핑퐁
박민규 지음 / 창비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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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 하고 퐁, 하는 그 가벼운 울림으로 다가오는 박민규의 소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그의 발언은 가볍지않은 성찰을 담고 있다. 대체 어떻게 이럴 수가? 하는 심정이 들 만큼 그의 주제는 지구적, 아니 우주적일 정도로 광대무변하고 그에 걸맞게 묵직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한편, 아니 대체 또 어떻게 이럴 수가? 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그의 문체는 무게감을 없앤 채로 전방위적으로 뛰어다닌다. 아니다, 날아다닌다. 박민규말고 또 누가? 모르겠다. 하여간에 내 생각엔 대단한 솜씨고 엄청난 방법이다. 그의 주제와 그의 작법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서.  

나야말로 그를 통해 알게 되었다. 세계가 언제나 듀스포인트라는 걸. 

얘야, 세계는 언제나 듀스포인트란다. 이 세계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나는 줄곧 그것을 지켜봤단다. 그리고 이루 셀 수 없이 많은 이들에게 탁구를 가르쳤어. 어느 쪽이든 이 지루한 시합의 결과를 이끌기 위해서였지. 하지만 아직도 결판은 나지 않았단다. 이 세계는 

그래서 좋다고도, 나쁘다고도 할 수 없는 곳이야. 누군가 사십만의 유태인을 학살하면 또 누군가가 멸종위기에 처한 혹등고래를 보살피는 거야. 누군가는 페놀이 함유된 폐수를 방류하는데, 또 누군가는 일정 헥타르 이상의 자연림을 보존하는 거지. 이를테면 11:10의 듀스포인트에서 11:11, 그리고 11:12가 되나보다 하는 순간 다시 12:12로 균형을 이뤄버리는 거야. 그건 그야말로 지루한 관전이었어. 지금 이 세계의 포인트는 어떤 상탠지 아니? 1738345792629921:1738345792629920, 어김없는 듀스포인트야.  

듣고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다. 듣기 전에는 이 세상이 어떻게 이렇게라도 유지되고 있는지, 잠깐씩 생각해보다가도 에이 내가 그걸 어떻게? 하면서 그만 생각하곤 했지. 그런데 알고보니 그게 듀스포인트의 법칙이었다니. 이제 그걸 알게 되었다니...! 앞으로 관망하지 말고 주시해야겠다. (!) 

뭐야, 이건 또 왜? 하는 생각이 들게 여러가지 이야기가 불쑥 등장한다. 모아이와 못과 치수에서 모아이와 못과 탁구대로, 탁구대에서 세끄라탱으로 랠리로, 모아이에서 핼리혜성을 기다리는 모임으로 9볼트의 에에에에~로, 모아이에서 헤밍웨이의 아류의 아류의 아류...인 존 메이슨으로, 다시 실버스프링의 핑퐁맨에게로. 그렇게 불쑥 등장하는 이야기들은 따로 또 같이, 붕붕 날아다니다가 어딘가 살짝 내려앉고 또 다른 데서 뭔가 붕붕 난다. 그 내려앉은 이야기들은 어디선가 직소퍼즐의 한 조각처럼 기막히게 따닥, 제자리를 찾았을지도. 그렇게 그 조각들은 여기저기서 따닥따닥하면서, 어느새 그림을 만들어가고 있다, 고 봐야겠지. 

요즘들어 부쩍 느낀다. 모아이가 말한 대로, 인간 각각의 해악은 9볼트 정도의 전류와 같다고. 

