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조각달
로즈메리 웰스 지음, 김율희 옮김 / 다른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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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성장소설이라고 하면 환장을 한다. 유년시절의 기억에서 더 멀어질수록 나를 끈질기게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것은 그 시절의 추억들이다. 그 추억이 무엇이 간대 나를 성장 중이라고 말하며 계속 머무르게 하는지 알 수 없지만, 문학을 통해서 채워지지 않는 그리움을 메우려 하는 하는지도 모르겠다. <붉은 조각달>을 읽게 된 연유도 그랬다. 작가며 출판사가 모두 낯선 상황에서도 '성장소설'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책을 집어 들었다. 무척 예쁘다는 첫 이미지 이외에도 왠지 모를 슬픔이 묻어나는 것이 감지됐는데, 자꾸 올라오려는 그 슬픔을 애써 무시하며 눌러 버렸건만, 결국 그 슬픔에 잠식당하고 말았다.

 

  쉴 틈 없이 꼼짝 않고 책을 읽을 수밖에 없던 이유는 잠시 시선을 돌려 버리면 내가 느끼고 있는 이 분위기에서 빠져나올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또한 열여섯 살 소녀 인디아의 슬픔을 놓쳐 버리고 구경만 하게 될 것 같아 두려웠다. 이 책의 배경이 전쟁이라는 사실, 그리고 미국의 남북 전쟁 가운데서도 가장 치열했던 샤프스버그 전투가 배경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았더라면 아무리 성장소설이라고 해도 책을 집어 들지 않았을 것이다. 그랬더라면 풀어낼 곳조차 없는 남모를 슬픔에 잠식당하지 않았을 것이고, 흐트러지는 이 마음을 가누려 애쓰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의 마음이 둘 곳 없다고 이 책을 피해버렸다면, 잊힌 전쟁에 관한 진상은 결코 내게 와 닿지 못했을 것이다. 

 

  저자는 세계 곳곳에서 자행되는 전쟁의 안타까움을 전하기 위해 <붉은 조각달>을 썼다고 한다. 12년 간 남북 전쟁에 대해 조사하고 연구해서 한 권의 책을 썼다는 사실 앞에 숙연해 지면서도, 한 소녀의 성장에 초점이 맞춰진 것이 의아했다. 그러나 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는 아이들이란 사실을 부정할 수도 없어, 오랜 시간 동안 조사하고 연구한 전쟁의 참상을 어떻게 펼쳐낼지 궁금했다. 1861년부터 1865년까지 4년 동안 일어났던 남북 전쟁이 북군의 승리로 끝났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버지니아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시작부터가 마음 아팠다. 그러나 나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저자는 마치 전쟁의 참상이 다가오지 않을 것처럼 태연하게 인디아의 성장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 차분함 때문에 전쟁이 배경이 된 소설이라는 사실도 잊은 채, 인디아의 주변을 살피며 그 소녀가 어떻게 변화되어 가는지에만 관심이 갔다. 트림블 가의 아들인 에모리와 실험실에서 지식을 탐하는 것을 보고 인디아가 대학에 갈 수도 없다는 사실을 앎에도 전쟁의 배경을 배제하고 훌륭하게 성장해 나가기를 바랐다. 에모리와 함께 하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인디아의 재능은 빛났고, 팍팍하게 돌아가는 삶의 잔상 속에서도 그들의 꿈이 이뤄지길 바랐다. 그들에게 처해진 환경이 너무 눈에 띄지 않았기에, 혹은 너무 멀리 있는 것처럼 흘러갔기에 이후에 처해질 고난에 대해서 아무런 대책이 없기는 독자인 나도 마찬가지였다. 12년 동안 조사하고 연구한 흔적을 남기듯, 너무나 평이하게 흘러가다가 고통은 점진적으로 커져만 갔다. 제발 그만 두라고, 더 이상의 고통을 주는 것은 잔인하다고 스스로 되뇔 때까지 전쟁의 잔인함은 그칠 줄을 몰랐다.

