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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인생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34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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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님이 된 기분이다.

책을 읽고 있었음에도 책을 읽지 못하는 상황에 처해 있었고, 읽지 않고 낭독을 들었다고 해도 책을 이해하지 못한 느낌.

<새로운 인생>은 그렇게 내게 익숙하지만 드물지 않은 낯섬과 난해함으로 다가왔다.

 

<당신이 지금 손에 들고 있는 책의 모든 구석 구석을 충분히 주의하면서 지능적으로 보았는가?>

 

이 부분에서 나는 할 말을 잃고 6시간동안 대화한 상대가 장님인줄을 몰랐던 주인공 오스만을 어떠한 말로도 비난할 수 없었다.

되려 내가 그의 비난을 받아 마땅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난해하지만 열심히 읽어가고 있었던 나의 맥을 탁 풀어버린 한마디의 비유는 그렇게 내 마음속에 비수로 꽂혀가고 있었다.

 

두툼한 책을 마주 하면서 녹록치 않음을 어느 정도 예상했었지만 쏟아지는 혼란속에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지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어느날 읽은 책 한권의 여행속으로, 현실속의 버스 여행속으로 그를 따라가고 있었지만 그의 행로를 예측할 수 없었고 마지막 부분에선 어렴풋이 그의 죽음을 예상했을 뿐이였다.

일출의 그 찬란함과 경이로움을 본 적이 있기에 그가 마지막으로 느꼈을 빛을 어렴풋이 추측할 수 있을 뿐, 그리고 그가 읽은 책에서의 광채와 비슷했을 거라고 짐작할 수 있을 뿐 나는 눈뜬 장님에 불과했다.

 

어느날 읽게 된 책 <새로운 인생>을 통해 새로운 인생을 맞이할 수 있을 거라며 마음속의 방황을 실제로 행하고 있었음에도 그 자신도 어디로 흘러갈지 알 수 없었던 그 버스여행들은 그에게 과거가 되어 있었고 그 여행으로 인한 족쇄는 그를 결국 붙들고 말았다.

사랑하는 자난과 그의 연인 메흐메트를 통해 그는 완전히 새로운 세계를 꿈꾸게 되었음에도 그가 만난 것은 혼란스럽고 소란스러운 지극히 현실적인 세계일 뿐이였다.

그러한 현실성을 느끼며 돌아오기를 기대하지도 않았지만 오스만이 읽게 된 책으로 인해 진즉 자신의 삶의 방향을 바꿔버린 메흐메트의 아버지를 만나고부터 오스만은 영화에서나 만날 수 있을 법한 삶을 잠시 만끽하게 된다.

나름대로의 길을 걷고 있던 아들이 어느날 책 한권으로 인해 변해버렸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힘든 메흐메트 아버지는 사람을 고용해 아들을 감시하고 심지어 그 책의 작가, 그 책을 읽은 사람들까지 소멸시켜 간다.

결국 오스만은 메흐메트를 만나 그에게 세 방의 실탄을 쏘며 '내가 방금 사람을 죽였소' 라고 말하며 그 자리를 피하지만, 결국 죽은것은 오스만 자신이다.

오스만 자신의 이름을 쓰고 있던 메흐메트가 아닌 그 살인의 괴로움에서 그는 늘 자신을 죽여가고 결국은 죽음의 희열(?)을 맛보며 사라져간다. 그는 그 죽음이 달갑지 않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함에도......

 

이 소설을 읽는 내내 눈에 띄였던 것은 버스였다.

오스만이 죽어간 곳도 버스요, 그가 여행의 수단으로 삼은 것도 버스며, 메흐메트가 죽었다고 생각하는 가족들 역시 버스사고라고 오해하고 있었다.

또한 메트메트의 아버지 나린 박사는 아들을 망쳐버린 그 책을 읽는 사람들을 없애기 위해 버스사고를 일으키기도 한다.

