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산소리>를 읽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이가 책을 찢어 놓은 것을 발견했다. 찢은 순간을 목격했다면 아마 아이에게 엄마 책을 찢으면 어뜩하냐고 소리를 질렀겠지만 뒤늦게 발견한 뒤라 그냥 마음을 툭 놔버리고 엄마 책 찢지 말라고 주의만 주고 말았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이 책을 볼 때마다 내 마음 한구석이 너덜너덜해진 기분이다.

 

 

 

책을 좋아하면서부터 결벽증에 가까울 정도로 책에 낙서하거나 접히거나 더러워지는 걸 절대 못 봤다. 이상하게 깔끔한 성격도 아니고 정리 정돈과는 거리가 먼 나인데 책장 정리만큼은 나름대로 생각과 고집을 가지고 있다 보니 한참을 책의 겉모습에 집착하던 때가 있었다. 책을 읽다 엎어놓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고, 띠지도 소중하게 보관하며, 양장본에 달려있는 책 줄도 모양 그대로 유지하느라 가려진 글자를 유추하며 읽기도 했다. 내가 생각해도 심히 피곤한 행동이 아닐 수 없는데 그런 내 모습을 보면서 언젠가 한 번 크게 데일 것 같다는 느낌을 갖고 있었다.

 

그런 내가 책에 대해 많이 너그러워진 모습을 보면 가끔 생소하기도 하다. 스스로 예감한 것처럼 어떤 큰 계기가 있어서라기보다는 출판사에서 근무했던 경험 때문에 책의 겉모습에 많이 너그러워졌던 것 같다. 출판사에 근무하기 전까지 책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유통되는 지 그런 과정은 자세히 알지 못했다. 그렇기에 소중하게 산 책이 구겨지거나 찍혀서 오면 내 블로그에 바로 올려서 온라인 서점을 비난하면서 어이없어 했다. 다른 사람들도 동조해주니 그런 행동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물론 책이 심하게 상해서 오는 걸 달가워 할 사람은 없다. 그렇기에 교환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출판사에서 근무하면서 그렇게 반품되어 돌아오는 책들은 다시 세상으로 나가지 못하고 폐기되는 것을 보며 너그럽게 넘어갈 수 있었던 책들까지 모조리 반품시키고 비난했던 내 모습이 부끄러워졌다. 그때부터 책이 좀 상해서 오거나 구겨져서 와도 읽기에 큰 상관이 없다면, 내가 이 책을 반품하면 폐기되는 게 너무 안타까워 그냥 읽었다. 그러다보니 책의 겉모습에 대해 많이 너그러워질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여전히 책에 밑줄을 긋거나 책의 겉장으로 페이지를 표시한다거나 쫙 펴서 보는 일은 없다. 그래도 종종 읽은 곳의 페이지를 표시할 메모지가 없으면 엎어 놓기도 하고 책을 읽다 상해도 그냥 그러려니 한다. 그래서 아이가 내 책을 찢어 놨을 때도 그냥 마음을 비워버렸는지도 모른다. 여전히 아이의 손에 닿는 내 책이 거실 여기저기에 있어 아이가 마구 꺼내서 펼칠 때면 엄마 책은 만지지 말라고 단호하게 주의를 준다. 결과물에 너그러운 것과 과정에 너그러운 것은 다르기 때문이다.

 

 

 

 

*정가 3만원인 카프카의 책 등을 아주 멋지게 찢어 놨다. ㅠㅠ

 

 

 

얼마 전에는 화장실에서 보던 책을 휴지걸이 위에 놓아두고 다른 일을 하다 그대로 그 책이 변기에 빠진 일이 있었다. 다행히 깨끗한 변기라서 순간적으로 책을 바로 건져내서 수돗물에 얼른 헹구고 말렸지만 과연 그 책이 내가 아끼는 책이었다면, 지금은 출간되지 않는 책이었다면 어땠을까 상상을 하니 끔찍했다. 아마 그 책을 볼 때마다 우울해서 피하고 말 것이다. 다행히 그 책은 내가 굳이 소장해도 되지 않을 책이었고 다 읽고 난 다음에 지인에게 주려고 했던 책인데 그런 일이 있었으니 줄 수도 없어서(그렇게 큰 티가 나지 않지만) 그냥 내 책장에 보관하고 있다.

