핑퐁
박민규 지음 / 창비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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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 하고 퐁, 하는 그 가벼운 울림으로 다가오는 박민규의 소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그의 발언은 가볍지않은 성찰을 담고 있다. 대체 어떻게 이럴 수가? 하는 심정이 들 만큼 그의 주제는 지구적, 아니 우주적일 정도로 광대무변하고 그에 걸맞게 묵직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한편, 아니 대체 또 어떻게 이럴 수가? 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그의 문체는 무게감을 없앤 채로 전방위적으로 뛰어다닌다. 아니다, 날아다닌다. 박민규말고 또 누가? 모르겠다. 하여간에 내 생각엔 대단한 솜씨고 엄청난 방법이다. 그의 주제와 그의 작법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서.  

나야말로 그를 통해 알게 되었다. 세계가 언제나 듀스포인트라는 걸. 

얘야, 세계는 언제나 듀스포인트란다. 이 세계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나는 줄곧 그것을 지켜봤단다. 그리고 이루 셀 수 없이 많은 이들에게 탁구를 가르쳤어. 어느 쪽이든 이 지루한 시합의 결과를 이끌기 위해서였지. 하지만 아직도 결판은 나지 않았단다. 이 세계는 

그래서 좋다고도, 나쁘다고도 할 수 없는 곳이야. 누군가 사십만의 유태인을 학살하면 또 누군가가 멸종위기에 처한 혹등고래를 보살피는 거야. 누군가는 페놀이 함유된 폐수를 방류하는데, 또 누군가는 일정 헥타르 이상의 자연림을 보존하는 거지. 이를테면 11:10의 듀스포인트에서 11:11, 그리고 11:12가 되나보다 하는 순간 다시 12:12로 균형을 이뤄버리는 거야. 그건 그야말로 지루한 관전이었어. 지금 이 세계의 포인트는 어떤 상탠지 아니? 1738345792629921:1738345792629920, 어김없는 듀스포인트야.  

듣고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다. 듣기 전에는 이 세상이 어떻게 이렇게라도 유지되고 있는지, 잠깐씩 생각해보다가도 에이 내가 그걸 어떻게? 하면서 그만 생각하곤 했지. 그런데 알고보니 그게 듀스포인트의 법칙이었다니. 이제 그걸 알게 되었다니...! 앞으로 관망하지 말고 주시해야겠다. (!) 

뭐야, 이건 또 왜? 하는 생각이 들게 여러가지 이야기가 불쑥 등장한다. 모아이와 못과 치수에서 모아이와 못과 탁구대로, 탁구대에서 세끄라탱으로 랠리로, 모아이에서 핼리혜성을 기다리는 모임으로 9볼트의 에에에에~로, 모아이에서 헤밍웨이의 아류의 아류의 아류...인 존 메이슨으로, 다시 실버스프링의 핑퐁맨에게로. 그렇게 불쑥 등장하는 이야기들은 따로 또 같이, 붕붕 날아다니다가 어딘가 살짝 내려앉고 또 다른 데서 뭔가 붕붕 난다. 그 내려앉은 이야기들은 어디선가 직소퍼즐의 한 조각처럼 기막히게 따닥, 제자리를 찾았을지도. 그렇게 그 조각들은 여기저기서 따닥따닥하면서, 어느새 그림을 만들어가고 있다, 고 봐야겠지. 

요즘들어 부쩍 느낀다. 모아이가 말한 대로, 인간 각각의 해악은 9볼트 정도의 전류와 같다고. 

인간의 해악은 9볼트 정도의 전류와 같은 거야. 그것이 모여 누군가를 죽이기도,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는 거지. 그래서 다들 다수인 척하는 거야. 이탈하려 하지 않고, 평형으로, 병렬로 늘어서는 거지. 그건 길게, 오래 생존하기 위한 인간의 본능이야. 전쟁이나 학살은 그 에너지가 직렬로 이어질 때 일어나는 현상이지. 전쟁이 끝난 후에도 수만 볼트의 파괴자가 남아 있을까? 학살을 자행한 것은 수천 볼트의 괴물들일까? 그렇지 않다고 생각해. 전쟁이 끝난 후에 남는 건 모두 미미한 인간들이야. 독재자도 전범도, 모두가 실은 9볼트 정도의 인간들이란 거지. 요는 인간에게 그 배치를 언제든 바꿀 수 있는 이기(利己)가 있다는 거야. 인간은 그래서 위험해. 고작 마흔한명이 직렬해도 우리 정도는 감전사할 수 있는 거니까.  

