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nowcat in New York - 혼자 놀기의 달인 Snowcat 뉴욕에 가다
권윤주 글 그림 / 열린책들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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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상태에 따라 생각하는 것도 보이는 것도 달라지는 것을 알고 있다. 특히 나에겐 흔치 않은 여행이 그럴 때가 많다. 어떤 걱정도 없이 여행을 즐길 때면 모든 것이 여유롭고 평화스럽고 불쾌한 일이 있더라도 그럴 수도 있다며 수월하게 넘어간다. 하지만 조그만 걱정이 마음을 비집고 오기라도 하면 여행의 즐거움은 찾기 힘들어진다. 모든 것이 시큰둥하고 정신은 딴 데 팔려 있고 여행지를 떠나 내가 속한 곳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두려움이 이는 찜찜함. 그런 기분 따윈 느낄 겨를도 없이 정말 한곳에 오래 머물며 구석구석 내 발자국을 남기는 것. 그것이 요즘에 내가 가진 여행에 대한 소망이다.

 

  가고 싶은 여행지를 꼽으라고 하면 두루뭉술하게 유럽이라고 말한다. 언어의 장벽은 유럽 쪽도 마찬가지나 미국을 비롯한 북아메리카 쪽은 뭔가 구미가 당기지 않는다. 하지만 나보고 몇 달 동안 그곳에 머물러 보라고 한다며 선뜻 그러마고 느긋한 마음을 가진 채 언어의 장벽도 뛰어 넘을 수 있을 것 같다. 스노우캣이 머문 뉴욕을 보니 더욱 그런 욕심이 강해진다. 도시 구석구석을 누비며 추억을 남기고 어울리고 그 안에 속했던 시간들. 그 시간들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이미 내가 그곳에 머물다 온 것처럼 설렘과 포근함이 가득했다.

 

  타인에게 보여주기 위한 허세가 내 안에도 내재하므로 커피숍에서 내 입맛에 맞지 않는 쓰디 쓴 아메리카노를 마시면서도 그 분위기를 즐기곤 한다. 더불어 다리를 꼬고 책까지 들고 있으면 말 그대로 허세 가득한 여자가 되어 버리지만 그런 허세를 부려 본적이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결혼과 임신, 출산, 육아에 치이다보니 어쩌다 가끔 그런 여유를 부리러 커피숍에 들어가도 아이의 상태가 변할까 허겁지겁 차를 마시고 나오기 바쁘다. 그래서인지 이 책을 보면서 이런 여행을 더 갈망하게 되었고, 여행이 아닌 잠시만이라도 현지인으로 살아볼 수 있다면 좋겠다고 소망했다.

 

  낯선 사람들과 섞여서 마시는 차와 식사. 내 발자국을 남기며 돌아다니는 골목들. 읽지 못하더라도 서점과 도서관에서 책 냄새를 맡고, 공원 벤치에 앉아 요기를 하고 책을 보고, 잔디밭에 벌러덩 누워 광합성을 하며 낮잠을 자는 것. 이 모든 것을 뉴욕에서 즐긴다고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벅차오른다. 거기다 내가 한때 미친듯이 좋아했던 음악을 이어폰이 아닌 공연으로 만날 수 있다면 그 뿌듯한 삶의 기쁨을 무엇으로 표현할까? 저자처럼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사진을 잘 찍는 것도 아니지만 마음속으로라도 맘껏 간직하고 싶은 상상이었다.

