쥐와 게 두껍아 두껍아 옛날 옛적에 10
김중철 지음, 김고은 그림 / 웅진주니어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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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세 정도의 유아들에게 읽어주기 적당할 것 같다. 북한의 민담에서 채록한 것이 이야기의 근원이라는데, 뼈대만 남았다는 이야기에 김중철 님은 진짜 살 하나 붙이지 않고 담백하게 글을 썼다. 어른인 내게는 그 군더더기 없이 단단한 글이 좋았다. 이야기의 진행을 막지 않으니 아이들도 좋아할 것 같다. 

쥐와 게가 오다가다 만나 친구가 되었다. 각자 그럭저럭 형편 따라 잘 사는 듯, 여기서는 서로 기우는 처지는 아니라는 전제에서 시작하는 듯하다. 그렇게 나란한 관계라야 하는데, 지내보니 그렇지 않다. 쥐가 놀러오면 (마음이 착하다는) 게는 성심껏 장만해서 대접한다. 쥐는 답례로 내일은 우리집에 놀러와, 라지만 막상 게가 찾아가니 뜻밖에 모른체,다. ?? 다음 날, 쥐는 엉성하게 변명하지만 게는 판단을 미룬다. 그런데, 똑 같은 일이 다시 한 번 더 되풀이 되고, 쥐는 여전히 엉성한 변명을 늘어놓는다. 마치 게가 착해서든, 어리석어서든 꼭 집어 따지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하고 어물쩡 넘어가려는 듯, 쥐의 꼼수가 보일듯 말듯하다. 그래도 실은 '쥐, 뭘까? 안 평범한, 비범한 인물이야? 아님 무슨 비밀이라도 있나?' 그런 생각도 슬그머니 든다. 그러나 세 번 째 그런 일이 되풀이되려 하자, 게는, 쥐의 생각에는 뜻밖에, (내 생각에는 으응, 역시나, 평범한 진리가 중요하지!..)

버럭, 화를 내고 쥐를 응징한다. "야, 거짓말 하지 마!" 란다.  쥐의 다리를 꽉 물면서. 

그러자 쥐가 보인 반응은 어이없기도 하지만, 웃음을 자아내기도 한다. "게가 착한 줄만 알았더니 사납기도 하구나." 란다.  그리고 나중에는 아이스크림을 들이밀며 살짝 얼굴을 붉힌다. (반성하고 화해의 몸짓?)

모르는 척, 속아주는 척 하고 있어도 속으로는 다 안다. 실은 어느 정도 참아주기도 한다. 매번 갋을 수야 있나, 다음엔 안 그러겠지. 하는 게 보통 수더분한 사람들의 인지상정이기도 하다. 또 대부분의 사람들은 상대가 그렇게 알고도 모르는 척, 해 주는 것 다 안다. 그러니 다음엔 그러지 말아야지 하고 조심하기도 한다. 세상은 자주 그렇게 두루뭉술하기도 한 거다.

그런데 진짜, 이 세상엔, 그런 대부분의 사람들 말고, 진짜 특이한 사람들도 생각보다 많아서, 모르는 척 참아주고 있으면 괜찮은 듯 매번 그러는 사람들도 있다. 자기 좋은 거만 생각하고 남 힘든 건 진짜 몰라서 그런 사람도 있고(멍청이..들이다), 상대가 힘들면서도 참아주기만 하면 내몰라라 하는 사람도 있다(얌체들이다). 사실 20%의 사람들이 80%의 자산을 움켜쥐고 80%의 사람들이 20%로 힘들게 비명지르며 사는 걸 몰라몰라 하는 게 실제 세상이니 달리 덧붙일 필요도 없겠다. 80%의 사람들이 한 번 두 번 참다가 세 번 째 꼭, 깨물어 버린다면 20%는 "80%가 착한 줄만 알았더니 사납기도 하구나." 라고 할까? ^^ 이런 데 까지 생각이 나아갔지만, 이 유아 대상의 그림책에서는 둘의 관계는 그저 내면을 제외하고 외양은 수평 관계이니 그런 생각까진 할 필요 없겠다. 서로 마음을 내 줘야지 관계가 지속된다는 것, 함께 나누어야 서로 사이도 좋아진다는 것, 그런 걸 본때 있게 보여주려는 거겠지.  

