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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나나 피시 Banana Fish 세트 - 전13권
요시다 아키미 지음 / 애니북스 / 2009년 9월
평점 :
품절
세트라는 이유로 책장 맨 윗칸을 차지하고 내려올 생각을 안 하고 있던 이 책을 읽게 된 건『바닷마을 다이어리』때문이었다. 다음 책 출간을 기다리자니 일정을 알 수 없었고 우연히『바나나 피시』의 작가였다는 것과 어떤 내용인지도 모르고 이 책을 선물 받고 책장 맨 윗칸에 올려놓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힘겹게 책을 꺼내 1권을 읽자마자 전혀 내 취향의 책이 아니라는 사실을 간파했다. 베트남 전쟁이 잠깐 나오더니 마피아의 세계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도 모자라 폭력, 죽음, 동성애의 성폭력 등 피하고 싶은 주제들만 잔뜩 나왔다. 도저히『바닷마을 다이어리』의 작가라고 연관 지을 수 없을 만큼 자극적이고 상반된 내용이었다.
이 책을 내게 선물한 이는 주인공의 얼굴이 점점 변해가는 것이 좀 티가 나지만 그 변화를 지켜보는 것도 재밌고 나름 흡인력이 있다고 했다. 정말 1권에서 주인공 애시의 얼굴은 각지고 성장 중인 소년의 울퉁불퉁한 모습이었다면 점점 얼굴의 선이 부드러워지고 만화주인공(?)같은 얼굴로 변모해갔다. 처음 그런 얼굴을 보며 예쁘게 생겼다느니 해서 어리둥절했지만 뒤로 갈수록 뭔가 그림들이 탄탄해져 가는 것 같아 그런 변화를 감지할 수 있어 그러려니 하기로 했다. 게다가 내가 분명 좋아하지 않는 소재임에도 불구하고 흡인력이 있었다는 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깊은 밤, 아이를 재워놓고 며칠 동안 거실에 배를 깔고 누워 이 책을 쌓아놓고 읽었다. 잠시 고개를 들어 현실을 인지하면서 ‘왜 내가 이 책을 이렇게 읽고 있을까?’ 스스로 질문을 던질 정도로 뒤의 이야기가 궁금해서 읽기를 멈출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이 책의 내용은 나에게 썩 유쾌했다고 말 할 수 없다. 책 속에 등장하는 주요 소재들이 다른 문학에서 이미 보아온 낯선 것이 아님에도 그 모든 것을 모아놓자 어둠의 세계를 경험한 듯 기운이 빠져 버렸다. 베트남 전쟁당시 ‘바나나 피시’라고 외치며 총을 난사해 동료를 죽이고 정신이상에 빠져버린 형 대신 복수하고자 마피아의 세계로 빠져든 똑똑하고 잘생기고 능력 있는 17세 소년 애시. 수려한 외모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뛰어난 사격 실력으로 수많은 사람을 죽인 인물이기도 하다. 도저히 17세의 소년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의 환경에서 살아가고 있으며 역시나 특이한 마음의 상처를 가지고 있다. 총질을 해대며 영역다툼을 하고 돈과 권력을 위해 해서는 안 될 일까지 해가는 모습은 그렇다 쳐도(어디까지나 만화니까) 동성애에 관한 부분은 가장 보기 불편했다. 어린 남자아이들에게 가해지는 성폭력, 그리고 그런 취향을 가진 사람들의 등장, 노골적으로 그런 성향을 드러내는 사람들이 아무리 만화라지만(그렇다고 영역다툼하다 생명을 잃는 일, 양심에 어긋나는 일들이 만화라도 참을 수 있다는 얘기는 아니다.) 보기 불편했다.
냉철하고 피도 눈물도 없을 것 같은 소년 애시도 일본에서 날아온 에이지에게만은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준다. 누군가에게 특별한 한 사람이 있다는 것은 축복이지만, 그게 꼭 남자여야 했는지, 이 만화에서 여자의 등장이라곤 손가락에 꼽을 정도라 당연하게 여겨지는 분위기가 적응하기 힘들었다. 신파적으로 나가자면 에이지는 전형적인 나쁜 남자의 곁에 있는 아리따운 이국 소녀여야 하는데 그 역할을 애시보다 나이가 많은 에이지가 하고 있는 것이다. 에이지에게만 모든 것을 허락하고(성적인 관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관대해지고 너그러워진 탓에 수많은 위기에 봉착하고 목숨을 위협하는 위험은 물론 타인의 목숨을 빼앗는 일이 허다했다. 아무리 에이지에게 애시 옆에 있어봤자 도움이 안 된다고 말해도 마음이 곁에 있고 싶다고 하기에 늘 문제를 안고 다닐 뿐이다. 애시의 고독과 외로움을 유일하게 보듬어 줄 수 있는 사람이 에이지였기에 연약하고 보호해야만 하는 여자의 이미지가 철철 넘쳐도 어떻게 해볼 수가 없었다. 애시는 에이지를 지키고 에이지는 애시 곁에 있고 싶어 하니까. 인간의 이성까지 조종하는 ‘바나나 피시’라는 약물의 큰 문제점과 그 비밀을 둘러싼 음모와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까지 덮어 버리는 애시와 에이지의 관계는 끝까지 긴장감을 늦추지 않게 했다.
이 책의 외전을 읽다 보니 마치 애시가 곁에 있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현실에는 없을 것 같은 인물인데 며칠 동안 주구장창 만나다 보니 어느새 정이 들었나 보다. 이왕 정이 들꺼면 에이지와 함께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았을 것을. 당시에는 험악하고 위험했던 일들이 추억으로만 되새겨져야 한다는 게 외전을 보면서 좀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나와는 동떨어진 세계이기에 현실감은 없지만 그런 세계의 존재를 알기에 어딘가에 애시가 있고 신파적이긴 하지만 에이지같은 인물이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동성애 옹호 여부를 떠나 내 모든 걸 내어줄 수 있는 사람과 함께 오래할 수 있다는 것. 애시가 그토록 애쓰며 내내 지키려고 했던 건 아마 그것이 아니었을까? 그런 사람을 만났다고 믿었기에 결혼까지 하고 그 사이에 사랑하는 아이까지 낳았음에도 과연 현재의 나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애시의 부재 뒤에 나에게 던져진 당황스런 질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