인간의 해악은 9볼트 정도의 전류와 같은 거야. 그것이 모여 누군가를 죽이기도,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는 거지. 그래서 다들 다수인 척하는 거야. 이탈하려 하지 않고, 평형으로, 병렬로 늘어서는 거지. 그건 길게, 오래 생존하기 위한 인간의 본능이야. 전쟁이나 학살은 그 에너지가 직렬로 이어질 때 일어나는 현상이지. 전쟁이 끝난 후에도 수만 볼트의 파괴자가 남아 있을까? 학살을 자행한 것은 수천 볼트의 괴물들일까? 그렇지 않다고 생각해. 전쟁이 끝난 후에 남는 건 모두 미미한 인간들이야. 독재자도 전범도, 모두가 실은 9볼트 정도의 인간들이란 거지. 요는 인간에게 그 배치를 언제든 바꿀 수 있는 이기(利己)가 있다는 거야. 인간은 그래서 위험해. 고작 마흔한명이 직렬해도 우리 정도는 감전사할 수 있는 거니까.  

그래서 생존해야 해. 우리가 죽는다 해서 우릴 죽인 수천 볼트의 괴물은 발견되지 않아. 직렬의 전류를 피해가며, 모두가 미미하고 모두가 위험한 이 세계에서- 그래서 생존해야 해. 자신의 9볼트가 직렬로 이용되지 않게 경계하며, 건강하게, 탁구를 치면서 말이야. 

 작가는 우리에게 말한다. 

 "가까운 탁구장을 찾아주세요"  

도시의 어딘가에선 힘없는 인간이 맞아죽고, 세계의 어딘가에선 힘없는 민족이 폭격을 당한다. 그리고 나는, 괜찮다. 이곳은 별, 문제가 없는- 아마도 그런, 시추에이션.  

속에서, 그도, 나도, <핑퐁>의 못과 모아이도, 살아남은 한 사람이다. 크나큰 두 차례의 전쟁과 존 덴버와 도밍고가 부르는 '퍼햅스 러브'가 뒤섞인 인류의 1교시에서 말이다.  

살아남았다고 해서 인류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어딘가에선 힘없는 인간이 맞아죽고, 어딘가에선 힘없는 민족이 폭격을 당한다. '퍼햅스 러브'와 같은 노래를 아무리 불러도, 세계의 키워드는 여전히 약육강식이다. 인류의 2교시를 생각한다면, 생존이 아니라 잔존이다. 지난 시간의 인간들이, 그저 잔존해 있는 것이다.      ... 

실은, 인류는 애당초 생존한 게 아니라 잔존해왔다. 만약 인류가 생존한 것이라면 60억 중 누구 하나는 그 이유를 알고 있어야 한다. 우리가 대체, 왜, 살고 있는지를, 말이다. 영문도 모른 채, 말하자면 이곳에서 우리는 너무 오래 잔존해왔다.  

아직은 '고등학생 정도로 부패하지'는 않은 못과 모아이는 그들에게 결정권이 주어졌을 때 결정한다. 탁구계라는 커다란 계가 일견 하찮은 지구의 운명을 일견 하찮은 그들에게 맡긴다는 건 실은 

 각각 9볼트 정도에 불과한 해악의 조합이, 역시나 실은, 지구의 1교시의 비극의 원인이라는 걸 잊지 말라는 건지. 선택권을 가진 못과 모아이는, 과연 '고등학생 정도로 부패하지'는 않았으므로, 지구에게 언인스톨을 명령한다. 다, 사라져도 좋다. 새로 시작하지 않으면 답이 없다. 

언젠가 환경문제를 이야기하면서 누군가가 유명한 사람이 한 말이 기억난다. 지금 지구인들에게 주어진 방법은 한 가지 뿐이다. 누군가들은 지구의 위기를 타개할 방법을 찾으며 죽음으로 가는 고속 질주를 늦추어야 한다고, 감속하라고, 저속으로 나아가야 살 수 있다고 말하고 있지만, 실은 그건 거짓말이다. 단 한 가지 우리가 인류의 생존을 위해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실은 유턴 뿐이다. 우리는 거꾸로 가야한다.