어쨌든, 이야기는 단순 명료하다. 군더더기도 거의 없다. 어이없는 성격의 쥐가 나오니 절로 긴장이 유발되어 다음에는 어쩌려나? 게가 언제까지 참으려나? 기다리게 된다. 그것만으로도 유아들에게 충분할 것 같은데, 그러다 보니 내게는 그림이 군더더기가 너무 많은 것처럼 느껴졌다. 아기자기하고 주변 이야기가 많은 만화풍의 그림이다. 나중에 하나하나 짚어보고 마치 숨은 그림 찾기 하듯 자세히 보면 그 나름의 볼거리를 주니 재미있다 하겠지만, 우선은 번잡스럽다. 이야기가 물흐르듯, 뒤로 갈수록 급류를 타듯 진행되는데 뭔가 자꾸만 물의 흐름을 방해하는 것 같다. 이 책을 볼 만한 또래의 아이들에게는 결국 잔재미를 주겠지만, 처음 이 책을 읽을 때는 꼭 그런 주변부는 다 무시하고 그저 이야기를 따라 쭉- 나가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한 번 볼 책이 아니니까 우선은 이야기의 재미를 보고, 그게 충분할 때 그 부수적인 재미에 눈 돌리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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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봄 여름 가을 겨울 - 감성 발달을 위한 사계절 그림책
린리쥔 지음, 린리치 그림, 린리치웅 미술편집, 심봉희 옮김 / 베틀북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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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정말 반갑다. 이렇게 섬세하고 아름다운 그림에 시와 같은 감성을 지닌 글이라니. 향기로운 글과 그림을 벗하며 자연 속으로 들어가는 느낌이 너무나 상큼하다. 

봄 여름 가을 겨울, 풀과 벌레와 새들의 세계를 우리를 이끄는 이들을 생각하면, 그들의 자연과 더불어 충만한 삶을 생각하면 내가 다 두근두근하다. 온 세상의 아이들을, 진정으로 이 세계로 초대하고 싶다.  

기나긴 겨울이 가고 햇살 가득한 봄이 되자 아이는 흙 조금, 씨앗 몇 알, 물, 따스한 봄볕으로 정말 새싹이 자라나는지 실험해 보기로 한다.

씨앗을 심고 / 날마다 아침 저녁으로 물 주는 일을 잊지 않았습니다. / 나는 하루빨리 새순이 껍질을 벗고, / 나를 만나러 와 주길 기다렸지요. 

기다리고 또 기다리고, / 하루, 이틀, 사흘.... / 일 주일이 지났는데도 아무런 소식이 없어요. / 나는 엄마에게 왜 씨앗이 아직도 싹을 틔우지 않느냐고 물었지요. 

 그러자 엄마가 말씀하셨어요. / "한 가지가 빠졌는 걸." / "그게 뭔데요?" 

 "인내심 말이야! / 기다릴 줄도 알아야 한단다." 

새싹을 기다리는 아이의 마음이 그대로 노래가 되었다. 화분에서 싹이 얼른 트기를 기다리는 조그만 도토리 요정들이 그대로 아이의 마음을 보여주는 듯하다. 이 노래의 마지막 장에서 파릇파릇 소복소복 나란히 자라난 초록의 싹들에 내 마음이 벅차다. 기다리고 기다렸기 때문에! 

