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키의 여행법 - 사진편 - <하루키의 여행법> 에세이편의 별책 사진집, 개정판 하루키의 여행법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김진욱 옮김, 마스무라 에이조 사진 / 문학사상사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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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행서를 글로 읽는 것과 사진과 함께 보며 읽는 건 분명한 차이가 있다. 글로 읽을 때는 묘사에 의지해 나름 상상하며 읽어야 한다는 단점이 있지만 반대로 그 상상이 글을 읽는 풍미를 더해주기도 한다. 사진과 함께 읽는 글은 내가 상상할 틈도 없이 있는 그대로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단점이 있는 반면 어떤 의문을 달 여지없이 정확하다. 그래서 이 책을 읽기 전,『하루키의 여행법』을 다 읽고 봐야 하는지 아니면 함께 봐야하는지 고민을 했었다. 그러다『하루키의 여행법』을 읽으면서 그곳이 궁금할 때 이 책을 펼쳐 현장감을 느끼도록 했다.

  사진이 떡하니 실려 있으니 글에 의지한 나의 상상력이 빈약했음이 단박에 드러났다. 그러나 그런 움츠러든 모습으로 글을 읽어나간다면 이도저도 아닌 소심한 접근법이 될 것이 뻔해 내가 상상한 것과 사진을 비교해갔다. 그랬더니 오히려 편안히 볼 수 있었고 글에서 보지 못한 생생함으로 저자의 여행지를 더 구석구석 살펴볼 수 있게 되었다. 저자와 함께 동행한(고베 도보 여행만 제외하고) 마쓰무라 에이조의 사진은 오글거리는 감성을 일깨울 정도로 멋을 부리지 않아 편안했다. 분명 보통 사람과 다른 시선을 가졌다는 것은 알겠지만 문외한인 나의 시선과 거리감이 깊지 않아서 느긋하게 볼 수 있었다. 어떤 생각을 하며 찍었을까 하는 사진도 많았고 저자가 묘사한 부분을 정확하게 보여주는 부분도 있어 놀라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사진으로 보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거라 생각되어지는 장면들도 있었다. 전쟁의 상흔 때문인지 노몬한의 모습이 특히 그랬고 사살된 늑대의 모습은 차라리 몰랐으면 좋았을 정도로 마음이 찡했다. 새끼 호랑이를 안고 찍은 사진은 웃음을 자아냈지만 저자의 글과 사진이 크게 초점이 흔들리지 않아 이 책을 보는 재미도 나름 쏠쏠했다.