 

  전쟁이 일어날 당시 12살이었던 인디아는 넉넉하지 않았지만, 아빠와 엄마 남동생, 정신이 오락가락 하신 할아버지와 함께 살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잔잔한 행복도 잠시, 전쟁은 그 모든 것을 앗아갔다. 어느 날 갑자기 전쟁이 닥쳐와 모든 것을 휩쓸고 지나갔더라면 한 무더기의 고난을 한꺼번에 감당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전쟁의 양상에 따라, 북군과 남군의 대치 상태에 따라 시시각각 달라지는 상황 속에서 전쟁은 그들의 피부에 조금씩 와 닿더니, 급기야는 피부를 뚫고 나와 그들을 철저히 파괴해 버렸다. 과학자를 꿈꾸는 에모리는 병사들의 죽음을 막을 수 있도록 의학의 수준을 끌어 올리려 하지만, 전쟁 중에 그들의 의식을 바꾸는 것은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총알 때문이 아니라 너무나 단순한 질병으로 인해 병사들이 목숨을 잃어갈 때는 할 말 조차 잃어 버렸다. 인디아의 아빠도 그런 질병을 앓고 있어, 에모리에게 도움을 청해 약을 받았지만 아빠는 이미 전쟁터로 떠난 뒤였다.



  인디아는 에모리가 준 약을 아빠에게 전해주면 살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기에, 위험을 무릅쓰고 아빠를 찾으러 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옥수수 밭이 순식간에 말끔하게 베어졌다.'는 표현이 적합할 정도로 끔찍한 샤프스버그 전투의 잔상을 목격하게 된다. 수많은 영혼들이 하늘로 올라가고, 붉은 조각달이 떠 있는 신비로운 광경까지 목도하는 인디아를 보는 순간부터 희망을 잃어버렸던 것 같다. 아빠가 살아서 돌아올 거라는 믿음, 전쟁이 끝나면 에모리와 함께 연구를 할 수 있을 거라는 희망, 한 마을에서 북군과 남군의 병사가 갈리는 애매모호한 현상까지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었다. 북군이 승리하고 전쟁이 끝나 평화가 깃들고, 남군은 패배했지만 노예제도가 없어질 거라는 역설적인 긍정조차도 무의미할 정도의 잔인하고 또 잔인한 전쟁의 참상은 수그러들 줄 몰랐다.

 

  과연 그곳에 신이 존재하는가 하는 질문을 던지게 만드는 전쟁의 참상은 고난 받을수록 깊어지는 그들의 신앙과 극명하게 비교 되었다. 그렇게 간절히 기도했건만 아빠는 결국 떠나가고, 인디아의 가족은 빈털터리가 되어 삭막한 외삼촌네 집으로 들어간다. 인디아에게 더 이상 아빠는 존재하지 않았다. 어디 그들뿐이랴. 한 가정의 가장으로, 자식으로, 연인으로의 삶을 제대로 살지 못하고 덧없이 쓰러져 간 남자들이 너무나 많았다. 마지막 희망이었던 에모리와의 연구 자료마저 같은 동네의 청년에 의해 불살라지고, 모든 것이 파괴되는 절망을 맛본 인디아에게 힘을 내라는 말조차 건넬 수 없었다. 대학을 갈 수 있는 도시로 가라는 위로도, 에모리가 어딘가에 살아 있을 거란 한 줄기 희망도 가질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인디아는 생각보다 훨씬 강했다. 그 모든 일을 감내하고 희망을 놓지 않았고, 북군 장교를 돕기도 했으며, 에모리와 극적으로 만나고, 마음속에 품은 뜻을 펼치기 위해 도전하고 있었다.

 