실은 내게도 꼭, 이 책에서 보여주는 것과 같은 보물 상자가 있다. 나는 언제나 대자연 속의 보물찾기를 즐긴다. 내 상자 안에 있는 것은  

빨갛고 여린 날개를 가진 단풍나무 열매들, 북실북실한 모자를 쓴 상수리나무 도토리, 귀여운 쌍동이 같은 고추나무 열매, 활짝 벌어지거나 혹은 푸른 채 꽁꽁 닫힌 소나무 열매, 노랗고 빨간 노박덩굴 열매, 신비로운 파랑을 지닌 댕댕이덩굴 열매, 단단하기 그지없는 물오리나무 열매, 터져버린 박주가리 씨앗 주머니, 빨갛게 익은 찔레 열매, 어느새 깜짝 놀랄만큼 작아져버린 고욤 하나, 보랏빛 작살나무 열매...  그리고 여름의 흔적을 보여주는 조약돌, 조개껍질, 바다유리들.

그리고 내게는 또 보물을 담은 책이 있다. 그 책갈피 속에는 섬세한 단풍나무 잎, 당당한 왕고들빼기 잎, 물오리나무 잎, 붉게 물든 산딸기나무잎, 손바닥같은 고로쇠나무 잎, 기기묘묘 까마귀머루 잎, 솜털 보송한 산철쭉 잎사귀, 저마다 조금씩 다른 산뽕나무 잎 형제들, 잎자루에 날개를 단 붉나무잎, 개암나무잎, 마른 억새 가지, 아직도 보랏빛을 갖고 있는 제비꽃, 돌돌 말린 댕댕이덩굴, 얼룩덜룩한 망개나무잎, 겨울눈을 달고도 반짝이는 잎으로 남아있는 감태나무 잎사귀, 접힌 채로 말라버린 자귀나무 잎들, 아직 연두색 그대로인 어린 졸참나무잎...  

나는 늘 숲에서 나올 때면 주머니가 마른 열매들로 불룩했다. 목에 감았던 손수건을 풀어 작은 주머니를 만들어 예쁜 나뭇잎이 다치지 않게 담아 손에 들고 돌아오곤 했다. 그것들은 내게는, 거의 언제나 그냥 지나치지 못할 만큼 예뻤고 신비로왔다. 눈을 질끈 감지 않으면 숲길을 걸어나오지 못할 만큼... 새들의 노래소리에 발 소리를 죽이며 멈춰야 했고, 벌레들의 연주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다. 바람이 향기를 담아 불어오면 눈 감지 않을 수 있었던가?... 그 순간의 행복을 나는 지금 이 순간에도 느낀다. 들여다보고, 냄새 맡고, 만지고, 소리를 들으며 또 때로 행운처럼 다가온 산뽕나무 오디 열매를 맛보며, 온몸으로 나아가던 그 순간들은 내게는 전율이었다. 그 심정을, 나는 이 책의 지은이에게서 느낀다. 내가 가슴 벅차게 느끼던 그 순간들을 이토록 아름답게 보여주는 사람들이 있다니  

행복하다. 그들의 노래를 듣고, 그들의 화폭을 들여다보고, 그들을 따라 숲속으로 들어가는 내 마음이야말로,  

가득하고 가득하다. 세상 모든 아이들에게, 또 지친 삶을 이어가는 어른들에게도 이 가득함을 나눠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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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봄 여름 가을 겨울 - 감성 발달을 위한 사계절 그림책
린리쥔 지음, 린리치 그림, 린리치웅 미술편집, 심봉희 옮김 / 베틀북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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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의 보물을 사랑하고 즐기는 세 자매, 정말 행복한 삶을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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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좌표 - 돈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생각의 주인으로 사는 법
홍세화 지음 / 한겨레출판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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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세화 님의 글이라면 신문에서 드문드문 짧게, 거의 언제나 비통한 어조의 글을 읽어왔다. 희망이 보이지 않는 사회에 대해 말하자면 어두울 수밖에 없으려니 하면서도 더불어 마음이 무거웠던 것도 사실이어서, 책이 나왔대도 선뜻 손이 가지않았다. 그래도 마음 한켠에 <생각의 좌표>가 남아있어, 도서관에 간 참에 신간으로 들어와 있기에 얼른 빌렸다. 읽는 내내 내겐 다행이랄까, 역시나 희망이 보이지 않는 사회에 대한 예봉이지만 어둡고 무겁지만은 않았다. 지은이 스스로 밝히기를,  