 

  그런 상상을 맘껏 하면서도 저자가 자세히 그려놓은 지리라던가 뉴욕의 풍경들은 지리적 감각이 제로인터라 공감각으로도 온전히 느끼긴 조금 힘들었다. 아마 내가 혼자 그렇게 돌아다녔다면 언어의 장벽에 부딪혀 헤맸을 게 뻔하고 그래서 더더욱 지리적 감각을 키울 생각은 하지 않았을 거다. 그래서 온 뉴욕을 누비고 그대로 전해준 저자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이 책을 보는 것만으로도 뉴욕에 갈 수 없음에 절망하지 않고 내가 뉴욕에 조금이나마 가까웠다는 사실에 기뻐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얽매인 게 많아 자유롭게 홀연히 여행을 떠나지는 못하지만 종종 현실의 갑갑함이 짓누를 때 이 책으로나마 뉴욕으로의 여행을 해보려고 한다. 호사를 더 부려 본다면 음악을 들으며 카페에 앉아 다리를 꼬고 바닐라라떼를 마시며 삶에 치이지 않은 척 해본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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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엄마 찬양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지음, 송병선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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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탈레온과 특별봉사대』에서의 저자의 능글맞음을 기억한다. 판탈레온 대위를 앞세운 진지한 능글맞에 반해 저자의 모든 작품을 섭렵하고 싶을 정도였다. 이후에『나쁜 소녀의 짓궂음』을 읽으며 전작과는 또 다른 분위기를 느꼈고『새엄마 찬양』을 통해 에로티즘의 끝을 본 것 같았다. 이미 우리 사회에 공공연하게 드러나 있지만 감추고 싶어 하는 성(性)에 대해 이렇게 노골적이고 저돌적인 작품을 만난적이 있었을까? 직설적이면서도 그림과 함께 엮어가는 몽롱한 이야기는 이 소설의 주인공 새엄마 루크레시아, 의붓아들 알폰소, 남편 리고베르토와 교묘하게 얽혀 들어간다. 따로 장(章)을 마련해 그림 이야기, 그림에 관한 이야기를 장황하게 늘어놓는 배치는 소설속의 인물들과 흡사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 같았다.

 

  리고베르토 씨는 새 아내 루크레사의 육체와 성적인 매력에 반해 결혼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마흔을 맞은 그녀는 성적인 매력을 전혀 잃지 않았고 오히려 그들은 매일 밤 쾌락을 즐기며 새로운 결혼생활에 만족감을 얻는다. 혹시나 그들 사이를 불편하게 하진 않을까 걱정하게 되는 알폰소도 새엄마를 찬양할 정도로 좋아하며 평온한 관계를 맺어간다. 하지만 그러한 일상이 진행될수록 안정되는 느낌이 아니라 오히려 무언가 꾹꾹 누르며 뻥하고 터질 기회를 엿보는 긴장감이 팽배했다.

 

단지 성만을 다루는 작품은 그다지 매력이 없다. 그런 작품은 활력이 없기 때문이다. 인생은 단지 성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인생을 오로지 성으로만 다루는 작품은 너무 인위적이다. (238쪽, 해설)

 

  저자는 성만 다루고 있는 작품의 인위적인 면을 지적했듯이 새엄마와 사춘기 의붓아들의 근친상간을 다루고 있으면서도 특유의 발랄함과 능글맞음, 도무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우아한 분위기를 잘 끌어내고 있었다. 알폰소의 무지한 순수함이 새엄마의 긴장감을 무너뜨리게 하고 결국에는 그것이 계획된 영악함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지만 알폰소를 미워할 수도, 새엄마를 탓할 수도 없는 교묘한 분위기가 되어 버린다. 근친상간은 어떤 식으로든 용납할 수 없기에 그들이 새롭게 꾸렸던 가정이라는 울타리를 결국 깨진다. 이 모든 것이 알폰소의 계획이었음을 깨닫는 순간 허무함이 밀려오기 보단 저자가 여기저기 배치해 놓은 그림에 관한 전설, 그들이 만들어 내고 있는 현실이 얽혀 그냥 수긍해 버리는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 소설의 특징인 경계 허물기’의 예를 보여주듯 소설 속의 인물들과 또 다른 이야기를 통해 저자는 내용도 완전히 섞어 버리는 허물기를 보여주는 듯했다. 어떤 것이 전설이고, 어떤 것이 허구인지를 구별하지 못할 만큼 몽롱한 분위기 속에서 성에 대한 다양한 면이 부각되었다. 성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는 속내를 들여다보듯 거부감이 들지 않으면서도 그럴듯하게 포장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성에 대해 낱낱이 까발리는 듯했고 밝다 못해 아름답게 미화되는 저자 특유의 문체와 구성 속에 빨려 들어갔다.