  글과 사진의 관계는 늘 결론이 나지 않는 것 같다. 아무리 묘사를 풍부하게 해도 한 장의 사진이 더 정확하게 보여줄 때도 있고 사진으로 볼 수 없는 부분을 글이 표현해내는 것도 있다. 글과 사진을 함께 보았지만 역시나 그런 느낌이 들었고 그런 괴리는 어떤 글과 사진이라도 완벽하게 차단할 수 없을 것 같다. 예를 들어 저자가 설명한 멕시코의 작은 마을은 대도시와는 또 다르다는 정도로만 받아들이고 말았는데 사진으로 만나니 쓸쓸함과 적막감, 시골이라는 특수함이 주는 짠한 마음이 단박에 드러났다. 거기다 시골에서 자란 나의 추억까지 더해져 부모님만 두고 자취방으로 홀로 돌아와야 했던 유년시절의 기억까지 떠올랐다. 사진이 아니었다면 그런 기억의 추적까지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한 때 사진이 잘 찍고 싶어 열심히 셔터를 누르다보면 나도 좀 나은 사진을 찍을 수 있겠지 하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열심히 셔터를 눌러도 사진이 는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고 후에 마음가짐의 문제가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마음가짐을 고쳐먹어도 사진은 나에게 어렵게만 느껴진다. 기술보다 사물을 보는 마음가짐. 그리고 뷰파인더 안을 넘어 그 이면까지 보려는 시도가 있을 때에 한발 더 나아지는 사진을 찍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쉽지 않다. 그러다 내가 그런 사진을 찍기를 기다리는 것보다 그런 사진을 자주 보는 게 더 빠르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조금씩 사진집을 들춰보고 있다. 그래서 콕 집어 이 사진은 이러이러하다 말은 못하지만 대강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찍었는지 짐작할 수는 있다. 지극히 개인적인 시선이긴 하지만 이 사진집을 보면서 왜곡된 마음가짐과 시선으로 찍은 사진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제대로 설명할 능력이 없는 나는 편안하고 좋았다는 표현으로 자꾸 이렇게 다른 소리를 늘어놓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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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의 여행법 하루키의 여행법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마스무라 에이조 사진,김진욱 옮김 / 문학사상사 / 199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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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북소리』의 여운 때문인지 하루키의 여행서가 더 읽고 싶었다. 그래서 읽게 된『하루키 여행법』은『먼 북소리』와는 다른 분위기가 느껴졌다. 단기간으로 여러 곳을 방문하고 체험한 이야기가 실려 있었는데 여행을 하게 된 계기가 어떠냐에 따라 글의 분위기도 미묘하게 달랐다. 맨 먼저 실린 작가, 배우들의 성지로 알려진 이스트햄프턴의 이야기는 저자도 썩 내켜하지 않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개인적인 느낌일 수 있으나 그곳의 특성상 쉽게 접근할 수 없고 복권에 당첨되지 않는 이상 살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곳. 그런 곳이어서 그런지 겉도는 느낌이 들기도 했고 반면 꼭 그런 곳에 살아야 대단한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갖는 것도 아님을 느끼게 해주기도 했다.

   이스트햄프턴의 이야기를 시작으로 저자는 무인도에도 가고 멕시코, 우동 맛여행, 전쟁의 흔적을 따라 나선 노몬한 탐방, 아메리카 대륙 여행기, 그리고 고베까지의 도보 여행기가 펼쳐진다. 한권의 책에 실린 여행 이야기로는 굉장히 다양한 노선이다. 그래서 글의 분위기가 그때그때 달랐고 여행의 목적을 갖고 떠나는 저자의 관심과 마음 상태에 따라 그곳의 이야기는 더 진하게, 때론 고독하거나 관람자의 시선으로 그려지기도 했다.

  나에게 이 책을 추천해 준 지인은 무난히 읽을 수 있을 거라고 했고 특히 손님에게 직접 파밭에서 직접 파를 뽑아다 먹게 하는「우동 맛여행」이 재미날 거라 했다. 우동이나 실컷 먹자고 떠난 여행이기에 졸지에 우동가락이 절로 나올 정도로 매일 우동을 먹는 여행이었지만 굉장히 신나있음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우동을 좋아하고 여행을 떠나는 목적이 정확했기에 고장마다 다른 우동맛을 느끼는 것이 즐거웠을 것이다. 지인의 말마따나 파밭에서 직접 파를 뽑아다 먹는 우동에 저자도 흥분했고 나도 너무너무 궁금할 정도였다.

  목적이 따르는 여행을 하는 저자라는 사실을 언급한 것처럼 무인도에 가든 멕시코에 가든 나름의 목적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일어나는 변수가 여행을 더 풍부(?)하게 해주었다. 무인도에서 며칠 묵겠다는 야심찬 포부와 함께 섬으로 가지만 정작 벌레 때문에 학을 떼고 하루만에 철수하는가 하면 왜 하필 멕시코를 여행하게 되었는지 타인이든 스스로든 궁금증이 일 정도의 여행을 하고, 운명에 의해 관심을 갖게 되고 결국 그곳까지 갔다고 할 수밖에 없는 노몬한 방문기, 아무런 특색 없는 모텔방과 기나긴 고속도로만 생각났던 아메리카 여행, 그리고 고향으로 쉽지 않은 발걸음을 옮겼던 도보 여행이 그랬다.

