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링조어의 마지막 여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30
헤르만 헤세 지음, 황승환 옮김 / 민음사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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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장에 읽어야 할 책이 산더미임에도, 이 책을 구입하게 된 것은 순전히 겉표지 때문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고흐의 자화상이 실려 있었고, 고흐의 눈빛이 한 없이 고독해 보였다. 그 눈빛을 차마 거부할 수 없어 충동적으로 책을 구입하고 말았다. 헤르만 헤세의 작품이라는 데서 오는 관심도 어느 정도 작용했겠지만, 그것보다 겉표지에 고흐의 자화상이 실려 있는 이유가 더 궁금했다. 헤르만 헤세의 몇몇 작품을 읽는 동안 작품에 우울한 기운이 깃든 것 같아 즐겨 읽는 작가가 아니었기 때문에, 겉표지를 보고 책을 구입했다는 사실이 계면쩍을 정도다. 
 

  고흐의 자화상만큼이나 책 제목이 나의 관심을 끌었던 것은 사실이다. 클링조어의 여름에서 고흐의 여름을 떠올릴 수 있었고, 특히나 강렬한 그림을 그려냈던 아를시절을 떠올리게 만든다. 거기다 '클링조어'라는 인물의 마지막 여름이라고 하니, 고흐가 숨을 거두었던 7월을 생각나게 만드는 것도 당연했다. 그렇게 고흐와 잔뜩 연관을 시키며 책을 펼쳤건만, 이내 혼미해지고 말았다. 고흐와 비슷한 인물이라는 것을 어느 정도 예견했다 하더라도 고흐와 비슷한 삶의 단상이 펼쳐지지 않은 것에 대한 이질감 보다, 어지럽게 펼쳐지는 내면의 드러남 때문이었다. 내면이 처절히 파괴되어 가고 있음에도 그림을 그리려는 예술에 대한 열정은 어느 정도 비슷했지만, 죽음을 향해 가는 클링조어의 내면은 고흐와 닮아있으면서도 달랐다.

 

  짧은 에피소드로 이루어진 '클링조어의 마지막 여름'은 줄거리를 찾아내기가 힘이 들었다. 글을 읽는 순간 흩뿌려져 버렸고, 클링조어의 내면을 알아간다는 점진적인 느낌이 드는 것이 아니라, 한없는 수렁으로 빠져들어 가는 기분이었다. 그 수렁의 끝은 죽음이었고, 과정에는 클링조어의 고통과 열정, 저자의 내면을 빗댄 고흐의 삶까지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 그렇다보니 얇은 책을 읽었음에도, 속도는 더디기만 했고, 읽고 난 후에도 또렷해지는 기분은 덜했다. 오히려 온통 어지럽혀진 곳에 발을 디디고 온 느낌이었고, 책을 덮고 나서도 혼란스러움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묘사에 대한 세세함이 지나치면서도 흐름을 간파할 수 없는, 틀에 얽매이지 않은 저자의 문체도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다. 글 안에서 펼쳐지는 클링조어의 피폐해져가는 모습은 광기가 깃들어 있는 것 같았다. 클링조어는 술과 여자가 늘 포함된 그의 일상에서 육체와 정신의 고통을 가득 머금은 채, 오로지 그림으로 표출해 내고 있을 뿐이었다.

 

  그 모든 것이 클링조어의 내면이라고 치부하기엔 석연치 않았는데, 역자해설을 통해 저자가 이 작품을 쓸 당시의 상황을 돌아보게 되었다. 헤세는 이 작품을 쓸 당시에 정신적인 고통이 엄청났었다고 한다. 1차 세계대전의 혼란, 거듭되는 가정사에 약해질 대로 약해진 헤세가 새로운 곳에 정착을 하면서 개인적인 고통을 작품으로 승화시켰다고 한다. 그 가운데 쓴 작품이 <클링조어의 마지막 여름>이고, 문체의 독특함, 고흐와 클링조어에게 부여된 혼란스러움이 자전적인 요소가 강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인지 이 작품 속에 등장하는 클링조어를 단 한 사람으로 단정 지을 수 없다. 고갱을 생각나게 하는 클링조어의 친구나, 자연스레 고흐를 떠올리게 만드는 클링조어의 행보는 저자 자신일 수밖에 없었다.