 

아이의 수준에서든, 어른들의 빈약한 환상의 수준에서든, 위선의 가면을 벗기는 상징이자 도구로 작용한다. (246쪽)

 

  ‘위선의 가면을 벗기는’ 과정을 저자는 이 작품을 통해 꼼꼼히 해 나갔다. 그래서 불편한 내용을 읽으면서도 어둠으로 침잠하지 않았고 내가 가진 성에 대한 잘못된 인식과 편견을 깨기도 했다. 성을 드러내는 것도 감추는 것도 어느 쪽이 옳다고 말할 순 없지만 이 작품을 통해 그간 우리가 숨기고 타락시켰던 성이 무조건 나쁘고 불편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새로이 심어 주었다. 드러내고 숨기기 전에 올바로 전하는 것이 먼저라는 것, 온전히 쾌락과 추구만을 위한 도구로 사용하지 말자는 조금은 진부한 교훈(?)을 이끌어내며 소란스럽고 장황하고 어리둥절했던 이 소설을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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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아와 새튼이 - 한국 최초 법의학자 문국진이 들려주는 사건 현장 이야기
문국진 지음 / 알마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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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의 강연회를 들은 적이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법의학자로서의 고충과 사건현장에서의 에피소드들을 무척 재밌게 들었었다. 법의학자가 무슨 일을 하는지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모르던 내게 관심을 갖게 만든 건 드라마 <싸인>이었다. 배우 박신양의 열연 속에 법의학자의 중요성을 알게 되었고 열악한 환경 속에서 묵묵히 자기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렇게 관심을 갖고 있을 즈음 저자의 인터뷰집을 읽게 되었고 절판되었던 이 책도 만나게 되었다.

 

  오래전에 출간되었지만 절판되었던『지상아』『새튼이』두 권의 책 중에서 의미심장한 글들을 골라 한권으로 묶인 책이 이 책이다. 주제별로 사건을 들려주고 어떻게 해결했는지를 들려주고 있는데 이런저런 의의를 떠나 일단 한번 잡으면 놓을 수 없을 정도로 흥미진진하다. 이러한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겠지만 일어난 사건들 속에서 법의학자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새삼 느끼게 해주었다. 또한 사건의 현장만 잘 살펴도 어떠한 이유로 사망을 했는지, 타살이라면 범인의 흔적은 무엇이 남겨져 있는지를 알아채는데 중요하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런 사건 속에 저자의 경험과 지식이 얽히면서 감탄할 정도로 사건이 풀리는 것을 보면서 신기하기만 했다.

 

  이 책에는 총 5부로 나뉘어 여러 사건을 다루고 있는데 안타깝고, 어이없고, 말도 안 되는 사건들이 참 많았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재를 비롯한 과거에 이러한 일들이 일어났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진실을 규명하기 위해 저자가 했던 노력들이 고스란히 전해져와 그 노고에 감탄하면서도 힘들고 어려운 일이라 많은 사람들이 자원하지 않는 것에 안타까움을 느끼기도 했다.

 

  어쩌면 이 순간에도 억울한 일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며 그런 사람들을 위해 묵묵히 일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억울한 죽음을 당하고 그 사연이 알려지지 않는 사연이 얼마나 많을까 생각하면 삶이 참 허무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미 벌어진 사건들이라 흥미롭게 읽긴 했지만 차라리 이 모든 이야기들이 허구였으면 좋았을 거란 생각이 들 정도로 삶의 어두운 이면을 보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신념을 가진 채 타인을 돕는 일을 하는 분들이 새삼 대단해 보였다.