그래도 희망의 끈을 놓을 수 없고 그 근거인 젊은이들에게 다가가려는 시도로 잡문들을 묶어 책을 낸다.  ... 그렇기에 다시금'그렇게 싸워왔는데 여기까지밖에 오지 못했나'라고 말하기보다 '소수의 부단한 노력으로 이나마 덜 비인간적인 사회를 이룰 수 있었다'는 편에 서려고 한다. 이 책은 그래서 그런 소수에게 서로 위무하고 격려하자는 뜻이 담겨 있다. 한국사회구성원들의 의식 형성에 관한 내 생각에 어쭙잖게 내 삶에 대한 내 생각의 조각들을 덧붙인 것은 나름대로 편한 비루함보다는 불편한 자유 쪽에 서려고 했던 삶의 궤적을 통해 소수에겐 그래도 탄식보다는 의지가 어울린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였다. 

그러하니. 희망의 근거인 젊은이들에 대한 위무와 격려의 느낌이었을까? 조금이라도, 어딘가 한 귀퉁이 한 조각이라도 따뜻한 느낌이었던 건 그래서였을까? 비판의 날은 엄정해도 신문에서 보듯 한 편 한 편이 모두 비통하진 않았다.  

'내 생각은 어떻게 내 생각이 되었나?'라고 젊은이들에게 질문한다. 지은이는 얼마나 자주 맹목적인 편견을 접했던지, 그 근거없는 믿음의 뿌리는 대체 어디일까? 어째서 그것이 잘못된 믿음이라는 것을 치명적으로 알게되는 순간이 올 때까지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그 믿음에 대해 회의하지 않는 것일까?  라는 질문을 던지고 스스로 답을 찾는다.   

18세기 프랑스의 교육철학자 콩도르세는 사람을 ‘생각하는 사람’과 ‘믿는 사람’으로 나누었다. 이는 다시 말해 ‘근대적 인간’과 ‘중세적 인간’으로 나눈 것인데, 이를 다시 내 식대로 적용해보면 ‘내 생각은 어떻게 내 것이 되었나?’를 물을 줄 아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나눌 수 있다. 왜냐하면, ‘내 생각은 어떻게 내 것이 되었나?’라고 물을 때 자기 생각을 바꿀 가능성이 그나마 열리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자기 생각을 바꿀 가능성이 없는, 지금 갖고 있는 ‘생각을 믿는’ 사람으로 남기 때문이다. 
 
기존 생각을 수정하려면 자신을 끊임없이 부정하는 용기가 필요한데, 대부분은 기존의 생각을 고집하는 용기만 갖고 있다. 머리가 나쁜 탓이 아니다. 오히려 머리가 좋은 사람일수록 그 좋은 머리를 기존의 생각을 수정하기보다 기존의 생각을 계속 고집하기 위한 합리화의 도구로 쓴다. 사람이 좀처럼 변하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이다. 지금 생각하는 바를 지속적으로 합리화하면서 고집하기 때문에 사람 살아가는 모습이 변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집에서, 학교에서, 사회에서 대체 무엇을 배우고 익히는지, 잘 살아가고 싶고 나름대로는 노력을 게을리하는 것도 아니건만 그런데도 평범한 내가 이토록 불편한 이유는 무엇인지 궁금했다. 이유야 생각해보면 한둘이 아니고, 막연하게는 여러가지 생각들이 떠올랐지만, 확신을 갖기 어려웠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다보면 그저 한탄조로 흐르고 말던 기억들, 그 기억들을 밀어내며 지은이는 이렇게 일러준다. 우리는 이렇게 배우지만(學), 저렇게 익히면서(習) 살아간다, 고.  