아 정말, 유턴은 인류의 관점에서, 인류를 남길 것이다. 언인스톨은 보다 과격하다. 지구의 관점에서 인류를 삭제하고 지구를 남길 것이다. 그러나 지구로서는 그건 끝이 아니라 부활일 것이라니, 아 정말, 인류의 하나로서 갈길을 알 수 없다. 박민규는 나더러 가까운 탁구장으로 가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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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좌표 - 돈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생각의 주인으로 사는 법
홍세화 지음 / 한겨레출판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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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한 비루함보다 불편한 자유 쪽에 서려고 했던 소수를 위한 위무와 격려를 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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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군화 잭 런던 걸작선 3
잭 런던 지음, 곽영미 옮김 / 궁리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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깜짝 놀랐다. 1908년에 첫 출간되었다는, 그게 백 년도 넘었다는 이야기인데, 그 과거의 사람이 쓴 책의 내용이 섬찟하리만큼 지금과 닮아 선득했다. 그 당시에 읽었던 사람들에게는 미래소설이었겠지. 지금 읽자니 백 년 전의 과거형이 아니라 현재형인 듯하여 오히려 놀랍다. 잭 런던이 대체 누구인가? 여기저기 인용되어 이미 이름만 익숙하던 저자의 책을 처음 만난 소감이라면, 그는 정말 귀신같다는 것이다.

도입부의 형식도 멋졌다. B.O.M.(인류형제애 시대, the Brotherhood of Man) 419년-서기 27세기-, 기적처럼 아름다운 도시 아디스에서, 메러디스라는 문헌학자가 에이비스 에버하드의 원고를 세상에 공개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에이비스 에버하드가 남편 어니스트 에버하드, 20세기 초 노동자 대중을 위한 투쟁에 목숨을 바친 한 치열한 사회주의자의 일대기를 기록한 원고다. 1906년경에 쓰인 이 책의 주요시기는 1912년과 1932년 사이, 런던으로서는 가까이는 이삼십년 안팎을, 멀리는 700년을 내다보고 썼다는 이야기다. 게다가 그 예견이 사실상 21세기 초의 극한 자본주의국가인 미국과 한국의 현재형에 다름 아니어서 전율이 일었다.

작가가 그리고 있는 그 시기는 소수의 집단이 사회의 정치, 경제적 권력을 독점하고 행사하는 정치 체제인 과두지배체제의 시대다. 그 시기  자본주의 모순이 첨예하게 드러나는 미국 사회, 자본가들은 끊임없이 잉여 자본을 축적하는 반면 실업과 빈곤에 시달리는 민중들 속으로는 불공평한 세상을 바로 잡겠다는 사회주의 사상이 확산된다. 선거에서 합법적으로 노동자들이 다수 의석을 확보하자 자본가들의 지배세력인 ‘강철군화’는 대책을 마련하는데, 그들의 대책이라는 것이 놀랄 만큼 우리가 이미 겪은 무대책한 자본주의의 징그러운 역사와 닮았다. 런던이 그리고 있는, 강철군화가 폭력단과 비밀경찰과 군대까지 동원하여 저항세력을 박살내는 장면들, 언론과 대학, 사법을 장악하고 의회마저 무산시키는 장면들, 노동자 계급의 분열을 일으키기 위해 몇몇 거대 노조에만 노동 조건을 개선하고 급여를 올려주어 우월한 노동자로 만들어버리는 장면들은 너무나 생생하여 현재와 그대로 겹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정말로 서글프다. 비극을 서술하는 런던의 예견이 너무나 정확하여, 그런데다 그의 예견에는 강철군화의 지배의 역사가 300년에 이어지니 앞으로도 200여년의 세월, 실은 그게 언제일지 알 수도 없는 미래에나 희망의 세기로 들어선다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맞아 떨어진 것처럼 앞으로도 맞아 떨어진다면 정말 두렵지 아니한가....

