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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이 인 더 시티
신윤동욱 지음 / 생각의나무 / 2007년 7월
평점 :
품절
서울에서 6개월 가량 살아본 적이 있다. 그러나 부푼 꿈을 안고 도착한 서울은 삭막하기 그지 없었다. 혼자서 하는 서울 생활이 녹록할거라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대도시의 그 차가움은 잊을 수가 없다. 지하철에서 만나는 무표정한 얼굴들, 다른 사람은 신경 쓰지 않는 개인주의, 비싼물가, 탁한 공기 등 내게 남아있는 서울은 상상속에 존재했던 화려함보다 피부로 와 닿는 어둠이 많았다. 그래서 대도시는 내가 살아갈 곳보다 거쳐가는 곳으로 인식되어 있다. 어둠을 뚫고 나가지 못한 나의 부진함이라고 해도 그게 나의 한계였다고 생각하면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곳이 평안하게 느껴진다. 한때는 대도시를 발판으로 세계로 뻗어나갈 꿈까지 꿨던 적이 있지만, 번잡한 도시의 지하보다 한가한 도시의 지상을 택한 나의 선택에 후회는 없다.
겉표지가 상당히 예뻐서(겉표지가 주는 이미지에 벗어나는게 쉽지 않다.) 이런 느낌일거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제목을 대충 읽고 지나친 나의 부주의함도 있지만 내 안에 잠재되어 있던 도시의 차가움이 꼬물꼬물 일어나는 계기가 되고 있었다. 그런 도시에서 적응하지 못했다는 열등감도 내재되어 있겠지만 저자의 신랄함, 자유분방함, 걸쭉한 언변은 내가 가지고 있는 도시에 대한 어둠을 파헤쳐 주지 못했다. 어느 정도의 공감은 이끌어 냈지만 나와는 다른 세계를 살고 있는 듯한 느낌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의 글의 주제는 다양했다. 사회, 문화, TV, 영화 개인적인 뒷담화까지 막힘없이 펼쳐지는 언변은 실로 놀라웠다. 지극히 주관적인 시각에서 써내려간 글들이지만 그가 바라본 관점은 약간 달랐다. 남들이 정면을 보고 넋을 잃고 있다면 저자는 사이드와 뒷문을 통해 바라봤다고나 할까? 저자의 그런 시선이 낯설었지만 나쁘지 않았다. 그의 언변이 놀라웠다는 것은 말을 잘한다는 것도 포함되겠지만 그것 보다는 막힘 없이 줄줄이 써가는 것이 신기한 것도 있었으리라.(그 글들을 쓰기 위해 자신의 머리를 쥐어 뜯었다 해도. 혹시 그래서 머리숱이 줄어든게 아니였을까.ㅡ.ㅡ) 그러나 그의 막힘없는 말들 속에는 상당히 거칠고 시대의 흐름을 알아야 이해할 수 있는 용어가 많았기에 수긍하는 고갯짓 보다 갸웃하는 머뭇거림이 많았던 것도 사실이였다. 인터넷을 사용하지 않으면 인터넷 용어를 모르듯이 내가 모르는 용어가 많아 낯설었다. 또한 클럽에 자주 간다는 저자는 그런 클럽의 영향인지 아니면 원래부터 존재했던 기질인지 모든것에 벽을 두고 있지 않다는 느낌도 들었다. 특히 동성애에 대한 그의 피력은 애정(?)이 넘칠 정도 였는데, 그의 글에 몰입하다 보면 내 주위에 동성애가 없는 것과(내가 모를지라도.), 동성애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는게 이상할 정도로 동화되어 가고 있었다.
분명 그의 글은 거침없고 막힘없는 반면 짙은 깊음을 주는 것은 아니였지만 어느 정도의 울림을 주고 있는 것은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그가 내뱉는 글에 혼란스러워하고, 당황하고, 나도 모르는 동화를 이끌어 갔다고 해도 한편의 희비극을 보는 듯한 느낌은 지울 수가 없었다. 나와는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듯한 저자, 동떨어짐으로 구분될 수 밖에 없는 저자와의 만남은 갈수록 설명이 모호해져 갔다. 그의 글을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그의 사고방식과 신랄한 시각에 동의하지 않음에도 이끌림이 유발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랬기에 나의 혼란스러움은 더해갈 수 밖에 없었다. 그의 글에서 느껴지는 것은 즐비하게 늘어선 도시의 높은 건물들처럼, 솟아남과 사이사이의 뛰어넘음이였다. 여전히 내게는 익숙치 않았다. 하고 싶은 말을 다 내뱉는 저자, 부모성을 같이 쓰기를 실천하는 저자(그래서 이름이 신윤동욱. 나도 실천하고 싶지만 내 이름은 괴물이 되어 버린다. 장강선아? 켁.), 무엇이든지 거림낌이 없어 보이는 저자, 그런 저자의 삶의 양상이 내심 부럽기도 했지만 나는 그럴 용기가 없는 것 같다.
한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에 내가 무슨 용기를 내야 하냐고 의심할지도 모르지만, 나에게는 용기가 필요한 것들이였다. 그렇다고 그런 용기라는 것이 대단한 것들에 초점이 맞춰지는 건 아니였다. 그러면서도 겉으로 보여지는 저자의 직업, 그에 따르는 부수적인 것들을 부러워 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저자의 드러냄을 탐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자신의 생각을 낱낱이 고백하는게 더 부끄러운 시대다. 그런 현실에 저자는 기죽지 않고 자신의 모든 것을 드러냈다. 타인의 시선보다 내 자신에게 먼저 솔직해 지는 것. 그 드러남을 필두로 삼는 직업을 가졌다고 해도 어느 정도의 용기가 필요하다고 본다. 그런 용기의 결과물이 부드럽고 희망적인 요소가 부족하다고 해도 그걸 다듬어 가는 건 저자의 몫인 반면 우리의 몫이기도 하다. 그를 어디에서 바라 보느냐에 따라서 그의 날개짓은 다양한 바람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부디 그가 저은 한 번의 날개짓에 부러지지 말지어다.
오타발견
p 232. sbs의 <개그콘서트> -> kbs 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