 

  인간이 광기의 한가운데로 들어가는 것을 목도한 기분. 이 책을 한 문장으로 표현한다면 아마 이런 느낌일 것이다. 클링조어의 행보를 제대로 간파할 수 없는 가운데, 정상적인 사람의 생각을 읽고 있다는 기분이 들지 않았다. 예술에 대한 열정으로 치부할 수도 없고, 한 사람의 인생을 덤덤히 지켜보는 시선으로도 파악할 수 없는 무지가 나를 온통 지배했다. 풍류를 즐겼던 이태백을 좋아하는 친근감이(이태백이 특히 우리에게 낯선 인물이 아님에도) 낯설게 느껴질 정도로 클링조어란 인물은 끝끝내 나와 일치되지 못했다. 관찰자의 입장도 실패하고, 나의 내면을 빗대어 비교할 수 없는 인물이 클링조어였다. 겉표지에 고흐의 자화상이 실린 것이 궁금해 집어 든 한 권의 책은, 혼란스러움만 가중시킬 뿐이었다.

 

  책을 읽는 동안 클링조어, 고흐, 헤르만 헤세의 세 인물을 놓고 볼 때, 그 가운데 어느 한 사람의 내면으로 들어가지 못한 것 같다. 한 없이 자유로운 영혼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제대로 집중하지 못한 나의 탓일 것이다. 내 마음이 어지러울 때 읽어서인지, 클링조어가 보낸 마지막 여름에 관한 에피소드와 세밀한 만남을 이루지 못한 것이 조금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러나 클링조어 혹은 고흐, 저자와의 만남을 이루어내지 못했다 하더라도 작품에서 느껴지는 고통의 농도를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마지막'이 주는 삶의 끝자락은 한 사람을 이해하기엔 부족할지 모르나, 예술과 버무려진 내면의 광기는 낯설면서도 간과하기 힘들었다. 이 작품을 통해 저자는 이해와 동조를 끌어내는 것이 아니라 내가 닿지 못한 세계의 끝을 경험하게 해주었다. 광기로만 치부하느냐, 예술에 대한 열정이 사그라드는 것으로 보느냐는 오로지 독자의 몫일 것이다. 그 무한함의 가능성 속에서 한 자락의 위로를 이끌어 낸다면 그것보다 값진 경험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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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존감 - 나를 사랑하게 하는
이무석 지음 / 비전과리더십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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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자존심에 상처를 입어 눈이 탱탱 붓도록 운 일이 있었다. 나만 상처를 입으면 괜찮을 텐데, 나로 인해 타인까지 상처를 입을까봐 그게 겁이 나고 두려웠다. 그 과정에서 나를 한없이 깎아내렸던 것은 물론, 내게 주어진 환경과 현재의 상황들을 무척 비관했었다. 오해가 풀리고 도리어 위로를 받고서야 마음이 진정 되었지만, 잠시나마 내 자신을 잃어버렸던 것은 사실이다. 그 일 때문에 무척 마음이 상해있을 때, 책장에서 <자존감>이란 책을 발견했다. 평상시 같았으면 장르 문학을 뽑아냈을 내게, 유난히 또렷한 시선으로 다가온 책이었다. 아무래도 그때 나의 마음상태 때문에 자연스레 이 책에게 마음을 뺏긴 것이리라.
 

  누군가가 내 마음을 어루만져주고, 나의 이야기를 들어준다면 그것만으로도 마음이 후련해 질 것 같은 기분. 누구나 그런 경험이 있을 것이다. 나 또한 그런 마음이 들어 간접위로라 할지라도 마음을 달래고 싶었다. 그럴 때 만난 책인 만큼, 책 속의 한구절한구절이 내게 가깝게 다가왔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좀 더 내 자신과 깊이 있게 만나고, 내가 경험했던 감정을 잘 추스르려면 저자가 제시하는 키워드를 잘 받아들여야 했다. 그건 바로 열등감이었다. 누구나 한가지쯤은 가지고 있을 법한 열등감. 그 열등감이 우리의 삶에서 어떤 영향을 펼치는지, 또한 성격의 형성과 일상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를 사례를 통해서 비춰주고 있었다.