  철저히 남북 전쟁 당시로 독자를 끌어들였음에도 현재 진행형으로 끝을 맺은 소설에 잠시 멍해지기도 했다. 더 이상 파괴될 것이 없었기에 전쟁의 끝이 보였지만, 그 이후의 삶이 궁금했기에 여전히 진행 중인 결말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하지만 저자가 인디아의 삶을 단정 지어준다고 해서 단정 지어지는 것이 아님을 알기에, 모든 상처를 극복하고 에모리와 같이 연구할 수 있는 환경에서 재회하기만을 바랐다. 인디아 뿐만이 아니라 전쟁의 폐해를 겪은 모든 사람들이 다시 일어설 수 있기를, 똑같은 참상이 일어나질 않기를 진정으로 바랐다. 바램과는 다르게 현실은 여전히 전쟁과 기근, 재난과 가난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그 가운데서도 아이들이 자라나고, 희망을 품는다는 사실을 아프게 깨달았기에 그 참상을 어른들이 조금이라도 막아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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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일 - 사랑이 내게 온 날 나는 다시 태어났습니다 장영희의 영미시산책
장영희 지음, 김점선 그림 / 비채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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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루를 마감하고 잠들기 전, 책장을 보며 어떤 책을 읽어야 하는지 마음속으로 계획해본다. 그냥 읽고 싶은 책만 골라 읽으면 좋겠지만, 우선순위를 무시할 수 없는 책들이 있어서 나름대로 순서를 정해본다. 그러나 마음속의 계획은 늘 그렇듯 지켜지기 보단 어기기가 더 쉬운 법이다. 읽어야 할 책과 관심 있어 구입한 책들이 뒤엉켜서 책장을 어지럽히고 있기에, 늦은 밤임에도 불구하고 책장 정리를 했다. 먼저 읽어야 할 책들을 손이 잘 닿는 책장에 빼놓고, 최근에 구입한 책들도 따로 분류해 놓았다. 그렇게 정리를 해 놓으니 읽어야 할 책 순서가 한 눈에 보였다. 그리고 얼마나 많은 책들을 방치해 두었는지, 관심 있다고 구입한 책들마저도 신경 쓰지 못한 사실이 확연히 드러나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렇게 정리 된 책장을 보면서 문득 <생일>이란 책이 눈에 들어왔다. 그동안 고(故) 장영희 교수님의 에세이가 아니라 '영미시산책'이라는 이유로 주요 목록에서 배제해 두었었다. 어쩌면 같은 해에 암으로 돌아가신 장영희 교수님과 김점선 화백의 마음이 녹아있는 책이라서 선뜻 손을 뻗지 못했는지도 모르겠다. 두 분이 같이 작업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얼마나 아름다운 책(김점선님의 말을 빌려)이 만들어졌는지 가늠할 수 있을 정도인데, 이제는 그런 결과물을 만날 수 없다는 사실과 두 분을 더 이상 뵐 수 없다는 사실이 마음 아프게 다가왔다. 그러다 한 밤중의 책 정리로 인해 다시 눈에 띄게 되었고, 아련한 마음을 품은 채 영미시가 주는 낯섦을 호기심으로 바꾼 다음에야 책을 읽을 수 있었다.

 

  책 제목이 <생일>인 것을 보고 조금은 의아했다. 생일이라고 하면 '태어남'이란 의미가 뿌리박혀 있기에 더 이상 생각이 뻗어 나가지 못했다. 서문을 보고서야 '사랑이 내게 온 날 나는 다시 태어났습니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제목이 참 맛깔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을 할 때의 그 설렘과 기쁨, 달랠 길 없는 그리움조차도 다시 태어남으로 포장한다는 뜻이 내게도 가깝게 다가왔다. 그 때문에 잠시 우리의 시가 아닌 영미시라는 사실도 잊은 채, 어떠한 시들이 실려 있을지 무척 궁금해졌다. 거기다 상식으로 알아두어야 할 거장 시인들의 시가 실려 있다고 하니, 국외 시에 무지했던 내게 조금이나마 알은체 할 거리를 만들어 주는 계기가 될 거라 생각했다.

 

  영미 시라고 하더라도 책 제목에서 말했던 것처럼, 사랑에 관한 시이므로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시가 많았다. 영어 원문과 함께 교수님의 번역이 실려 있는 시들을 보면서, 처음에는 욕심내어 원문까지 읽어 보았다. 한 줄 읽고 해석을 보며 내가 생각한 이미지와 해석이 들어맞는지를 따져 보았는데, 얼마 안가 단어들이 막히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시를 읽는 것인지 영어 공부를 하고 있는 것인지 헷갈려서 원문 전체를 다 읽지 않고, 번역 시를 먼저 보며 '이런 표현은 영어로 어떻게 쓰였을까' 란 궁금증을 일으키는 문장만 원문을 보았다. 그렇게 읽는 것이 시의 의미를 더 느낄 수 있었고, 짤막하게 실린 시인의 생애와 함께 온전하게 시를 맛보게 해 주었다.