 

 

 

책이 많다보니 예전에는 책장의 책 먼지도 자주 털어주고 아끼곤 했었는데 점점 무심해지곤 한다. 장단점이 있겠지만 예전의 내 모습을 기억하기에 나에게는 좋은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책의 겉모습에 집착하지 말고 책을 읽는 과정과 내용에 더 집중하는 것. 여전히 책을 깨끗이 보는 것을 좋아하지만 아이가 찢은 책을 보고도 크게 화내지 않는 내 모습에 안도감을 느낀다. 하지만 정말 내가 좋아하는 책을 찢는다면 그 뒤는 장담할 수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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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14-12-27 1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아이도 열심히 낙서하고 책을 찢는 중이라 공감가는 글이에요.

안녕반짝 2014-12-31 02:19   좋아요 0 | URL
그래도 찢긴 책을 보면 마음이 아픕니다 ㅜㅜ
 
결혼하지 않아도 괜찮을까? 마스다 미리 만화 시리즈
마스다 미리 지음, 박정임 옮김 / 이봄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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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만 날씨가 추워도 집밖으로 나가지 않던 내가 요즘은 자주 밖에 나가고 있다. 이유는 단 하나, 햇살이 좋아서다. 게으른 나도 밖으로 이끌어내는 햇살을 볼 때마다 공원에 한가로이 앉아 차를 홀짝이며 재미난 책을 읽고 싶다는 욕망이 인다. 이제 돌 지난 아이와 함께 그 모든 것을 충족하기란 여간 벅찬 일이라 그냥 유모차를 끌고 집 앞에 나가는 정도다. 만약 내가 결혼을 하지 않았더라면, 아이가 아직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그런 여유를 즐긴들 정말 행복했을까? 자신 있게 대답은 못하겠다.

  드라마에서 결혼을 하니 뭐가 좋냐는 질문에 ‘결혼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없어서 좋다.’라고 대답하는 걸 보고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다. 20대 중반부터 남자친구가 없는 내게 주변에서 슬슬 걱정을 하기 시작했고 서른이 넘어버리자 문제가 있는 것처럼 보기 시작했다. 수도권에서는 워낙 결혼이 늦어 서른을 넘든 말든 별로 신경 쓰지 않는데 지방에서는 서른이 넘어서도 애인이 없다고 하면 큰 일이 벌어진 것처럼 군다. 그리고 사람을 달달 볶아대는데 그 잔소리를 견뎌내기란 쉽지 않다. 서른두 살에 결혼을 하고 일 년 후 아이를 낳고 나자 그제야 조금 안도감이 들긴 했다. 그럼에도 뭔가 다른 사람과 발맞추기 위해 쫓아간다는 조급함이 내게 있다는 것을 지우지 못했다.

  이 책의 제목에서 묻어나는 것처럼 내가 했던 고민들과 걱정들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결혼을 꼭 해야 하는 걸까? 나에겐 적금이 얼마나 있고, 아이를 낳아서 잘 키울 수 있으며, 노후대책은 문제없을까 등등 나이를 먹고 책임져야 하는 일이 많아질수록 그런 걱정과 고민들은 늘어만 갔다. 내가 여전히 결혼도 못하고 아이도 낳지 못한 상태였다면 엄청난 히스테릭한 상태에 빠져 있었을 거라 장담한다. 짝이 없는 모든 남자들과의 로맨스를 상상하면서도 그럴 리 없다는, 나와 상관없는 사람들이라는 결론에 도달해버리는 조울증. 아마 책 속의 인물들보다 내가 더 훨씬 건강하지 못한 생각들과 걱정들로 시간을 더 허비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 책에서 그려진 연애에 대한 걱정, 미래에 대한 불안, 나보다 먼저 결혼하고 아이를 낳는 친구들을 보며 드는 조급증, 그리고 유서 써보기는 내가 경험해 본 것들이었다. 그런데 결혼이라는 인생 2막을 시작하자 결혼 전에는 절대 알 수 없었던 새로운 걱정거리들이 찾아왔다. 가정이라는 공간에 아내, 엄마, 며느리, 딸이라는 틀에 속박되어버리는 반자유가 그랬다. 반대로 그로인해 결혼 전에는 알 수 없었던 행복을 맛보기도 하지만(남편이 내 곁에 있다는 것이 행복하고 반대로 내 옆에 있음으로 밉기도 하며 아이가 태어나자 너무 너무 사랑스럽고 이 아이를 잘 키울 수 있을까 하는 걱정거리 등) 결혼 전으로 돌아간다 해도 현재의 내 모습을 변화시킬 무언가는 없을 것 같다. 그래서 잔잔하면서도 섬세하게 파고드는 인물들의 내면 이야기들이 뭔가 찡하고 울림이 왔다. 이미 그런 과정을 거쳐 왔고 그 다음 단계를 살아가고 있는 나여서 그런지 청승맞아 보이기보다 건강한 고민과 자기성찰로 느껴졌다.