  하루키의 여행서를 읽다보면 그의 감정대로 고스란히 따라갈 수밖에 없는 것은 과하게 포장하지 않으며 그렇다고 있는 그대로만 그려내지 않는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 감정 상태에 따라 객관적으로 보기 힘든 경우에도 그것 또한 그곳에 있었던 당사자의 시선이니 그러려니 하고 봐지는 것이다. 시각적, 내면적, 공감각적인 시선이 섞여 그곳에 내가 있는 듯하지만 적당한 거리감을 두고 지켜볼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저자가 어느 곳에 가든지 낯선 느낌보다 어떤 시선으로 풀어낼지가 더 기대되었다. 여행을 좋아하고 어떤 곳에 내놔도 꿋꿋하게 있었던 일을 다 얘기해줄 것 같은 질긴 근성이 오히려 독자를 안도하게 만든다.

  저자는 여행을 하면서 ‘나 자신이 그 자리에서 녹음기가 되고 사진기가 된다.’고 했는데 그런 노력이 있어서인지 억지스러움이 느껴지지 않아 좋았다. 때론 사진으로 담아낼 수 없는 것들, 글이 아니면 표현해 낼 수 없는 것들을 느낀 그대로 그려내는 모습이 종종 청승맞아 보일 때도 있었지만 그랬기에 더 인간미가 넘쳤던 것 같다. 저자가 했던 여행을 해보라고 하면 단박에 거절을 할 나지만 혼자서 여행을 해 본적이 없는 내게 가끔은 이런 여행이 부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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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먼 북소리 - 무라카미 하루키





하루키의 소설보다 하루키의 에세이가 더 좋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 그런 느낌만 가지고 있었는데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확신이 생겼다. 그리고 지금까지 읽은 하루키 에세이 중에 이 책이 가장 좋다고 말한다. 지금으로부터 오래 된 유럽여행기라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사진에서 종종 드러나는 촌스러운 모습임에도 그의 글에서 있는 그대로의 하루키가 드러나고 있다. 이 책은 특이하게도 초반부터 좋아지는 것이 아니라 중 후반을 넘어가면서 어느 순간 이 책을 좋아지고 이 분위기를 계속 느끼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인지하면서 별거 아닌 에피소드에 웃음을 터트리곤 한다. 그런 변화도 쏠쏠했고 꼭 그곳을 경험하지 않아도 충분한 경험이 되는 그런 사실적이고 꽉 찬 유럽 기행기였다.



2. 저지대 - 줌파 라히리





단 몇 장을 읽고 단박에 그녀의 팬이 되었다. 그래서 신간 소식을 들었을 때 꽤 두툼한 두께임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설렜는지 모른다. 기존의 작품을 모두 읽은 것은 아니지만 주로 이민자의 삶을 중심으로 그려냈던 소재와 달리 인도의 역사, 그 역사로 인해 가족과 남편을 잃은 두 주인공의 삶(역시 이민자의 모습을 그려냈다.)을 철저히 그려낸 것이 달랐다. 그럼에도 두툼한 책은 쉼 없이 넘어갔고 역시 줌파 라히리라는 감탄사가 나왔다. 그녀의 작품을 처음 읽었을 때의 짜릿함과 흥분은 덜했지만 현재 그녀의 작품을 읽을 수 있다는 사실이 감격으로 다가왔던 시간이었다.



3. 지금 이 순간의 행운 - 매튜 퀵





기대하지 않았던 데서 오는 기대 이상의 만족감. 그런 감정을 느낄 때 독서의 보람을 느끼곤 한다. 우연히 읽게 된 이 이야기는 책장을 덮는 마지막까지 흐뭇한 미소가 떠오르게 만들었다. 책의 내용은 결코 밝고 희망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저자의 글 솜씨가 평범하고 어쩌면 흔히 보았던 소재로 보일 수 있는 이야기를 잘 풀어낸 느낌이었다. 그래서 사회에 절대 섞일 수 없는, 오히려 평범한 인간의 밖에 존재할 것 같은 그들의 이야기가 더 따뜻하고 공감 가며 알고 싶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아무런 기대 없이 읽어서인지 더 좋았던 책이었다. 이런 책을 이 순간에도 놓치고 있다 생각하지 괜히 마음이 조급해져 이 책 저 책 뒤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4. 여행, 혹은 여행처럼 - 정혜윤