 


  의학박사이자 국제정신분석가인 저자는 열등감이 조건이 아니라 관점의 문제라고 역설하고 있었다. 자신이 만난 사람들의 사례를 통해, 잘못된 관점으로 인한 열등감으로 어떻게 삶이 부서지고 있는지를 여과 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외모, 학력, 집안, 능력에 관한 열등감에 사로잡혀 자신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타인의 시선만 의식하고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이 책을 통해서 알 정도였다. 열등감으로 인해 일상의 어려움이 닥치니 저자에게 상담을 의뢰했겠지만, 그들이 이야기가 나와 거리가 먼 타인의 이야기만은 아니었다. 그런 사례들 속에는 내가 의식하고 있지 못한 열등감, 의식하고 있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은 열등감이 내제되어 있었다.

 

  다양한 열등감을 지닌 사람들의 사연을 알아가다 보면, 공통분모로 작용하는 것이 눈에 띄기도 했다. 바로 유년시절에 자리한 성장과정의 배경이었다. 어른이 되어서 나타난 열등감의 대부분은 어릴 적에 가정 내에서 비교당하거나, 학교에서의 안 좋은 추억, 강박감 등이 원인으로 작용되는 경우가 많았다. 성장하면서 그런 경험이 없을 순 없지만, 제대로 위로해주지 못했거나 관점의 차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할 때에 나타나는 것이 바로 열등감이었다. 열등감을 건강하게 이겨낸다는 것이 쉽지 않더라도, 제대로 치유하지 못한 열등감이 뱉어내는 후유증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열등감에 휩싸이면 자존감도 낮아지고, 낮아진 자존감으로 인해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 객관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조차 어렵게 만들고 있었다.

 

  이 책에서는 갖가지 열등감을 지니고 있던 사람들이 저자와 만나 이야기하고, 치료를 받으면서 조금씩 자존감을 키워 나가고 있었다. 열등감을 없애고 자존감을 높여나가는 것은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했다. 그런 과정을 포기하지 않고 노력을 기울이면 충분히 열등감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례도 많았다. 고졸이라는 학력이 부끄러우면 학교를 다니면 되지만, 그것이 쉬운 방법이 아니므로 관점의 문제를 해결하면 되었다. 외모에 자신 없는 부분이 있다면, 많은 용기가 필요할지라도 자신을 비하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바라볼 줄 아는 시선이 필요했다. 그런 시도를 조금씩 하다보면, 자신감이 생기기 마련이고 자연스레 자존감도 높아져 삶의 질이 달라진다. 처음에는 극도의 열등감에 휩싸여 일상생활을 영위하지 못할 정도의 사람들이 저자를 찾아왔지만, 그 이후에 달라진 모습을 통해 충분한 가능성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무엇보다 자신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며, 자신의 존재가 소중하다는 것을 알아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읽으면서 나에게 포함된 몇몇 가지 열등감(고졸인 학력, 타인의 시선 신경 쓰느라 당당하지 못한 언행)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 보기도 했다. 고졸에 대해서 한 때 열등감을 가졌던 적이 있었으나, 지금은 전혀 부끄럽지 않다(대학을 가서 남들과 동등해 진다는 생각보다 공부가 하고 싶어 대학을 가고 싶은 마음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타인에 대한 시선 때문에 당당하지 못하고, 소심하게 행동하는 것에 대해서는 좀 더 생각해보며 고쳐나갈 필요성이 있다는 것을 느낀다. 무조건 내 입장에서만 생각하지 말고, 타인과 툭 터놓고 이야기 하거나, 관점을 바꾸려는 시도가 내게도 필요했다. '진짜 자기' 파악하고 만나려는 노력이 있는 한, 열등감에 휩싸인 절망적인 삶을 살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이 쉽지 않다는 것은 알지만, 최소한 자기의 문제점을 찾았다면, 그 문제해결을 위해 시도해 보는 것이 중요하다. 문제인식이 시도의 발판이 될 것이므로, 조금씩 자신의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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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는 잘해요 죄 3부작
이기호 지음 / 현대문학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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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내문학에 협소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내게, 이름을 들어봄직한 작가의 신간은 마냥 반갑기만 하다. 아직 저자의 작품을 한 권도 만나지 못했더라도, 신간이 나왔다고 하면 읽고 싶은 욕망이 인다. 오래 전, 지인에게 선물 받은 이기호의 소설이 책장에 고이 모셔져 있음에도 여태껏 못 만나고 있다가 신간을 먼저 만나게 되었다. 기존 작품을 읽지 않아 어떠한 변화를 꾀하고 있는지 파악할 수는 없더라도, 심심치 않게 들려오는 저자에 대한 소문은 궁금증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책은 그야말로 너무도 순식간에 읽어 버릴 정도의 흡인력을 가지고 있었다. 정신없이 읽다보니 어느새 책장을 덮고 있는 내가 낯설 정도로 눈의 피로를 급격하게 상승시키는 읽힘이었다. 그러나 책을 읽고 난 뒤에 내 안에 남아 있는 것이 무엇인지, 건져 오르는 것이 없이 조금 당황스러웠다. 이 이야기를 어떻게 정리해야 하며 풀어나가야 할지 그것도 고민되었지만, 내게 와닿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계속 의문을 갖게 만들었다. 줄거리를 캐내는 것도, 이런 부분이 맘에 들고, 저런 부분이 맘에 들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조차 힘겨웠다. 내가 책 속으로 한없이 빨려 들어간 시간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과연 나는 책 속의 인물들을 제대로 만나기나 한 것일까?

