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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령 - 상 ㅣ 열린책들 세계문학 57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김연경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악령』 상권을 읽은 지 2년 8개월이 지나서야 하권을 꺼내들었다. 보통 상, 하권이 분리되어 있는 책을 읽다 말았을 때는 포기하거나, 다시 처음부터 읽는 게 대부분이다. 나 역시 상권만 읽고 하권을 꺼내들지 못한 책이 여러 권이고, 긴 장편소설을 읽다 중단한 채 여전히 대기 중인 책도 있다. 그렇게 긴 시간이 지났음에도 상권을 다시 읽지 않고, 혹은 읽기를 포기하지 않고 하권을 꺼내들었던 것은 도스또예프스끼 작품이었기에 가능했다.
도스또예프스끼의 전집을 접하면서부터 꼭 2독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빨간색 전집도 힘겹게 모았지만 무선으로 된 보급판 전집도 겨우 한질을 완성했다. 출판사에서 기존의 전집이 절판시키고 한정판을 준비하던 시기에 전집을 만난 터라 우여곡절이 많은 책이 되어 버렸다. 1독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2독을 하겠노라 마음먹고 보급판 전집을 모았고, 2년 8개월 만에 하권을 꺼내드는데 굉장한 용기가 필요했음에도 오히려 더 마음이 편한 부분도 있었다. 2독할 때 제대로 읽자는 심정이 어느 정도 내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저런 편안한 마음으로 하권을 꺼내들었음에도 당연하게도 상권의 줄거리가 세세하게 생각이 나지 않았다. 줄거리 요약을 다시 읽고 하권을 읽기 시작했는데 스무 명이 넘는 등장인물은 헷갈리기 시작했으며 저자가 만들어놓은 그들 각각의 성정이나 특징들이 온전히 각인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오랜 공백이 무색할 정도로 도스또예프스끼의 작품은 너무 재미있었다.
도스또예프스끼의 작품은 어렵다는 편견을 나또한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전집을 마주하기 전까지 매력을 알 길이 도통 없었다. 우리에게 익숙한 『죄와 벌』도 고등학교 때 읽고 너무 어려워 치를 떨었고, 전집을 순서대로 읽으면서 도스또예프스끼 작품을 새롭게 보게 되었고 제대로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제대로 읽는다는 것이 도스또예프스끼가 작품을 쓰게 된 배경과 각각의 사상들을 낱낱이 알게 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오히려 아무 생각 없이 즐겁게 읽을 수 있었다는 얘기다. 『악령』 하권을 읽으면서 잠시 잊었던 도스또예프스끼만의 매력을 되찾게 되었고 총 천 페이지가 넘는 책을 나름 정독하며 재밌게 읽을 수 있었던 밑바탕이 만들어졌다.
도스또예프스끼 전집을 읽던 흐름이 쭉 이어지지 않아 전체적인 분위기를 제대로 설명할 순 없지만 『악령』은 그야말로 잔인하고 냉정하며 범죄가 가득한 작품이 아니었나 싶다. 이 소설의 중심인물인 스따브로긴을 선두로 그와 일당이라고 할 수 있지만 모두 제각각인 5인조의 행동만 지켜보더라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소설의 등장인물이 22명인데 12명이 파멸해 버리는 것만 보더라도 살인과 사건, 자살이 난무했음에도 무덤덤하게 지켜볼 정도였다. 천 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소설의 양도 그렇지만 수많은 등장인물과 그들이 나눈 세세한 대화 사건의 전개 등을 미뤄볼 때 소설의 내용을 간략하게나마 요약하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작품을 읽는 동안 깨달았다. 또한 이 소설이 굉장히 산만한 소설로 평가되는데 상권과 하권의 긴 공백을 가진 나로써도 하권을 읽으면서 한참을 헤맸었다. 그럼에도 전체적인 분위기를 파악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저자의 문체에 매료되어 읽기를 멈출 수가 없었다.
