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안녕 - 박준 시 그림책
박준 지음, 김한나 그림 / 난다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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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에서 깼다. 방금 꾼 꿈인데도 내용이 기억이 나질 않았다. 시계를 보니 새벽 2시 반.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무언가를 해야겠다는 생각 또한 들지 않았다. 왜 그런 꿈을 꾸었는지, 이 시간에 깨어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 곰곰 생각해 보았다. 가슴이 답답했다. 닥치지 않은 걱정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고, 모든 것에 자신이 없어졌다. 그렇게 어둠 속에서 멀뚱거리며 기도도 했다가, 반성도 했다가, 그런 와중에 생필품을 스마트폰으로 주문하기도 하고, 도통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안녕, 안녕은 말하고 싶을 때 말하고

안녕, 안녕은 말하기 싫을 때에도 해야 하는 말이야.

결국 새벽 5시쯤 잠이 들었고, 아침이 되어 커피를 마시며 잠을 깨우며 안녕을 결심했던 사람들에게 ‘안녕’을 고했다. 약 2년을 알아왔던 사람들에게 ‘안녕’을 말하면서 이 ‘안녕’이 하고 싶은 말이었는지, 하기 싫은 말이었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오랜 고민을 내려놓듯 ‘안녕’을 말했을 때는 아무렇지 않을 줄 알았는데, 울컥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내가 먼저 만나자고 손을 내민 사람들이었고, 코로나19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스스로 초심을 잃어버린 게 사실이었다. 지극히 개인적인 핑계들로, 일방적인 결론으로 끝까지 책임지지 못한 것에 대한 무책임일지도 몰랐다.

벽 앞에서 우리는 눈앞이 캄캄해지지.

벽은 넘지 못하고 눈만 감을 때가 있어.

힘을 들일수록 힘이 빠지는 순간이 있고,

힘을 내도 힘이 나지 않는 날들이 있지.

현재 나는 벽을 넘지 못하고 눈만 감고 있는 상태다. 하지만 이 ‘벽’의 실체를 정확히 알지 못한다. 어쩌면 시인처럼 그래서 ‘한 번도 보지 못한 네가 보고 싶어.’라고 두루뭉술하게 말했음에도 단박에 무언가가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안녕, 안녕은 처음 하는 말이야/안녕, 안녕은 처음 아는 말이야./안녕은 마음으로 주고 마음으로 받는 말이야./그래서 마르지 않아.’라는 시인의 말처럼 내가 오늘 ‘안녕’을 말한 이들에게 처음 말한 ‘안녕’은 분명 ‘마음으로 주고 마음으로 받는 말’이었다고 생각한다. 그 과정에서 분명 내 마음이 탐탁지 않은 적도 있었고, 뜻하지 않은 기쁨을 느낀 적도 있었다. 모호했던 나만의 세계가 연결된 기분도 들었고, 연결이 매끄럽지 않아 회의감이 든 적도 있었다. 그런 과정 끝에 나는 ‘조심스럽게 물어보는 일이고, 셈하지 않고 들어주’지 못했음을 인정한다. 그래서 ‘나’라는 벽에 마주섰고, 그 벽에서 결국 나는 등을 돌려 ‘안녕’을 고했다.

안녕은 차곡차곡 모으는 마음이야.

마음을 딛고, 우리는.

안녕, 안녕.

그럼에도 시인은 나에게 내가 이런 식으로 고했던 ‘안녕’도 결국은 ‘차곡차곡 모으는 마음’이라고, ‘마음을 딛고, 우리는. 안녕, 안녕.’을 말해도 된다고 알려주는 것 같았다. 마치 내가 저지른 무책임함에 대한 예언 같았다. 그래도 된다고. 그게 끝이 아니라고. 끝은 아무도 알 수 없듯이 또 다른 ‘안녕’을 말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있는 거라고 말이다. ‘한번 눈으로 본 것들은 언제라도 다시 그려낼 수 있어./그리고 그리고 또 그리는 것을 그리움이라고 하는 거야.’라는 말에는 언제라도 내 마음이 허락하면 다시 ‘안녕’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라는 위로처럼 들렸다.

안녕, 다시 안녕이라는 말은 서로를 놓아주는 일이야.

안녕, 다시 안녕이라는 말은 뒷모습을 지켜봐주는 일이야.

안녕, 안녕.