겨우 올해에 들어서야 이 책의 읽기를 마칠 수 있었다. 이 책이 출간 될 당시 현장에서 저자와 책 속의 주인공들 이야기를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제야 제대로 읽게 되어서 좀 민망하긴 하지만 그만큼 책이 내게 오고 싶어 할 때 읽을 수 있어서 더 좋았다. 책 제목을 보며 여행서로 착각할 수도 있다. 나 역시 그러했는데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장소 이동의 여행이 아닌 우리가 전혀 신경 쓰고 관심 갖지 않을 수도 있는 분야에서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해나가는 사람들의 삶의 여행을 담아낸 책이다. 책 속에 등장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놀랐던 건 타인이 알아주지 않아도 자신의 신념대로 꿋꿋하게 열정을 채워나간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무엇에, 어떤 일이 저런 열정을 쏟았는지 기억조차 없는데 그들의 삶을 보고 있자니 하루하루 주어진 시간에 충실 한다는 사실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알게 되었다. 독특한 책이었고 생각지도 않았던 사람들의 삶 속으로 뛰어들어 그만큼 소중한 시간이 된 책이기도 했다.



5. 환상의 빛 - 미야모토 테루






우연히 알게 된 작가였고 우연히 읽게 된 작품이었으나 단번에 작품의 매력 속에 빠져 버렸다. 이 책을 추천해준 지인의 말마따나 아름다운 소설이라는 느낌이 들 정도로 묘사가 뛰어난 소설이었다. 단편집이지만 이미 영화로 국내 팬들에게 익숙한 <환상의 빛>이 가장 인상 깊었다. 주인공이 그려낸 소설의 배경 속에 마치 내가 서있는 기분이었고 그만큼 주인공이 느낀 감정에 충실할 수 있었다. 그녀의 작품을 더 읽어보고 싶단 열망이 강해 책을 읽는 도중에 그녀의 다른 작품을 주문하는 시간들마저 소중하게 느껴졌다. 내가 기존에 알고 있던 작가와 작품이 아닌, 전혀 배경지식도 없지만 작품으로 매료되는 이 시간들이 독서의 매력을 가중시킨다.




- 개인적인 취향대로 다섯 권의 책을 고르긴 했지만 별 네 개, 혹은 네 개 반의 책들도 많았다. 입덧으로 인해 거의 석 달간 책을 읽지 못했지만 2014년에는 87권의 책을 읽었다. 예전에는 연초에 목표 권수와 어떤 분야의 책을 읽을지 세세한 계획을 세우기도 했으나 올해는 손이 닿는, 내키는 독서를 했다. 그렇다보니 해외소설에 치중했고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웹툰도 많이 읽었다. 권수에 포함하기 민망한 책들도 많았지만 어차피 권수에 치중한 독서를 하지 않기에 이렇게 읽다 질리면 또 다른 분야를 찾아 읽겠지 하는 마음이 먼저 드는 것이다.

무엇보다 둘째를 가진 이후로 아이가 태어나면 당분간 독서는 나와 먼 얘기가 될 것 같다는 생각에 이 책 저 책 꺼내서 읽었던 책들이 후반부에 강했다. 올해는 책도 많이 구입하지 못했음에도(정말 내 책장에는 몇 년간 책을 구입하지 않아도 될 만큼 읽어야 할 책이 가득하다.) 읽은 책보다 들어온 책이 더 많다. 자꾸 예전 이야기를 하게 되지만 이런 상황에 민감했던 시기가 있었으나 지금은 무덤덤하다. 언젠가는 읽겠지 하는 느긋한 마음으로 책을 대하고 있다. 좋은 현상인지 나쁜 현상인지 가늠하긴 힘드나 이것 또한 그간 독서를 통해 경험한대로의 흐름이라고 생각한다. 내년 독서 소망은 한가지다. 권수보다 틈틈이 책을 읽으면서 손에 놓지 않는 것. 그러다보면 정말 좋은 책들을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모두 모두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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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4-12-31 19: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손에 놓지 않으려는 마음이 제일 중요해요. 그 마음이 강렬해지면 원하는대로 책을 읽고 싶은 생각도 많아질겁니다. 그런 시간이 무척 소중합니다. 책 읽는 시간이 즐겁게 느껴진다면 좋은 책을 만났다는 증거라고 생각이 듭니다. ^^
 