 

  이 책에는 두 명의 남자가 등장한다.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는 '나'란 인물과 시설에서 만난 '시봉'이다. 그들이 만난 시설이란 곳이 정상적인 사람들이 드나들고, 쾌적한 환경이라고 볼 수 없기에 이야기의 시작은 평범하지 않았다. 복지사들에게 얻어터지고, 약을 먹지 않을 땐 어질어질 하고, 포장 일을 하고 있는 그들은 '시설의 기둥들'이란 이름으로 그곳에서 풀려나게 된다. 포장하며 써 넣은 글 덕분에 경찰들이 들이닥쳤고, 갈 곳이 없어진 '나'는 시봉의 집으로 향한다. 시봉의 집엔 그의 여동생과 동거중인 '뿔테안경'이 있었다. 그곳의 분위기도 유쾌하지 않았지만, 그들에게 그런 것을 따질 여유가 없었다. 동네 구경을 하며 소일거리를 삼던 그들은 '환자'였고 무언가 좀 많이 부족해 보이는 시설의 기둥들일 뿐이었다.

 

  그런 그들이 일거리를 찾아낼 수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시설에서의 경험이 토대가 되었다. 시설의 반장 역할을 맡은 '나'가 자신 있었던 것은 복지사들에게 다른 사람들의 사과를 대신 해주는 것이었다. 그것도 없는 죄까지 만들어가며, 일일이 보고를 하고, 얻어터지는 일상을 보내다 보니 그것이 새로운 일거리가 될 거라 생각했다. 그 일로 인해 새로운 사업 아이템을 구상한 것은 뿔테안경이었다. 하지만 남이 대신 해주는 사과로 돈벌이가 될 리도 없었고, 사과의 원인이라는 것도 어이가 없는 것들뿐이었다. '나'와 시봉이 첫 고객으로 삼은 것은 동네의 과일가게 주인과 정육점 주인이었다. 무척 친한 사이인 그들을 닦달하다 사이를 더 갈라놓고 말았다. 뿔테안경이 전단지를 만들어 고객을 확보하려 했고, 정식적인 첫 고객은 절름발이 아이가 태어나자 부인과 아이를 떠난 중년 남자였다. 그 남자가 그들에게 부탁한 사과를 부인이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 무척 애를 쓰다 '뿔테안경'이 어이없는 사과의 희생양이 되고 만다. 거기다 '나'는 시봉에게 '죄'를 지은 채, 복지사들에게서 혼자만 도망쳤고, 시봉의 여동생을 향한 새로운 마음으로 새로운 길을 가려는 시도에서 책은 끝이 난다.

 

  그 모든 이야기는 현실에서의 그들, 시설생활 가운데서의 그들, 그리고 사과를 위해 만난 새로운 사람들 사이에 일어났다. 말도 안 되는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들이 말하는 '죄'의 이유를 듣다보면 얼핏 그럴듯해 보여 혹시 나도 새로운 죄를 짓고 사는 건 아닌지 의아할 정도였다. 정육점 주인에게도 사과의 빌미로 '반찬을 더 집어 먹는다', '공을 높이 올렸다'라는 이유를 갖다 붙이고 있었지만, 죄는 지으면 지을수록 더 많아진다는 논리에 자칫하다간 빠질 수도 있단 생각이 들었다. 그들의 행동과 일상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시설에서 정상적이지 못했던 시간들과 맞물리면서 현실의 이야기가 아닌 것 같았다. 어떻게 시설로 들어온 지도 알지 못하는 '나'는 자신의 존재를 찾기 위해 원장도 찾아가고, 아버지를 찾아 헤매기도 했다. 그 아버지란 존재가 실은 자신과 같은 시설에 있었던 사실을 알아차렸을 때도 '나'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오히려 그것이 진실인지 명확하게 알려주고 있지 않아, 김빠지는 결말 앞에서도 의연(?) 할 수밖에 없었다.