끝까지 ‘뒷모습을 지켜봐주’기로 했다. 다시는 서운하거나 이기적인 마음을 갖지 않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뒷모습을 지켜보며 ‘안녕’이라고 말하기로 했다. 그렇게 마음을 고쳐먹으니 ‘말하고 싶을 때 말하’는 ‘안녕’이라는 말이 꼭 슬픈 것만은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온통 시에 마음을 뺏겨, ‘안녕’을 음미하느라 놓치고 있었던 이 책 속의 흰 강아지와 새의 만남이 처연해보였다. 하지만 쓸씀함에 무게가 쏠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느꼈던 감정처럼 이들이 결국 하게 되는 ‘안녕’은 ‘서로를 놓아주’고 ‘뒷모습을 지켜봐주는 일’처럼 느껴졌다.

아직도 마음이 욱신거린다. 이 욱신거림의 실체를 여전히 모르겠다. 오늘 닥친 여러 가지 일들에 대한 반응일 수도 있고, 여전히 보이지 않은 근심이라는 정체에 정복당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나는 씩씩하게 ‘안녕’을 고할 수 있게 되었다. 이별인지 반가움인지 알 수 없는 ‘안녕’의 마지막에 내가 담을 수 있는 의미는 무한하다는 사실만으로도 오늘은 이미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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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은『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재독이었다. 책을 좋아하는 지인들과 이 책을 읽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올해가 도끼 옹의 탄생 200주년이라는 사실을 알게되었다. 가장 좋아하는 작가이기에 소소하게 혼자서라도 기념해보기로 했다.



1,600쪽에 달하는『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읽고 지인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감격했던 건, 드디어 도끼 옹의 매력을 아는 이들을 만났다는 사실이었다. 2004년에 시작된 도끼 옹 전작 읽기는 꼭 10년이 걸렸다. 맘 잡고 읽었다면 더 빨리 읽었을 수도 있지만 읽기가 더딘 이유 중 하나는 도끼 옹 작품을 읽는 사실 자체가 외로웠다. 너무 좋은데, 이 작품의 매력을 아는 이들이 없으니 혼자서 외롭게 읽었다고밖에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다 문학동네에서 출간 된『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읽고 나서 이런 번역이라면 사람들에게 도끼 옹의 매력을 알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리고『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읽은 지 3년이 지나서 다시 재독했다. 소설은 많은 부분이 다르게 읽혔고, 도끼 옹의 매력을 발견한 이들과 이 작품에 대한 찬사를 나누다보니 행복했다. 이 순간을 위해서 오랫동안 도끼 옹을 짝사랑했다는 생각과 함께 그간의 일들이 스쳐지나갈 정도였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다음 작품을 읽을 수 없어 안타깝지만 나름대로 계획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시작으로 『가난한 사람들』까지 거꾸로 전작을 해볼 생각이다. 얼마나 걸릴지 알 수 없고, 착실하게 실행이 될지 모르겠지만, 이 위대한 작품 앞에서, 도끼 옹의 탄생 200주년을 기념하며 소소하게 실행해볼까 한다.


 

 

 

책장에서 도끼 옹 책들을 꺼내보았다. 빨간색 양장으로 된 18권의 전집이 절판될 즈음에 이 책을 발견한 터라 모두 모으는데는 꽤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온라인서점에는 당연히 품절이 된 상태여서 직접 출판사에 문의해 책을 구했지만 그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그래서 블로그 이웃 분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내가 도끼 옹 전집을 모은다고 하니 근처 서점에서 구해서 보내주신 분도 계셨고, 내게 없는 책을 기꺼이 선물해준 분도 계셨다. 그 분들의 도움을 받아 빨간색 전집과 무선본을 모을 수 있었다.


이 책들이 내게로 오기까지는 많은 사람들의 도움이 있었다. 그 분들의 도움과 정성과 마음이 모여 이 책들을 읽을 수 있었는데, 그간 그 마음을 잊고 있었다. 이 시간을 빌어 다시 한 번 그 분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해본다.