솔직히 고백하자면, 과두지배계급은 자신들도 놀랄 만큼 예기치 않은 발전을 이룬 것이다. 하나의 계급으로서 그들은 스스로를 단련시켰다. 그 세계에서는 모든 구성원에게 각자의 일이란 게 있었고, 그것은 반드시 수행해야 했다. 부유한 젊은이들 중에 게으름을 피우는 자는 더 이상 없었다. 그들의 힘은 과두지배체제의 단결된 힘을 보태는 데 이용되었다. 그들은 군대의 지휘관, 산업계의 상관이나 총수로 복무했다. 또한 응용과학 분야로 진출하여 많은 이들이 훌륭한 기술자가 되었다. 일부는 정부의 여러 세분화된 분야로 들어갔고, 식민지 속국에서 근무했으며, 수만 명이 다양한 비밀기관에 투입되었다. 다시 말해 그들은 교육, 예술, 성직, 과학, 문학의 도제가 되어 그 분야에서 과두지배체제를 영속시키는 방향으로 국가의 사고 체계를 주조하는 중요한 기능을 담당했다. 그들은 교육받았고, 나중에는 그들이 하고 있는 일이 옳다고 배웠다. 아이로서 이 세상의 그림을 받아들이기 시작하는 그 순간부터 귀족 사상을 흡수했다. 이 귀족 사상이 그들의 성장 과정으로 엮여 들어가 마침내는 그들의 뼈와 살이 되었다. 그들은 자신들을 야생동물 조련사, 즉 짐승들의 지배자로 간주했다.

이런, 잭 런던은 사실은 21세기를 살다가 타임머신을 타고 20세기 초로 되돌아가 이미 겪은 미래의 이야기를 써낸 것 아닐까? 그렇지 않고서는 이토록 구구절절 맞출 수 있을까. 그의 젊은 시절을 뜨겁게 달구었던 사회주의 공부는 대체 어떤 것이었길래.

 

책 중간중간 메러디스는 주를 달아 에버하드의 시대를 설명하는데, 미래인간이 원시 야만의 700년 전, 그러니까 20세기 초반을 서술하는 걸 읽는 재미가 아주 특별했다.

예를 들어 고명한 대학교수의 집 응접실에서 노동자 출신의 어니스트가 조심조심 움직이는 것에 대해 미래 세기의 문헌학자 메러디스는 이런 주를 달았다.

각주38: 당시에는 거실을 골동품으로 채우는 것이 관습이었다. 그들은 간소하게 사는 법을 알지 못했다. 이런 거실은 끝없이 청소를 해주어야 하는 박물관이었다. 먼지 귀신이 집안의 주인이었다. 먼지를 붙드는 장치는 수없이 많았지만, 그것을 없애는 장치는 몇 개뿐이었다.

 

허영으로 가득 찬 장식 취향을 능청스럽게 비꼬는 런던의 솜씨는 가히 일품이어서 자못 유쾌하기까지 하다.

243쪽에 달아놓은 각주88에서는 ‘Arthurization’이라는 단어의 어원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P. M. Arthur가 20년 간 대표로 있었던 기관사노조가 회사와 타협한 뒤 특혜 받은 노조가 되면서 나머지 노동조합과 별도로 독자적인 노선을 걷게 되는데, 나눠먹기를 의미하는 단어인 ‘아서화’의 배후에는 이런 이기적이면서도 성공적이었던 획책을 꾀한 아서라는 인물의 혁혁한 활동이 있었다는 것. ‘아서화’라는 말은 오랫동안 어원학자들의 머리를 아프게 했는데, 700년 전의 이 오래된 원고를 통해 그 어원이 밝혀지게 된 것이란다.

실은 이 대목에서 나는 이런 말이 정말 있나 싶어 인터넷에서 단어 검색에다 지식 검색까지 다 해보았지만 ‘Arthurization’이라는 단어는 오직 잭 런던의 강철군화 15장에 등장하는 말이었던지 모든 검색은 그리로 연결되었다. 그러니 참으로 실감나는 설명이 아닐 수 없다.