오스만 뿐만이 아닌 터키인들에게 버스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인 것 같은 착각을 만들 정도로 버스의 등장은 흔하다.

결국 그 버스의 의미는 떠날 수 있지만 다시 돌아올 수 있다는 동시다발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음에도 그 느낌은 상이하기에 한꺼번에 묶을 수 없는 즉, 오스만의 경험, 인생처럼 언제든 갈아탈 수 있으며 언제든 나아갈 방향을 정할 수 없는 복잡미묘하면서도 꼭 필요한 존재로써의 등장이 아닐까?

그랬기에 <새로운 인생>이라는 책을 읽고 새로운 삶을 찾을 수단을 맞이한 것도 버스였고 자난과 메흐메트를 각각 다른 장소에서 만난 것도 버스였기에 어느새 자연스러움으로 자리잡고 있게 된다.

그러나 그 버스의 낡음은 오스만의 추억속에서처럼 익숙했지만 바뀌어 버린 버스,길,운전사들의 복장과 행동은 새로운 인생을 맞이하고 있는 현재의 오스만처럼 낯설었다.

자난이 사랑하는 메흐메트에게 질투심을 느껴 그를 살해하기도 했던 오스만이였지만 그 후 아무렇지도 않게 평범한 가정을 일구며 살아가는 오스만은 변해버린 버스와 같았다.

그랬기에 그 평안함은 불안했다. 그가 다시 옛 추억을 되살려 캐러멜을 만든 사람을 찾아가기 위해 다시 떠나는 버스 여행에서 그의 죽음을 예상할 수 있었듯이 새로운 인생이 아닌 이름이 같은 캐러멜을 찾아가는 모습은 그의 종점이였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단순하게 한권의 책으로 인해 태연히 살인을 저지르고도 아무렇지 않은 듯(죄와 벌의 라스꼴리니꼬프처럼) 살아가는 행위의 결과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죽음이 가져오는 것은 당연함이였다.

그가 죄를 저질렀기에 괴로워 했기에 겪게 되는 당연함이 아닌 책 속에서 만난 <새로운 인생>은 오스만에서 죽음으로써 만날 수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린 박사가 요즘에도 책 한권이 그렇게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냐고 말했던 것처럼 그것은 흔한 경험이 아니기에 내가 보기에도 현실성이 떨어진다. 죽음을 겪어보지 않았기에 그의 찬란한 죽음 앞에서 그가 갈망했던 새로운 인생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정도지만 그의 죽음은 새로운 인생을 간직하였기에(어떤 식으로든..) 그의 죽음은 담담함으로 다가왔다.

 

그의 죽음은 짧았고 그의 여행은 길었지만 왜 나는 그의 죽음만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그가 겪은 여행은 안개에 쌓인듯 희미하며 앞을 볼 수 없었고 그의 죽음은 확실한 결과를 보여주었기 때문일까?

아마 <새로운 인생>을 찾아가는 오스만의 여정에 동조할 수 없었고 저자의 난해함을 파헤칠 수 없었고 <새로운 인생>이라는 것이 내게 와 닿지 않음을 그의 죽음을 통해 묻어가길 원했는지도 모른다.

혹은 그의 죽음으로 인해 더이상 <새로운 인생>을 생각하지 않아도 되고 내 손에서 내 머리에서 놔버릴 수 있는 후련함을 기대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스만이 보았던 강렬한 빛을 잊을 수 없는건 왜일까.

자꾸 내게 질문이 많아지는 건 왜일까.

