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001초 살인 사건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까멜레옹(비룡소) / 2009년 5월
평점 :
절판
온다 리쿠, 이미 여러 편의 장편과 단편집 <도서실의 바다>를 읽은 적이 있는 작가다. 매번 뭔가 느낌이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지만, 소재는 정말 다양하다. 마치 마르지 않는 깊은 우물에서 끌어올리듯 깊고도 청량한 이야기가 끊임없이 이어지는 걸 보면 속에 무진장 많은 걸 갖고 있는 작가라는 생각이 든다. 익숙한 문체와 여기저기 산발적으로 되풀이되면서 조금씩 시기나 시점이 다른 이야기를 싣고 있는 터라 약간 식상해지다가도 또 어느새 손에 들게 되는 걸 보면 은근히 중독성이 있는 작가이기도 하다. 거미줄처럼 이리저리 얽혀있는 관계가 호기심을 충족시키며 천천히 풀려나가는 걸 좋아해서 장편을 좋아하는 편이지만, 역시나 단편집도 손에 들게 되고 말았다.
작품의 공기에 휩싸이는 시간과 범위가 아무래도 장편만 하지는 못하지만, 전체적으로 꽤 짜릿하게 기억에 남을 만한 작품이 여럿 있었다.
'냉동 귤' 겨우 14쪽 남짓 짧은 글인데 꽤 강렬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치밀한 계획이나 작품 구상 같은 복잡한 일에 매이지 않고도 상상력의 힘으로 이만큼 짜릿한 이야기를 만드는 게 작가의 힘이라는 생각이 든다. 개인적으로 꼭 한 번 써보고 싶었던 적이 있었던 것 같은, 태연하게 황당한 이야기여서 제일 맘에 들었다. 마지막 한 줄 붙어 있는 결론 같은 이야기가 심란한 내용인데도 불구하고 읽는 동안 경쾌하게 읽었다.
'그대와 밤과 음악과' 다짜고짜 대화체로 시작하는데 끝까지 그렇게 대화체로 간다. 어느 순간부터 '음, 어떤 해설도 없이 이야기만으로 풀어가는구나' 고 생각하며 읽게 되었는데, 책 뒤에 붙은 작가의 말에 보면 그에 대한 이야기가 잠깐 나온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ABC 살인 사건'에 대한 오마주라는 앤솔로지 기획을 위해 쓴 것이라는 설명. 대화만으로 이어지는 미스터리를 써 보고 싶어 라이오 디제이라는 설정을 택했다고 한다. 새로운 형식이 거슬리지 않고 읽는 즐거움도 주고, 긴장감도 더해주는 것 같아 좋았다.
'수정의 밤, 비취의 아침'이라는 작품은 <보리의 바다에 가라앉는 열매>와 <황혼녘 백합의 뼈>로 이어지는 미즈노 리세 시리즈의 번외편으로 썼다는데, 리세의 파트너 요한의 에피소드이다. 그 이상한 학원의 분위기는 익숙하지만 구체적으로 인물들이 기억나지는 않는 차에 읽었지만, 단편으로도 충분히 흥미로왔다. 한 편만 읽어도 그 묘한 아우라를 풍기는 특이한 학원의 이야기가 궁금해져 더 많은 이야기를 읽고 싶어질 것만 같다. 작가가 후기에 붙인 말, "사악한 요한 군의 사악한 결말이 마음에 든다." - 굉장히 온다 리쿠적인 말이라는 생각이다.
'외로운 성' 동화적인 소재에 어른들까지 공감할 만한 이야기였다. "옛날, 옛날부터 어느 곳에 외로운 성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마치 아이들에게 오래된 동화를 들려주듯 '~습니다' 체로 이야기한다. 외로운 아이가 되면, 초록 사나이가 그 외로운 아이를 납치하러 온다. 외로운 성으로 데려가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여기, 한 외로운 여자 아이가 있다. 스스로는 외롭다는 걸 의식도 못할 때가 많지만 그 아이는, 언제 엄마와 아빠와 눈을 맞춰 본 적이 있었는지 기억하지도 못할만큼 실은 외롭다. 그리고 그 에리를 데려가는 초록 사나이. 동화는 흥미롭게 이어진다. 약간은 섬찟한 반전도 준비되어 있다. 이야기는, 아이들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듯 서늘하고 썰렁하다. " 냄새가 납니다. 외로운 아이의 냄새입니다. 자기가 그렇다는 걸 모르는 외로운 아이가 어디에 있는지, 초록 사나이는 순식간에 알 수 있습니다. 초록 사나이는 걸음을 빨리해 입맛을 다시며 아이들에게 접근합니다." 어두운 매력이 가득한 동화..
'졸업'도 그 짧은 순간의 섬광 같은 장면으로 하여, 그 앞과 뒤가 궁금해지는 이야기이다. 더이상의 설명도 없는데 마치 강렬한 한 편의 단막극을 보는 듯, 그리고 그 극이 끝나자 다들 무대에서 손을 털고 일어나며 "아아, 이제 끝이네, 이제 우리 여기에서 나가는 거야" 하는 깜짝 놀랄 결말이 기다리고 있다. 이러나저러나, 하도 짧아서 번쩍, 하는 순간 잠시 하얗게 되었다 다시 까맣게 되는 그런 기분이랄까. 온갖 상상을 하게 만드는, 기가 막히게 짧아서 빛났던 작품.
열 네 편의 작품을 더듬다 보니 읽기를 마쳤을 때의 생각과 달리 꽤 인상적인 작품들이 많았다. 아무래도 단편집 한 권을 들고 읽다 보면, 한 편의 감각에서 빠져 나오기도 전에 바로 다른 한 편으로 다시 들어가게 되니까 -물론 내리 읽어대는 내 경우가 그렇겠지만- 앞의 작품은 그새 다음 작품의 무대 아래로 덮여버리고 마는 것같다. 충분히 짧은 한 편 한 편의 느낌에 풍덩 빠져 있기가 어려운 거다. 아무래도 내쳐 읽어내는 방식을 바꾸든지 해야지... 단편의 맛은 마치 색도 모양도 크기도 다른 여러 가지의 에피타이져를 하루에 하나씩 맛보듯, 아끼면서 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