 

  '나'와 시봉이 격은 일들은 분명 가볍지 않고 시봉의 생사여부를 알 수 없게 흘러가고 있음에도, 독자는 심각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것이 저자의 익살과 재기 발랄함인지는 몰라도, 등장인물들로 인해 많은 것을 생각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어느 것에도 무게중심을 두고 싶지 않은 가벼움과(소재는 결코 간과할 수 없는 무게가 있음에도) 다른 세계의 이야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박혜경님은 해설에서 카프카의 <소송>에서의 주인공 요제프 K가 직면했던 상황(자신의 죄가 무엇인지 모른 채 죄를 인정하고 자백해야 하는 상황)과 비슷하다고 했다. '나'와 시봉이 시설에서 그랬고, 다른 원생들도 마찬가지였으며, 사과를 대신 해준다는 명목으로 찾아다닌 사람들에게도 그랬다. 알 수 없는 '죄' 때문에 괴로워했고, 그들은 그 '죄'를 찾아내서 사과를 하고, 상대방이 받아들여 주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이 수긍할 수 있는 '죄'인지의 여부는 따지지 않고, 오로지 일방통행으로 행해지는 사과의 오류였다.

 

  이 소설은 Daum에 일일 연재된 소설이라고 한다. 아무리 인기 있는 작가가 연재를 해도 종이책으로 발간 돼야 읽는 나로서는, 한 번도 연재를 보지 못한 것이 조금 민망하기도 했다. 그러나 저자는 골격만 빼고 새로 다시 썼다고 하니, 그것 또한 비교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이래저래 죄책감을 가질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것보다는 '나'와 시봉이 하는 사과의 의미, 시설 안에서의 자아의 잃어버림, 현실에 섞이지 못하는 불순물 같은 존재인 주인공들로 인해 내가 직면하게 되는 '상황'이 어떤 것인지 파악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했던 사과의 생뚱맞음처럼 나에게 '죄'를 묻는다는 것과 알 수 없는 상대에 대한 '사과'의 효과를 기대할 수 없기에 그것 또한 난처하다. 오히려 '죄'를 더 지으며, 뻔뻔스럽게 행동하는 나를 마주하는 것이 더 익숙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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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아한 거짓말 창비청소년문학 22
김려령 지음 / 창비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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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죽음'이라는 단어는 생경하지만 결코 낯선 것이 아니다. 타인의 죽음에 대해서는 이렇듯 무관심하면서도, 가족의 죽음을 목도하게 되면 비로소 피부를 뚫고 들어오는 '경험'이 되기 때문이다. 조카의 죽음이 그랬다. 10년 전 아버지의 죽음은 어느 정도 가슴에 묻을 수 있었지만, 25살에 삶이 단절 되어 버린 조카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여전히 힘이 든다. 분명 어딘가에 존재할 것 같고, 손을 뻗어 잡아당기면 나를 향해 다가올 것 같은데, 더 이상 그럴 수 없다는 사실이 너무도 애석하다. 가슴에 묻어도 묻어지지 않는 가족의 죽음은 남겨진 이들에게 너무나 큰 상실감으로 잠재해 있어, 그 고통을 꺼내는 것조차도 큰 용기가 필요하다.
 

  '죽음'이라는 다소 무거운 이야기를 꺼낸 것은 김려령의 신작 <우아한 거짓말> 속의 주인공 천지 때문이다. 내일을 준비하던 소녀 천지가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천지의 이야기, 그리고 남겨진 가족들의 이야기를 읽어 나가도 속 시원히 무언가를 받아들일 수 없어 답답할 뿐이었다. 달라지지 않는 것은 천지는 더 이상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다는 것이고, 남겨진 가족들을 비롯해 주변 사람들을 통해서도 천지의 죽음의 비밀은 뚜렷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진실'을 알고 싶어하는 독자들에게 저자는 친절하게 길을 안내하기 보다, 여러 장면을 통해서 스스로 알아가도록 유도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마음을 한없이 놔버린 상태로 오로지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책을 읽어나간다면,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진실'과 독자가 알아야 할 '진실'에서 더 멀어질 수밖에 없다.