그래서 생존해야 해. 우리가 죽는다 해서 우릴 죽인 수천 볼트의 괴물은 발견되지 않아. 직렬의 전류를 피해가며, 모두가 미미하고 모두가 위험한 이 세계에서- 그래서 생존해야 해. 자신의 9볼트가 직렬로 이용되지 않게 경계하며, 건강하게, 탁구를 치면서 말이야. 

 작가는 우리에게 말한다. 

 "가까운 탁구장을 찾아주세요"  

도시의 어딘가에선 힘없는 인간이 맞아죽고, 세계의 어딘가에선 힘없는 민족이 폭격을 당한다. 그리고 나는, 괜찮다. 이곳은 별, 문제가 없는- 아마도 그런, 시추에이션.  

속에서, 그도, 나도, <핑퐁>의 못과 모아이도, 살아남은 한 사람이다. 크나큰 두 차례의 전쟁과 존 덴버와 도밍고가 부르는 '퍼햅스 러브'가 뒤섞인 인류의 1교시에서 말이다.  

살아남았다고 해서 인류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어딘가에선 힘없는 인간이 맞아죽고, 어딘가에선 힘없는 민족이 폭격을 당한다. '퍼햅스 러브'와 같은 노래를 아무리 불러도, 세계의 키워드는 여전히 약육강식이다. 인류의 2교시를 생각한다면, 생존이 아니라 잔존이다. 지난 시간의 인간들이, 그저 잔존해 있는 것이다.      ... 

실은, 인류는 애당초 생존한 게 아니라 잔존해왔다. 만약 인류가 생존한 것이라면 60억 중 누구 하나는 그 이유를 알고 있어야 한다. 우리가 대체, 왜, 살고 있는지를, 말이다. 영문도 모른 채, 말하자면 이곳에서 우리는 너무 오래 잔존해왔다.  

아직은 '고등학생 정도로 부패하지'는 않은 못과 모아이는 그들에게 결정권이 주어졌을 때 결정한다. 탁구계라는 커다란 계가 일견 하찮은 지구의 운명을 일견 하찮은 그들에게 맡긴다는 건 실은 

 각각 9볼트 정도에 불과한 해악의 조합이, 역시나 실은, 지구의 1교시의 비극의 원인이라는 걸 잊지 말라는 건지. 선택권을 가진 못과 모아이는, 과연 '고등학생 정도로 부패하지'는 않았으므로, 지구에게 언인스톨을 명령한다. 다, 사라져도 좋다. 새로 시작하지 않으면 답이 없다. 

언젠가 환경문제를 이야기하면서 누군가가 유명한 사람이 한 말이 기억난다. 지금 지구인들에게 주어진 방법은 한 가지 뿐이다. 누군가들은 지구의 위기를 타개할 방법을 찾으며 죽음으로 가는 고속 질주를 늦추어야 한다고, 감속하라고, 저속으로 나아가야 살 수 있다고 말하고 있지만, 실은 그건 거짓말이다. 단 한 가지 우리가 인류의 생존을 위해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실은 유턴 뿐이다. 우리는 거꾸로 가야한다.

아 정말, 유턴은 인류의 관점에서, 인류를 남길 것이다. 언인스톨은 보다 과격하다. 지구의 관점에서 인류를 삭제하고 지구를 남길 것이다. 그러나 지구로서는 그건 끝이 아니라 부활일 것이라니, 아 정말, 인류의 하나로서 갈길을 알 수 없다. 박민규는 나더러 가까운 탁구장으로 가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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