그건 아마도 그 빛에 반사되는 나를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휘적 휘적 어디인지 모를 곳을 걷고 있는 오스만이 아닌 바로 내 자신의 환영을 만났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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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인간인가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의 기록
프리모 레비 지음, 이현경 옮김 / 돌베개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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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우울함이 짙다.
기록 되어야 하고 내가 그 역사를 알아야 하지만 그 한가운데에서 똑바로 서 있을 자신이 없기에 늘 피하고만 싶었다.
이 책도 그러한 냄새를 폴폴 풍기고 있다.
내가 피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만 싶은 책.
그러나 그럴 수록 끌림은 나의 생각을 뛰어넘지 못했다.
내 손에 들린 책을 보고 있자니 읽을 용기가 생기질 않아 한참을 망설였다.
케테 콜비츠의 '인간'이 중심이 되는 작품을 연상케 하는 겉표지의 이상한 형태의 사람을 부여잡고 있는 모습은 접근을 더디게 만들었고 어떠한 인간의 모습을 보게 될지 몰라 무던히도 한숨을 쉬게 되었다.
책을 펼치자마자 작가의 프로필을 보게 된 나는 의아했다.
그 험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남아서 이러한 책을 썼으면서 왜 자살로 생을 마감했단 말인가 하며 이해할 수 없는 의문을 계속 던지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이 책에서 보게 될 것을 잘못 상상하고 있었다.
잔인함,처철함,우울함을 잔뜩 기대하며 겁을 먹고 있었지만 저자는 책의 곳곳에서 말했던 것처럼 자신은 증언을 할 뿐이라고 했다.
그랬기에 아우슈비츠와 저자의 자살을 나는 터무니 없이 연결 짓고 있었던 것이다.
아유슈비츠와 자살은 극이였다. 강제와 선택이라는 것 하나만 떠올려도 나의 연결은 한없이 부끄러워지고 있다.
 
저자의 증언은 조금은 색달랐다.
책을 읽어감에 따라 내가 생각했던 자극적인 분위기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난 후에도 저자의 글을 통해서 드러나는 사실들은 오로지 증언만이 바탕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안에는 인간을 통한 철학적 사고, 끊임없이 인간이고 싶은 저자의 갈망이 짙어지고 있었다. 통계나 수많은 자료들을 똑같이 읊어대는 것이 아닌, 그것으로 인해 독일인들에게 무조건적인 증오심을 심어주는 것이 아닌 철저한 고증적인 서술이였다.
그래서 나는 문학적인 면을 볼 수 있었고 인간임을 생각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나 또한 인간임을 잊지 않으려고 무던히 노력하기도 했다.
너무나 태연히 사라져간 많은 사람들을 그대로 흘려보내면서 비참한 생활을 견뎌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인간이라는 의미부여를 하려고 하는 내가 우스워 보이기도 하였지만 나 또한 희망을 버릴 수가 없었다.
그것은 분명 부당한 처사였고 알려지고 알아야 할 역사였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도 그와 비슷한 역사를 가지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더더욱 우리와 비슷했던 그들의 고통과 우리의 서러움을 접목시켜서 어떻게 치유해야 할지를 알아가야 할터인데 우리는 무한한 미래만을 바라보고 있진 않았는가.
희망을 품을 수 없는 곳에선 희망이 피어나고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곳에선 미래의 두려움만이 번져가고 있다.
사고를 가진 인간이 동물보다 더한 처사를 당하고 있었음에도 그 안에서 우린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일까. 안도감이나 아득한 거리감을 느끼고 있을까.
잠시 내 자리가 부끄러워 지면서 한줌의 재로도 변하지 못한 수많은 사람들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부끄러움은 잠시 잠깐인 걸 알기에 당당히 밝히지 못할 것임을 나 또한 잘 알고 있다.
그러나,그래도,그렇기에 인간이다라고 말하고 싶어진다.
당신은 인간이였고 그 인간임을 지키기 위해 사투를 벌였노라고 위로하고 싶어진다.
그 아픈 기억을 다시 들춰내면서도 중심을 잃지 않았고 스러져간 사람들을 기록하였기에 당신은 위대하다라고 말하고 싶어진다.
 