 

  이제 중학교 1학년인 천지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어떠한 진실이 숨겨져 있기에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밖에 없었을까. 천지와 천지의 주변 이야기를 다 듣고도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어 내가 본 것이 무엇인지, 눈에 보이지 않는 진실은 무엇인지 뚜렷이 알 수 없었다. 천지가 죽음을 선택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으나, 과연 천지가 선택한 죽음의 이면에는 무엇이 숨겨져 있었던 것이고,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지 파악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로 어려웠다. 모두들 진실을 회피하며, 단절되어 버린 천지의 삶과는 무관하게 앞으로 향하고 있었다. 특히나 천지를 괴롭혔던 화연은 자신이 천지에게 한 행동에 대한 반성을 한다기보다, 천지의 빈자리에 아쉬움을 느낄 뿐이었다. 화연이 괴로워하는 모습, 자신이 한 행동 그대로 친구들에게 받는 모습이 있긴 했으나 그런 모습으로 천지의 죽음에 빗댄 동정심을 느낄 수 없었다. 단지 천지는 왜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는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문이 생성될 뿐이었다.

 

  천지에게는 언니 만지, 엄마가 있었다. 아빠는 돌아가셨고, 달랑 세 식구였지만 각자의 색깔을 가진 채 무난함을 가장한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런 가족에게 천지의 죽음은 충격 이상의 것일 수밖에 없었다. 지켜주지 못했다는 안타까움과 슬픔이 내제된 고통의 드러남은, 가족이라는 끈끈함을 느끼기보다 핏줄의 절연을 더 느끼고 있었다. 화연을 비롯한 만지의 친구 미란, 천지의 친구이자 미란의 동생인 미라, 그들의 부모의 얽힘이 서서히 밝혀지지만 그 어느 곳에도 천지의 죽음을 예견할 수 있는 정확함은 확실하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오히려 독자가 그 진실을 비켜가게끔 '우아한 거짓말' 속에서 합리화를 시키고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 더 나았다.

 

  천지의 죽음의 원인을 확연히 밝혀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것부터가 잘못이었을까. 천지가 살아온 과정, 거기다 천지의 내면까지 보았음에도 불편한 진실은 도무지 내게 와 닿지 않았다. 천지가 가족들, 친구들에게 남긴 네 개의 실뭉치 속의 편지를 보면서도 왜 그렇게밖에 행동을 할 수 없었는지, 안타까움을 동반한 비난조차 일지 않았다. 남겨진 엄마와 언니를 생각하면 한없이 안쓰러웠지만, 죽음을 맞이할 동안에도 희망의 꿈을 꾼 천지의 고통을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거라는 것을 알아 버렸다. 그런 천지에게 죽을 용기를 내어 살아라는 말이 얼마나 무색할지 짐작조차 못하겠다. 죽을 수밖에 없는 환경을 만들어주고, 살아라고 한다면 그것만큼 잔인한 것이 어디 있을까. 무엇보다 세상과 단절시켜야 하는 천지 자신이 가장 무섭고 두려웠을 것이다. 그 고통을 이해하기보다 원인만 밝혀지길 바랐으니, 나 또한 질실 거부, 책임 회피에 동조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으리라.

 

  저자도 '어떠한 일이 있어도 미리 생을 내려놓지 말라고, 생명 다할 때까지 살라고' 말했다. 천지에게 미안한 말이지만, 천지가 경험할 수 있는 삶 속에는 기쁨이 더 많을 거라고 나 또한 말해주고 싶다. 누구나 그렇게 살아간다는 진부한 말보다 고통을 뛰어넘는 기쁨과 희망도 삶 속에 동시에 내제되어 있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내가 천지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결국 내 자신에게 하는 말이며, 이 책을 읽어갈 독자들에게도 건네주고 싶은 말이다. 책 속에서 처절한 고통과 상처를 맛보더라도, 그래도 살아갈 가치가 있노라고 얕은 삶의 경험을 드러내 보이고 싶은 것이다.