 

 

 

 

 

막상 이렇게 전시를 해보니 열린책들의 양장본과 무선본의 두께 차이가 확연하다. 양장본이 더 얇고 책을 펼치기가 좋았는데, 글씨가 너무 작아 애를 먹었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도끼 옹의 전 작품을 출간해 준 사실은 참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다만 도끼 옹 전집을 만난 20대에서 40대가 되어버렸으니 눈 건강을 위해서 큰 글씨 책을 읽고 싶다.^^

 

문학동네에서 출간 된『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과『죄와 벌』까지 더해지니 내가 소장하고 있는 도끼 옹 전집이 어마어마하다. 열린책들에서 무선본까지 절판이 된 뒤에 한정판으로 양장본이 출간된 적이 있었다. 도끼 옹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꽤 비싼 금액에도 불구하고 구입했었는데, 나도 그때 결재까지 갔다가 취소한 경험이 있다. 그때 취소를 하지 않았더라면 도끼 옹 전집이 세 질이 될 뻔 했다. 그때는 아쉬웠지만 지금 생각하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시간이 지나서 새롭게 번역된 도끼 옹 작품을 읽는 것이 더 반갑고 즐겁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도끼 옹 작품을 선택할 때 문학동네 번역본을 읽으면서 열린책들 번역본과 비교해 놓은 포스팅을 참고하면 좋을 듯하다. 아쉬운 건 문학동네에서 출간된 작품이 두 편 뿐이라 다른 작품이 궁금하다면 열린책들 세계문학에 포함된 책들을 읽어야 한다는 점이다. 다양한 번역을 선택할 때 개인의 성향이 들어가기 때문에 온라인 서점에서 미리보기를 통해서라도 조금씩 읽어보고 선택하길 바란다.



https://blog.naver.com/hiphopdrum/221271730464

 

 

 

 

 

도끼 옹 책들을 책장에서 더 찾아봤다. 『지하로부터의 수기 외』는 커버가 달라 그냥 구입해봤고, 나머지 책들은 도끼 옹에 대해 더 알고 싶어서 구입한 책이다. 『도스또예프스끼와 함께한 나나들』도 출판사에 문의해서 힘들게 구했는데 그나마 2018년에 개정판으로 출간되어 있으니(큰글자 책도 있다!) 관심 있는 분들은 개정판을 읽어보시길!

 

 

 

 

내게 있는 도끼 옹의 책을 모두 모아봤다. 약간 욕심이 지나쳤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가장 애정하는 작가이니 예외를 두고 싶다. 하지만 앞으로 도끼 옹의 작품이 새롭게 번역되어 출간된다면 또 구입할 것이다. 번역에 따라 다르게 읽는 것도 너무 좋고, 도끼 옹의 작품이라면 기꺼이 언제라도 읽고 싶기 때문이다.


도끼 옹의 탄생 200주년에 부쳐, 소소하게 고백한 그의 작품을 읽을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감격이 오래오래 지속됐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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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1-05-26 14: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크하- 아름답습니다. 도끼 옹 책을 보내주신 분들의 마음도 그렇고요.

안녕반짝 2021-05-26 2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 오랜만에 정리하면서 고마운 마음을 느꼈어요^^
 
독도 공부 - 한 권으로 읽는 독도 논쟁의 모든 것
유석재 지음 / 교유서가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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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심으로만 독도를 지킬 수 없다면, 독도에 대해 제대로 알자. 독도를 일본 땅이라 주장하는 일본인을 만난다면 제대로 반박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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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커스 나이트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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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책이 읽고 싶었다. 읽어야 할 책들이 정해져 있고, 이어지는 일에 치이다 보니 내가 읽고 싶은 책을 꺼내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은 채 그냥 읽고만 싶었다. 그러다 문득 요시모토 바나나 작가가 생각이 났고, 마침 신간이 출간된 터라 동네 서점에 문의를 해 보았지만 없었다. 책이란 게 당장 읽고 싶을 때 펼치지 않으면 타이밍을 놓치는 법이라(저자의 신간을 구입해놓곤 아직도 읽지 않고 있다), 동네서점에 주문을 해 놓고 돌아오는 길에 책장을 살펴보았다. 아직 읽지 않은 저자의 책이 세 권 있었고, 그 중에서 가장 두꺼운 이 책을 꺼내 들었다. 일본문학이 낯설었던 20대에 저자의 작품 중에서 나름대로 가장 좋았던『암리타』와 두께와 분위기가 닮아 있다는 이유로 꺼내들었는데, 두 호흡 만에 읽을 정도로 오랜만에 저자만의 분위기에 함몰되었다.


개인적으로 저자를 완전히 좋아하게 된 작품은『막다른 골목의 추억』때부터였다. 저자의 여러 작품을 만나왔지만 이 작품이 발판이 되어 작품 속의 본질을 본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항상 죽음이 등장하고, 죽음은 삶 가까이에 산재해 있는데 먼 얘기라 치부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친절히 알려주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럼에도 그 죽음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이 반짝반짝 빛나 보여 이후 출간되는 저자의 작품을 무조건 읽겠노라 다짐했다.『서커스 나이트』도 그런 느낌의 연장선이라 달게 읽었는지도 모른다.