 

  한편으로는 이런 일이 힘들어서 자원하는 사람들이 적은 게 아닌, 이러한 사건들이 많지 않아 자원자가 없었으면 하는 바람도 일었다. 분명 경험이 풍부한 관록을 가진 자가 있어야 그 분야의 발전을 위해서 좋긴 하지만 풍부한 경험을 가지도록 사건들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간절했다. 저자는 초동수사의 중요성, 그리고 법의학자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내내 강조하고 있다. 억울한 죽음이 발생하지 않는 것. 그것이 법의학자의 사명이므로 그런 시선에서 이 책을 읽어준다면 오로지 재미로만 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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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을 쫓는 모험 (상) - 개정판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신태영 옮김 / 문학사상사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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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명 '쥐' 시리즈인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부터 『댄스 댄스 댄스』까지 읽는 동안 이 작품이 가장 재미있었고 완성도가 높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인의 말처럼 이 작품을 만나기 위해 마치 앞서 두 작품을 거쳐 온 것만 같았다. 어김없이 주인공 '나'가 등장했고, 한통의 편지로 시작된 양 사나이를 쫓는 모험은 기묘하고 신비하면서도 하루키답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하루키 첫 작품으로 『상실의 시대』를 택해 두고두고 후회한다는 말을 자주 했었다. 하루키 작품을 전혀 모르던 20대 초반의 어린 나에겐 적응하기 힘든 작품이었고 이어 『1Q84』를 읽고 나서도 하루키 작가에 대한 거리는 좁혀지지 않았다. 특이한 소설이고 독특한 소재다는 생각만 들뿐 하루키 문학 전반을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초기작을 읽고 보니 하루키 문학의 흐름과 변화를 이제야 조금이나마 감지하게 된 것 같다. 

 

  그 바탕에는 이 작품이 있었다. 빅브라더와 양 사나이가 닮아있어서인지 몰라도 이상하게 읽는 내내 『1Q84』가 생각났다. 당시 그 소설을 읽을 때 '어떻게 이런 소재를 생각해 낼까?'란 의문만 들었었는데 이 작품을 읽으니 좀 더 풍부하고 정교한 소설이 『1Q84』란 사실을 인지하게 되었다. 물론 개인적인 느낌일 수도 있지만 이 작품이 발단이 되어 『1Q84』가 정점에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초기작부터 읽어나갔다면 『1Q84』를 좀 더 감탄하며 읽었을 거란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친구가 보내온 편지 속의 사진으로 인해 양을 찾는 모험이 시작되었지만 과연 그 양이 진짜 존재하는지 과연 찾지 못한다면 '나'는 어떻게 되는지 전혀 예감할 수 없었다. 너무 막막해 양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았고, '나'의 태도도 서두르기보다 결과는 신경 쓰지 않은 채 행동할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양을 찾아 떠나면서도 과연 이 모든 상황이 '나'에게 유리한 상황을 열어줄지 의문을 떨칠 수 없었다.

 

  서서히 스며드는, 양을 찾아야겠다는 목적의식은 소설을 읽는 집중도를 놓여갔고 친구 '쥐', 즉 네즈미에 관한 복선이 보이기 시작했다. 양 사나이를 만나고 양 사나이에 관한 비밀이 모두 풀렸을 때 네즈미의 죽음을 예감한 것처럼 이 모험은 단순한 양 한 마리를 찾는 모험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 안으로 들어가 그 사람을 지배하고 삶을 바꿔버리는 양 사나이. 『1Q84』의 빅브라더와 무척 닮아 있었고 다른 사람의 삶은 물론 은밀한 조직의 행보를 차단하기 위해 네즈미가 자신의 목숨과 바꿔버린 것이다.

