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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향전 : 사랑 사랑 내 사랑아 ㅣ 국어시간에 고전읽기 (나라말) 2
조현설 지음, 이지은 그림 / 나라말 / 2002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지난 번, <손가락에 잘못 떨어진 먹물 한 방울> 이라는 멋들어진 제목을 달고 나온 운영전을 읽고는 탄복을 했다. 이 책, <사랑 사랑 내 사랑아>는 위의 책과 같이 나라말이라는 출판사에서 펴낸, "국어시간에 고전 읽기 " 시리즈의 두 번째 책이다.
뒷쪽 책날개에 전국 국어교사 모임에서 정리한 듯한 이야기가 있다.
"누구나 알고 있는 듯하지만, 누구도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한 재미있는 우리 고전. 원본을 충실히 살리면서도 중고생들이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쓰여진 "국어시간에 고전읽기"는 우리 아이들에게 고전 문학의 참맛을 느끼게 해 줄 것입니다. ..."
딱 그 말대로, 내가 느낀 것이 바로 고전 문학의 참 맛이었다면, 나는 그 맛난 강물에 풍덩 빠지고 달밤에 취하듯 그 맛에 취했다. 우리 고전을 원전으로 본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라면, 나는 새고 지도록 보고 또 볼 것이다. 내가 보고 또 책을 사서 내가 아끼는 이들에게 이 즐거움을 누리라고 권한다.
춘향전이란 이야기는 하여간 놀랍다. 그냥 줄거리만 들어도 흥미진진한 이야기니까. 판소리와 소설을 모태로 하여 오페라, 영화, 드라마, 만화, 소설, 아이들을 위한 동화로까지 재구성되는 원동력은 우선은 그 감동적이고 짜릿한 이야기에 있는 것 같다. 신분을 뛰어넘는 아름답고 꿋꿋한 청춘 남녀의 사랑! 지금 TV에서 이름만 바꾸고 춘향전의 이야기가 그대로 나온다 해도 많이들 볼 것이다, 아마도.
그런데 이 원전 춘향전을 읽자면, 그 스토리를 이끌어가는 말의 맛에 취해 거의 무아지경에 이른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특정한 작가 없이 판소리에서 발달된 소설이라는데, 그 유장하고 유려함이 책 한 권에 담뿍 담겨있다. 언젠가 이 책을 보고야 말 미래의 독자를 이끄는 데는, 이 책의 한 대목 대목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한다. 그런 대목들이 널려 있어 고르기도 쉽지 않다.
잠깐 춘향을 만나고 공부방으로 돌아온 이도령은 춘향 생각에 책에는 뜻이 없어졌다. 책을 펼치면 고운 말소리 귀에 쟁쟁하고 어여쁜 맵시는 눈에 삼삼하였다. 해 지기만을 기다리며 방자를 자꾸 귀찮게 했다. .......(중략)..... (이러면서 방자를 데리고 한 수 가르친다며 천자문을 외는데, 그 가는 곳이 희한하다.)
