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철군화 잭 런던 걸작선 3
잭 런던 지음, 곽영미 옮김 / 궁리 / 2009년 3월
평점 :
품절


 

깜짝 놀랐다. 1908년에 첫 출간되었다는, 그게 백 년도 넘었다는 이야기인데, 그 과거의 사람이 쓴 책의 내용이 섬찟하리만큼 지금과 닮아 선득했다. 그 당시에 읽었던 사람들에게는 미래소설이었겠지. 지금 읽자니 백 년 전의 과거형이 아니라 현재형인 듯하여 오히려 놀랍다. 잭 런던이 대체 누구인가? 여기저기 인용되어 이미 이름만 익숙하던 저자의 책을 처음 만난 소감이라면, 그는 정말 귀신같다는 것이다.

도입부의 형식도 멋졌다. B.O.M.(인류형제애 시대, the Brotherhood of Man) 419년-서기 27세기-, 기적처럼 아름다운 도시 아디스에서, 메러디스라는 문헌학자가 에이비스 에버하드의 원고를 세상에 공개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에이비스 에버하드가 남편 어니스트 에버하드, 20세기 초 노동자 대중을 위한 투쟁에 목숨을 바친 한 치열한 사회주의자의 일대기를 기록한 원고다. 1906년경에 쓰인 이 책의 주요시기는 1912년과 1932년 사이, 런던으로서는 가까이는 이삼십년 안팎을, 멀리는 700년을 내다보고 썼다는 이야기다. 게다가 그 예견이 사실상 21세기 초의 극한 자본주의국가인 미국과 한국의 현재형에 다름 아니어서 전율이 일었다.

작가가 그리고 있는 그 시기는 소수의 집단이 사회의 정치, 경제적 권력을 독점하고 행사하는 정치 체제인 과두지배체제의 시대다. 그 시기  자본주의 모순이 첨예하게 드러나는 미국 사회, 자본가들은 끊임없이 잉여 자본을 축적하는 반면 실업과 빈곤에 시달리는 민중들 속으로는 불공평한 세상을 바로 잡겠다는 사회주의 사상이 확산된다. 선거에서 합법적으로 노동자들이 다수 의석을 확보하자 자본가들의 지배세력인 ‘강철군화’는 대책을 마련하는데, 그들의 대책이라는 것이 놀랄 만큼 우리가 이미 겪은 무대책한 자본주의의 징그러운 역사와 닮았다. 런던이 그리고 있는, 강철군화가 폭력단과 비밀경찰과 군대까지 동원하여 저항세력을 박살내는 장면들, 언론과 대학, 사법을 장악하고 의회마저 무산시키는 장면들, 노동자 계급의 분열을 일으키기 위해 몇몇 거대 노조에만 노동 조건을 개선하고 급여를 올려주어 우월한 노동자로 만들어버리는 장면들은 너무나 생생하여 현재와 그대로 겹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정말로 서글프다. 비극을 서술하는 런던의 예견이 너무나 정확하여, 그런데다 그의 예견에는 강철군화의 지배의 역사가 300년에 이어지니 앞으로도 200여년의 세월, 실은 그게 언제일지 알 수도 없는 미래에나 희망의 세기로 들어선다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맞아 떨어진 것처럼 앞으로도 맞아 떨어진다면 정말 두렵지 아니한가....

솔직히 고백하자면, 과두지배계급은 자신들도 놀랄 만큼 예기치 않은 발전을 이룬 것이다. 하나의 계급으로서 그들은 스스로를 단련시켰다. 그 세계에서는 모든 구성원에게 각자의 일이란 게 있었고, 그것은 반드시 수행해야 했다. 부유한 젊은이들 중에 게으름을 피우는 자는 더 이상 없었다. 그들의 힘은 과두지배체제의 단결된 힘을 보태는 데 이용되었다. 그들은 군대의 지휘관, 산업계의 상관이나 총수로 복무했다. 또한 응용과학 분야로 진출하여 많은 이들이 훌륭한 기술자가 되었다. 일부는 정부의 여러 세분화된 분야로 들어갔고, 식민지 속국에서 근무했으며, 수만 명이 다양한 비밀기관에 투입되었다. 다시 말해 그들은 교육, 예술, 성직, 과학, 문학의 도제가 되어 그 분야에서 과두지배체제를 영속시키는 방향으로 국가의 사고 체계를 주조하는 중요한 기능을 담당했다. 그들은 교육받았고, 나중에는 그들이 하고 있는 일이 옳다고 배웠다. 아이로서 이 세상의 그림을 받아들이기 시작하는 그 순간부터 귀족 사상을 흡수했다. 이 귀족 사상이 그들의 성장 과정으로 엮여 들어가 마침내는 그들의 뼈와 살이 되었다. 그들은 자신들을 야생동물 조련사, 즉 짐승들의 지배자로 간주했다.