 

  이 모든 과정이 조금 지난한 부분도 있었지만 비밀이 풀려가는 과정이 흥미진진했고 기묘한 양 사나이의 등장은 많은 생각을 들게 했다. 양 사나이에 여러 가지를 대입해 보면 현재 내가 살고 있는 사회의 병폐를 볼 수 있었고, 어쩌면 지금도 알게 모르게 이어지고 있는 수많은 욕망들의 꿈틀거림을 제대로 목도할 수 있었다. 네즈미의 선택이 불가피 했지만 그가 머물러 있던 깊은 산중의 쓸쓸한 집이 내내 잊히지 않는다. 내 마음 속에 그런 쓸쓸한 집을 가지고 있으면서, 양 사나이가 언제라도 들어와 맘껏 휘젓게 만들고 있으면서도, 그 집을 여전히 해체하지 못하는 내가 야속하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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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와 집짓기 - 마흔 넘은 딸과 예순 넘은 엄마의 난생처음 인문학적 집짓기
한귀은 지음 / 한빛비즈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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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면서 꿈을 자주 꾸는 나에게 단골 공간은 집이다. 내가 자라고 지금은 엄마 혼자서 지키고 계시는 집. 그런데 이상하게도 꿈에서 나온 집의 모습은 집을 수리하기 전인 아주 허름하고 기억도 잘 나지 않는 구조의 집이다. 왜 그런 집의 모습이 자꾸 나오는지 모르지만 꿈 속에서 맞이한 집은 포근하거나 다정한 모습이 아니다. 늘 어둡고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긴장감이 팽배한 분위기의 집이 늘 등장한다.

 

인문지리학자 이푸 투안은 공간과 장소를 구별했다. 공간이 한 개인에게 무의미한 곳이라면, 장소는 한 개인이 스스로 의미를 부여한 곳이다. 가령, 우리의 기억 속에 있는 어떤 사건이나 감정과 연관되어 있는 곳은 공간이 아니라 장소이다. 그래서 삶은 장소 만들기의 과정이다. 자기만의 안온한 장소가 있는 사람은 행복하고 따뜻한 사람이다. (20쪽)

 

  이 문장을 읽고 나니 늘 뚜렷하지 않은 기억 속에 자리한 무의식이 장소로 인해 드러난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래서 내가 기억하고 싶은 대로 기억하는 과거의 일이 장소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고 생각하자 오랜 궁금증이 풀리는 듯 했다. 나에게 ‘안온한 장소’가 있을까? 늘 나만의 서재를 꿈꾸었지만 넘쳐나는 책 때문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어 나만의 온전한 장소는 아직 갖지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책으로 둘러싸인 방에서 이렇게 책을 읽은 느낌을 남길 때면 이 순간, 이 공간이 무척 소중하게 느껴진다.

 

  일 년 반 동안 세 번의 이사를 하면서 나의 집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의 집이라는 게 널찍한 아파트의 꼭대기 층, 다락방이 있는 그런 곳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졌을 뿐 전원주택을 지을 생각은 꿈에라도 가지지 않았다. 잡지나 텔레비전을 통해서 보는 멋진 집들은 나와는 거리가 먼 얘기라 치부하고 타인이 지어놓은 공간에 대강 맞춰 살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일단은 집을 지을 경제적 능력이 안 되고 이런저런 이유로 도시를 떠날 수 없기 때문이다. 나중에라도 집을 짓고 싶다는 생각은 모호하게 하고 있지만 과연 그 일이 실현될 수 있을지 어떨지는 알 수 없다.