호빵맨처럼, 사람이란 결혼하면 남편과 몸을 나누고, 아이가 태어나면 아이와도 자신의 일부를 연결해서 살아가는 거네. 60쪽

삶과 죽음의 경계선을 멀리 두지 않는 저자의 작품을 읽다 보면 인식의 차이도 곧잘 허물어버리는 내용들을 만날 수 있다. 가령 남편과 사별 후 시부모님이 살고 계신 주택의 2층에서 딸을 키우며 살아가고 있는 사야카에게 전 남자친구 이치로의 편지가 도착하는 소설의 시작 부분이 그렇다. 시부모님 앞으로 온 편지를 우연히 사야카가 먼저 읽게 되지만 편지의 목적이란 것도 ‘그 집 마당의 담장 밑에 소중한 것을 묻었으니 가능하면 되찾아 오라’는 어머님의 유언에 따르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소설을 많이 읽어 온 독자라면 이후에 이어질 몇 가지 막장을 떠올릴 수도 있고, 인식의 차이에서 오는 피로한 몇몇 장면들이 연출될 거라 짐작할 수도 있다. 나 역시 그런 생각을 잠시 했지만 저자는 그런 피로함과 막장(?)의 추측을 과감히 깨버리고, 감정의 섬세함과 거리낌 없는 솔직함에 뻔하디뻔한 인식의 벽을 만들지 않는다.

자기 안에 얼마나 많은 고집과 착각이 있고, 그것에 얼마나 얽매여 있는지는 편견이 없는 사람을 접해 보지 않고는 알 수 없는 법이죠. 150쪽

사야카가 시어머니에게 이 편지에 대해 바로 알리고, 이치로를 만나 담장 밑에 묻힌 소중한 것의 이야기를 듣고, 그것을 직접 파내 이치로에게 전달하고, 그 모든 과정을 시어머니와 스스럼없이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고민하며 더불어 사야카와 이치로와의 사이에 있었던 일들도 말하는 모습에서 이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많은 것에 더 집중할 수 있었다. 예의는 갖추되 가식 없는 인물들을 보며 우리는 때로 마음속에 담긴 말 한마디를 아무런 목적 없이 있는 그대로 뱉어내기가 얼마나 힘든가를 생각해 보게 된다. 사랑한다는 말, 괜찮지 않다는 말, 곁에 있어 달라는 말 등 내 마음을 표현하는 데 있어 수많은 벽을 치느라 피로함에 오히려 반대로 뱉어낼 때가 얼마나 많았는지!


나는 다르다고 생각하지 마. 주위 탓으로 돌리는 게 가장 나쁘지만, 나만은 괜찮을 거라는 생각도 틀린 거야.

272~273쪽

말에 스스럼이 없는 인물들은 그렇게 말에 걸리지 않고, 끊겼던 시간과 과거의 일을 통해 현재를 더 빛나게, 소중하게 만들어가고 있었다. 사야카가 이치로의 가족을 구하다 굽어버린 엄지손가락을 움직일 수 있게 된 것도 다 때가 되었기 때문이고, 담장 밑에 묻혀 있던 것도 다시 제대로 묻고, 이치로와의 만남도, 사야카의 고향 같은 발리에서 진심으로 자신을 걱정해준 이다 씨에게 ‘이 손이 오래도록 잘 움직이지 않은 것은 슬픔 탓이었어.’ 라는 말을 듣고 사야카가 이제는 마음껏 걱정하고 위로해 줄 수 있는 사람들 틈에서 슬픔을 이겨냈음을 확인 받는 기분이었다. 어쩌면 사야카의 말처럼 애당초 담장 밑에 소중히 묻혀 있던 존재가 드러나지 않았더라면 이 모든 만남과 치유는 없었을 지도 모른다.

