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무라카미 하루키 잡문집 ㅣ 비채 무라카미 하루키 작품선 1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이영미 옮김 / 비채 / 2011년 11월
평점 :
콘래드의 소설이 우리를 실제로 아프리카의 깊은 정글 속으로 끌고가듯이. 그러나 우리 모두는 언젠가는 책장을 덮고, 현실로 돌아와야만 한다. 우리 모두는 픽션이 아닌 다른 곳에서 현실세계와 마주선 우리 자신을, 아마도 픽션과 힘을 상호교환하는 형태로, 완성해가야만 한다. 235쪽
소설과 현실 세계를 적절하게 오가게 해주는 작가 가운데 하나는 하루키가 아닌가 싶다. 그의 소설을 읽다 현실세계로 돌아오고 싶으면 그의 에세이를 읽는다. 소설 속의 절제된(왠지 모르게 하루키 소설 속의 인물들이 절제되어 있다는 생각이 든다) 모습을 벗어나면 나와 같이 숨 쉬고 살아가는 저자를 만난다. 그러나 그런 만남이 글로 한정되어 있듯이 ‘잡문집’이라 이름 붙인 이 책에서 정말 다양한 저자를 만났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글과 미발표 글을 나름대로 분류해서 엮어서 만든 두툼한 이 책을 읽으면서 굉장히 많은 저자를 만난 느낌이었다.
처음엔 순서대로 서문과 해설에 관한 글을 읽다가 읽히지 않아서 오랫동안 덮어뒀다. 그러다 읽히지 않는 부분은 제쳐두고 읽고 싶은 부분부터 읽었더니 재미있었다. 제목처럼 다루고 있는 이야기가 많아서 다 읽고 났을 땐 저자를 굉장히 오랫동안 지켜본 것 같은 기분이 들 정도였다. 지금까지 글을 쓰며 살아온 시간을 한번 되돌아 본 것이랄까? 글 쓰는 것에 대해, 좋아하는 재즈에 대해, 그 외 삶의 잡다한 이야기를 듣다보니 번외를 읽는 것 같은데 실은 그것이 지금껏 저자를 두둑하게 지탱했던 중심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것 같았다.
그건 아니지, 마살리스 씨. 그런 표현은 정당하지 않아. 재즈라는 음악은 이미 세계 음악 속에서 확고한 시민권을 얻었고, 그것은 달리 말해 세계 시민의 자산으로 기능하고 있다는 뜻이지. (중략) 물론 흑인 뮤지션이 핵심 추진 세력으로 크게 경의받아야 하는 건 틀림없는 사실이고 그 역사 또한 절대 간과되어서는 안 되겠지. 그러나 그들만이 그 음악의 유일한 정통적 이해자요 표현자이며 다른 인종은 그곳에 낄 틈이 없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너무나 오만한 논리이자 오만한 세계관이 아닐까. (144쪽)
저자가 재즈를 좋아하는 사실은 익히 알고 있지만 내가 아는 재즈는 깊이가 너무 얕아 좋아하기도, 싫어하기도 힘들었다. 그러다 이 문장을 읽고 재즈를 정말 좋아하고 나름대로의 세계관이 있다는 인지가 되었고, 책을 읽다 궁금한 재즈 음악을 찾아 들으면서 느긋하게 책을 읽어 나갔다. 읽고 싶은 만큼 읽고, 공감할 수 있는 부분에서 감동하고, 언급된 책들을 찾아서 읽다 보니 더 많은 세계를 만난 듯 했다. 번역에 관한 부분을 읽다 그가 좋아했던 작가들의 작품을 책장에서 빼왔다. 카버, 샐린저, 폴 오스터의 책을 꺼내놓고 조금씩 읽자 내 책장에서 잊혀지고 있던 작가를 다시 재조명해주는 것 같아서 고마웠다.
소설을 쓴다는 것은 다시 말해 이야기를 만드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야기를 만드는 일은 자기만의 방을 만드는 것과 비슷합니다. 방을 마련하고, 그곳으로 사람들을 불러 편안한 의자에 앉히고, 맛있는 음료를 내놓고, 상대가 그곳을 아주 마음에 들게 하는 것. 마치 자기만을 위한 장소인 것처럼 느끼게 하는 것. (445쪽)
저자는 그런 방을 꾸준히 만들고 있다. 그리고 앞으로 그가 만들어 낼 방을 기대하며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생각건대, 우리는 우리를 물어뜯거나 찌르는 책만 읽어야 한다. 책은 우리 안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트리는 도끼여아만 한다.’는 프란츠 카프카의 편지를 인용해 저자가 쓰고자 하는 ‘책의 일관된 정의’를 더 느껴보고 싶기도 하다. 다소 과격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읽는 이의 바다를 깨트리는 일은 굉장한 일이라 여겨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