 

264쪽, ‘수백만 명이 굶어죽고 있는데도, 과두지배계급과 그 추종자들은 잉여로 포식하고 있었다.’라는 대목을 읽자면 비감하다. 유엔 식량기구의 자원활동가인 장 지글러의 책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의 의문 그대로가 아닌가. 거기에 대한 각주91은 위트인가 페이소스인가.

 

각주91: 같은 상황이 AD 19세기에 영국의 통치를 받고 있던 인도에서도 연출되었다. 원주민들이 수백만 명씩 굶어죽는데도, 통치자들은 그들의 노고로 얻은 결실을 빼앗아 화려한 허식과 하찮은 바보짓거리에 소비했다. 오늘날의 계몽된 시대를 사는 우리로서는 선조들의 그 같은 행동에 얼굴을 붉히지 않을 수 없다. 우리의 유일한 위안은 철학에 근거한다. 우리는 사회진화에서 자본주의 단계를 먼 옛날의 원숭이 시대와 똑같이 받아들여야 한다. 인간은 진창이나 진흙 속 하등생물에서 일어서기까지 그러한 단계들을 거쳐와야 했다. 그만큼 많은 진창과 진흙이 들러붙어 쉽게 떨쳐지지 않는 것은 부득이한 일이었다.

 

물론 런던이 내세운 인물 어니스트 에버하드는 이 시대에 여러 비판을 받기도 한다. 노동자들이 자신의 권리를 찾기 위해 일으키는 혁명조차도 그는 지식인에 의해 주도되는 시혜와 계몽적 차원의 혁명을 꿈꾼다. 노동자들의 자생력을 믿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가 존엄성을 되찾아주고 싶은 노동자들은 그에게는 계몽되어야 하는 존재들이다. 우월적인 존재가 고결한 정신으로, 자선을 베풀듯이. 런던이 가진 그런 한계가 이 작품 이후 그의 행보를 설명하는 것 같기도 하다. 실제로 돈 잘 버는 유명작가의 삶을 살았던 런던이 말년에는 혁명에 대한 모든 기대를 저버린 채 생을 마감했다는 걸 알고는 씁쓸했다. 신념과 열정으로 써내려간 그의 작품은 세기를 넘어 이어지고 있으나 40년의 길지 않은 그의 인생에서는 이어지지 못한 셈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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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테라
박민규 지음 / 문학동네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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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읽었던 <삼미슈퍼스타즈>로 단박에 그의 팬임을 자처하게 된 나는 또한 전도사이기도 해서 부지런히 박민규를 소개하고 다니기도 했다. 물론 대상을 면밀히 고르는 것도 잊지는 않았다. 내 생각에, 도저히 박민규와는 어울리지 않아 역효과만 가져올 사람도 내 주변에 많지는 않지만 더러는 있어서이다.

그런데 <파반느>와 <삼미슈퍼스타즈>와 <핑퐁>만 해도 그건 현실이었던 거다. <카스테라>를 읽고 나니 단연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럼 <카스테라>...는? 책을 읽는 동안 공간은 전 우주적으로 확장되고 시간은 과거와 미래의 구분을 무의미하게 했으므로 가히 4차원이었다. 박민규 따라 유쾌한 4차원 여행, 게다가 너구리와 기린과 개복치와 펠리컨이라니!  대체 이게 뭐야, 할 것 없이 한 번 따라다녀 보는 거다. 

박민규를 읽는 건 내게 상당히 유쾌한 일이다. 그토록 분방하게 날아다니는 작가의 사고를 들여다보는 일도 즐겁고, 매이지 않은 정신의 현존을 보는 것도 신선한데다, 그의 작품들이 이 사회에 농담으로 버무려 툭, 던지는 문제의식들은 결코, 결코 가볍지가 않다. 아니 어쩌면 우리모두, 애써 외면하며 나랑은 상관없음, 그럼 내겐 문제 아님 하던 것들을 "아니 이거 문제 맞잖아" 하며 이쪽으로 불쑥 던진다. "받아, 받으라구! 재밌다구!!" 한다. 그래, 재밌다.. 