 ‘배움’ 없이 인권의식이나 연대의식을 형성하기 어렵지만 배움만으로는 부족하다. 아무리 좋은 가치라 해도 몸에 익히지 않으면 공염불에 머물기 쉽다. 물이 낮은 곳으로 흐르듯 자연스럽게 몸에 배게 하려면 익히고 또 익혀야 하는 것이다. 환경과 일상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이유가 그래서다. ‘사람은 어렸을 때 형성된다’라는 교육 금언을 생각하면 어렸을 때의 교육환경과 일상이 이웃에 대한 배려나 인권의식에 미치는 영향력이 얼마나 막대한지 알 수 있다. 

 ‘지적 인종주의’를 내면화하여 경쟁과 차별을 부추기는 교육환경에서 우리 학생들은 좋은 가치에 관해서는 어쩌다 ‘배울’ 뿐이고 일상 속에서는 그 반대를 ‘익힌다’. 우리 학생들은 남과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공동체의식, 연대의식을 어쩌다 ‘배우지만’ 일상에서는 남을 누르고 혼자 이기는 것을 ‘익힌다.’ 우리 학생들은 인권 의식에 대해 이따금 배울 뿐이고, 일상에서는 인권 침해를 몸에 익힌다. 우리 학생들은 자유, 평등의 가치를 어쩌다 배우고 일상에서는 억압과 차별을 몸에 익힌다. 이렇게 우리 학생들은 일상에서 억압과 차별, 인권 침해를 겪으며 몸에 익히기 때문에 나중에 남을 억압, 차별하고 인권을 침해하면서도 인식하지 못한다.  

우리 사회가 다른 사람과 더불어 같이 잘 살라고 권하는 사회라고, 내 몸은 익히질 못했다. 불특정한 (실은 이 조차 요즘은 '특정한' 누구일수도 있다..) 옆 사람을 누르고 경쟁에서 이기는 것만이 살길이라고 익혀왔다. 그 와중에 역시나, 함께 잘 사는 사회가 우리가 추구하는 사회라고 머리로는 또 슬며시 배워왔다. 그 말씀 그대로다. 배움과 익힘의 이 괴리 앞에서 고민하고 갈등하는 것도 대부분 그리 오래가지 않는다. 어느새 몸은 익힌대로 가고 있다. 이론과 실제의 괴리가 존재한다는 합리화도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사는 게 어디 책에 쓰인 대로만 되던가 말이다..하면서. 그러니, 어찌 불편하지 않겠는가. 내 몸이 경쟁에 휘둘리고 오히려 앞서가려고 아둥바둥할 때에도, 모두들 그것이 요즘 세상의 최고의 선이자 필요조건이라고 부추길 때에도 남는 의문은 그것이다. 경쟁에서 뒤쳐질 때는 그럼 어쩔건데...? 사실 그건 경쟁의 카테고리 안에서는 결코 해서는 안되는 생각이다. 생각하고 있는 그순간에도 나는 벌써 한 단계쯤 뒤쳐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런 살벌한 순간에도 엄연히 의문은 존재하더라는 거다. 중학생인 아이를 좀더 공부하라고 다그칠 때에 그 의문은 최고조에 이른다. 어느 수준 이상 이해하면 모두 그 선을 넘어서버리는 절대평가가 아니다. 모든 구성원들이  아무리 갈고 닦아도 결국 어느 수직 좌표 위에 한 점으로 찍힐 수밖에 없는, 애초에 한계가 없는 무한경쟁을 아이들은 하고 있다. 그 무한경쟁에서 가능한 윗자리에 점을 찍으라고 아이를 어디까지 내몰 수 있는 것일까? 언제나 거기서 막힌다.  

