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좌표 - 돈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생각의 주인으로 사는 법
홍세화 지음 / 한겨레출판 / 2009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홍세화 님의 글이라면 신문에서 드문드문 짧게, 거의 언제나 비통한 어조의 글을 읽어왔다. 희망이 보이지 않는 사회에 대해 말하자면 어두울 수밖에 없으려니 하면서도 더불어 마음이 무거웠던 것도 사실이어서, 책이 나왔대도 선뜻 손이 가지않았다. 그래도 마음 한켠에 <생각의 좌표>가 남아있어, 도서관에 간 참에 신간으로 들어와 있기에 얼른 빌렸다. 읽는 내내 내겐 다행이랄까, 역시나 희망이 보이지 않는 사회에 대한 예봉이지만 어둡고 무겁지만은 않았다. 지은이 스스로 밝히기를,  

그래도 희망의 끈을 놓을 수 없고 그 근거인 젊은이들에게 다가가려는 시도로 잡문들을 묶어 책을 낸다.  ... 그렇기에 다시금'그렇게 싸워왔는데 여기까지밖에 오지 못했나'라고 말하기보다 '소수의 부단한 노력으로 이나마 덜 비인간적인 사회를 이룰 수 있었다'는 편에 서려고 한다. 이 책은 그래서 그런 소수에게 서로 위무하고 격려하자는 뜻이 담겨 있다. 한국사회구성원들의 의식 형성에 관한 내 생각에 어쭙잖게 내 삶에 대한 내 생각의 조각들을 덧붙인 것은 나름대로 편한 비루함보다는 불편한 자유 쪽에 서려고 했던 삶의 궤적을 통해 소수에겐 그래도 탄식보다는 의지가 어울린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였다. 

그러하니. 희망의 근거인 젊은이들에 대한 위무와 격려의 느낌이었을까? 조금이라도, 어딘가 한 귀퉁이 한 조각이라도 따뜻한 느낌이었던 건 그래서였을까? 비판의 날은 엄정해도 신문에서 보듯 한 편 한 편이 모두 비통하진 않았다.  

'내 생각은 어떻게 내 생각이 되었나?'라고 젊은이들에게 질문한다. 지은이는 얼마나 자주 맹목적인 편견을 접했던지, 그 근거없는 믿음의 뿌리는 대체 어디일까? 어째서 그것이 잘못된 믿음이라는 것을 치명적으로 알게되는 순간이 올 때까지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그 믿음에 대해 회의하지 않는 것일까?  라는 질문을 던지고 스스로 답을 찾는다.   

18세기 프랑스의 교육철학자 콩도르세는 사람을 ‘생각하는 사람’과 ‘믿는 사람’으로 나누었다. 이는 다시 말해 ‘근대적 인간’과 ‘중세적 인간’으로 나눈 것인데, 이를 다시 내 식대로 적용해보면 ‘내 생각은 어떻게 내 것이 되었나?’를 물을 줄 아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나눌 수 있다. 왜냐하면, ‘내 생각은 어떻게 내 것이 되었나?’라고 물을 때 자기 생각을 바꿀 가능성이 그나마 열리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자기 생각을 바꿀 가능성이 없는, 지금 갖고 있는 ‘생각을 믿는’ 사람으로 남기 때문이다. 
 
기존 생각을 수정하려면 자신을 끊임없이 부정하는 용기가 필요한데, 대부분은 기존의 생각을 고집하는 용기만 갖고 있다. 머리가 나쁜 탓이 아니다. 오히려 머리가 좋은 사람일수록 그 좋은 머리를 기존의 생각을 수정하기보다 기존의 생각을 계속 고집하기 위한 합리화의 도구로 쓴다. 사람이 좀처럼 변하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이다. 지금 생각하는 바를 지속적으로 합리화하면서 고집하기 때문에 사람 살아가는 모습이 변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집에서, 학교에서, 사회에서 대체 무엇을 배우고 익히는지, 잘 살아가고 싶고 나름대로는 노력을 게을리하는 것도 아니건만 그런데도 평범한 내가 이토록 불편한 이유는 무엇인지 궁금했다. 이유야 생각해보면 한둘이 아니고, 막연하게는 여러가지 생각들이 떠올랐지만, 확신을 갖기 어려웠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다보면 그저 한탄조로 흐르고 말던 기억들, 그 기억들을 밀어내며 지은이는 이렇게 일러준다. 우리는 이렇게 배우지만(學), 저렇게 익히면서(習) 살아간다, 고.  