 

  이 책에 실린 시들은 모 일간지에 칼럼으로 실린 것들이라고 한다. 당시에 원고를 담당했던 기자분이 계절마다 제목을 붙여 주었다고 하는데, 그 제목과 함께 김전선 화백의 그림을 느끼고, 교수님의 시에 대한 칼럼을 맛보는 것은 더할 나위 없는 조화였다. 시에 온전히 들어가지 못했을 때, 제목이나 그림, 칼럼을 통해서 이해를 도왔기에 각각의 존재만으로도 시를 돋보이게 하고 다채롭게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사랑의 절절함을 느낌과 동시에 이런 다양함을 맛보며, 거장들의 시를 음미한다는 것은 참 산뜻한 기분이었다. 시라는 장르가 어렵게 다가온 나 같은 독자에게 여기저기서 도움이 손길이 뻗어 있는 것 같아, 영미 시임에도 즐겁게 읽고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

 

  언어가 다르고 문화가 다르더라도, 사람의 감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이 시집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껏 많이 읽지 않은 국외 시집을 살펴보면, 번역의 매끄럽지 못한 부분으로 인해, 혹은 시의 함축적인 의미 때문에 온전히 느낄 수 없었다는 것이 떠오른다. 최대한 독자에게 다가가고자 하는 노력이 엿보인 이 시집으로 인해 그런 어려움을 많이 해소시켰다. 교수님도 '시를 번역하는 사람은 시인이어야 한다는' 말을 언급하셨지만, 나 같은 독자들조차도 시라는 문학은 알려고 하면 할수록 오묘하면서도 감질거리는 매력을 던져 준다는 사실을 깨달아 간다. 영미 시의 매력을 느꼈음은 물론, 한 편의 시가 다양하게 표현 될 수 있다는 사실(특히나 김점선 화백의 그림을 통해)에 풍요로움을 맛보았다.

 

  마음의 절절함이 느껴졌던 시, 공감을 이끌어 냈던 시, 신선함을 던져 준 시, 잔잔함 파문을 일으킨 시들이 내게 다가와 주어서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여러 사람의 노력이 녹아 있는 시집이라는 사실도 잊은 채, 나도 모르게 순식간에 읽어 버린 것이 민망할 정도다. 책장에 자리하고 있는 또 다른 영미 시집이 남아 있어 다행이면서도, 이런 만남을 더 이상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이 여전히 허전하다. 시를 읽는 내내, 장영희 교수님과 김전선 화백의 흔적을 온 몸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마음이 절절해지는 것을 느끼며 그 분들의 평안함을 빌었다. 좋은 책을 남겨 주어서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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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 - 본죽 대표 김철호의 기본이 만들어낸 성공 레시피
김철호 지음 / 비전비엔피(비전코리아,애플북스)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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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만 줄기차게 읽다 보면 현실감각이 떨어질 때가 있다. 내가 속한 세계가 현실인지 허구인지, 내 머릿속을 왔다가는 생각의 시초가 소설 속의 이야기인지, 내가 경험한 것인지 헷갈리기도 한다. 그럴 때는 현실감을 일깨워 줄 수 있는 책들을 찾아서 읽곤 한다. 평전이나 인문서적, 미술에 관한 책들을 뒤척이며 현실감을 일깨우고 다시 문학 속으로 빠져든다. 문학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독서패턴을 이런 식으로라도 꿰어 맞춰 골고루 분포 시키고 싶은 의도가 숨어 있기도 하다. <정성>이란 책을 꺼낼 때도 그랬다. 문학 속에서만 헤매다 보니 인간미를 느끼고 싶었고, 묘하게 나의 마음을 끄는 책 제목에 감질 맛을 느껴 책장에 손을 뻗게 되었다.

 

  죽 전문점 본죽 대표가 쓴 책이라는 사실을 알고 인간미를 느끼는 데는 문제가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 사람의 성공담을 듣는 것은 말 그대로 삶의 체험을 간접 경험하는 것이기에, 문학의 허구의 후유증을 조금이라도 덜어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문학을 통해서도 충분히 현재의 삶의 실재성을 끌어 낼 수 있지만, 현장의 소리를 듣는 것이 더 생생하게 다가올 때가 있다. 굳이 <정성>이 아니더라도 많은 사람들의 성공담을 듣고, 그 순간에는 내 자신을 반성하며 내 안에 끓는 열정이 있는지를 따져보는 일은 비일비재했다. 그러나 과연 그런 느낌을 얼마나 간직할 수 있으며, 행동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 생각해보면 나의 대답은 늘 궁해진다. 현실감을 일깨우고 싶어 책을 꺼냈다고 말하면서도, 내 안에 얼마나 많은 것을 간직할 수 있을지 나조차도 알 수 없었다.