 

  그런데 여기 꿈을 이룬(?) 분이 있다. 이 책 속에 집 짓는 과정이 모두 담겨 있는 저자의 엄마다. 자식들 다 키워놓고 나만의 집을 짓고 싶다는 소망을 가진 평범한 대한민국 엄마의 표본일지 모르지만 정말 그런 꿈이 이뤄지자 적극적으로 참여하신 분이다. 오로지 엄마의 마음에 드는 집을 짓는 과정은 우여곡절도 많고 짓고 보니 소소한 문제점들도 발견되었지만 이런 집을 지을 수 있다는 게 참 부러웠다. 나라면 엄마 마음에 드는 집을 지으라고, 엄마가 적극적으로 참여해도 되니 맘대로 해보라고 할 수 있는 배짱이 있을까? 거기다 엄마의 방을 만들어 줄 배려를 가질 수 있을까? 저자는 엄마에게 이 모든 것을 다 허락(?)했다. 오래 살던 곳을 떠나 오로지 딸이 있다는 이유로 삶의 장소를 옮긴 부모님께 할 수 있는 선물이자 배려였다.

 

애정만이 좋은 부부의 요건은 아니다. 애정보다 중요한 것은 존중이다. (23쪽)

 

  부부가 각방을 쓴다는 게 이해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나 또한 아이가 태어나면서 자연스레 각방을 쓰게 되었는데 각방을 쓰고 보니 장단점이 판이하게 드러났다. 단점은 남편의 숨소리, 곁에 있다는 든든함을 매일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고 장점은 아이가 잠든 후에 혼자 독서등을 켜고 책을 읽거나 리뷰를 쓸 수 있다는 점이었다. 그래도 밤이 되면 각자의 방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너무 쓸쓸해 난방비도 아낄 겸 한방을 쓰자 해서 얼마 전에 남편이 다시 안방으로 옮겨왔다. 거의 10개월만이었다. 같은 공간에 누워 있다는 안정감은 있지만 개인 생활이 사라졌다는 불편함이 바로 생겼다. 그래서 아이가 잠들면 몰래 빠져나와 거실에서 책도 보고 배고픔을 달래지만 아이의 곁에서, 따뜻한 방에서 즐기던 독서가 벌써 그리워진다.

 

  엄마와의 집 짓는 과정을 보면서 이런 생각까지 할 수 있는 건 집의 형태에 대한 이야기만 하고 있지 않는데서 오는 다양함이다. 사진을 첨부하고 이렇게 지어졌다는 나열만 되어 있다면 그저 엄마에게 집을 선물하는 몇몇에게만 특별한 이야기가 되어버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저자는 집 짓는 과정을 통해 엄마의 이야기, 집이 완성되어 가는 이야기, 그 속에서 끌어낼 수 있는 다양한 이야기를 함께 곁들인다. 곰곰 생각하며 문장을 곱씹게 되는, 오랜 사유에서 나왔다는 것을 알아챌 수 있는 적당한 무게감을 느낄 수 있는 글이었다.

 

  그래서인지 하나의 집이 완성되어 가는 과정을 글과 사진으로 모두 보았음에도 이 책을 덮고 난 후에 나에게 남은 건 특별한 것도 ‘집’이라는 공간 자체에만 얽힌 기억만 남은 것도 아니었다. 부정의 의미보다 저자가 조근조근 들려주는, 집을 중점으로 퍼져나가는 삶의 많은 이야기(부모님, 아이, 성장과정, 현재의 모습 등)를 만나서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이푸 투안의 말처럼 이 책 속의 집은 나에게 가상의 장소이기 때문에 이른 느낌을 가지는 것도 무리가 아닐 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문득문득 이 집이 떠오르는 것은 오로지 엄마가 마음에 드는 방식으로 지어졌다는 점일 것이다. 아직까진 상상 속에서 내가 갖고 싶은 집을 지을 수밖에 없지만 역설적이게도 집이라는 것이 꼭 멋들어지게 지어야만 나만의 공간이 생기는 것이 아님을 느끼게 된 것도 사실이다. 나에게 집이란 어떤 공간이지, 이 공간에서 나는 과연 행복한지, 함께 생활하고 있는 가족에게 어떠한 기억을 마련해 줄 것인지 그런 고민만 해도 벅차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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