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링조어의 마지막 여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30
헤르만 헤세 지음, 황승환 옮김 / 민음사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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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장에 읽어야 할 책이 산더미임에도, 이 책을 구입하게 된 것은 순전히 겉표지 때문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고흐의 자화상이 실려 있었고, 고흐의 눈빛이 한 없이 고독해 보였다. 그 눈빛을 차마 거부할 수 없어 충동적으로 책을 구입하고 말았다. 헤르만 헤세의 작품이라는 데서 오는 관심도 어느 정도 작용했겠지만, 그것보다 겉표지에 고흐의 자화상이 실려 있는 이유가 더 궁금했다. 헤르만 헤세의 몇몇 작품을 읽는 동안 작품에 우울한 기운이 깃든 것 같아 즐겨 읽는 작가가 아니었기 때문에, 겉표지를 보고 책을 구입했다는 사실이 계면쩍을 정도다. 
 

  고흐의 자화상만큼이나 책 제목이 나의 관심을 끌었던 것은 사실이다. 클링조어의 여름에서 고흐의 여름을 떠올릴 수 있었고, 특히나 강렬한 그림을 그려냈던 아를시절을 떠올리게 만든다. 거기다 '클링조어'라는 인물의 마지막 여름이라고 하니, 고흐가 숨을 거두었던 7월을 생각나게 만드는 것도 당연했다. 그렇게 고흐와 잔뜩 연관을 시키며 책을 펼쳤건만, 이내 혼미해지고 말았다. 고흐와 비슷한 인물이라는 것을 어느 정도 예견했다 하더라도 고흐와 비슷한 삶의 단상이 펼쳐지지 않은 것에 대한 이질감 보다, 어지럽게 펼쳐지는 내면의 드러남 때문이었다. 내면이 처절히 파괴되어 가고 있음에도 그림을 그리려는 예술에 대한 열정은 어느 정도 비슷했지만, 죽음을 향해 가는 클링조어의 내면은 고흐와 닮아있으면서도 달랐다.

 

  짧은 에피소드로 이루어진 '클링조어의 마지막 여름'은 줄거리를 찾아내기가 힘이 들었다. 글을 읽는 순간 흩뿌려져 버렸고, 클링조어의 내면을 알아간다는 점진적인 느낌이 드는 것이 아니라, 한없는 수렁으로 빠져들어 가는 기분이었다. 그 수렁의 끝은 죽음이었고, 과정에는 클링조어의 고통과 열정, 저자의 내면을 빗댄 고흐의 삶까지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 그렇다보니 얇은 책을 읽었음에도, 속도는 더디기만 했고, 읽고 난 후에도 또렷해지는 기분은 덜했다. 오히려 온통 어지럽혀진 곳에 발을 디디고 온 느낌이었고, 책을 덮고 나서도 혼란스러움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묘사에 대한 세세함이 지나치면서도 흐름을 간파할 수 없는, 틀에 얽매이지 않은 저자의 문체도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다. 글 안에서 펼쳐지는 클링조어의 피폐해져가는 모습은 광기가 깃들어 있는 것 같았다. 클링조어는 술과 여자가 늘 포함된 그의 일상에서 육체와 정신의 고통을 가득 머금은 채, 오로지 그림으로 표출해 내고 있을 뿐이었다.

 

  그 모든 것이 클링조어의 내면이라고 치부하기엔 석연치 않았는데, 역자해설을 통해 저자가 이 작품을 쓸 당시의 상황을 돌아보게 되었다. 헤세는 이 작품을 쓸 당시에 정신적인 고통이 엄청났었다고 한다. 1차 세계대전의 혼란, 거듭되는 가정사에 약해질 대로 약해진 헤세가 새로운 곳에 정착을 하면서 개인적인 고통을 작품으로 승화시켰다고 한다. 그 가운데 쓴 작품이 <클링조어의 마지막 여름>이고, 문체의 독특함, 고흐와 클링조어에게 부여된 혼란스러움이 자전적인 요소가 강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인지 이 작품 속에 등장하는 클링조어를 단 한 사람으로 단정 지을 수 없다. 고갱을 생각나게 하는 클링조어의 친구나, 자연스레 고흐를 떠올리게 만드는 클링조어의 행보는 저자 자신일 수밖에 없었다.

 

  인간이 광기의 한가운데로 들어가는 것을 목도한 기분. 이 책을 한 문장으로 표현한다면 아마 이런 느낌일 것이다. 클링조어의 행보를 제대로 간파할 수 없는 가운데, 정상적인 사람의 생각을 읽고 있다는 기분이 들지 않았다. 예술에 대한 열정으로 치부할 수도 없고, 한 사람의 인생을 덤덤히 지켜보는 시선으로도 파악할 수 없는 무지가 나를 온통 지배했다. 풍류를 즐겼던 이태백을 좋아하는 친근감이(이태백이 특히 우리에게 낯선 인물이 아님에도) 낯설게 느껴질 정도로 클링조어란 인물은 끝끝내 나와 일치되지 못했다. 관찰자의 입장도 실패하고, 나의 내면을 빗대어 비교할 수 없는 인물이 클링조어였다. 겉표지에 고흐의 자화상이 실린 것이 궁금해 집어 든 한 권의 책은, 혼란스러움만 가중시킬 뿐이었다.

 

  책을 읽는 동안 클링조어, 고흐, 헤르만 헤세의 세 인물을 놓고 볼 때, 그 가운데 어느 한 사람의 내면으로 들어가지 못한 것 같다. 한 없이 자유로운 영혼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제대로 집중하지 못한 나의 탓일 것이다. 내 마음이 어지러울 때 읽어서인지, 클링조어가 보낸 마지막 여름에 관한 에피소드와 세밀한 만남을 이루지 못한 것이 조금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러나 클링조어 혹은 고흐, 저자와의 만남을 이루어내지 못했다 하더라도 작품에서 느껴지는 고통의 농도를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마지막'이 주는 삶의 끝자락은 한 사람을 이해하기엔 부족할지 모르나, 예술과 버무려진 내면의 광기는 낯설면서도 간과하기 힘들었다. 이 작품을 통해 저자는 이해와 동조를 끌어내는 것이 아니라 내가 닿지 못한 세계의 끝을 경험하게 해주었다. 광기로만 치부하느냐, 예술에 대한 열정이 사그라드는 것으로 보느냐는 오로지 독자의 몫일 것이다. 그 무한함의 가능성 속에서 한 자락의 위로를 이끌어 낸다면 그것보다 값진 경험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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