...'가련하게도 오늘 밤은 기생집에서 자겠구나' 원앙금침에 잘 숙, 절대 가인과 좋은 풍류가 춘추에 나열되어 있으니 벌일 열, 은은한 달빛 삼경에 온갖 정회를 베풀 장, 오늘은 찬 바람이 쓸쓸히 불어 오니 침실에 들거라 찰 한, 베개가 높거든 내 팔을 베어라 이만큼 오너라 올 래, 에라 후려쳐서 질끈 안고 임의 다리에 들어가니 차가운 눈바람에도 더울 서, 침실이 덥거든 음풍을 취하여 이리저리 갈 왕, 춥지도 덥지도 않은 때가 어느 때냐 오동잎 지는 가을 추, 백발이 장차 우거지리니 소년 풍모 거둘 수, 잎 진 나무에 찬 바람 부니 흰눈에 뒤덮인 강산 겨울 동, 자나깨나 못 잊는 우리 사랑 깊고 깊은 방 속에 감출 장, 간밤 가는 비에 연꽃이 빛이 나니 부드러울 윤, 이런 고운 자태 평생을 보고도 남을 여, 백년가약 깊은 맹세 한없이 넓고 푸른 바다를 이룰 성, 이리저리 노닐 때 세월을 가는 줄 모르니 해 세, 조강지처 못 내보내고 아내 푸대접 못 하나니 대전통편의 법 율, 군자의 좋은 배필 춘향 입에 내 입을 한 데 대고 쪽쪽 빠니 음률 려 자가 아니냐? 애고 애고 보고 싶어." 이렇게 소리를 질러 떠들어 대니 그때 마침 사또가 저녁 진지를 마친 후 잠깐 식곤증이 몰려와 졸다가 "애고 보고 싶어." 소리에 깜짝 놀랐다. "이리 오너라!" "예." "아니, 공부방에서 누가 침이라도 맞고 있느냐, 시큰한 다리라도 주무르고 있느냐? 알아보고 오너라." 심부름꾼 통인이 부리나케 달려갔다. "도련님 웬 고함이요? 사또께서 놀라 알아보라 하시니 가서 뭐라 할까요?" '딱한 일이다. 이웃집 늙은이는 귀를 먹어 어렵다던데 귀가 너무 밝은 것도 예삿일은 아니구나!" 속으로는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겉으로는 짐짓 놀라 이도령은 대답했다. "내가 논어를 읽는 중 '슬프다, 내가 늙었구나. 꿈에 주공을 뵙지 못한 지가 오래로구나.' 하는 대목을 보다가 나도 주공을 보면 그렇게 해 볼까 흥취에 취하여 소리가 높았으니 그대로만 여쭈어라."
이러구러 이도령의 능청은 밤 깊듯 깊어간다. 이리 감칠 맛 나는 대사들은, 지금에는 만들래야 만들 수도 없는 말들이다. 지금 쓰지 않는 말로 이 시대의 이야기를 할 수 없듯, 그때 쓰던 말로 그 시대의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이리 생생하여 그 시대의 쪽문을 슬쩍 훔쳐보는 맛이 여간 아니다. 조현설 님의 글의 맛인지 이 이야기의 원전이라는 <열녀춘향수절가>의 맛인지, 하여간에 우리는 그 맛에 취할 뿐이다.
더불어 이지은 님의 그림을 논외로 할 수 없다. 이 책의 매력은 읽기도 전에 우선 그 기막힌 그림에서 볼 수 있거니와, 이 책을 거의 불후의 명작 수준으로 만들고 있다. ^^ 저 남도의 붉은 흙을 떠올리게 하는 바탕색이며, 민화의 해학과 현대 일러스트의 깜찍함이 어울린 그림체는 이 발랄한 청춘남녀의 이야기에 너무나 잘 어우러진다. "조현설 님의 글을 읽고 이지은 님이 해석하기를, 이렇게 하였느니라~~" 라는 듯, 이지은 님의 해석은 나를 당겼다 놓았다 한다. 한번 본 춘향을 어서 또 보고 싶어 공부가 안되는 몽룡의 모습이 온 방 가득 이리 뒹굴 저리 뒹굴 널려 있고, 아무래도 이별할 수밖에 없다는 몽룡의 말을 듣고 낯빛이 변하며 코를 발심거리고 이를 뽀드득 갈며 눈알을 씰룩대며, 치맛자락을 와드득 좌르륵 찢어 버리고 머리카락도 와드득 쥐어뜯는 춘향의 모습이 정말이지 하하 웃지 않을 수 없도록 실감나게 그려져 있다. '어화둥둥 내 사랑아' 의 장면은 또 어떻고! 아무리 잘 할래야 아둔한 내 말로는 설명할 수가 없으니 안타까울 뿐이다.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더니, 이 재미난 이야기를 두고도 여태 좋은 줄도 모르고 살았다니 원통하다. 이제 조현설 님과 이지은 님의 힘을 빌어 서말 구슬이 영롱한 목걸이로 팔찌로 엮어지니, 한 마디로 안 보면 손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