저자의 작품의 매력이 뭐냐고 물으면 존경이라곤 할 수 없는 찌질 한 인물이나 궁핍하고 고난에 찬, 궁지에 몰린 등장인물들이 나옴에도 그들의 내면을 드러내는 장황한 대화와 소소한 일상과 사건들에 눈을 뗄 수 없다는 점이다. 서로의 대화를 정독해도 산만함과 부산스러움, 지나칠 정도로 세세한 묘사 때문에 그 대화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할 때가 있음에도 읽는 순간만큼은 재밌게 그들의 내면으로 들어간다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그들이 속 시원하게 모든 것을 드러내지 않고 후에 생각지도 못한 행동을 한다든지 자신들도 의아하게 생각하는 엉뚱한 언변을 해도 이상하게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도스또예프스끼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이기에 가능하다는 알 수 없는 수긍을 하게 되는 것이다.
옮긴이는 『악령』의 매력을 '주인공과 여타 인물들이 지닌 <마력>에 있다.' 라고 하면서 '그들은 자신을 먹어 치운, 혹은 자신이 집어삼킨 관념들과 함께 자살하거나 살해당한다. 그러니까, 『악령』에서는 관념이라는 마귀를 쫓아 내줄 신이 결코 등장하지 않으며, 마귀와 한 몸이 된 인물들은 그들의 물리적 생이 중단되지 않는 한 <홀림> 혹은 <들림>의 지옥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했다. 그야말로 비극적인 작품인 『악령』은 등장인물들이 하나하나 파멸해 가는 모습, 그것도 서로에게 살해당하거나 역자의 말대로 자기 반성 없이 '관념들과 함께' 자살해 버리는 인물을 통해서 인간 내면에 깃든 잔인함과 무작위성을 그대로 드러낸다고도 볼 수 있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로 스따브로긴을 들 수 있다. 역자는 스따브로긴이 이 작품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치와 특징 때문에 다른 인물들이 오히려 빛을 발하지 못한다고 말할 정도로 그의 행동과 타인에게 끼치는 다양한 영향이 너무나 굳건했다.
스따브로긴을 결코 동정할 수도 수긍할 수도 없는 이유는 그가 저지른 악행들을 공공연하게 드러내면서도 내면으로나마 자기성찰과 반성이 부족하다는 점 때문이었다. 태연자약하면서도 매몰찬 그의 행동들을 보고 있으면 정말 나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결코 독자가 분노할만한 결말을 맞이할 것 같지 않다는 인상을 주었다. 이 책의 말미에 실린 「찌혼의 암자에서」는 편집자의 권유와 압박에 의해 삭제되었는데 스따브로긴의 참회를 다루고 있어 작품을 읽으면서 가졌던 안개 속에 갇힌 스따브로긴의 내면을 좀 더 들여다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이 부분을 통해 '『악령』에서 수수께끼처럼, 혹은 내적 모순으로 읽히는 여러 부분이 완전히 해독될 수 있는 것이다.'라고 했는데 어느 정도의 해갈이 되었던 것은 사실이다.
두서없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꺼내놓았지만 상, 하권을 긴 시간에 걸쳐 읽은 탓도 있고 갈수록 도스또예프스끼 작품을 읽고 무언가를 정리한다는 것이 어렵게만 느껴진다. 결말도 중요하지만 철저히 과정에서 드러나고 즐길 수 있는 작품들이기에 그럴 것이다. 고등학교 때 『죄와 벌』을 읽을 때만 해도 저자의 이런 매력을 알 리가 없었고 왜 명작인지 의미부여에만 치우치다보니 오히려 과정에서 더 힘겨워 했던 것 같다. 이 작품을 접하지 못한 타인에게 어떤 내용인지, 읽고 난 뒤의 나의 느낌이 어떤지 세세하게 전하지 못해도 전혀 아쉬움을 느끼지 못하는 이유다. 독자 자신이 온전히 작품 속에서 과정을 만끽해야 하기 때문이다. 도스또예프스끼의 작품을 처음 접했던 나처럼 의미부여를 위해 어려운 작품이라는 편견을 가지지 않은 채, 온전히 있는 그대로 많은 사람들이 도스또예프스끼의 작품의 매력을 느꼈으면 하는 게 나의 바람이라면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