 

  책을 읽기 전부터 '현실감을 일깨우기 위해'란 목적으로부터 비어져 나온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채워갔다. 하지만 그런 생각도 잠시, 한 호흡에 책을 읽어버리고 최선을 다해 삶을 살아온 저자를 보자 나의 현실감은 더 떨어지고 말았다. 분명 가능한 일을 한 저자임에도, 내게는 불가능으로 보였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목적의식과 도전의식, 무엇보다 열정이 내게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자처럼 절망의 순간의 끝에서 붙잡았기에 성공할 수 있었다는 말도 안 되는 자기 합리화를 덧입혀 보아도, 도전보다는 포기가 더 쉽다는 유혹이 나를 따라왔다. 수많은 실패를 하고, '우리 가족이 행복하게 살게 되는 것'을 추구하면서 현재의 본죽을 이끌어 온 저자가 어느새 나에게서 더 멀어져 버린 느낌이었다.

 

  그 느낌은 타인의 성공에 대한 부러움과 시샘보다, 하고 싶을 일을 끄집어냈다는 사실에 대한 동기 그 자체 때문이었다. 하나님은 각각의 인간에게 각각의 달란트를 주셨다고 하셨는데, 그것을 갈고 닦지 않으면 발견할 수 없다는 말이 나를 괴롭혔다. 눈에 띄지 않는다는 이유로 나의 달란트가 무엇인지 찾기를 거부했고, 노력보다는 포기가 빠르다는 이유로 무언가에 모든 것을 던져보는 것을 거부해왔다. 저자처럼 절망의 끝에 내몰리더라도 열정적으로 나를 던질 용기가 내게도 있는지 의심만 갔다. 저자의 성공담을 소개하고, 대단하다는 사람이라고 칭송하며, 나를 전혀 대입시키지 않은 채 책을 덮어버릴 수 있다면 좋으련만. 저자의 삶 속에 나의 모습이 어지럽게 대입되는 것을 도무지 피할 수 없었다.

 

  <본죽>이라면, 우리 동네에도 자리하고 있기에 심심찮게 방문하는 음식점이다. 아플 때만 먹는 음식이라는 틀을 깬 저자처럼, 나 또한 한 번 맛보고는 그런 생각을 깨트리고 종종 이용하고 있다. 입맛이 없거나, 속이 안 좋거나, 병문안을 갈 때 더 자주 이용하긴 해도, 그냥 죽이 먹고 싶어서 들를 때도 허다하다. 내가 가지고 있는 죽에 대한 생각(저자가 본죽을 열기 전에 여러 죽집을 통해서 얻은 생각)을 깨준 것처럼, 저자는 한 끼 식사로, 푸짐하게 내 줄 수 있는 죽집, 깔끔하고 푸근한 죽집이라는 이미지를 내세웠다. 그리고 현재의 본죽이 있기까지의 과정과 비빔밥과 국수에까지 도전하고, 해외까지 진출하는 과정을 보면서 저자의 첫 생각에서 무궁히 발전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성공에만 중점을 두고 지점 늘이기, 이익을 위해 어느 정도 눈감아 준다는 원칙의 벗어남, 안정 궤도에 오르면 그대로 안주하고 싶은 심리를 이기지 못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저자는 '우리 가족이 행복하게 살게 되는 것'을 어느 정도 이루어지자 그 꿈이 커져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것에 중점을 두게 되었다. 대가를 바라지 않기에 타인의 질책에도 수그러들지 않는 일을 한다는 것이 쉽지 않음에도, 저자가 지금까지 이룩하고 앞으로 이룩할 것들에 대한 기본 바탕에는 '선한 영향력'이 깔려 있었다. 그랬기에 저자 또한 지금까지 본죽을 이룩한 것에 대한 수많은 어려움과 환희에 대해서 담담히 말할 수 있었고, 앞으로의 행보에 대해서도 마음껏 말할 수 있었다. 그 결실이 한 권의 책으로까지 이어졌으니, 저자의 성공 레시피는 앞으로도 꾸준히 쌓여 갈 것이다.