 

  천지의 죽음을 맞이하면서도 내 가장 가까이에 있었던 조카의 죽음과 연결시킬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소설 속의 죽음과 현실의 죽음은 다른 거라고 말하고 싶었고, 그런 식으로 깊이 패인 상처를 다시 헤집어 놓기 싫었다. 그러나 자꾸만 조카의 죽음이 연상되고, 천지 가족의 고통이 나의 고통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데는 많은 과정이 필요치 않았다. 천지의 내면을 보면서도 내가 알 수 없는 고통이 조카의 내면에 그득했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먹먹해 질뿐이다. 그 먹먹함을 천지의 죽음으로 통해 드러내는 것이 너무 싫지만, 이렇게라도 기억하지 않으면 사라져 버릴 것 같아 두려운 것도 사실이다. 천지에게도 조카에게도 더 이상 내세의 고통이 따라가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어떠한 진실의 이면이 있던 지간에 남아있는 자는 단서를 잡지 못할 것이며, 입 안으로 진실을 떠 먹여 줘도 흘려버릴 것이라는 데 오는 어리석은 확신 때문이다. 그렇기에 나는 얼마나 많은 거짓된 진실을 뒤덮으며 살아가고 있는 지, 차마 그 이면을 들추어낼 용기가 남아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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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결을 스치며 바람을 스치며
아모스 오즈 지음, 정영문 옮김 / 열린책들 / 2007년 6월
평점 :
절판


 어떤 책을 읽다 중단하게 되면, 그 이야기는 완성 되지 못한 채 뇌리에 맴돌 때가 있다. 특히나 중간까지 읽다 만 책들보다, 초반을 넘기지 못하고 덮어 버린 책들이 그런 경우가 많다. 그 이야기를 완성시키지 못한 채 방치하다 완성시켰을 때의 후련함. 그것도 책을 읽는 매력중의 하나라면 하나지만, 강렬한 끌림에도 불구하고 책장을 넘기지 못하는 책들도 만나게 된다. 내가 무척 좋아하고, 국내에 번역된 책을 거의 다 읽은 아모스 오즈의 <물결을 스치며 바람을 스치며>가 그랬다. 아모스 오즈의 책이었기에 출간 당시 구입해 놓았음에도 불구하고, 도무지 초반의 몇 장을 넘기지 못했다. 포메란스라는 유대인 교사가 독일인들을 피해 숲으로 피신하는 시작은 흥미진진했으나, 몇 번을 시도해도 10페이지를 읽지도 못하고 덮고 말았다. 그러다 아모스 오즈의 새로 번역된 책을 읽으니, 안 읽은 책이 이것뿐이라 이번에는 꼭 완독하고 싶어 첫 장부터 다시 펼쳤다.
 

  다행스럽게도 그동안 넘기기 힘들었던 책장이 비교적 잘 넘어가고 있었다. 국내에 번역된 아모스 오즈의 마지막 책을 읽어나간다 생각하니, 무척 뿌듯하면서도 즐거웠다. 간간히 번역되었던 책들이 있긴 했지만, 온전한 소설을 만난 건 실로 오랜만이라 책장이 막힘없이 나가는 것에 약간 흥분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기분은 애석하게도 오래 가지 않았다. 명확히 드러나지 않는 묘사와 흐름은 점점 미궁으로 나를 끌어당겼고, 급기야 줄거리를 놓쳐버리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꿈속을 헤매는 듯, 어디서부터 다시 읽어야 다시 갈피를 잡을 수 있는지 여전히 오리무중인 채로 뒤로 돌아갈 수도 없었고, 앞으로 나아가도 석연치 않음이 계속 나를 지배했다.

 

  책의 시작이 포메란스가 전쟁을 피해 숲으로 피신하는 것부터 시작했으므로, 썩 좋은 배경은 아니었다. 김나지움에서 수학과 물리학을 가르치는 교사였고, 같은 학교에서 독일어를 가르친 그의 부인 스테파는 남편과 같이 도망치지 않고 집에 남아 있었다. 1939년 독일군이 폴란드를 침입했을 때의 배경이라고 해도, 당시의 현실감을 일깨우는 글이 아니었다. 두 사람의 중심으로 이야기가 흘러가긴 하지만, 확연히 드러나지 않는 정치적인 묘사가 대부분이었다. 그랬기에 그 사이에서 나의 혼란은 거듭될 수밖에 없었고, 중간쯤부터 포메란스와 스테파의 위치는 물론 그들의 내면을 파악한다는 것에 어려움이 따르는 것은 당연했다. 그렇다보니 글이 던져주는 몽롱함에 취해 어딘지 모르는 곳의 이야기에 빠져 허우적대고만 있었다.