연천유원지를 떠다니던 오리배로 들어가는 '아, 하세요 펠리컨'을 봐도 작가가 소재로 삼는 것들의 새로움을 깨닫게 된다.  연천유원지, 유원지라고는 하지만 더 정확하게는 저수지다. 그저 열세 척의 오리배와 고장난 두더지잡기, 경품크레인이 전부다. 주말에는 32키로 떨어진 소읍 에서 그렇고그런 가족나들이를 오고, 주중에는 딱봐도 불륜인 묘령의 남녀들이 왠지는 모르겠지만 오리배를 타고 저수지로 나간다. 게다가 뭘 하든 계속 발로 페달을 돌리면서. 그런 상황인데, 유일한 직원인 주인공과 또 던져놓은 듯 만큼만 사업을 챙기는 정도인 사장이 주고받는 말. 

도대체 누가 이런 보트를 탈까?  

처음엔 그것이 의문이었다. 말 그대로 <오리배>다. 우선 앉으면 기분이 이상해진다. 오리라니. 절대 찬성할 수 없다. 게다가 끊임없이 발로 페달을 돌려야한다. 퐁당퐁당 퐁당 또 그 소리가 그렇게 이상할 수 없다. 하여간에 그걸 타고 퐁당퐁당 퐁당 물 위를 떠다닌다. 그럴 리가 싶지만, 그게 전부다. 그렇게 한 바퀴 돌고 오니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21세기인데 이걸 타는 사람들이 있을까요? 그래도 꽤 타더라구. 나도 놀랐다니까. 사장은 정말이지 놀란 눈치였다. 놀랍게도, 사장의 말은 사실이었다.  

휴일이 되자 이럴 수가 싶은 수의 사람들이 오리배를 타러 왔다. .... 그것은 뭐랄가, 저렴한 인생들 사이에 흐르는 심야전기와 같은 것이었다.  

정말이지, 있을 법한 곳이고, 아니, 실제로 어디에나 그런 데가 엄연히 있다. (안 가봤지만) 에버랜드 같은 곳이 인공의 다양한 파도를 만들고 광대한 시설을 자랑하며 어드벤쳐, 하고 있는 세상인데, 없어지지도 않고 오리배 열세 척을 두고 여기도 유원지, 라는 곳이 있지 않은가. 누가 그걸 봐도 박민규처럼 저렇게 꼭 찍어서 쓰지는 않겠지만, 우리 모두 알기는 안다. 마음 속으로 이제 저런 걸 얘기할 시점은 아니지, 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 생경함, 그 낯섬을 무시하며 살아간다. 그런데 박민규가 얘기를 하니까, 내겐 그 '과거에 머물고 있는 현재의'장소가 그렇게 신선할 수가 없는 거다. 그래, 믿을 수 없는 일이야, 여전하잖아! 그렇게 우선 그 유원지라는 존재를 다시 들여다보게 한다. 

그 유원지에서 참 별 일들도 많다. 몰래 보트를 훔쳐 타는 사람도 있다. 혼자 살짝, 즐기다가 호루라기를 불면 그저 강 건너편 기슭에 보트를 대고는 달아나버리면 그만이다. 허참. 오리배를 타기엔 조금 아까운 양복을 입고왔던 한 남자는, 퐁당퐁당 배를 타고 나가 저수지 한가운데서 그만 약을 먹어버린다. 생을 마감하는 장소로 고른 오리배 위. 어때? 별일도 다 있다 싶지만, 그게 또 분명 누군가 겪어본 일들처럼 생각되는 거다. 어쩌면 작가가 직접 겪었을지도 모르는 일들이다. 무규칙 이종 소설가를 자처하는 작가야말로, 글로써 화려하게 데뷔하기 전에 온갖 종류의 직업을 두루 섭렵했다지 않는가. 누군가 겪어서 말해주기 전에는, 그 한적한 저수지 위 오리배에서 뭐 그런 일들까지 일어나랴고 생각이나 했을까 말이다. 신기하고 생생한 이런 이야기들은 글에 생명력을 불러넣는다. 삶의 변방을 들여다보는 일, 변방의 존재를 새삼 긍정하게 되는 일. 그런 경험을 하며 읽어가는 일이 어찌 즐겁지 아니한가.  