  잠든 아이 곁에서 이 책을 읽었다. 그러면서도 책 속에 마음을 뺏겨 내가 한 남자의 아내이고 한 아이의 엄마라는 사실을 잠시 잊었다. 몇 번이고 멈춰서 반복해서 읽고 잠시 다른 생각을 하게 되는 순간들이 많았다. 모두 공감을 이끌어낸 순간들이라 생각한다. 그럼에도 그 부분을 이곳에 옮기지 않은 이유는 그런 순간들을 옮긴 순간 그런 상황에 놓여있던 나로 깊이 빠져 들까봐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이고 과거보단 미래를 보아야 할 상황이기에 지나온 상념들에 너무 깊이 묻히지 않으려고 한다. 그러기 위해선 그런 과정을 거쳐 온 내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좀 더 밝게 나의 현재를 바라보는 것. 그것이 이 책을 읽고 난 내가 할 수 있는 첫 번째 일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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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나나 피시 Banana Fish 세트 - 전13권
요시다 아키미 지음 / 애니북스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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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라는 이유로 책장 맨 윗칸을 차지하고 내려올 생각을 안 하고 있던 이 책을 읽게 된 건『바닷마을 다이어리』때문이었다. 다음 책 출간을 기다리자니 일정을 알 수 없었고 우연히『바나나 피시』의 작가였다는 것과 어떤 내용인지도 모르고 이 책을 선물 받고 책장 맨 윗칸에 올려놓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힘겹게 책을 꺼내 1권을 읽자마자 전혀 내 취향의 책이 아니라는 사실을 간파했다. 베트남 전쟁이 잠깐 나오더니 마피아의 세계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도 모자라 폭력, 죽음, 동성애의 성폭력 등 피하고 싶은 주제들만 잔뜩 나왔다. 도저히『바닷마을 다이어리』의 작가라고 연관 지을 수 없을 만큼 자극적이고 상반된 내용이었다.

  이 책을 내게 선물한 이는 주인공의 얼굴이 점점 변해가는 것이 좀 티가 나지만 그 변화를 지켜보는 것도 재밌고 나름 흡인력이 있다고 했다. 정말 1권에서 주인공 애시의 얼굴은 각지고 성장 중인 소년의 울퉁불퉁한 모습이었다면 점점 얼굴의 선이 부드러워지고 만화주인공(?)같은 얼굴로 변모해갔다. 처음 그런 얼굴을 보며 예쁘게 생겼다느니 해서 어리둥절했지만 뒤로 갈수록 뭔가 그림들이 탄탄해져 가는 것 같아 그런 변화를 감지할 수 있어 그러려니 하기로 했다. 게다가 내가 분명 좋아하지 않는 소재임에도 불구하고 흡인력이 있었다는 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깊은 밤, 아이를 재워놓고 며칠 동안 거실에 배를 깔고 누워 이 책을 쌓아놓고 읽었다. 잠시 고개를 들어 현실을 인지하면서 ‘왜 내가 이 책을 이렇게 읽고 있을까?’ 스스로 질문을 던질 정도로 뒤의 이야기가 궁금해서 읽기를 멈출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이 책의 내용은 나에게 썩 유쾌했다고 말 할 수 없다. 책 속에 등장하는 주요 소재들이 다른 문학에서 이미 보아온 낯선 것이 아님에도 그 모든 것을 모아놓자 어둠의 세계를 경험한 듯 기운이 빠져 버렸다. 베트남 전쟁당시 ‘바나나 피시’라고 외치며 총을 난사해 동료를 죽이고 정신이상에 빠져버린 형 대신 복수하고자 마피아의 세계로 빠져든 똑똑하고 잘생기고 능력 있는 17세 소년 애시. 수려한 외모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뛰어난 사격 실력으로 수많은 사람을 죽인 인물이기도 하다. 도저히 17세의 소년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의 환경에서 살아가고 있으며 역시나 특이한 마음의 상처를 가지고 있다. 총질을 해대며 영역다툼을 하고 돈과 권력을 위해 해서는 안 될 일까지 해가는 모습은 그렇다 쳐도(어디까지나 만화니까) 동성애에 관한 부분은 가장 보기 불편했다. 어린 남자아이들에게 가해지는 성폭력, 그리고 그런 취향을 가진 사람들의 등장, 노골적으로 그런 성향을 드러내는 사람들이 아무리 만화라지만(그렇다고 영역다툼하다 생명을 잃는 일, 양심에 어긋나는 일들이 만화라도 참을 수 있다는 얘기는 아니다.) 보기 불편했다.