교육이라기보다 차라리 집단 광란 상태라고 불러야 마땅한 그 도가니 속으로 자식을 보내면서 고민이 없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그 고민은 우리 배움과 익힘의 괴리, 아니 아예 상관없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는 나눔과 분배를 구별짓는 우리 사회의 잣대를 이야기한다. 온정적이고 시혜적이고 사적인 나눔에는 발벗고 나서는 '조중동'이 공적이고 사회연대의 성격을 갖는 분배에는 쌍심지를 돋우며 반대한다는 것은, 우리 사회의 서글픈 아이러니다. 지은이의 말마따나, '가진 자들의 시혜나 온정이나 바랄 것이지, 불온한 생각은 하지 말라'는 뜻일까. 소득 2만불을 넘긴 우리 나라가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하는 대학무상교육을 유럽의 여러 복지국가들에서 1만불을 넘긴 시점에서 시작했다는 것은 서로 다른 지향을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다소나마 열린 사회의 이야기를 듣는 것도 힘이 된다. 미처 그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떠돌던 생각들이 좌표를 찾아 자리를 잡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더구나 그 어떤 미래도 펼쳐주지 못한 채 오직 젊은이들을 구덩이로 떠밀고 있는 듯한 이 사회에서, 그래도 희망의 끈을 놓을 수 없어 그 근거인 젊은이들에게 다가가려는 시도로 묶어 낸 이 책은 그래서 더욱 소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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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대 위의 까치 - 진중권의 독창적인 그림읽기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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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랑 바르트는 사진의 의미에 두 개의 층위가 있음을 지적한다. 하나는 '스투디움'으로, 사회적으로 널리 공유되는 '일반적' 해석의 틀에 따라 읽어내는 의미다. 우리는 특정한 사진을 보고 그 사진이 뭘 의미하는지 금방 이해하곤 한다. 다른 하나는 사회적으로 널리 공유되는 그런 일반적 해석과는 관계없이, 때로는 그것을 전복하면서 보는 이의 가슴과 머리를 찌르는 효과이다. 오직 보는 이 혼자만이 느끼는 이 절대적으로 '개별적'인 효과를 바르트는 '푼크툼'이라 부른다. 

라고는 하지만, 이 책을 다 읽은 뒤에도 나는 푼크툼이라는 것이 얼마나 스투디움의 도움을 받고 있는지를 더 절절히 느꼈다고 해야겠다. 진중권이 바로 자신에게 꽂힌 열두 편에 대하여 '사밀한 체험'을 이야기하고 있을 때, 그 사밀한 체험 들은 실상 그에게는 '마치 바늘에 찔리는 듯한' 푼크툼이었을지언정, 내게는 이미 존재했던 그 모든 해석들 속에서 또다른 가능성을 내비치는 행위, 어쩌면 스투디움의 더미를 슬쩍 불리는 일처럼 느껴진 게 여러 번이었다. 그는 자기 자신의 푼크툼을 설명하기 위해 더 많은 지면을 스투디움의 기록물에 의존한다. 그것들은 저자가 말하듯, 몇 가지를 제외하면 99퍼센트 인터넷을 통해 찾은 것들이다. 

따라서 여기에 모은 글들은 독자들을 대신하여 그림을 읽어주기 위함이 아니다. 굳이 말하면 이 책의 성격은'범례적'이라 할 수 있다. 즉 이 책은 독자들을 향한 적극적 독해의 요청, 다시 말해 '그림을 이처럼 읽어보라'거나 '이와는 다른 식으로 읽어보라'는 채근에 가깝다.   

'오랫동안 세상은 이렇게 읽어왔는데 이제 나는 이렇게 읽었으니, 앞으로 너는 너대로 읽어보라'고? 그러나 어쨌든 이 책의 지면을 채우는 것은 '세상이 읽고 지은이가 읽는' 그림에 관한 이야기들이다. 그 다음은 독자의 몫이니 알아서들 해야지! 말을 하나 안하나 그건 그런 건데.

사실, 미술사를 꿰고 도상학을 익힌 전문가의 수준이 아니라면, 그림 보기를 즐기나 그림 보기에 익숙치 않은 일반인들이야 늘 그림을 읽어주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게 마련이다. 그저 그림 보기를 즐기려도 대체로 조언에 의존하지 않고는 안된다. 그런 조언들의 세계를 이미 여러 번 거닐었던 사람이라면야 나름의 견해가 생기기도 하겠지만, 일단 호오 만으로는 완결되지 않는, 뭔가 읽는 방식이라는 게 있다는 걸 깨닫게 되지 않던가.  