저자의 그러한 색다른 증언때문에 책을 읽는 내내 도스또예프스끼의 '죽음의 집의 기록'이 생각이 났다.(저자도 '죽음의 집의 기록'을 언급하였다.)
수용소와 감옥이라는 조금은 다른 면이 있긴 하지만 인간이 갇혀있으며 내 의지와 상관없는 노동과 삶을 꾸려간다는 것에는 별 다른 차이가 없었다.
'죽음의 집의 기록'을 읽었기에 수용소에서의 욕구 충족을 이해할 수 있었고 그 안에서의 존재감 또한 쉽게 지나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동물처럼 살아가고 있지만 어쨌거나 나는 인간이기에 그 인간임을 지켜가는건 쉽지 않다.
그 인간임의 참된 모습이 무어라고 정의할순 없지만 인간적인 모습을 버릴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인간임을 드러낼때 그 모습이 나타난다고 말하고 싶다.
저자는 그러한 인간에 철처지 초점을 맞추었고 그랬기에 인간됨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수 있었다. 그 인간됨은 씁쓸하고 처절하고 외로웠지만 그 인간됨을 잃지 않기 위해 발버둥 치며 하루 하루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기에 조금은 위로가 되는 시간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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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아들
박목월.박동규 지음 / 대산출판사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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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아들이라는 관계를 생각해볼때 나이가 적든 많든 아버지의 든든함, 위대함은 아들이 뛰어 넘을 수 없는 범접함에 속해있다는 것을 이 책을 읽는 내내 느끼고 있었다.

청록파의 대표 시인 박목월.

그 이름만으로도 느껴지는 묵직함은 실로 거대한 것이였다.

그런 아버지를 둔 박동규.

그 두사람의 글이 한권으로 묶여져서 나왔다. 그러나 이 글들을 묶은 박동규님은 이 작업이 몹시 망설여졌다고 한다. 그 이유인즉슨 대학시절 논문을 아버지께 한 부 드렸더니 빨간 볼펜으로 수정을 해놓은 것을 본뒤 아버지와 나란히 글이 실린다는 것 자체가 부끄럽다는 것이다.

이 책을 읽기 전에는 그래도 박목월 시인의 아들이니 크게 다를 바가 없을 거라며 겸손함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박동규님에겐 미안한 일일지도 모르겠으나(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실테지만...) 내가 느끼는 박목월 시인의 글도 그러하였다.

왜 아버지와 함께 실리는 것조차도 송구할 일인지 왜 그렇게 어려워하는지를 말이다.

 

박목월시인의 일기를 읽고 있으면 정갈하면서도 서정적인 느낌, 그리고 마음 한켠이 싸하게 아파오는 뜨거움이 느껴져 한국문학의 매력을 제대로 느낄 수 있었다.

그 동안 번역된 외국문학을 수없이 읽어왔던 것이 한순간 위로가 되듯 그렇게 그의 글은 군더더기 없이 단아했다.

가슴아픈 일은 더 가슴 아프게 평범한 일상은 특별하게 박목월 시인을 거쳐가는 것들은 그렇게 변신을 하고 있었다.

아버지로써 남편으로써의 애틋함이 곳곳에 묻어났고 글쟁이로써의 보람과 생계의 고단함은 그의 글에 고스란히 녹아 있었다.

 

또한 신앙을 가지고 가정의 중심에 우뚝 서게 한 다음 일곱식구가 그안에서 때로는 아등바등 때로는 너무나 즐겁게 살아가는 모습이 내 마음까지 포근하게 만들어 주었다.

우리집은 박목월시인의 식구보다 더 많아 화목보다는 경쟁의 나날을 보내곤 했지만 어릴적 아버지 앞에서 예절을 차리던 일들이며 수많은 추억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그래서 책장을 넘기다 말고 멍하니 사색에 빠지기도 했다.

나의 어린시절, 아버지, 가족을 생각해보니 그립기도 하고 서럽기도 하여 오만가지 만상에 빠져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박목월 시인의 글들이 이렇듯 현실감에 낭만을 더해주었다면 아들 박동규님의 글은 아버지에 대한 추억, 가족에 대한 일화들이 대부분이여서 박목월시인의 글의 숨겨진 에피소드를 보는 듯한 느낌이였다. 처음 내가 말하였던 아버지의 위대함은 이러한 느낌 때문이였으리라.