 

  책 제목처럼 이 책의 키워드는 '정성'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서비스에 정성이 들어가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지만, 특히나 음식과 관련 된 일을 한다면 정성이 좀 더 색다르게 다가올 것이다. 음식을 팔기 위해서 쏟는 정성을 뛰어 넘어, 죽 한 그릇으로 타인의 마음까지 움직이고, 행복을 발하는 정성. 마음 하나로 세상을 따뜻하게 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은 정성을 보여 준 것이 저자의 성공담에 들어 있었다. 중심 주제가 번복된 감이 없지 않고 일관된 구성을 보이지 못한 것이 조금 아쉽긴 했지만, 자신을 낮추며 담담하게 희망을 전하는 저자에게서 많은 것을 본 느낌이다. 자기에게 숨겨진 면을 끈기 있기 찾은 것, 앞이 보이지 않더라도 끝까지 노력해 보는 것, 그 결실을 혼자 갖는 것이 아닌 타인에게 나눠주려는 마음들이 나의 마음에도 잔잔한 파문을 일으켰다. 그 마음을 어떻게 지키느냐가 내게는 여전히 숙제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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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을 주는 그림
크리스토프 앙드레 지음, 함정임.박형섭 옮김 / 마로니에북스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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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을 좋아한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그림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그다지 많지 않음을 늘 실감하게 된다. 전시회를 가도 그렇고, 미술에 관련된 책을 구입해서 읽을 때도 마찬가지다. 특히나 내가 아는 그림일수록 알은체를 하며, 더 이상 알기를 거부하는 것이 사실이다. 똑같은 그림이라도 해석에 따라, 보는 이의 시각에 따라 달리 보임에도 불구하고 틀 안에 그림을 가둔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어떨 때는 그림이 아니라 그림을 그린 화가의 생애에 더 초점을 맞춰 진정성을 부인해 버릴 때도 있다. 화가의 생애가 그림에 미치는 영향을 무시할 수 없더라도, 그림에서 느껴지는 감정을 좀 더 소중히 다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래서인지 내게 익숙한 그림을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고, 해석하게 되는 책들을 만나면 반갑다. 내가 갖지 못한 넓은 시각을 보길 원하고, 내가 알지 못했던 새로움을 알아갈 수 있다는 가능성 때문일 것이다.

 

  <행복을 주는 그림>은 프랑스에서 유명한 심리학 관련 저자 중 한명이 쓴 책이라고 했다. 심리학에 관해서 무지하기 때문에 처음 듣는 저자임에도 거부감이 들지 않았던 것은 '그림'이라는 제목이 주는 이미지 때문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그림과 함께라면 낯선 저자의 글이라도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나의 이런 편한 마음이 섣불렀는지, 책을 끝까지 읽는 동안 마음이 열리지 않았음을 실감했고 아쉬움으로 책장을 덮어 버렸다. 무엇이 나의 마음을 열어 주지 못하고, 그림과 함께 어우러지는 글을 감상하지 못했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아도 뚜렷한 해답은 떠오르지 않고, 다만 내가 저자의 글에 다가가려 하지 않았다는 노력과 그림에서 심리학을 끌어내려는 진부하면서도 익숙한 소재의 시도가 결실을 맺지 못했다는 사실만 수면위로 떠올랐다.

 

