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대 위의 까치 - 진중권의 독창적인 그림읽기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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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랑 바르트는 사진의 의미에 두 개의 층위가 있음을 지적한다. 하나는 '스투디움'으로, 사회적으로 널리 공유되는 '일반적' 해석의 틀에 따라 읽어내는 의미다. 우리는 특정한 사진을 보고 그 사진이 뭘 의미하는지 금방 이해하곤 한다. 다른 하나는 사회적으로 널리 공유되는 그런 일반적 해석과는 관계없이, 때로는 그것을 전복하면서 보는 이의 가슴과 머리를 찌르는 효과이다. 오직 보는 이 혼자만이 느끼는 이 절대적으로 '개별적'인 효과를 바르트는 '푼크툼'이라 부른다. 

라고는 하지만, 이 책을 다 읽은 뒤에도 나는 푼크툼이라는 것이 얼마나 스투디움의 도움을 받고 있는지를 더 절절히 느꼈다고 해야겠다. 진중권이 바로 자신에게 꽂힌 열두 편에 대하여 '사밀한 체험'을 이야기하고 있을 때, 그 사밀한 체험 들은 실상 그에게는 '마치 바늘에 찔리는 듯한' 푼크툼이었을지언정, 내게는 이미 존재했던 그 모든 해석들 속에서 또다른 가능성을 내비치는 행위, 어쩌면 스투디움의 더미를 슬쩍 불리는 일처럼 느껴진 게 여러 번이었다. 그는 자기 자신의 푼크툼을 설명하기 위해 더 많은 지면을 스투디움의 기록물에 의존한다. 그것들은 저자가 말하듯, 몇 가지를 제외하면 99퍼센트 인터넷을 통해 찾은 것들이다. 

따라서 여기에 모은 글들은 독자들을 대신하여 그림을 읽어주기 위함이 아니다. 굳이 말하면 이 책의 성격은'범례적'이라 할 수 있다. 즉 이 책은 독자들을 향한 적극적 독해의 요청, 다시 말해 '그림을 이처럼 읽어보라'거나 '이와는 다른 식으로 읽어보라'는 채근에 가깝다.   

'오랫동안 세상은 이렇게 읽어왔는데 이제 나는 이렇게 읽었으니, 앞으로 너는 너대로 읽어보라'고? 그러나 어쨌든 이 책의 지면을 채우는 것은 '세상이 읽고 지은이가 읽는' 그림에 관한 이야기들이다. 그 다음은 독자의 몫이니 알아서들 해야지! 말을 하나 안하나 그건 그런 건데.

사실, 미술사를 꿰고 도상학을 익힌 전문가의 수준이 아니라면, 그림 보기를 즐기나 그림 보기에 익숙치 않은 일반인들이야 늘 그림을 읽어주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게 마련이다. 그저 그림 보기를 즐기려도 대체로 조언에 의존하지 않고는 안된다. 그런 조언들의 세계를 이미 여러 번 거닐었던 사람이라면야 나름의 견해가 생기기도 하겠지만, 일단 호오 만으로는 완결되지 않는, 뭔가 읽는 방식이라는 게 있다는 걸 깨닫게 되지 않던가.  

그런 수요에 대한 공급이랄까, 여러 전문가 혹은 다소 전문적 훈련을 거친 비전문 애호가들이 스스로의 그림 읽기를 시도한다. 그렇게 나온 책은 사실 돌아보면 우후죽순이다. 그렇다 보니 '나는 누구누구가 읽어주는 그림읽기가 좋다', 라는 기호가 생기기도 한다. 그렇게 하나씩 그들의 읽기를 귀기울여 듣고 때로 익혀가면서 순수 애호가들은 그나마 단련되어 가는 게 아니겠는가. 그들의 읽어주기에도 차등, 혹은 차이가 있다. 어떤 이는 의도적으로 스투디움의 관점에서 읽어주기를 즐기고, 어떤 이는 스투디움의 관점에 자신의 관점을 넌지시 보태기도 한다. 어떤 이는 아예 일반적인 견해와 상관없이, 자신의 관점만을 주관적으로 기술하기도 한다. 그 여러 방법들 중에서 누가 어떤 방법의 읽어주기를 고르는가 하는 것은 여러 요인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겠지만 어쨌든 그 선택은 필요와 기호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옳고 그름의 문제, 혹은 우월하거나 열등함의 문제와 별도로 방법들은 나름의 존재이유를 갖고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진중권이 '푼크툼'이라는 것을 다소 과장되게 설명하고 있지만, 이미 오래 전부터 누군가에 의해 꾸준히 시도되고 있는 방법이 아닌가? 많이 떠들썩한 광고를 보고 뭔가 새로운 것을 기대했다가 내심 실망하고는 좀 허접한 기분이 들었다. 그의 그림 읽어주기가 좀더 방대한 자료를 펼치며 해박하다거나 좀더 주관적이라거나, 그럴 수도 있겠다. 하지만 '푼크툼'이라는 낯선 단어와 함께 펼쳐지는 그의 그림 읽기(해석)는, 설령 그를 뒤따르며 혹은 함께 걸어가며 즐기는 낯선 길이었을지언정 이미 그런 길들은 그가 처음으로 헤쳐낸 원시림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 원시림은 이미 여러 안내자들에 의해 여러 갈래의 길을 닦아놓은 상태인 고로, 그는 그 옆에 자신의 길을 내고 있는 중이다. 이름이 없었더라도 그 길들은 오래 전부터 여러 갈래로 존재해왔기 때문에 더이상 낯선 길도 아니었다. 이미 멀쩡히 존재하던 대륙에 '신대륙의 발견'이라고 이름붙이자 그것이 그때부터 신대륙이 되는 거라면, 아무래도 약간 낯간지러운 느낌이 든다.  

장황하게 뭔가 불편했던 느낌이 떠올라 정리해봤지만, 그게 진중권의 그림읽기에 대한 불편함은 아니다. 그가 서문에서 밝힌 '창조적 독해'에 대해 그게 뭐 그리 새삼스레 밝힐 일인가, 싶었을 뿐 그의 창조적 독해  그 자체에 대한 반감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가 조목조목 짚어주면서 그림은 점점 더 재미있어지고 숨은 뜻은 드디어 살짝 모습을 드러낸다. 게다가 그걸 보는 각도도 하나 둘로 제한된 게 아니라 무궁무진하게 확장된다. 이미 세상에 드러난 여러 개의 해석에 또 새로운 하나를 보태면서 이 시대의 정서와도 교차시키니 그 어찌 솔깃하지 않으랴. 덧붙여 이미 진중권에게는 우리 시대의 논객의 아우라가 겹쳐있지 않는가. 열 두 점의 그림 중에 그가 아니었으면 흘려보냈을 태반을 운 좋게도 소개받은 것, 한 장의 그림을 소개하면서 시대를 넘어 그 작품의 오마쥬를 넘나드는 즐거움, 물론 이 책의 주작업인 그의 푼크툼을 들여다보는 일들이 어우러져 즐거운 독서였다는 사실도 덧붙여야 비로소 공정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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