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 서 있는 이순신 장군 동상의 비밀을 알고 있는가? 이순신 장군 동상의 얼굴이 누구의 얼굴인지에 대해 알면 놀랄 것이다(동상의 제작자 김세중의 얼굴을 본 딴 것이라는 의견이 있다).

이순신 장군이 입고 있는 갑옷은 조선식 갑옷이 아니라 중국식 갑옷이다. 그리고 제작자 측에서는 현충사에 있는 칼을 참고해 만들었다고 하지만, 이순신 장군의 손에 들려 있는 칼은 실제 이순신이 사용한 조선선 '쌍룡검'이 아니라 일본도다. 그런데 이 칼이 일본도인 것보다 중요한 것은 이 칼을 쥐고 있는 손이 오른손이라는 사실이다. 오른손에 칼을 든 것은 명백한 패장敗將의 항복을 의미한다. 광화문에 있는 이순신 장군 동상은 우리 민족의 기상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패배의 역사를 보여주는 절망적인 조형물일 수도 있다. 『안중근 사라진 총의 비밀』51쪽



- 광화문에 있는 이순신 동상에 이런 비밀이 있을 줄은 몰랐다. 그렇게 의미 있는 동상, 수많은 사람들이 보는 동상을 확인도 안하고 만들 수가 있을까? 이 책을 읽고 나서 알게 된 나도 그렇지만, 이순신 동상의 비밀은 충격적이다.


무엇이든 왜곡될 수 있다. 인간이 하는 일이기에 그럴 수 있고, 잘못된 정보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 것도 역사를 지키는 일이 아닐까? 조형물이 이순신 장군의 업적이나 이순신 장군을 생각하는 마음에 대한 가릴 수 없다고 여기지만 그럼에도 잘못된 것은 올바르게 고칠 필요가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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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사라진 총의 비밀 -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고 빼앗긴 M1900을 찾아서
이성주 지음, 우라웍스 기획 / 추수밭(청림출판)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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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장군이 하얼빈 의거에서 사용한 M1900을 복각한다.


이 ‘황당한’ 프로젝트의 시작은 총을 좋아하는 40대 세 남자가 우연히 중국 하얼빈에 있는 안중근 기념관에 전시된 총을 보고 나서였다. 실제 안중근이 사용한 모델과 다른 ‘브라우닝 하이파워’가 전시되어 있었고, 한국 안중근 기념관에도 ‘플라스틱 덩어리 총’이 전시되어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우리가 하나 만들어 볼까’ 라는 호기심으로 시작된 프로젝트는 엄청난 일이 되어버렸다. 2018년 4월에 생각하고 의거 일에 맞춰 같은 해 10월 26일에 전달하려 했지만, 더 의미 있게 안중근 장군 의거 110주년인 2019년에 맞춰 진행되었다. 얼핏 시간이 넉넉하겠구나 생각할 수 있지만 그 과정을 보면 이 프로젝트의 목적이 흔들릴 정도로 어려움이 많았다.


똑같은 총이 없다고 해서 안중근 의사를 추모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50쪽


이런 의문이 충분히 들 수 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왜 안중근 장군이 M1900를 사용했는지에 대한 궁금증을 가져본 적도 없고, 복각의 의미를 두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 프로젝트는 시작되었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총기 복각’에서 ‘사격 재현’으로 일이 커지면서 우리나라가 총기 청정 국가이며, 그렇기 때문에 총기 반입은 엄청난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했다. 어렵게 미국에서 M1900를 구했지만(판매자에게 이 모든 사연을 설명하면서까지) 문제는 배송이었다. 결국 우리나라가 총기 청정 국가일 수밖에 없는 사실이 증명되면서 사격 재현은 미국에서 진행되었다.


이 프로젝트는 단순히 안중근의 총을 찾는 이야기가 아니다. 총을 통해서 인간 안중근의 역사를 알아가는 과정 그 자체다.