지금 이대로 괜찮은 걸까? 마스다 미리 만화 시리즈
마스다 미리 지음, 박정임 옮김 / 이봄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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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의 나를 떠올려보면 정말 열심히 살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뭐랄까. 지금 이 상황에서 벗어나면 좀 더 나은 나를 만날 수 있을 거란 막연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고향을 떠나 다른 곳에 가면, 지금 이 사람이 아닌 다른 사람을 만난다면, 내가 일하고 있는 이곳이 아닌 다른 직장을 다닌다면. 온통 이런 만약에 때문에 20대의 나는 심적으로 심각한 방황을 하고 있었으면서도 뭐 하나 제대로 하고 있는 게 없었다. 좀 더 나은 미래를 원했다면 그에 상응한 노력을 해야 하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니가 책 읽는 거 외에 하는 게 뭐 있냐는 뒤통수를 때렸던 말처럼 20대를 떠올려보면 5년의 긴 연애 뒤의 차임(그것도 군대에 있는 녀석한테. 이런.), 그로 인해 신앙을 갖게 되고 책에 더 빠지게 된 것. 그것밖엔 특별히 기억나는 게 없다. 그렇다고 신앙을 갖고 책을 읽게 된 게 첫사랑의 실패 때문이라는 게 아니라 그것이 계기가 되어 그나마 20대의 나를 건사시켜줬다는 말이다.

미래를 꿈꾸는 건 자유지만 지금 일도 제대로 했으면 좋겠어.

미래의 자신이 진짜고, 지금은 임시라고 생각하는 거네. (34~35쪽)

  이 문장 때문에 20대의 내 모습, 혹은 현재를 중요시하지 않고 어떠한 노력도 하지 않으며 지금보다 나을 거라며 무한한 희망만 갖았던 나를 떠올려보게 되었다. 심장이 쿵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굉장히 찔렸다. 20대의 나는 정말 임시라고 생각하고 미래만이 내 진짜 모습이 드러날 거라 생각했다. 그런 미래의 내가 현재 내 모습이다. 과연 그때는 지금 이런 모습이라고 생각이나 했을까? 내 일은 갖지 못한 채 아이를 키우며 너무나 평범하게, 때때로 남편 바가지 긁으며 감정조절 못해서 짜증 부리고, 넉넉하지 못한 주머니 사정을 한탄하면서 살아가는 내 모습 말이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두려운 마음도 든다. 현재의 나를 바라보고 재정비하며 과거를 반성하는 건 좋지만 여전히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또 희망고문이 시작되려고 한다.) 미래의 나는 지금보다 나아질 기미가 없을 거다. 미래를 대비해서 무언가를 한다는 거. 과연 그게 뭘까? 뭘 해야 과거의 나보다 낫고 잘 살아가고 있다고 느낄 수 있는 걸까? 그건 생각하기에 따라 정말 작은 것이 될 수도 있고 뭔가 거창한 것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의 내 모습도 미래의 내 모습도 진짜라고 생각하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일단 현재의 ‘나’에게 충실 하는 것밖엔 방법이 없는 것 같다.

  수짱이나 친구 마이코가 고민하고 있는 것들을 보면 그녀들은 과거에 어떻게 살아왔는지 궁금해진다. 일기를 쓰면서 무심코 흘러가버리는 생각과 자신의 모습을 담아보려는 수짱. 잘못된 일을 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과감히 떨쳐내지 못했던 마이코. 그들 각자, 혹은 서로가 함께 나눈 이야기들 속에서 그녀들이 꿈꾸었던 미래의 모습에 현재 모습을 대입했을 때 과연 그녀들도 밝게 웃을 수 있었을까? 그렇게 철두철미하게 준비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겠냐만은 평범한 사람이면 그렇듯 최선을 다하려 살아가려다가도 이리 저리 흔들리다 다시 다잡기를 반복하면서 나이를 먹고 인격과 취향, 성향이 형성되어 가는 것 같다.