  냉철하고 피도 눈물도 없을 것 같은 소년 애시도 일본에서 날아온 에이지에게만은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준다. 누군가에게 특별한 한 사람이 있다는 것은 축복이지만, 그게 꼭 남자여야 했는지, 이 만화에서 여자의 등장이라곤 손가락에 꼽을 정도라 당연하게 여겨지는 분위기가 적응하기 힘들었다. 신파적으로 나가자면 에이지는 전형적인 나쁜 남자의 곁에 있는 아리따운 이국 소녀여야 하는데 그 역할을 애시보다 나이가 많은 에이지가 하고 있는 것이다. 에이지에게만 모든 것을 허락하고(성적인 관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관대해지고 너그러워진 탓에 수많은 위기에 봉착하고 목숨을 위협하는 위험은 물론 타인의 목숨을 빼앗는 일이 허다했다. 아무리 에이지에게 애시 옆에 있어봤자 도움이 안 된다고 말해도 마음이 곁에 있고 싶다고 하기에 늘 문제를 안고 다닐 뿐이다. 애시의 고독과 외로움을 유일하게 보듬어 줄 수 있는 사람이 에이지였기에 연약하고 보호해야만 하는 여자의 이미지가 철철 넘쳐도 어떻게 해볼 수가 없었다. 애시는 에이지를 지키고 에이지는 애시 곁에 있고 싶어 하니까. 인간의 이성까지 조종하는 ‘바나나 피시’라는 약물의 큰 문제점과 그 비밀을 둘러싼 음모와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까지 덮어 버리는 애시와 에이지의 관계는 끝까지 긴장감을 늦추지 않게 했다.

  이 책의 외전을 읽다 보니 마치 애시가 곁에 있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현실에는 없을 것 같은 인물인데 며칠 동안 주구장창 만나다 보니 어느새 정이 들었나 보다. 이왕 정이 들꺼면 에이지와 함께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았을 것을. 당시에는 험악하고 위험했던 일들이 추억으로만 되새겨져야 한다는 게 외전을 보면서 좀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나와는 동떨어진 세계이기에 현실감은 없지만 그런 세계의 존재를 알기에 어딘가에 애시가 있고 신파적이긴 하지만 에이지같은 인물이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동성애 옹호 여부를 떠나 내 모든 걸 내어줄 수 있는 사람과 함께 오래할 수 있다는 것. 애시가 그토록 애쓰며 내내 지키려고 했던 건 아마 그것이 아니었을까? 그런 사람을 만났다고 믿었기에 결혼까지 하고 그 사이에 사랑하는 아이까지 낳았음에도 과연 현재의 나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애시의 부재 뒤에 나에게 던져진 당황스런 질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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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의 위스키 성지여행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이윤정 옮김, 무라카미 요오코 사진 / 문학사상사 / 200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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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의 장점이자 단점은 글쓴이의 감정 상태가 그대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마음 상태가 고르지 못하고 삐딱하게 바라보며 쓴 글은 읽는 이의 마음도 불편하게 만든다. 반면 상쾌하고 기분 좋게 쓴 글은 주제를 떠나 읽는 이의 마음까지 환하게 만든다. 하루키의 에세이를 연달아 몇 편씩 읽고 있지만 여행에세이는 세 번째였다. 하루키를 따라 여행을 하다 보니 책의 권수가 아닌 타국, 지역으로 구분하면 엄청나게 많은 곳을 다녀온 기분이 든다. 그렇기에 여행하면서 느꼈던 기분들이 고스란히 전해져왔는데 하루키도 밝혔듯이 이번 여행은 순조롭고 즐거웠으며 보기 드물게 말썽이 거의 없는 여행이었단다. 그래서였을까? 글에서도 묻어나는 평화로움과 즐거움이 이국적인 풍경과 함께 내 마음속에도 스며들었다.

 

  글에서 묻어나는 즐거움은 좋았는데 여행의 목적은 다름 아닌 술, 그것도 마셔본 적도 없고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위스키에 관한 것이었다. 술이라곤 스무 살 때 주량 테스트 해본다고 마셔본 게 전부라 그쪽 세계에 관해서는 외계인 취급을 당해도 할 말이 없다. 가끔 정말 더운 여름에 시원한 맥주 광고를 보면 ‘정말 저걸 마시면 시원할까?’란 호기심을 품어보긴 하지만 그렇다고 행동으로 옮겨보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아무리 하루키의 글이라도 위스키에 관한 여행기를 읽어야 한다니(공장 견학 2탄이라도 되는 듯, 역시 재미났다.), 처음에는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역시나 늘 그랬듯 금세 하루키의 글에 빠져들었고 술을 좋아하지도 마시지도 않는 내가 위스키란 도대체 어떤 맛일지 무척 궁금해지고 말았다.