안중근의 총을 찾아가는 이야기에 역사가 빠질 수 없다. 이토 히로부미란 인물을 이해하고, 왜 그를 사살해야 했는지를 알려면 일본 역사도 알아야 했다. 저자는 총을 찾는 프로젝트는 흡인력 있게 전달하면서 안중근 역사를 알아가는 과정은 깊고 진중하게 펼쳐 놓는다. 이토 히로부미가 ‘일본 제국주의의 기수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으므로 막부의 끝자락을 거쳐 메이지유신의 성공으로 근대화에 들어서면서 제국주의로 가는 모든 과정을 되짚는다. 얼핏 우리에게 우호적(절대 목적 없이 그럴 수는 없다)으로 보인 이토 히로부미가 사망했을 당시 일본은 오히려 한일합방을 앞당겼다고 비난했다. 하지만 저자는 이토 히로부미는 ‘큰 잡음 없이 식민지 확보에 나서겠다는 것이지 식민지를 포기한 것’이 아니었으므로 안중근 의사가 아니었다면 ‘일본에게 완벽하게 종속’되었을 가능성도 있었을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안중근 장군의 총 사격 시간은 ‘6초’였다. 그리고 ‘현대 권총 사격법으로도 상식 밖이라 할 수 있는’ 한 손 격발이었다. 결국 ‘M1900과 7.65밀리미터 탄이 한 손으로도 충분히 반동을 받아 낼 수 있게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알아가면서 총에 대한 의문이 풀렸다. 거기에 안중근 장군은 본래 총을 잘 다루는 명사수에다 의거를 개시하기 3개월 전부터 집중적인 훈련을 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이토 히로부미의 얼굴도 모르는 상태에다 시야가 제한되어 있는 악조건 속에서도 ‘일곱 발을 발사해 표적 넷에 여섯 발을 맞혔다는 것은 당시로서도, 지금으로서도 신기’에 가까운 능력이지만 ‘안중근의 실력’이었음이 증명되었다.


수많은 난관을 뚫고 미국에서 사격 재현 실험은 세 가지였다. 한 손 사격과 양손 사격의 정확도 측정, M1900 자동권총과 리볼버 권총의 연사 속도 측정, 덤덤탄의 파괴력 측정이었다. 저자는 두 명의 전문 슈터에게 두 종류의 총 사격을 맡겼고, 그렇게 긴 어려움을 뚫고 모든 실험이 끝났을 때 ‘선택을 했으니 그 대가를 치르는 중’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일 년 반 동안 이 프로젝트를 위해 달려오면서 직접 M1900를 조우하고, 사격 재현을 위해 여러 가지 실험을 하는 동안 저자에게 들을 수 있는 얘기는 여기까지 오는 과정에서 충분히 설명이 되었으므로 어느 정도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안중근 장군이 사용한 M1900는 분명 실존했지만 사라져버렸다. 일본 어딘가에 있을 것이라는 추측만 가진 채 그 총을 되찾고 싶어 이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총의 행방은 여전히 오리무중이고, 사격 재현도 국내가 아닌 미국에서 하고,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일본 국가 기관에 방문해 흔적을 찾으러 간다. 여전히 총의 행방은 찾을 수 없었지만 일본 미야기현 구리하라시에 있는 다이린지(대림사)의 주지 스님으로부터 이 프로젝트의 또 다른 의미를 듣게 된다.


익히 알고 있듯이 뤼순 감옥의 간수 지바 도시치와 안중근은 우정을 나누었고, 사형 선고를 받기 직전에 지바 도시치에 유묵을 건넨다. 지바 도시치는 이후 고향으로 돌아와 다니던 절인 다이린지에 유묵과 위패를 함께 모셨고, 지난 1979년 안중근 장군 탄생 100주년에 맞춰 한국으로 반환되었다고 한다. 주지 스님에게 프로젝트의 의미를 전달했더니 그 일을 반대하시면서, ‘지엽적인 부분에 천착해 또 다른 분란을 일으키는 것보다는 안중근이란 분의 본령에 다가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말을 해주었다. 계기야 어찌 되었건 ‘안중근이란 사람이 목숨을 버려가면서까지 우리에게 남긴 뜻을 후학들이 이어받’도록 노력해야 하는 일이 우리의 할 일인지도 모른다. 방법이 다를 뿐이지 우리도 ‘인간 안중근’이 걸어갔던 그 길이 무엇인지 묻고, 나름대로의 방향을 향해 가는 게 보답하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이 책을 읽는 동안 내게 남은 철학은 그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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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속도를 내본다, <총,균,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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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웃게 하십니다 - 창세기 5 김양재의 큐티 노트
김양재 지음 / 두란노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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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때문에 힘 빼지 않으면 기운이 남아돌아서 세상에 나가 헛짓이나 할 테니, 아이라도 붙들고 씨름하라고 말이죠. 주님은 저를 참 잘 아시는 분입니다. 200쪽

 