이치로는 어머니를, 사야카는 부모님과 남편 사토루를, 사야카의 딸 미치루는 아빠를 잃은 사람들이 함께 뭉쳐 있던 발리에서의 모습이 뭐라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뭉클했다. 과거의 남편이었고 미치루의 아빠이며 시부모님께 소중한 아들이었던 사토루를 기억하고, 남아 있는 사람들을 진정으로 응원해주는 많은 사람들을 보았다. 그 사람들을 보면서 시간이 걸리더라도 슬픔을 이렇게 기억되고, 새로운 힘을 만들어 낼 수 있다면 참 다행이라는 생각과 함께 별 것 아닌 것에 아등바등했던 내 모습이 오버랩되어 부끄럽기도 했다. ‘나를 인간으로 대해 주는 사람과 있어야 해요.’ 라고 말했던 이치로의 전 여자 친구의 말이 머릿속에 자꾸 맴돈다. 어쩌면 삶의 목적은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가 전부가 아닐까? 이 소설속의 모든 솔직함과 낯섦과 기이하고 생경한 일들이, 삶과 죽음을 끊임없이 되짚어 보는 일 모두가 결국엔 인간답게 살기 위한 목적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다시 삶의 목표를 이런 의미로 재배치해보면 조금 더 너그러워 질 수 있을 것 같은 착각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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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5
조지 오웰 지음, 김기혁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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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밖으로 쏟아지는 비,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 차를 홀짝이며 노트북을 타닥타닥 두드리고 이 순간이 나름 평안해 보인다. 그런데 나의 이런 행동은 물론이고 나의 생각, 내가 쓰고 있는 글씨까지 감시당한다고 생각하면 간담이 서늘해진다. 과연 그런 상태의 나를 온전한 자아라고 판단할 수 있을까? 생각을 지닌 존재지만 이런 생각을 드러내지 못한 채 누군가에게 감시당해야 한다면 나를 ‘인간’으로 볼 수 있을까?


신어의 완전한 목적이 사고의 폭을 좁히려는 데 있다는 걸 자넨 모르겠나? 결국에 가서는 사상죄도 문자 그대로 불가능하게 해자는 걸세. 왜냐하면 그걸 나타낼 낱말이 없으니까 말이야. 68~69쪽

그간 써 왔던 ‘정상적인 언어’는 ‘구어’가 되고, 사고의 폭을 좁히기 위해 ‘신어’를 제작하고 실제로 ‘낱말들을 매일같이 수십 개 혹은 수백 개씩 폐기’ 하는 ‘언어를 뼈만 남기고 깎아내는’ 작업은 소름 끼칠 정도였다. 내가 원하는 말을 단 한 마디도 쓸 수 없고, 쓸 필요도 없을 때 이미 사고도 자동적으로 정해진다고 생각하면, 인간성을 지닌 마지막 인간이라고 평해지는 윈스턴 스미스의 고민과 결말은 그야 말로 더 끔찍하다. 윈스턴이 다른 이들과는 달리 인간성을 지닌 인간이기에 계란으로 바위치기일지라도 그의 저항이 파문이 되어 인간성을 잃어버린, 생각이란 걸 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자극이 되길 바랐다. 혹은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윈스턴 스미스가 한 일이 전설로 남아 인간됨을 잊지 않길 바랐다. 그게 너무 큰 바람이었음을, 생각을 할 수 있는 인간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보여주는 이 소설을 보며 그저 참담할 뿐이었다.

소설 속의 세계는 오세아니아, 유라시아, 동아시아 3대 초강대국으로 나뉘어 의미 없는 전쟁을 하고 있다. ‘승리도 패배도 없는, 전면전도 종전도 없는’ 전쟁 가운데 윈스턴 스미스가 속해 있는 곳은 오세아니아이다. 총 4부의 행정부로 나뉘어 있는데, 평화부는 군사, 애정부는 사상, 풍부부는 물자, 진리부는 선전을 맡아 통치해 가며 이 모든 행정부를 관리하는 것이 ‘당’ 이다. ‘당이 해결해야 할 두 가지 거대한 문제’는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의 생각을 의지에 반해 알아낼 수 있느냐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어떻게 하면 사전 예고 없이 몇 초 만에 수억만 명의 생명을 죽이느냐 하는 문제일 뿐이라고 말한다. ‘전쟁은 평화, 자유는 굴종, 무식은 힘’ 이라는 당의 슬로건 아래 자의적으로 2분 증오가 행해지고, 부모의 잠꼬대까지도 사상경찰에 고발하는 자녀들, 어느 곳이나 사람들을 감시하는 텔레스크린과 산과 야외를 감시하는 마이크로폰은 ‘당’에서 요구하는 인간으로 살게끔 만들어버린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총괄하는 인물은 ‘빅 브라더’로 실재하는지 알 수 없는 베일에 싸여 있는 인물이지만 그의 권력을 결코 무시할 수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빅 브라더’의 감시 아래 그를 찬양하며 종속되지만, 이를 거부한 윈스턴 스미스는 이 세계에서 한낱 소소한 저항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그가 비밀 일기장을 몰래 구입해 방안에 설치되어 있는 ‘텔레스크린’의 사각지대에서 일기를 쓰는 행위는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떨렸다. 1984년 4월 4일에 첫 일기가 시작되고, 그의 운명이 어떻게 흘러갈지 알 수 없지만 언제 들킬까 불안감이 내내 잠재해 있었다. 그가 진리부 소속이기 때문에 이런 행위에 대해 좀 더 용이했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그의 이런 위험한 행동이 과연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결론을 내리기조차 슬퍼진다.


