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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와 집짓기 - 마흔 넘은 딸과 예순 넘은 엄마의 난생처음 인문학적 집짓기
한귀은 지음 / 한빛비즈 / 2014년 1월
평점 :
절판
자면서 꿈을 자주 꾸는 나에게 단골 공간은 집이다. 내가 자라고 지금은 엄마 혼자서 지키고 계시는 집. 그런데 이상하게도 꿈에서 나온 집의 모습은 집을 수리하기 전인 아주 허름하고 기억도 잘 나지 않는 구조의 집이다. 왜 그런 집의 모습이 자꾸 나오는지 모르지만 꿈 속에서 맞이한 집은 포근하거나 다정한 모습이 아니다. 늘 어둡고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긴장감이 팽배한 분위기의 집이 늘 등장한다.
인문지리학자 이푸 투안은 공간과 장소를 구별했다. 공간이 한 개인에게 무의미한 곳이라면, 장소는 한 개인이 스스로 의미를 부여한 곳이다. 가령, 우리의 기억 속에 있는 어떤 사건이나 감정과 연관되어 있는 곳은 공간이 아니라 장소이다. 그래서 삶은 장소 만들기의 과정이다. 자기만의 안온한 장소가 있는 사람은 행복하고 따뜻한 사람이다. (20쪽)
이 문장을 읽고 나니 늘 뚜렷하지 않은 기억 속에 자리한 무의식이 장소로 인해 드러난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래서 내가 기억하고 싶은 대로 기억하는 과거의 일이 장소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고 생각하자 오랜 궁금증이 풀리는 듯 했다. 나에게 ‘안온한 장소’가 있을까? 늘 나만의 서재를 꿈꾸었지만 넘쳐나는 책 때문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어 나만의 온전한 장소는 아직 갖지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책으로 둘러싸인 방에서 이렇게 책을 읽은 느낌을 남길 때면 이 순간, 이 공간이 무척 소중하게 느껴진다.
일 년 반 동안 세 번의 이사를 하면서 나의 집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의 집이라는 게 널찍한 아파트의 꼭대기 층, 다락방이 있는 그런 곳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졌을 뿐 전원주택을 지을 생각은 꿈에라도 가지지 않았다. 잡지나 텔레비전을 통해서 보는 멋진 집들은 나와는 거리가 먼 얘기라 치부하고 타인이 지어놓은 공간에 대강 맞춰 살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일단은 집을 지을 경제적 능력이 안 되고 이런저런 이유로 도시를 떠날 수 없기 때문이다. 나중에라도 집을 짓고 싶다는 생각은 모호하게 하고 있지만 과연 그 일이 실현될 수 있을지 어떨지는 알 수 없다.
그런데 여기 꿈을 이룬(?) 분이 있다. 이 책 속에 집 짓는 과정이 모두 담겨 있는 저자의 엄마다. 자식들 다 키워놓고 나만의 집을 짓고 싶다는 소망을 가진 평범한 대한민국 엄마의 표본일지 모르지만 정말 그런 꿈이 이뤄지자 적극적으로 참여하신 분이다. 오로지 엄마의 마음에 드는 집을 짓는 과정은 우여곡절도 많고 짓고 보니 소소한 문제점들도 발견되었지만 이런 집을 지을 수 있다는 게 참 부러웠다. 나라면 엄마 마음에 드는 집을 지으라고, 엄마가 적극적으로 참여해도 되니 맘대로 해보라고 할 수 있는 배짱이 있을까? 거기다 엄마의 방을 만들어 줄 배려를 가질 수 있을까? 저자는 엄마에게 이 모든 것을 다 허락(?)했다. 오래 살던 곳을 떠나 오로지 딸이 있다는 이유로 삶의 장소를 옮긴 부모님께 할 수 있는 선물이자 배려였다.
애정만이 좋은 부부의 요건은 아니다. 애정보다 중요한 것은 존중이다. (23쪽)
부부가 각방을 쓴다는 게 이해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나 또한 아이가 태어나면서 자연스레 각방을 쓰게 되었는데 각방을 쓰고 보니 장단점이 판이하게 드러났다. 단점은 남편의 숨소리, 곁에 있다는 든든함을 매일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고 장점은 아이가 잠든 후에 혼자 독서등을 켜고 책을 읽거나 리뷰를 쓸 수 있다는 점이었다. 그래도 밤이 되면 각자의 방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너무 쓸쓸해 난방비도 아낄 겸 한방을 쓰자 해서 얼마 전에 남편이 다시 안방으로 옮겨왔다. 거의 10개월만이었다. 같은 공간에 누워 있다는 안정감은 있지만 개인 생활이 사라졌다는 불편함이 바로 생겼다. 그래서 아이가 잠들면 몰래 빠져나와 거실에서 책도 보고 배고픔을 달래지만 아이의 곁에서, 따뜻한 방에서 즐기던 독서가 벌써 그리워진다.
엄마와의 집 짓는 과정을 보면서 이런 생각까지 할 수 있는 건 집의 형태에 대한 이야기만 하고 있지 않는데서 오는 다양함이다. 사진을 첨부하고 이렇게 지어졌다는 나열만 되어 있다면 그저 엄마에게 집을 선물하는 몇몇에게만 특별한 이야기가 되어버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저자는 집 짓는 과정을 통해 엄마의 이야기, 집이 완성되어 가는 이야기, 그 속에서 끌어낼 수 있는 다양한 이야기를 함께 곁들인다. 곰곰 생각하며 문장을 곱씹게 되는, 오랜 사유에서 나왔다는 것을 알아챌 수 있는 적당한 무게감을 느낄 수 있는 글이었다.
그래서인지 하나의 집이 완성되어 가는 과정을 글과 사진으로 모두 보았음에도 이 책을 덮고 난 후에 나에게 남은 건 특별한 것도 ‘집’이라는 공간 자체에만 얽힌 기억만 남은 것도 아니었다. 부정의 의미보다 저자가 조근조근 들려주는, 집을 중점으로 퍼져나가는 삶의 많은 이야기(부모님, 아이, 성장과정, 현재의 모습 등)를 만나서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이푸 투안의 말처럼 이 책 속의 집은 나에게 가상의 장소이기 때문에 이른 느낌을 가지는 것도 무리가 아닐 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문득문득 이 집이 떠오르는 것은 오로지 엄마가 마음에 드는 방식으로 지어졌다는 점일 것이다. 아직까진 상상 속에서 내가 갖고 싶은 집을 지을 수밖에 없지만 역설적이게도 집이라는 것이 꼭 멋들어지게 지어야만 나만의 공간이 생기는 것이 아님을 느끼게 된 것도 사실이다. 나에게 집이란 어떤 공간이지, 이 공간에서 나는 과연 행복한지, 함께 생활하고 있는 가족에게 어떠한 기억을 마련해 줄 것인지 그런 고민만 해도 벅차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