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안녕 - 박준 시 그림책
박준 지음, 김한나 그림 / 난다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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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에서 깼다. 방금 꾼 꿈인데도 내용이 기억이 나질 않았다. 시계를 보니 새벽 2시 반.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무언가를 해야겠다는 생각 또한 들지 않았다. 왜 그런 꿈을 꾸었는지, 이 시간에 깨어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 곰곰 생각해 보았다. 가슴이 답답했다. 닥치지 않은 걱정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고, 모든 것에 자신이 없어졌다. 그렇게 어둠 속에서 멀뚱거리며 기도도 했다가, 반성도 했다가, 그런 와중에 생필품을 스마트폰으로 주문하기도 하고, 도통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안녕, 안녕은 말하고 싶을 때 말하고

안녕, 안녕은 말하기 싫을 때에도 해야 하는 말이야.

결국 새벽 5시쯤 잠이 들었고, 아침이 되어 커피를 마시며 잠을 깨우며 안녕을 결심했던 사람들에게 ‘안녕’을 고했다. 약 2년을 알아왔던 사람들에게 ‘안녕’을 말하면서 이 ‘안녕’이 하고 싶은 말이었는지, 하기 싫은 말이었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오랜 고민을 내려놓듯 ‘안녕’을 말했을 때는 아무렇지 않을 줄 알았는데, 울컥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내가 먼저 만나자고 손을 내민 사람들이었고, 코로나19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스스로 초심을 잃어버린 게 사실이었다. 지극히 개인적인 핑계들로, 일방적인 결론으로 끝까지 책임지지 못한 것에 대한 무책임일지도 몰랐다.

벽 앞에서 우리는 눈앞이 캄캄해지지.

벽은 넘지 못하고 눈만 감을 때가 있어.

힘을 들일수록 힘이 빠지는 순간이 있고,

힘을 내도 힘이 나지 않는 날들이 있지.

현재 나는 벽을 넘지 못하고 눈만 감고 있는 상태다. 하지만 이 ‘벽’의 실체를 정확히 알지 못한다. 어쩌면 시인처럼 그래서 ‘한 번도 보지 못한 네가 보고 싶어.’라고 두루뭉술하게 말했음에도 단박에 무언가가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안녕, 안녕은 처음 하는 말이야/안녕, 안녕은 처음 아는 말이야./안녕은 마음으로 주고 마음으로 받는 말이야./그래서 마르지 않아.’라는 시인의 말처럼 내가 오늘 ‘안녕’을 말한 이들에게 처음 말한 ‘안녕’은 분명 ‘마음으로 주고 마음으로 받는 말’이었다고 생각한다. 그 과정에서 분명 내 마음이 탐탁지 않은 적도 있었고, 뜻하지 않은 기쁨을 느낀 적도 있었다. 모호했던 나만의 세계가 연결된 기분도 들었고, 연결이 매끄럽지 않아 회의감이 든 적도 있었다. 그런 과정 끝에 나는 ‘조심스럽게 물어보는 일이고, 셈하지 않고 들어주’지 못했음을 인정한다. 그래서 ‘나’라는 벽에 마주섰고, 그 벽에서 결국 나는 등을 돌려 ‘안녕’을 고했다.

안녕은 차곡차곡 모으는 마음이야.

마음을 딛고, 우리는.

안녕, 안녕.

그럼에도 시인은 나에게 내가 이런 식으로 고했던 ‘안녕’도 결국은 ‘차곡차곡 모으는 마음’이라고, ‘마음을 딛고, 우리는. 안녕, 안녕.’을 말해도 된다고 알려주는 것 같았다. 마치 내가 저지른 무책임함에 대한 예언 같았다. 그래도 된다고. 그게 끝이 아니라고. 끝은 아무도 알 수 없듯이 또 다른 ‘안녕’을 말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있는 거라고 말이다. ‘한번 눈으로 본 것들은 언제라도 다시 그려낼 수 있어./그리고 그리고 또 그리는 것을 그리움이라고 하는 거야.’라는 말에는 언제라도 내 마음이 허락하면 다시 ‘안녕’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라는 위로처럼 들렸다.

안녕, 다시 안녕이라는 말은 서로를 놓아주는 일이야.

안녕, 다시 안녕이라는 말은 뒷모습을 지켜봐주는 일이야.

안녕, 안녕.

끝까지 ‘뒷모습을 지켜봐주’기로 했다. 다시는 서운하거나 이기적인 마음을 갖지 않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뒷모습을 지켜보며 ‘안녕’이라고 말하기로 했다. 그렇게 마음을 고쳐먹으니 ‘말하고 싶을 때 말하’는 ‘안녕’이라는 말이 꼭 슬픈 것만은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온통 시에 마음을 뺏겨, ‘안녕’을 음미하느라 놓치고 있었던 이 책 속의 흰 강아지와 새의 만남이 처연해보였다. 하지만 쓸씀함에 무게가 쏠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느꼈던 감정처럼 이들이 결국 하게 되는 ‘안녕’은 ‘서로를 놓아주’고 ‘뒷모습을 지켜봐주는 일’처럼 느껴졌다.

아직도 마음이 욱신거린다. 이 욱신거림의 실체를 여전히 모르겠다. 오늘 닥친 여러 가지 일들에 대한 반응일 수도 있고, 여전히 보이지 않은 근심이라는 정체에 정복당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나는 씩씩하게 ‘안녕’을 고할 수 있게 되었다. 이별인지 반가움인지 알 수 없는 ‘안녕’의 마지막에 내가 담을 수 있는 의미는 무한하다는 사실만으로도 오늘은 이미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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