유명한 시인이기에 그는 추켜 세우고 그의 아들일지라도 아버지를 뛰어넘을 수 없기에 혹평하는 것이 아닌 글에서 자연스레 위대함이 느껴졌다.

신앙으로 키운 자녀, 아버지와 반대로 아들의 입장에서 바라본 아버지, 가족의 모습들이 아버지 글에서 아득히 먼 미래였다면 아들의 글에서는 과거가 되는 교감.

그렇게 글의 맛은 달라도 톱니바퀴가 맞물려 가듯 부자의 글은 하나가 되고 있었다.

박동규님의 글에서는 서정성이 조금은 부족하고 아버지에 대한 추억과 기억을 억지로 끌어내려함이 보여 자연스러움이 아쉬웠으나 그도 그럴것이 박목월 시인의 글은 일기에서 발췌한 것들이고 박동규님은 모든걸 짜내야 했으니 내가 느끼는 감정도 무리가 아니였을거라 생각된다.

 

그러나 그 가운데 내가 무어라 말할 수 없는 것은 핏줄의 끈끈함이였다. 서로의 글에 녹아 있는 가족이라는 울타리안의 더운 피는 내가 무엇으로도 부정할 수 없고 무엇으로도 떼어낼 수 없는 핏줄의 끌림이였다.

그걸 느꼈기에 온 가족이 들썩 들썩 했던 나의 어린 시절이 떠올랐는지도 모르겠다.

비단 이러한 추억 뿐만이 아닌 박동규님이 알리고자 했던 '허물어진 가정을 회복시키고 인간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의미하고 이는 세계가 무엇인지 알게 하는 단서 제공'에도 크나큰 역할을 했으리라.

이 글을 읽고 있는 것 만으로도 인간임이 소중하고 가족의 울타리에 있다는 것이 눈물겹도록 서럽고 행복해지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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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고 온 시 창비시선 213
고은 지음 / 창비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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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모국어를 한밤중에 애틋하게 사모하지 않을 수 없다' 라고 고은 시인은 말한다.

한밤중의 애틋함.

쉽게 지나칠 수 없는 마음이다. 나 또한 경험했기 때문이다.

 

이 시집을 사놓고 읽기 시작한게 꽤 오래전인데 나의 마음처럼 고은 시인의 시는 잘 읽혀지지도 와닿지도 않았다.

시인의 비평만이 나의 귓등을 간지럽히고 있었다.

그러한 비평에 나도 어쩔 수 없이 동조하면서 몇달을 읽다만채 방치하였다. 그렇게 묻혀있는 시집을 보면 마음이 불편하고 후딱 소설처럼 읽을 수 없음을 안타까워하며 시간만 흘려보냈다.

시집을 펼쳤다 덮었다를 수없이 반복하던 밤.

그날은 무척 피곤한 밤이였다.

쌓여있는 책들을 보며 한숨짓던 밤.

그리고 도저히 시를 품을 수 없는 밤이였다. 그걸 잘 앎에도 무작정 시집을 펴들었다.

책 갈피가 꽃혀있었지만 읽은 시들이 무색할 정도로 기억이 나지 않는 밤. 남은 시를 홀라당 마음에 풀어버린 날은 그렇게 대조적인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피곤함, 나른함, 초로함이 느껴지는 가운데 펼친 시들이 이렇게 읽혀질지 상상할 수 없었다. 시집을 덮고 나니 읽어 버린 시간이 무색하였지만 애틋하게 모국어를 사모하였다던 고은 시인의 밤은 고스란히 내게 전달되고 있었다.