  ‘나’를 구성하는 것에 인격, 취향, 성향만 고려한다면 조금은 밋밋한 삶이 될 것 같다. 때때로 변덕을 부리는 내면과 주변의 영향을 받지 않고 살아갈 수 없는 인간의 본성을 이해하는 것. 그러다 어느 지점에 안착하는 게 내 모습이고 그런 나를 구성하는 걸 일일이 따져 보지 않는다면 마음이 좀 더 편할 것 같다. 마스다 미리의 만화를 읽으면서 주인공들이 고민하고 고뇌하는 것들에 마음이 끌려 나도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았지만 모든 답은 내 안에 있다는 사실만 확실해져 조금 힘이 빠졌다. 다만 이런 생각을 나 혼자만 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데서 오는 안도감은 있었지만 말이다. 그런데 지금보다 미래의 나에게 너 괜찮냐고 묻고 싶어지는 이 불안감은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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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ledgling 2014-12-31 08: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읽은거말고 한게 뭐있냐고 한사람 누군가요. 책읽는게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고 하는 말같은데... 아니면 책말고 다른 것도 해보라는 긍정적인 의도로 말한것일수도 있겠지만... 사람은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살아야 행복인데 20대를 책과 살았다는 것은 스펙만 쌓는 말잘듣는 노예보다 훨 낫습니다요! 물론 양서를 한다는 전제지만... 책읽는게 잘하신겁니다. 자식한테도 훨도움되고요.

cyrus 2014-12-31 1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20대들이 일을 구하지 않고, 아무것도 안 하려고 하는 모습을 보인다는 뉴스를 봤어요. 안타까워요. 저도 미래에 대한 고민이 많은지라 걱정이 많은 편이지만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사는 건 아니라고 봐요. 차라리 책이나 열심히 읽는 시간을 가졌으면 하는 생각도 들어요. 책만 읽고 살았다고 누군가가 핀잔하거나 무시하더라 신경쓰지 마세요.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항상 행복한 일이 가득하기를 바라겠습니다.
 
녹턴
세실 바즈브로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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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인데다 햇살이 좋아 밖으로 나가고 싶었다. 마침 아이도 졸려 하기에 남편과 함께 나가기로 하고 챙기는데 별 것도 아닌 일로 남편이 짜증을 냈다. 나도 맞장구를 쳐서 그렇게 나가기 싫으면 나 혼자 다녀오겠다고 하자 정말 남편이 그대로 집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런 상황이 짜증이 나 한숨을 푹 쉬며 집 앞에 나가려던 계획을 수정해 좀 더 멀리 산책을 나갔다. 지난 주말에는 함께 유모차를 밀며 느긋하게 산책을 했는데 아이와 둘만 나가려니 뭔가 처량해 보였다. 그렇게 복잡다단한 마음을 다스리면서 산책을 하는데 햇살이 좀 뜨거워도 바람이 불어 그럭저럭 상쾌했다. 아이도 기분이 좋은지 스르륵 잠이 들고 바다는 눈앞에 펼쳐지고 잠시 유모차를 멈춰놓고 가져온 책을 읽었다. 지난밤에 조금 읽다 끝까지 읽어보고 싶어 가져온 책. 작가도 낯설고 책 내용에 대한 어떤 정보도 없지만 그래서 현재 내 상황과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바다에 관한 내용이 나와서 바다가 보이는 곳에서 읽으려고 가져온 책이 아니었는데 묘하게 현장독서가 되고 말았다. 내가 바라보고 있는 바다는 어디가 수평선인지 구분이 안가는 넓고 먼 바다가 아닌 은빛 물결을 가까이에서 내려다 볼 수 있고 바로 섬과 연결되어 있는 작고 아담한 바다였다. 그래서 네 편의 단편에서 나오는 거대하고 누군가의 목숨을 앗아갈 정도로 거친 바다의 모습이 아니었기에 동떨어진 느낌이 들기도 했다. 너무나 평온한 바다를 보고 있어서 작품 속에 드러난 이중적인 바다의 모습을 생생하게 느끼긴 어려웠지만 오히려 그런 반대되는 분위기였기에 어느 정도 관찰자의 입장에서 지켜볼 수 있었다.