 

  그렇다고 위스키를 찾아서 마셔보겠다는 소리는 아니고 위스키란 술을 통해 스코틀랜드의 작은 섬 아일레이까지 찾아간 열정에 감탄을 더할 뿐이다. 여행에 목적이 있어야 여행이 순조롭다는 말을 그제야 이해하게 된 것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찾아 길을 떠나면 모든 과정이 즐거울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어떤 작가를 좋아 그 작가의 고향을 찾아간다거나 좋아하는 화가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것, 음악이 좋아 음악가가 태어난 나라를 방문하는 것과 똑같은 목적의식이 술이라고 해서 달라지지 않는 다는 것을 말이다. 그 목적이 타인에게 해를 주거나 범죄에 악용되지 않는 거라면 한번쯤은 뚜렷한 목표를 가진 여행도 좋을 것 같았다.

 

  먼저 찾아간 아일레이 섬은 맛 좋은 위스키를 만들어 낼 조건을 갖춘 데다 아름답기까지 하지만 점점 인구는 줄어들고 섬 생활의 한계를 갖고 있기도 한 곳이었다. 거기다 훌륭한 위스키를 만들어낸다는 주민들의 자부심과 장인정신은 묘하게 맞물려 보는 이로 하여금 그곳의 풍경에서 묻어나는 평온함과 위스키의 향기가(맡아본 적이 없음에도 왠지 달콤할 것 같다. 모두 저자의 황홀한 묘사 때문이다.) 느껴졌다. 우리나라 술로 따지자면 소주공장에는 가공된 향이 난다면, 막걸리 공장에는 구수한 냄새가 날 것 같은 순전히 어떠한 근거도 없는 내 생각일 따름이지만.

 

  저자는 위스키의 황홀경에 빠져 음악에 비유하기도 하고 곧바로 아일랜드에 찾아가서는 <율리시스>를 떠올리며 비교하기도 한다. 위스키 맛을 모르니 비유에 맞장구를 쳐줄 순 없었지만 왜 그러한 비유를 드는지는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 많은 종류의 위스키 중에서도 섬세하게 다른 맛이 나는 것들을 구별하고 드러내려는 노력. 위스키에 대한 애정(사심도 가득했다.)이 듬뿍 담긴 글이었다.

 

  아일레이 섬에서는 그곳의 풍경과 술이 빚어내는 향기와 섬사람들의 삶이 엉켜 뭔가 더 친근하게 다가왔다면 아일랜드에서는 좀 더 개인적이고 사유가 담긴 위스키에 대한 이야기들을 풀어냈다. 그곳을 떠나서야 얼마나 아름다웠는지를 깨달았다고 했듯이 아일랜드 풍경을 보자 아일레이 섬이 얼마나 아름답고 위스키와 잘 맞는 곳인지를 나 역시 느낄 수 있었다. 저자의 말마따나 순조로운 여행이어서 그런지 여행을 떠나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저런 귀찮은 일들 때문에 떠나기를 망설여 하는 나에게도 여행의 묘미를 잔뜩 주었다고나 할까? 일단은 저자처럼 순조로운 여행을 하려면 떠나는 목적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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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퓨터를 잠깐 하다 끄고 나오면서 서가에서 왜 이 책을 들고 나왔는지 모르겠다. 마음이 편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무엇에 이끌리듯 이 책을 펼쳤다. 그리고 박민규 작가의 글까지 읽고 책을 덮었다.

국가가 국민을 구조하지 않은 `사건`이다.

이 말이 너무나도 절망적이다. 이 사실을 인지하고 있음에도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는 국가, 그 모든 걸 답답한 심정으로 지켜봐야 하는 세월호와 함께 가라앉지 않은 남겨진 국민이라는 사실 때문에 저 문장은 잔인하도록 절망적이다.

그럼에도 세월호는 잊혀져 간다. 그렇게 온 나라를 무기력하게 만든 사건이었음에도, 아직 세월호 속에서 나오지 못한 사람들이 있음에도 세월호 사건은 잊혀져 간다. 슬프다. 마음이 아프다. 나도 이러할진대 유가족들의 마음은 도대체 어떤 심정인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이 모든 책임을 어느 누구도 지지하려 않고 아래로만 내려보내는 책임전가가 씁쓸하기만 하다.

이 책을 끝까지 다 읽을 수 있을까? 다 읽고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무기력감에 휩싸이지 않을 자신이 있을까? 전혀 자신이 없다. 그래서 이 밤이 더 서글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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