 

글이라는 것이 어느 누가 쉽게 쓰겠냐만은 시를 휙휙 읽을 때는 나의 얼굴이 뜨겁다. 음미하는 것이 아닌 읽기 위주였기에 그러하리라.

그 밤의 나는 고은님의 시를 얼굴이 뜨거울 정도로 빠른 속도로 읽어 나갔다. 그러나 그 뜨거움에는 민망함이 그득한 것이 아니라 환희와 열정이 그득하였다. 시를 쓰는 시인의 마음, 그 시를 읽는 독자의 마음이 혼연일치되는 밤.

그렇게 그 밤은 내게 각별해져 가고 있었다.

 

1부 2부로 나뉘어져 있긴 하지만 2부는 '작은노래'라는 제목이 붙어 있는 독특한 시인 반면 1부는 시집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순례시이다. 여러 나라를 여행하며 쓴 시이기에 낯섬이 대부분이였다.

나는 나라 밖을 나가본 적이 없다는 핑계가 말이 되지 않을 정도의 낯섬. 그렇게 겉돌던 시들이였는데 순례시들 가운데 고국을 기억하는 시들을 보며 또한 작은 노래라는 2부의 시들을 보며 나의 마음은 환히 열려 버렸다.

시인이 말하는 풍경이 펼쳐지고 시인의 마음이 그대로 느껴지는 시간. 나의 마음은 시인의 시를 따라 이리저리 여행하고 있었다.

 

특히 많은 시들의 비슷한 분위기의 1부의 시보다 고은시인만의 독특함이 살아있는 2부의 시들의 매력은 신선했다.

하이쿠 같은 독특함이 느껴지는 고은표의 신선함이라고나 할까.

절제되고 짧지만 가슴이 저릿해지는 드러남이 느껴지는 시들이였다. 시대의 아픔부터 정체성이 발견까지 두루 퍼지는 주제는 내게 멀면서도 가깝게 느껴져 한참이나 내자리로 돌아오기가 힘들었다.

 

참으로 진귀한 밤이였다. 시가 내 안으로 들어온 밤.

시를 통해 나를 재발견 할 수 있었던 밤이였다.

꾸준함으로 읽히는 시가 아닌 폭풍처럼 휘몰아쳐 많은 것들을 쓸어가는 한편 많은 것들을 남겨 놓았지만 그 가운데 서 있는 나를 발견하는건 어렵지 않았다.

시에 대한 견문과 지식이 짧아 그의 시를 무어라 말할 수 없고 설명할 수 없지만 그 밤은 분명 그의 시가 온전히 내게 들어왔노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시의 절망이야말로 과거의 시와 미래의 시를 이어주는 시의 빛나는 축제를 진행시키는 것입니다'

 

이 말을 통해 나의 절망을 두려워하지 않음을 배운 것은 비단 시를 통해서만이 아닌 그를 온전히 느꼈기에 가능했던게 아닌가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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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이브 스토리 3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해용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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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혼란스럽다.

운명을 바꾼다는 것 자체가 처음부터 난해하며 쉽지 않을거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3권을 읽으면서 단순히 비전으로의 여행과 운명의 탑을 향한 길이 녹록치 않을거라는 예상만 했을 뿐 이러한 혼란스러움은 짐작하지 못했다.

와타루는 '탄식의 늪'에서 아버지와 아버지 애인을 닮은 사람들을 보며 현세의 와타루와 똑같은 상황임을 알고 괴로워 한다.

환영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가슴아픈, 자신의 고통을 감출 수 없는 상황이였다.

그러나 그것은 복선에 불과했다.

내가 혼란스럽다고 말한 것은 와타루의 여행이 깊어질수록 짙어지기 때문이다.

 

미쓰루와는 다르게 잔정많고 정의를 좇는 와타루는 하이랜더로써 또한 키키마와 미나의 동료로써 비전에서 자신의 목적외에 이루고 있는게 더러 있었다.