 

  거친 바다가 내려다보이고 사람도 보이지 않는 황량한 곳에서 이 책을 읽었다면 단박에 나는 우울감에 빠져 버렸을 것이다. 글이 드러내는 분위기에 쉽게 매도되는 편이라 우울하거나 무서운 책은 절대 깊은 밤에 읽지 않는다. 이 작품 속에 드러나는 네 편의 단편은 죽음이 등장한다.(「등댓불」에서 주인공이 본 사람이 형체는 끝끝내 밝혀지지 않지만) 여객선에서 콘트라베이스 연주자로 활동하다 침몰로 인해 동료도 잃고 자신의 삶의 방향이 더 복잡해져버린 한 남자의 이야기「페리의 밤」, 가장 가까워야 하고 마음을 나눠야 할 아내와 원만하지 못한 삶을 살아가며 외로움을 켜켜이 쌓아가는 등대지기가 등장하는「등댓불」, 사고로 바다에서 목숨을 잃은 아들에게 생일 때마다 편지를 쓴 병을 던지는 애틋한 노부부지만 실상 아들과의 교류는 거의 없었던「바다로 보낸 병」, 아버지와의 약속을 위해 매주 일요일 바다에 동생과 함께 나갔다가 눈앞에서 동생을 잃고 엉켜있던 가족관계에서 벗어나는 중년 남자의 이야기가 실린「혼자라면」이었다.

 

  짧은 단편인데도 뭔가 긴 이야기를 읽은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어떠한 사건은 일어났고 그 배경이 모두 바다라는 점, 그리고 남겨진 사람들의 이야기지만 삶을 한 단계 뛰어넘어 초월한 듯한 분위기를 띠고 있어서인지도 모르겠다. 초연하게 사건을 떠올리고 떠나간 사람을 그리워하기도 하고, 자신에게 닥친 일들에 대해 체념도 하지만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어 보였다. 하다못해 바다를 미워하지도 않고 그런 일이 일어난 것은 예고되어 있었기에 당연한 것으로 보았는지도 모른다. 바다라는, 수시로 변덕을 부리는 배경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라서 늘 위험성이 뒤따랐다. 그리고 위험부담은 현실이 되었다. 남겨진 사람에겐 고통일 수밖에 없는 상실감. 그런 사람들의 내면을 담담하게 써내려가고 있어 어떻게 보면 이미 숱하게 보아온 주제일지도 모르나 저자만의 문체로 작품의 배경이 되는 바다로 끌어들이는 흡인력이 있었다. 다른 작품에서도 이런 분위기가 나는지 궁금해 검색해 보았지만 국내에 번역된 작품인 이것뿐이었다. 저자의 또 다른 작품을 만날 수 있다면 똑같이 바다가 보이는 산책로에서 읽고 싶었는데. 그게 조금 아쉬웠다.

 

  우연히 책장에서 꺼낸 책에서 또 다른 세계를 맛볼 때의 독서는 행위자체로 만족감을 준다. 비록 이 책을 읽게 된 배경은 썩 유쾌하지 못했지만(집에 돌아와서 여전히 툴툴거리는 남편에게 내가 뭐 잘못한 게 있냐고 따지자 자기도 짜증낸 게 미안했는지 얼토당토 않는 이유를 댔다. 내가 외출하기 직전에 큰 볼일을 보러 화장실에 간 게 화근이었다나 어쨌다나. 자긴 화장실 들어가면 30분이 기본이면서! 하긴 외출 직전의 배우자의 오래 걸리는 화장실행은 그야말로 짜증 그 자체다.) 바다가 보이는 곳에서 이 책을 읽을 수 있어서 그 순간은 정말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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