이 구절을 읽는데 웃음이 나고 말았다. 이제 살만 한 건가? 눈물이나 좌절이 아닌 웃음이 났다는 건 내 아이와 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있다고 여겼다. 태어날 때부터 뱃속에서 숨을 못 쉬어 응급으로 태어나고, 뇌 손상까지 입었던 둘째. 수많은 사람들의 기도를 받고 태어난 덕분인지 자라면서 뇌 손상은 가뿐히 덮어 버리고, 건강하게만 자라달라는 기도에 정말 건강하게만 자라주고 있는 아이. 그것만으로 감사가 넘쳐났다. 나에게 왜 이런 아이를 주셨는지 곰곰 생각할 틈이 없었지만 늘 불안감은 있었다. 둘째는 49개월에 기저귀를 뗐고, 말이 터진 건 거의 최근이다. 말이 터지기 전에는 마음대로 되지 않으면 소리를 질러대는 탓에 매일매일 집안 분위기는 쑥대밭이었다. 놀이치료를 1년을 다니고, 화도 내고, 혼도 내고, 울며 기도하면서 어찌저찌 기다리다보니 말이 터졌고, 다섯 살에 할 수 있는 말보다 훨씬 느리지만 그 정도만으로도 나는 숨통이 트인다. 어쩌면 ‘세상에 나가 나의 헛짓’을 막기 위해 이렇게 특별히 사랑스러운(?) 아이를 주셨나보다.

 

세상에서 성공을 했건 실패를 했건 하나님만이 나에게 하나님 되시는 것이 가장 큰 위로와 기쁨입니다. 하나님만이 나의 위로가 된다는 것을 보이는 것이 하나님과 함께하는 증표입니다. 157쪽

 

아브라함이 아내 사라를 두 번이나 누이라고 속인 큰 잘못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예언처럼 큰 민족을 이루게 하셨고, 믿음의 조상이라 불리고 있다. 그런 그의 곁에서 순종했던 사라의 모습, 쫓겨난 사갈과 이스마엘이 무작정 내쳐진 것이 아님을, 그리고 이삭을 낳기까지 아브라함의 회개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 ‘하나님만이 나에게 하나님 되시는 것’을 붙들고 살지 않았다면 결코 버틸 수 없었을 인생이라는 사실이 보이기 시작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을 끊어내는 것. 그것을 알아가는 것도 어렵고, 회개도 끊어내는 것은 더 어렵다는 걸 알고 있다. 그래서 ‘나의 위로’가 하나님이 되지 못하고, 남 탓하고 신세한탄 하는 노예근성을 알고 얼마나 뜨끔했는지 모른다. 말씀 중간에 ‘나의 현재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있습니까? 노예근성 때문에 계속해서 비교하고 멸시하고 있는 부분은 무엇입니까?’란 날카로운 질문들을 그냥 아무런 대답을 하고 넘어갈 수 없었다. 계속 회개를 했고, 나의 비밀을 털어놓았다. 그것만으로도 나를 똑바로 마주하는 기분이 들었고, ‘하나님과 함께 하는 증표’의 첫 걸음은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정하는 사실임을 깨달았다.

 

별 인생 없습니다. 나에게 하나님 되시는 인생이 최고입니다. 196쪽

 

내 존재도, 내게 주어진 모든 것들도, 하물며 배우자와 자녀도 내 뜻대로 된 것이 없음을 철저히 인정했다. 나에게 주권이 없음이 불행하고 나약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께 맡겨 버릴 때 얼마나 평안한지를 다시 한 번 알게 되는 시간이었다. 어리석게도 신앙이 정기적으로 기복적이 된다. 한동안 충만했다가 그보다 더 오래 무기력감에 빠진다. 모든 원인이 나에게 있음에도 불구하고 늘 노예근성으로 ‘탓’ 돌리기에 바빴다. 내 교회, 내 환경, 내 처지, 내 상태에 따라 달라지는 신앙을 보면서 언제나처럼 휘둘리고 있었다. 그리고 감사하게도 이 책을 읽는 동안 회개하면서 조금씩 신앙이 회복되어 오는 것을 느꼈다. 하나님이 여전히 나와 함께 하심을, 늘 나를 건지시고 돌보아주신다는 사실을 또 알게 되었다.

 

어려운 이웃을 도와주는 것입니다. 내가 국가의 법을 지키는 것입니다. 가족을 불쌍히 여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어진 환경에 마지막까지 순종하는 것이 약속의 땅을 사는 것인 줄 믿습니다. 330쪽

 