당신을 사랑해요. 136쪽

오로지 빅브라더만을 사랑해야 하기 때문에 남녀 간의 사랑도 자유롭지 못한 상황에서, 자신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줄리아를 만나고 그녀와 위험한 밀회를 즐기는 일이 불안하지만 얼마나 자유로운 일인지를 보여준다. 감정이 변하는 것도 감지해내는 텔레스크린을 속여 그녀를 만나고, 대화를 하고, 과거의 시간을 떠올리는 것 자체만으로도 윈스턴 스미스는 살아 있음을 느꼈다. 그럼에도 윈스턴 스미스가 생각이라는 걸 하고, 일기를 쓰고, 줄리아를 만나 자유를 만끽하는 동안 내내 마음을 괴롭혔던 불안함은 결국 드러나고 만다. 그들은 체코되고 끝까지 저항할거라 여겼던 윈스턴 스미스는 끔찍한 고문과 세뇌 속에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빅브라더를 사랑했다고 고백하게 된다.

윈스턴, 자네가 인간이라면 자네는 마지막 인간이야. 자네와 같은 인간들은 멸종했어. (…)자넨 자네가 혼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나? 자네는 역사 밖에 있고 존재하지도 않아. 332쪽

줄리아를 배신하지 않았다고 자신 있게 말했던 윈스턴 스미스는 ‘우리에게 반항하는 한 우리는 절대 처형하지 않아. 우리는 그를 개조하고, 그의 속마음을 움켜쥐고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 버린다는 그들의 말대로 변모해 간다. ‘자유는 굴종’을 인정하고, ‘2+2=5’까지 인정했지만, 그가 가장 두려워하는 쥐 고문 앞에서 그는 그 고문을 피할 수 있는 단 한 명의 이름을 부르짖는다.


줄리아한테 해요! 줄리아한테 해요! 내가 아니야! 줄리아야! 그 여자한테는 무슨 짓을 해도 괜찮단 말이에요! 얼굴을 갈기갈기 찢고, 뼈다귀가 나올 때까지 해치워요. 내가 아냐! 줄리아한테 해! 나는 안 돼! 353쪽

한 인간이 완전히 ‘개조’ 되어버리는 순간을 너무나 섬뜩하고 그려낸 작품을 읽으면서 나는 윈스턴 스미스인지, 기꺼이 그 시대에 복종하는 보통이라고 말할 수 없는 인간 존재인지 혼란스러웠다. 구구절절 말하지 않아도 우리 삶 곳곳에 빅브라더 산재해 있음을 익히 알고 있고, 저자가 약 30년 뒤를 예상하며 쓴 소설은 완전히 낯선 풍경이 아니다. 인간이 다른 동물과의 다름은 사고할 수 있기 때문인데, 그 사고를 인간에게 한정짓는 것도 모순일 수 있지만 인간됨의 사고를 과연 누가 구분하고 정의내릴 수 있을까? 생각나는 대로 떠들어대는 이 모든 것이 누군가에 의한 철저한 계획이라면 그것만큼 무서운 것이 또 있을까?


저자가 이 소설에서 인간 미래에 대한 절망과 그에 대한 경고를 나타냈다고 했듯이 독재와 전체주의에 반대한 ‘인간의 본질을 상실한 영혼 없는 인간’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가장 컸다고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선 생각 자체에 우월함을 가지면 안 된다. 기준이 모호하더라도 나의 생각이 정당한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누군가의 삶을 산산조각 내고 있지는 않은지, 편협한 사고를 만들어 내는 건 아닌지를 끊임없이 되돌아봐야 한다. 너무나 미온적이고 지지부진하더라도 저자가 반대하는 전체주의에 함몰되지 않으려면 이러한 미미한 노력이라도 기울이는 수밖에 없다. 적어도 나를 가장 두렵게 하는 고문이 당도하지 않은 이상, 아직 내게 닥칠 불행과 자유 그 모든 것을 내 탓으로 돌릴 여력은 남아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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