그러면서 자연히 비전 세계의 역사, 여신님의 힘을 느끼며 비전에 젖어들게 되지만 그것으로 인해 자신의 목적을 잠시 잊으며 혼란스러워한다. 그러던 와중 비전에서 한사람, 여행자에서 한사람씩 사람기둥을 세운다는 것을 알고 그것을 없애 달라고 여신님께 말할 결심을 하지만 여신님께 말할 수 있는 소원은 한가지라는 것을 깨닫는다.

비전을 구해도 자신은 변화된게 없고 현세의 운명을 바꾼다고 하여도 상처는 마음에 남아있으니 커다란 결실을 맺을 것 같지도 않고 와타루는 혼란스럽기만 하다.

 

그 와중에 '목소리'는 여신을 없애고 비전도 현세도 모두 바꾸라는 유혹을 하지만 사카와의 장로와 바크상 박사는 운명의 탑으로 가는 도중에 자연히 말해야할 부탁이 생길테니 자신을 믿으며 마음을 편히 먹으라며 충고한다.

또한 처음 비전을 여행할때 미쓰루와 와타루의 길은 다르다고 했던 것을 보며 내 마음의 것들이 그대로 보여지기 때문에 길이 다르고 혼란을 겪는다는 것이다.

그 말에 와타루는 충격을 받는다. 분명 와타루가 있는 곳은 비전이지만 현세에서의 와타루이기 때문에 불합리함이 존재할 수 밖에 없다. 여행자의 마음을 반영하여 비전이 형태를 이루기 때문에 모든것이 와타루에게 달려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여행은 처음 내가 생각하였던 위험과 책임의 임무를 떠나 훨씬 복잡한 것이였다.

여신이 만든 세계 비전으로 여신이 초대하여 와타루가 왔으니 비전의 법을 어느 정도 수행해야할 터, 미쓰루는 점점 힘들어지지만 꾸꿋이 가보기로 한다.

포기한 여행자들이 살고 있던 델라 루베시의 안일함과 파괴를 본 후 와타루는 도망친 배신자를 쫓다 미쓰루를 만나지만 미쓰루다운 냉정함과 확실한 목적성에 크게 실망하고 만다.

보석을 찾기 위해 배산자가 현세에서 가져온 동력선의 도면을 걸고 북쪽 세계와 거래를 하려고 한다. 미쓰루는 그 거래로 통해 보석을 얻고 자신의 운명을 바꿀 수 있겠지만 비전은 더더욱 혼라스러워짐에도 아랑곳 하지 않는다.

그러나 와타루는 그것을 두고 볼 수가 없다.

오히려 여행자로써의 냉철함을 지니고 있는 미쓰루가 옳은 모습일지도 모르는데 와타루는 비전의 세계의 호란도 현세의 자신의 상처도 지나칠 수가 없는 것이다.

 

답답해보이기도 하고 미쓰루의 말마따나 사람좋고 한가해보여 저래가지고 운명의 탑에 도착할 수 있으며 사람기둥이 되어 버리는건 아닌가 하는 걱정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러한 와타루를 지나칠 수 없는건 우리의 마음 또한 미쓰루보다 와타루를 조금 더 닮아있기 때문이 아닐까.

잔정이고 정의로움이라고 해도 좋다.

그러나 올바르게 가고자 하는 마음이라고 말하고 싶어진다.

와타루도 다른 길로 가면 편하겠지만 내 마음이 내켜하지 않으니 시간이 걸리더라도 잠시 목적을 잃더라도 그렇게 차근 차근 올곧음을 향해 가는 것이다.

그 결과가 어떻게 나타날지 그러한 혼란스러운 마음이 어떻게 정리가 될지 알수 없지만 그 과정만으로도 와타루는 자신의 운명과 맞섰고 자신에게 진실되어 있었다.

나 또한 혼란스러움이 그득하기에 4권에서의 결말이 무척 궁금해진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마음이 싸하게 아려오기도 한다.

아무래도 그건 세상 모든것을 구할 수 없음을 알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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