그런 수요에 대한 공급이랄까, 여러 전문가 혹은 다소 전문적 훈련을 거친 비전문 애호가들이 스스로의 그림 읽기를 시도한다. 그렇게 나온 책은 사실 돌아보면 우후죽순이다. 그렇다 보니 '나는 누구누구가 읽어주는 그림읽기가 좋다', 라는 기호가 생기기도 한다. 그렇게 하나씩 그들의 읽기를 귀기울여 듣고 때로 익혀가면서 순수 애호가들은 그나마 단련되어 가는 게 아니겠는가. 그들의 읽어주기에도 차등, 혹은 차이가 있다. 어떤 이는 의도적으로 스투디움의 관점에서 읽어주기를 즐기고, 어떤 이는 스투디움의 관점에 자신의 관점을 넌지시 보태기도 한다. 어떤 이는 아예 일반적인 견해와 상관없이, 자신의 관점만을 주관적으로 기술하기도 한다. 그 여러 방법들 중에서 누가 어떤 방법의 읽어주기를 고르는가 하는 것은 여러 요인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겠지만 어쨌든 그 선택은 필요와 기호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옳고 그름의 문제, 혹은 우월하거나 열등함의 문제와 별도로 방법들은 나름의 존재이유를 갖고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진중권이 '푼크툼'이라는 것을 다소 과장되게 설명하고 있지만, 이미 오래 전부터 누군가에 의해 꾸준히 시도되고 있는 방법이 아닌가? 많이 떠들썩한 광고를 보고 뭔가 새로운 것을 기대했다가 내심 실망하고는 좀 허접한 기분이 들었다. 그의 그림 읽어주기가 좀더 방대한 자료를 펼치며 해박하다거나 좀더 주관적이라거나, 그럴 수도 있겠다. 하지만 '푼크툼'이라는 낯선 단어와 함께 펼쳐지는 그의 그림 읽기(해석)는, 설령 그를 뒤따르며 혹은 함께 걸어가며 즐기는 낯선 길이었을지언정 이미 그런 길들은 그가 처음으로 헤쳐낸 원시림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 원시림은 이미 여러 안내자들에 의해 여러 갈래의 길을 닦아놓은 상태인 고로, 그는 그 옆에 자신의 길을 내고 있는 중이다. 이름이 없었더라도 그 길들은 오래 전부터 여러 갈래로 존재해왔기 때문에 더이상 낯선 길도 아니었다. 이미 멀쩡히 존재하던 대륙에 '신대륙의 발견'이라고 이름붙이자 그것이 그때부터 신대륙이 되는 거라면, 아무래도 약간 낯간지러운 느낌이 든다.  

장황하게 뭔가 불편했던 느낌이 떠올라 정리해봤지만, 그게 진중권의 그림읽기에 대한 불편함은 아니다. 그가 서문에서 밝힌 '창조적 독해'에 대해 그게 뭐 그리 새삼스레 밝힐 일인가, 싶었을 뿐 그의 창조적 독해  그 자체에 대한 반감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가 조목조목 짚어주면서 그림은 점점 더 재미있어지고 숨은 뜻은 드디어 살짝 모습을 드러낸다. 게다가 그걸 보는 각도도 하나 둘로 제한된 게 아니라 무궁무진하게 확장된다. 이미 세상에 드러난 여러 개의 해석에 또 새로운 하나를 보태면서 이 시대의 정서와도 교차시키니 그 어찌 솔깃하지 않으랴. 덧붙여 이미 진중권에게는 우리 시대의 논객의 아우라가 겹쳐있지 않는가. 열 두 점의 그림 중에 그가 아니었으면 흘려보냈을 태반을 운 좋게도 소개받은 것, 한 장의 그림을 소개하면서 시대를 넘어 그 작품의 오마쥬를 넘나드는 즐거움, 물론 이 책의 주작업인 그의 푼크툼을 들여다보는 일들이 어우러져 즐거운 독서였다는 사실도 덧붙여야 비로소 공정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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