이야기가 '오리배 세계시민연합'으로 넘어가면 슬슬 웃음이 나온다.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그것이 숨은 기능입니다', 란다. 페루의 페르난이 우연히 오리배에 앉아 신문을 읽고 있었다는군요. 마침 뉴멕시코 농장의 기사가 났는데 거긴 일할 사람이 없어 난리였답니다. 아르헨티나엔 일자리가 없어 난린데 말입니다. 가면 얼마나 좋을까, 가면 먹고 살 텐데.. 그리고 발을 저었는데 순간 오리배가 공중으로 뜬 것입니다. 그 다음은 모든 게 쉬워진 거죠.  

그렇게 오리배의 숨은 기능을 최초로 찾아낸 페루의 페르난은 최초의 오리배 세계시민이 된 거고. 이내 많은 사람들이 그 숨은 기능을 활용하여 세계의 일자리를 찾아 떠나기도 하고 돌아오기도 하고 여행하기도 하고, 뭐 그렇단다. 그렇게 다니다가 오리배가 있는 저수지에서 잠시 머물기도 하면서. 그 상황을 젊은 주인공은 그렇다치고, 나이 많은 사장은 한술 더떠 아예 오리배 세계시민연합의 일원이 되어 가족을 만나러 미국으로 떠나더니 아예 가족과 함께 오리배를 타고 돌아다닌다. 생필품도 그렇고 물건들이 늘어나 수납을 위해 아예 오리배는 이제 펠리컨이 되었다, 는 이야기이다. 

뭐지? ㅋㅋ 유쾌하게 오리배 세계시민연합 이야기를 읽다가 그렇게 펠리컨으로 끝이 나니 유쾌한 중에도 궁금하다. 엄연히 존재하지만 실제로는 없는 것처럼 기억하지 않고 살아가는 많은 존재들이 중심에 있다. 그 존재들은 엄연한 일상성을 가지고 돌아가고 있다는 걸 깨닫는 순간, 그걸 깨닫게 해 놓고는 금세 이야기는 구름 저 위로 훌쩍 날아오른다. 그래도 좋고, 실은 그게 좋다. 작가가 솜씨 좋게 펼쳐놓는 그 이야기 보따리에는 땅을 딛고 있는 발과 구름 위에 걸친 머리와, 그 사이 어딘가 어떻게든 이어져 있을 몸뚱이가 있으리라 상상되는 그런 기분, 생각만 해도 유쾌하다. 머리를 구름에 두자니 발이 땅에서 떨어지고, 발을 땅에 딛고 있자니 머리가 땅에서 겨우 2미터도 안되는 현실을 이렇게 가볍게 넘어서버리는 게 누구나 풀어낼 수 있는 썰은 아닐 터, 박민규가 있어 즐겁다. 나도 가끔, 발은 땅에 두고 머리는 구름 위에 두는 상상이라도 훔쳐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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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 2010-03-15 17: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랫만에 다시 보네요. 이 책이 많이 마음에 드셨나 봐요. 처음 삼미슈퍼스타즈..에 열광하던때가 오래 안된거 같은데. 그거 만큼의 아니었어요. 이 책을 한번 들여다보고 싶게 쓰셨네요. 즐거운 책읽기 하세요.

2010-03-17 05: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카스테라
박민규 지음 / 문학동네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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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규를 통한 4차원적 사고 영역의 확장에 때로 즐겁게 두근두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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