  이 책에 실린 스물다섯 편의 그림은 화가와 그림이 낯설더라도, 전혀 어색한 느낌을 주지 않는다. 궁금증을 자아내는 평온함과 일상의 눈부심을 만끽할 수 있는 그림들로 채워져 있다. 일상의 눈부심이 조금 이질적인 해도 그림에 조금만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친숙한 화가와 반가운 그림이 많음에 금세 마음이 편안해 질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단순히 독자에게 그림을 보여주기 위해, 독자도 그림을 쓱 둘러보기 위한 목적이 이 책에 내포되어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림을 통해 내면을 꿰뚫어 보고, 표면에 드러난 상처나 자신이 알지 못한 어두운 부분이 그림과 글을 통해서 위로받기를 원했을 것이다. 나 또한 은연중에 그런 마음을 갖고 있었지만 끝내 내 마음 속으로 어느 것도 파고들지 못한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책의 구성을 살펴보자면, 6개의 주제로 그림을 묶어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감정들을 전달하고자 했다. 화가의 그림을 특정 부분을 확대시킨 첫 페이지와 그림과 어우러지는 저자의 간략한 느낌이 실려 있다. 그 다음에는 한 눈으로 살펴볼 수 있는 전체적인 그림이 실려 있고, 명언과 화가 소개, 저자 나름대로 이끌어 낼 수 있는 내면의 감정을 아우르는 글이 실려 있다. 이런 구성으로 25편의 그림을 보게 되는데, 여러 단락씩 나뉘는 구성 때문에 흐름이 끊긴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거기다 첫 페이지에 실린 그림에 대한 저자의 간략한 느낌 이외에 여러 가지 해석을 덧붙이려는 저자의 노력을 알 수 있었으나, 하나 되지 못하고 산산이 흩어져 버렸다. 묵상하듯 글을 읽고, 그림을 바라보며 느릿느릿 책을 읽지 않고 너무나 순식간에 독파하려 했던 나의 시도가 무모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림을 통해서 내면을 보고, 인간이 느끼는 또 다른 감정을 살펴볼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가 못 미쳐서 무엇을 읽고 느낀 것인지 혼란스럽기만 하다. 지극히 개인적인 느낌일 수밖에 없으나, '행복'이라는 것을 타인의 눈으로만 보려 했던 내 자신이 부끄러워지기도 했다. 읽는 이에 따라서, 보는 이의 심리 변화에 따라서 책이 달리 보일 수 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 계기이기도 했다. 그림을 통해서, 아니면 그림에서 흘러나오는 미약한 이미지를 변화시켜 현존하는 세계에서 다양함을 느낄 수 있는 실마리라도 찾게 된다면, 그것이 이 책의 숨은 뜻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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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혜옹주 - 조선의 마지막 황녀
권비영 지음 / 다산책방 / 2009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하루 종일 침대에 갇혀 있는 기분, 그 비참함을 아주 조금 안다. 머리가 마비되면 마음도 마비되고, 일상의 자잘한 행동들이 제약을 받게 된다. 먹는 것도 일상을 파고들었던 자잘한 생각들도 모두 멈춰 버리고, 자신의 괴롭히는 문제가 지배해 버리고 만다. 최근 나를 괴롭힌 어떤 문제 때문에 며칠을 고민하고, 식음을 전폐하고 보니, 비참함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 경험으로 인해 일상의 마비를 알게 되었고, 그 순간에도 한 여인이 떠올랐다. 조선의 마지막 황녀라 불리는 덕혜 옹주. 그녀의 일생 중에서도 모두에게 잊힌 채, 일본의 한 정신병원에 갇혀 지낸 모습이 떠올랐다. 내가 경험한 느낌과 감히 비교할 수 없지만, 글로 읽는 그녀의 고충을 조금이나마 피부로 느껴서인지 깊은 고뇌가 내 마음을 아프게 했다.

 

  누군가에게 잊힌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사람이 모든 기억을 끌어안고 살아갈 수 없더라도, 잊어서는 안 될 사람까지 잊어버릴 때의 그 쓸쓸함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평범한 사람들이라면 그것이 인생의 단면이라고 어느 정도 털어 버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무너지는 한 나라의 왕이라면 어떠했을까. 모든 치욕과 아픔을 낱낱이 겪고, 지켜봐야 했던 가족이라면 어떠했을까. 한 권의 소설로 인해서 그녀의 존재조차 모르고 있었던 한 여인을 알게 되었다. 고종과 명성황후는 어느 정도 인식하고 있을지라도, 그 이후의 혈통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덕혜 옹주의 출현은 당황스러웠다. 그녀를 잊고 있었다는 사실보다 그녀의 존재 자체가 언급이 된 적이 없다는 사실에 더욱 그러했다.

 

  <덕혜 옹주>를 읽고 나서 많은 사실에 씁쓸함과 충격을 받았지만, 무엇보다 그녀에 관한 책이 단 한 권밖에 없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다. 저자는 이 책의 원고를 완성하고 났을 때, 덕혜 옹주의 일생을 쓴 일본인의 책이 출간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어 거의 책을 다시 쓰다시피 했다고 한다. 덕혜 옹주에 관한 책이 한 권도 없던 때에, 그 일본인은 우리나라의 여러 도서관에 책을 기증했다고 한다. 참으로 부끄러운 사실이 아닐 수 없었다. 그 책이 번역된 것이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너무 오랫동안 그녀를 잊고 지낸 우리가 무심해서 부끄러웠다. 일본인이 쓴 덕혜 옹주의 생애, 국내 작가가 쓴 소설 한 권이 전부라고 하니 우리가 잊고 있는 것은 그녀의 존재가 아니라 자국민으로서의 존재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덕혜 옹주에 관해서 조금이나마 알고 나니, 나의 머릿속을 온통 지배하는 생각은 안타까움이었다. 조선의 마지막 황녀로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일본에서 강제 결혼을 하지 않았더라면, 남편에게 버림받고 정신병원에 갇히지 않았더라면 하는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운명의 장난과도 같은 그녀의 일생은 어디서부터 꼬인 것인지 추적해 나갈 수 없을 정도였다. 단지 일본의 속국이 되어 버린 조선 땅을 바라보면 한탄하고, 일본인들과 친일파들의 놀음에 따를 수밖에 없다는 현실을 직시하는 것뿐이었다. 고종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지만, 고종의 죽음을 지켜보고 도저히 회복될 수 없는, 망해가는 나라를 바라보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이 그녀를 괴롭혔다.