 

  내가 경험한 몽롱함과 혼란스러움이 어쩌면 그들에게 닥친 현실의 흔들림 때문이 아닐까란 생각이 든 것은, 포메란스가 양을 치며 시계를 수리하는 모습을 드러낼 때 부터였다. 당시의 상황이 여의치 않더라도 그런 결정을 쉬운 것은 아니었을 테지만, 포메란스가 무언가를 잃어버렸다는 느낌은 지워지지 않았다. 그것이 스테파를 향한 그리움인지, 삶이 뿌리째 흔들려 버린 상실감 때문인지 알 수 없더라도 그가 있을 자리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 그가 양을 치며 시계를 수리하다 수학의 난제를 증명함으로써 명성을 얻게 될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로인해 명성을 얻게 되지만, 그에게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전쟁 전의 상황으로 돌아갈 수도, 스테파를 다시 만날 수도 없었다. 그냥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에 순응하는 척 삶을 흘려보내고 있다고 생각될 뿐이었다.

 

  스테파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포메란스를 따라가지 않고, 집에 남아 있다 결국 스탈린 치하의 러시아로 건너가 스파이가 된다. 그러나 그녀가 스파이로써 어떠한 역할을 하고 있는지 보다, 그녀가 당하는 굴욕감, 눈에 보이지 않는 기이한 세계들은 복잡하게 얽혀 포메란스와 동떨어진 삶의 단상을 보여줄 뿐이었다. 그녀가 러시아에서 어떠한 정보를 담당하는지, 또한 그녀 주변에 맴도는 사람들의 의미가 무엇인지 파악하기 힘들었다. 거기다 포메란스와 스테파가 과연 서로를 의식이나 하고 있는지, 서로를 갈구하는지조차 알 수 없어 답답함이 나의 내면을 가득 채웠다. 결국 그들의 재회가 어떠한 식으로 치닫게 됐는지 알 수 없어, 책을 덮으면서 몹시 민망했다. 그런 흐름 속에 정치적인 상황까지 맞물리다 보니, 나의 혼란은 극을 향해 치닫고 있으면서도 책을 읽는 그 묘한 매력에서 손을 뗄 수가 없었다.

 

  이 책을 읽을 당시, 카페에서 차를 마시며 음악을 듣다 보니 더 혼란스러움이 가중됐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커피 향과 음악의 소란스러움, 글로 이루어지는 묘한 세계의 뒤엉킴은 내게 색다른 묘미를 안겨주었다. 책 내용이 혼란스러워질수록 내가 당면하고 있는 현실세계와 뚜렷한 대조를 보이면서도 묘한 엉킴이 내재해 있어, 그 분위기를 느꼈던 시간도 내겐 소중하다. 책을 분위기로 읽었다고 생각하면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으나, 처음 이 책을 대했을 때 가졌던 생각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이 책을 다 읽으면 아모스 오즈의 책을 섭렵한다는 의미도, 오랫동안 책장을 넘기지 못했던 책을 읽어간다는 후련함은 무의미했다. 몽롱함 속으로 나를 불러들였던 아모스 오즈의 세계에 온전히 안착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그의 글에서 느껴지는 매력은 여전히 내게 남아 있다. 한 작가를 작품을 하나씩 섭렵할 때마다 색다른 매력을 던져주는 것, 앞으로 쓰일 책이나, 번역될 책을 기다리는 것. 그 기다림의 즐거움을 이 책이 배가시켜 준 것만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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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5-10-13 16: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번역이 이상했어요. 지나치게 길어진 문장도 보였고요. 계속 읽어나가는 것이 힘들었어요. 특히 엘리샤가 무한의 신비에 집착하고, 음악의 힘을 강조하는 설정이 못마땅했어요.

안녕반짝 2015-12-15 22:22   좋아요 0 | URL
저는 번역을 생각할 틈도 없이(상세히 구별해 낼 능력도 없지만^^) 모호하고 몽롱해서 줄거리조차 잘 기억이 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