지역에 가 있는 틈을 타 희봉은 계락을 짜 우이저를 자살에 이르게 한다.

 

  이처럼 가진 형제의 스캔들에서 비롯된 바람은 결국 우이저 자매를 죽음에 이르게 하고 집안을 한바탕 뒤집어 놓는다. 가씨 집안에서 여전히 가씨의 남자들은 기를 못펴며 구실을 제대로 못하지만 이른 일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가씨 집안의 몰락이 멀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집안의 세세한 부분이 드러나면서 만만치 않은 살림이라는 것을 보여주며 어느 정도의 복선을 깔아준 셈인데, 가씨 집안의 남자들은 정신을 못 차리고 있으니 한심할 노릇이다.

 

  그런 와중에 보옥을 비롯한 그 또래의 젊은층들은 이런 집안의 미래 보다는 현재를 즐기기에 바쁘다. 자신들도 나름 집안일을 도우며 생활하고 있지만 크게 연연하지 않는 것 같다. 비슷한 연령층과 어울리다 보니 늘 즐겁게 지내려 애쓰고 자신들의 위치에서 일어나는 일들과 감정에 치우치기 일쑤다. 그러다 보니 집안의 흐름과는 떨어진 생활을 할 수 밖에 없는데 미래에는 자신들이 집안의 주역이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하는 것 같다. 서서히 세대교체가 이루어지겠지만 지금처럼 가씨 집안이 흘러 간다면, 그들이 집안 곳곳에 위치하고 있다해도 지금의 부귀영화를 누릴 수 없을 것 같다. 집안의 이런 일들에도 불구하고 워낙 집이 넓고 아직은 어리다 보니 그들은 주춤했던 시회를 다시 열며 자신들의 생활을 하기 바쁘다. 대옥은 여전히 드러내지는 않지만 서로에게 깊이 기대고 있고 그렇게 여전히 대관원은 바쁘게 돌아가고 있다.

 

  또한 지금껏 한번도 언급하지 못했지만 중간중간 삽입되어 있는 대돈방의 그림은 참으로 인상깊다. 처음에는 우리와 너무 다른 생활방식과 문화에 낯설어서 그의 그림이 어색했다. 내가 상상한 모습을 그가 그려낸 그림과 비교해보면 완전히 달라 당황했던 적이 많았다. 그러나 이제는 삽화가 익숙해서 대돈방의 그림을 봐야지만이 한장면이라도 또렷하게 드러나는 것 같다. 지금과는 완전 다른 중국의 모습을 상상하는 건 불가능했고, 내가 글을 통해 상상할 수 있는 건 희미한 윤곽 뿐이였다. 그랬기에 대돈방의 그림으로 세세한 생활 방식을 엿볼 수 있어 신선했다. 이제 그의 그림이 실려있는 다음권의 겉표지로 이야기가 어떻게 펼쳐질까를 상상하니 다음 이야기가 기다려 지는건 당연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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