 

  황녀로서의 위엄과 영민함, 대담함까지 모두 지녔지만 그 힘을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백성을 위해서 펼칠 수도 없는 것이 그녀의 운명이었다. 미처 뜻을 세우기도 전에 유학을 가장한 볼모로 끌려갔을 때부터 이미 그녀의 희망은 거기서 끝나 버렸는지도 모른다. 자신의 의지대로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이복형제인 영친왕이 일본에 있었으나, 어느 것도 그녀를 위로할 수 없었다. 그녀는 어머니와 함께 조선 땅에서 살고 싶었고, 지금 겪고 있는 치욕을 되갚아 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운명은 짓궂게도 그녀의 의중을 모두 피해갔다. 일본에서의 강제 결혼이 그러했고, 평범하지 않은 자신과 결혼한 남편의 애정이 식어가는 모습, 하나뿐인 딸이 조선인이라는 자체를 거부하며 그녀를 벌레 보듯 하던 일, 그녀를 감당하지 못하고 결국 정신병원에 버린 남편, 그리고 모두에게 잊힌 일들이 그랬다.

 

  그렇게 그녀의 삶이 무너지는 사이에도 그녀의 존재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고마웠다. 덕혜 옹주를 따라 온 유모나 덕혜 옹주와 혼인을 맺을 뻔 했던 박무영, 조선의 독립을 꾀하는 구국청년단들이 있었다. 모두가 덕혜 옹주를 잊어가고, 조선의 흔적을 지워 갈 때까지 그들은 타국에서 조선을 기억하고, 운명의 장난에 꺾인 사람들을 구하고자 했다. 덕혜 옹주보다 영친왕의 구출에 초점이 더 맞춰진 상황에서도 그녀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안심이 되었다. 그녀가 다시 조선으로 돌아올 때까지 헌신을 다했던 이름 모를 사람들. 실화가 바탕이 된 소설이라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허구인지 명확한 선을 그을 수 없지만 기본적인 밑바탕은 사실일거라 생각한다. 그렇게 마음먹으니 덕혜 옹주의 존재와 함께 조선을 기억하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의 울림이 들리는 듯 했다.

 

  조금 두툼한 책이어서 읽는 데 시간이 좀 걸릴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한 호흡에 소설을 읽어 버린 것과 읽고 나서 다스려지지 않는 감정 때문에 당황스러웠다. 덕혜 옹주에 초점이 맞춰지다 보니, 소설의 구성이 넓게 펼쳐지지 못하고 촘촘히 짜인 느낌은 덜했다. 덕혜 옹주의 내면과 그 주변의 상황들이 좀 더 균형을 맞추지 못하고 쓰인 것이 아쉬움으로 남기도 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덕혜 옹주의 존재감이고, 그녀의 존재가 소설로 인해 되살아나고,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기억하게 된다면 이 소설은 출간 자체만으로도 큰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한다. 덕혜 옹주의 생애를 그린 책을 구입해서 읽어보고 싶을 정도로, 그동안 그녀의 존재를 알지 못한 것이 미안했다. 그녀가 조선의 마지막 황녀여서가 아니라, 조선의 국민으로 조선을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마음을 엿보아서인지도 모르겠다. 이제라도 그녀의 재발견이 이루어져 그녀 이외에 묻혀버린 수많은 사람들을 기억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간절함이 든다. 타국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을 우리의 국민을 우리가 기억하지 않으면 누가 기억하겠는가. 씁쓸함만이 공허한 가슴을 휩쓸고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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