이런, 잭 런던은 사실은 21세기를 살다가 타임머신을 타고 20세기 초로 되돌아가 이미 겪은 미래의 이야기를 써낸 것 아닐까? 그렇지 않고서는 이토록 구구절절 맞출 수 있을까. 그의 젊은 시절을 뜨겁게 달구었던 사회주의 공부는 대체 어떤 것이었길래.

 

책 중간중간 메러디스는 주를 달아 에버하드의 시대를 설명하는데, 미래인간이 원시 야만의 700년 전, 그러니까 20세기 초반을 서술하는 걸 읽는 재미가 아주 특별했다.

예를 들어 고명한 대학교수의 집 응접실에서 노동자 출신의 어니스트가 조심조심 움직이는 것에 대해 미래 세기의 문헌학자 메러디스는 이런 주를 달았다.

각주38: 당시에는 거실을 골동품으로 채우는 것이 관습이었다. 그들은 간소하게 사는 법을 알지 못했다. 이런 거실은 끝없이 청소를 해주어야 하는 박물관이었다. 먼지 귀신이 집안의 주인이었다. 먼지를 붙드는 장치는 수없이 많았지만, 그것을 없애는 장치는 몇 개뿐이었다.

 

허영으로 가득 찬 장식 취향을 능청스럽게 비꼬는 런던의 솜씨는 가히 일품이어서 자못 유쾌하기까지 하다.

243쪽에 달아놓은 각주88에서는 ‘Arthurization’이라는 단어의 어원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P. M. Arthur가 20년 간 대표로 있었던 기관사노조가 회사와 타협한 뒤 특혜 받은 노조가 되면서 나머지 노동조합과 별도로 독자적인 노선을 걷게 되는데, 나눠먹기를 의미하는 단어인 ‘아서화’의 배후에는 이런 이기적이면서도 성공적이었던 획책을 꾀한 아서라는 인물의 혁혁한 활동이 있었다는 것. ‘아서화’라는 말은 오랫동안 어원학자들의 머리를 아프게 했는데, 700년 전의 이 오래된 원고를 통해 그 어원이 밝혀지게 된 것이란다.

실은 이 대목에서 나는 이런 말이 정말 있나 싶어 인터넷에서 단어 검색에다 지식 검색까지 다 해보았지만 ‘Arthurization’이라는 단어는 오직 잭 런던의 강철군화 15장에 등장하는 말이었던지 모든 검색은 그리로 연결되었다. 그러니 참으로 실감나는 설명이 아닐 수 없다.

 

264쪽, ‘수백만 명이 굶어죽고 있는데도, 과두지배계급과 그 추종자들은 잉여로 포식하고 있었다.’라는 대목을 읽자면 비감하다. 유엔 식량기구의 자원활동가인 장 지글러의 책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의 의문 그대로가 아닌가. 거기에 대한 각주91은 위트인가 페이소스인가.

 

각주91: 같은 상황이 AD 19세기에 영국의 통치를 받고 있던 인도에서도 연출되었다. 원주민들이 수백만 명씩 굶어죽는데도, 통치자들은 그들의 노고로 얻은 결실을 빼앗아 화려한 허식과 하찮은 바보짓거리에 소비했다. 오늘날의 계몽된 시대를 사는 우리로서는 선조들의 그 같은 행동에 얼굴을 붉히지 않을 수 없다. 우리의 유일한 위안은 철학에 근거한다. 우리는 사회진화에서 자본주의 단계를 먼 옛날의 원숭이 시대와 똑같이 받아들여야 한다. 인간은 진창이나 진흙 속 하등생물에서 일어서기까지 그러한 단계들을 거쳐와야 했다. 그만큼 많은 진창과 진흙이 들러붙어 쉽게 떨쳐지지 않는 것은 부득이한 일이었다.

 

물론 런던이 내세운 인물 어니스트 에버하드는 이 시대에 여러 비판을 받기도 한다. 노동자들이 자신의 권리를 찾기 위해 일으키는 혁명조차도 그는 지식인에 의해 주도되는 시혜와 계몽적 차원의 혁명을 꿈꾼다. 노동자들의 자생력을 믿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가 존엄성을 되찾아주고 싶은 노동자들은 그에게는 계몽되어야 하는 존재들이다. 우월적인 존재가 고결한 정신으로, 자선을 베풀듯이. 런던이 가진 그런 한계가 이 작품 이후 그의 행보를 설명하는 것 같기도 하다. 실제로 돈 잘 버는 유명작가의 삶을 살았던 런던이 말년에는 혁명에 대한 모든 기대를 저버린 채 생을 마감했다는 걸 알고는 씁쓸했다. 신념과 열정으로 써내려간 그의 작품은 세기를 넘어 이어지고 있으나 40년의 길지 않은 그의 인생에서는 이어지지 못한 셈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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