 ‘배움’ 없이 인권의식이나 연대의식을 형성하기 어렵지만 배움만으로는 부족하다. 아무리 좋은 가치라 해도 몸에 익히지 않으면 공염불에 머물기 쉽다. 물이 낮은 곳으로 흐르듯 자연스럽게 몸에 배게 하려면 익히고 또 익혀야 하는 것이다. 환경과 일상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이유가 그래서다. ‘사람은 어렸을 때 형성된다’라는 교육 금언을 생각하면 어렸을 때의 교육환경과 일상이 이웃에 대한 배려나 인권의식에 미치는 영향력이 얼마나 막대한지 알 수 있다. 

 ‘지적 인종주의’를 내면화하여 경쟁과 차별을 부추기는 교육환경에서 우리 학생들은 좋은 가치에 관해서는 어쩌다 ‘배울’ 뿐이고 일상 속에서는 그 반대를 ‘익힌다’. 우리 학생들은 남과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공동체의식, 연대의식을 어쩌다 ‘배우지만’ 일상에서는 남을 누르고 혼자 이기는 것을 ‘익힌다.’ 우리 학생들은 인권 의식에 대해 이따금 배울 뿐이고, 일상에서는 인권 침해를 몸에 익힌다. 우리 학생들은 자유, 평등의 가치를 어쩌다 배우고 일상에서는 억압과 차별을 몸에 익힌다. 이렇게 우리 학생들은 일상에서 억압과 차별, 인권 침해를 겪으며 몸에 익히기 때문에 나중에 남을 억압, 차별하고 인권을 침해하면서도 인식하지 못한다.  

우리 사회가 다른 사람과 더불어 같이 잘 살라고 권하는 사회라고, 내 몸은 익히질 못했다. 불특정한 (실은 이 조차 요즘은 '특정한' 누구일수도 있다..) 옆 사람을 누르고 경쟁에서 이기는 것만이 살길이라고 익혀왔다. 그 와중에 역시나, 함께 잘 사는 사회가 우리가 추구하는 사회라고 머리로는 또 슬며시 배워왔다. 그 말씀 그대로다. 배움과 익힘의 이 괴리 앞에서 고민하고 갈등하는 것도 대부분 그리 오래가지 않는다. 어느새 몸은 익힌대로 가고 있다. 이론과 실제의 괴리가 존재한다는 합리화도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사는 게 어디 책에 쓰인 대로만 되던가 말이다..하면서. 그러니, 어찌 불편하지 않겠는가. 내 몸이 경쟁에 휘둘리고 오히려 앞서가려고 아둥바둥할 때에도, 모두들 그것이 요즘 세상의 최고의 선이자 필요조건이라고 부추길 때에도 남는 의문은 그것이다. 경쟁에서 뒤쳐질 때는 그럼 어쩔건데...? 사실 그건 경쟁의 카테고리 안에서는 결코 해서는 안되는 생각이다. 생각하고 있는 그순간에도 나는 벌써 한 단계쯤 뒤쳐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런 살벌한 순간에도 엄연히 의문은 존재하더라는 거다. 중학생인 아이를 좀더 공부하라고 다그칠 때에 그 의문은 최고조에 이른다. 어느 수준 이상 이해하면 모두 그 선을 넘어서버리는 절대평가가 아니다. 모든 구성원들이  아무리 갈고 닦아도 결국 어느 수직 좌표 위에 한 점으로 찍힐 수밖에 없는, 애초에 한계가 없는 무한경쟁을 아이들은 하고 있다. 그 무한경쟁에서 가능한 윗자리에 점을 찍으라고 아이를 어디까지 내몰 수 있는 것일까? 언제나 거기서 막힌다.  

교육이라기보다 차라리 집단 광란 상태라고 불러야 마땅한 그 도가니 속으로 자식을 보내면서 고민이 없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그 고민은 우리 배움과 익힘의 괴리, 아니 아예 상관없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는 나눔과 분배를 구별짓는 우리 사회의 잣대를 이야기한다. 온정적이고 시혜적이고 사적인 나눔에는 발벗고 나서는 '조중동'이 공적이고 사회연대의 성격을 갖는 분배에는 쌍심지를 돋우며 반대한다는 것은, 우리 사회의 서글픈 아이러니다. 지은이의 말마따나, '가진 자들의 시혜나 온정이나 바랄 것이지, 불온한 생각은 하지 말라'는 뜻일까. 소득 2만불을 넘긴 우리 나라가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하는 대학무상교육을 유럽의 여러 복지국가들에서 1만불을 넘긴 시점에서 시작했다는 것은 서로 다른 지향을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다소나마 열린 사회의 이야기를 듣는 것도 힘이 된다. 미처 그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떠돌던 생각들이 좌표를 찾아 자리를 잡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더구나 그 어떤 미래도 펼쳐주지 못한 채 오직 젊은이들을 구덩이로 떠밀고 있는 듯한 이 사회에서, 그래도 희망의 끈을 놓을 수 없어 그 근거인 젊은이들에게 다가가려는 시도로 묶어 낸 이 책은 그래서 더욱 소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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