그리고 내가 이 땅에서 내 안위와 세속적인 성공과 내 가정만의 평안을 위해서 사는 게 아닌 약속의 땅을 살기 위해 노력해야 함을 깨달았다. 하나님이 죄밖에 없는 내게 그러하셨던 것처럼 내가 하나님의 땅에서 나눌 수 있는 최고의 은혜는 용서와 사랑이다. 이것이 해결되지 못하면 복음도, 하나님의 계획도, 이 땅이 약속이 땅이 될 수 있음도 모두 부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바로 해야 할 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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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괜찮은 눈이 온다 - 나의 살던 골목에는 교유서가 산문 시리즈
한지혜 지음 / 교유서가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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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조했다. 이상하게 거리감이 느껴졌고, 글을 읽고 있는 내가 겉돌았다. 누군가를 이해하려고 책을 펼친 건 아니었지만 “우리가 진심으로 누군가를 이해하고자 한다면, 누군가를 위해 고민하고 있다면, 우리가 말할 수 있는 첫마디는 ‘나는 너를 모른다’여야 할 것이다.(46쪽)” 라는 사실을 다소 황당하고 겸연쩍은 방법으로 터득했다. 깊은 밤, 이불 속에 몸을 깊숙이 묻고 스탠드 불빛 아래서 책을 읽다 거실로 나왔다. 식탁에 앉아 독서대에 책을 올리고 허리를 곧게 펴고 읽었다. 약간의 물리적 거리감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었는데, 희한하게도 ‘나는 너를 모른다’가 되었다. 그리고 어떠한 책임감도 묻어나지 않는 있는 그대로의 읽기를 즐겼다.

 

‘골목’이라는 단어 하나만으로도 어릴 적 살았던 고향집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두메산골이라 골목보다는 휑뎅그렁한 풍경이 전부였지만 저자가 언급한 ‘다락 방’도 많은 식구가 비좁게 자야 했던 좁은 방의 이야기도 이미 공유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지금의 고향집으로 수리하기 전에 다락에 전화기가 있었고, 벽에서 꽤 높은 곳에 위치해 있었지만 힘들게 올라가면 작은 내 몸 정도는 숨길 수 있는 공간이었다. 당연히 부모님에게 들키면 혼쭐이 났지만 형제들과 다락에서의 놀이를 멈출 수 없었던 기억이 문득 올라왔다. 9남매 중의 막내인 나는 무엇보다 식구들이 많을 때의 복작거림과 아무리 식구라고 해도 경쟁의 대상이 될 때의 불편한 감정을 어느 정도 알고 있다. 막내라고 해서 특별히 귀여움을 받지도 않았지만, 딱히 고생을 한 것도 안 한 것도 아닌, 그렇다고 이기심도 너그러움도 배우지도 못한 모호한 위치였다. 그래서 골목골목에 깃든 이야기들을 온 힘을 다해 만나고 싶지 않았다. 나의 치부를 들킬까봐, 미화 된 유년 시절을 다른 기억으로 대체해야 할까봐 두려웠는지도 모른다.

 

이 글을 읽는 동안 절대 행복하지 않았다. 오히려 힘이 들었고, 어느 정도의 거리감은 유지했지만 건조함은 끝내 잘라내지 못했다. ‘어쩌면 행복이란 즐겁고 만족 가득한 상태, 그 자체를 말하는 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정지되고 멈춰있는 어떤 순간이 아니라 생의 움직임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은 아닐까.(90쪽)’라는 말처럼 이 글을 마주하고 있는 나의 상태가, 행복을 차치하고라도 ‘생의 움직임 그 자체’였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과거의 이야기를 읽을 때는 잠시 현재를 잊었다가, ‘지금’을 드러내는 이야기 앞에서는 긴장감을 늦출 수 없어 속수무책이었다. ‘생의 움직임’이 너무 격렬한 탓인지 유년 시절의 추억에 젖어 있던 ‘나’가 쨍하고 깨진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어떤 것도 ‘나’가 아님을 부정할 수 없었다. 골목에 비유한 다양한 저자의 모습과 기억과 생각처럼 그렇게 갈라지는 여러 개의 ‘나’도 그냥 ‘나’였다. 그걸 바라보는 것만으로, 그 사실을 깨닫는 것만으로 긴장이 시시때때로 올라와 감히 ‘행복’이란 단어를 꺼낼 수 가 없었다.

 

그런 와중에도 어울리지 않는 근본적인 물음들이 올라왔다. 왜 굳이 시간을 들여, 잠을 줄여가며, 내 할 일을 방치하며(게으름도 한 몫 한다) 긴장감을 팽팽하게 끌어올리면서까지 타인의 생각을 마주하고 있는 것일까? 이런 질문을 하고 있는 내 자신도 유치하지만 전혀 다른 의미였는데도 나름대로 의미를 부여하기도 했다. ‘나도 때때로 타인의 삶에 대해 간섭하고 규정하고 통제하는 오만을 저지르며 살고 있다는 뜻(152쪽)’을 부정하기 위해서인지도 모른다는 것. 하지만 이렇게 거창한 이유보다는 ‘자신 없을 때는 한 발 더 내디뎌보는 용기도 필요한 것이다.(97쪽)’라는 말이 더 와 닿았다. 내가 하고 있는 이 모든 행위는 그저 ‘한 발 더 내디뎌보는 용기’일 뿐이었다고 말이다. 나는 그저 모든 순간에 약간의 용기를 내 본 것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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