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르겐 니콜라이 / 범양사 / 1984년 11월
평점 :
절판


"자연의 아름다움을 느끼는 감정이 사라졌다면 그것을 소생시키고, 그런 감정이 아직도 남아있다면 그것을 지속시키는 일은 이 책과 같은 서적의 가장 중요한 목적의 하나가 된다.  그러나 과학자로서 정확성과 진실성은 물론 유지해야 하지만, '무미건조'하지 않고 아름다운 것을 올바로 감상하고 좋은 목적을 옹호하는 저자 자신의 참여가 분명히 발휘되도록  그의 지식을 제시하는 것은 그의 의무인 것이다.


 우리는 어떤 강의 동물에 비하여 새와 새의 생활양식에 관해서 더 많이 알고 있기 대문에, 이 책의 제목에 담겨 있는 주제 내용을 아주 흥미롭고 많은 사람에게 이해가 가능하면서도 과학적 정확성이 유지되도록 설명을 해야 한다는 일이 어려운 일일 뿐만 아니라, 야심적이고도 책임이 중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일에 유르겐 니콜라이보다 더 적임자는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동물을 사랑하는 그의 내심의 동기가 연구가로서의 그의 능력과 훌륭하게 결합되어 알찬 완성품을 만들어냈다...."


  노벨상 수상자이면서 <솔로몬 왕의 반지>라는 책을 통해 새의 습성 생태학을 우리에게 정감어린 과학으로 설명해주었던 콘라드 로렌쯔가 이 책의 서문에서 쓴 글이다.  로렌쯔 교수의 동료이자 제자로서 전 생애를 새의 습성학 연구자로서 지낸 유르겐 니콜라이 박사가 쓴 이 탁월한 책이 우리나라에 번역되어 나온 것이 1984년이다. 


  내가 85년 처음 이 책을 만난 이래, 이 책은 새를 바라보는 내 시각을 확연히 넓혀주었고, 그릇되지 않게 잡아주었고, 내 삶을 새와 동떨어지지 않는 것으로 만드는데 크고 큰 기여를 했다.  지금까지 나는 이 책을 통해 미지의 새들을 만나 마치 내 벗인 양 가까이 하는 경험을 여러차례 하였다.  지금 나는 겨울철 철새 탐사를 앞두고 원병오님이 쓴 <한국의 새> 같은 도감들을 보면서 우리나라 새들과 낯익히기를 하고 있지만, 이 책에는 이 지구 어딘가에서 자신의 삶을 살고 있는 많은 새들의 이야기가 빼곡하다.  그들은 아름다운 사진을 통해 그 모습을 보여주고, 저자는 그들의 습성을 이야기해준다.  그들의'구애와 과시', '집짓기와 새끼기르기', '위장과 속임수>, <비상>,  <대이동>에 대해서, 그리고 생태계를 공유하는 이야기와 진화에 대해서.  이 책의 이야기들은 내게는 너무나 흥미롭고 신비로왔다.  사진으로 보고 글로서 듣는 그들의 이야기는 내 마음을 단박 사로잡았다.  처음 이 책을 읽고 미지의, 아름다운 어떤 것과 내가 비로소 만나는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던 때가 다시 생각이 난다.  지금도 나는, 새에 관한 대부분의 친밀감을 이 책에 기대고 있다.  내 이야기에서 새가 자주 등장하고, 내가 아이들과 함께 보는 그림책들에 새가 주인공인 이야기가 많고, 내가 새 그림을 자주 끄적거리는 것는, 이 책이 내게 준 것들에 대한 갚음에 다름아니다.  실로 나는 이 책을 통해 새를 만났다. 


  지구를 함께 나눠쓰고 있는 모든 것들 중에서도 특히나 인간과 새는 가깝다.   새들이 인간과 마찬가지로 시각과 청각에 중점을 두고 있으며, 이 감각 기능의 유사성 때문에 그들의 개별행동이나 가정생활 또는 사회생활이 서로 유사한 데가 많은 것이고, 이러한 유사성이 인간으로 하여금 새에 대하여 다른 동물에서보다 훨씬 더 강한 동정심과 동료감을 느끼게 한다고 한다.  인간과 가까운 친척인 영장류에도 속하지 않고 포유동물에조차도 속하지 않는 새들의 사회생활이 인간의 사회생활과 가장 가깝다는 흥미로운 사실이 아니더라도, 새는 그 아름다운  비상으로 하여 인간의 영역에 언제나 신비로운 도전의식을 제공해왔다.  역사적으로 볼 때 새의 생태 연구는 동물 일반의 행동 연구의 길잡이가 되어 왔고, 새 연구의 선구자들은 모두가 새에 반하고 미쳤던 학자들이었다고 한다.


  이 책이 아직 절판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 신기하고 기쁘다.  내가 이 책을 본 이래, 이 책을 보고 나서 나와 함께 이야기를 나눈 이들은 아직 없지만, 끊임없이 이 책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이들은 몇몇 있다.  관심있어 하는 이들에게 나는 이 책이 지금은 구할 수 없는 책이라고 단언했건만, 실은 이렇게 "지금도" 구할 수 있는 책이라는 게 정말 기쁘다.  당장 구해서 내 친구에게 주고 싶다.  몇년판인지, 원저가 무엇인지, 초판인지 개정판인지 어떤 정보도 없지만, 그때 내가 구입했던 84년판이면 어떠리.  이 책을 나눌 수 있다는 사실, 이 책을 통해 <새>에게 가까이 다가갈 친구가 생긴다는 사실이 더없이 기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참새 - 사계절 나이테 그림책 사계절 그림책
조혜란 글 그림 / 사계절 / 2002년 4월
평점 :
절판


   참새, 가을걷이 철이면 아까운 곡식을 축내서 얄미운데도, 그래도 정답고 귀여운 이름. 어릴 적 새 하면 그저 참새려니 했던, 그토록 익숙한 참새를 다시 보며 여러 생각에 잠긴다. 
   이 그림책에 나오는 그림들은 참 정겹다.  기와집과 초가집이 어우러진 작은 마을, 들창코에 딸랑하게 깎아올린 단발머리를 하고 볼이 빨간 아이들이 나온다.  이야기를 따라 포로롱 짹짹 조잘재잘하는 참새들도 딱 내가 생각하는 참새 바로 그대로다.  툇마루에 놓인 사기요강도, 머리맡 앉은뱅이책상 위에 놓인 못난이 삼형제 인형도 그림책에서 만나게 되니 어찌나 반가운지 모르겠다.  연필에다 색연필로 쓱싹쓱싹 그리고 칠한 듯한 그림들이 하도 정다워서 보는 나도 그만 연필을 잡고 아이와 함께 그려보고 싶어진다.  구석구석 숨어있는 작은 이야기들이 그림에서 톨 톨 털려나온다. 조근조근 낮은 목소리로 들려주는 이야기도 좋지만, 우선 그림에 흠뻑 빠져들고 마는 걸 어쩔 수 없다.


  아기 참새, 아기 병아리, 작은 물고기들…. 아이 때는 나도 그저 한번 길러보고 싶어서 학교 앞에서 “삐약삐약” 소리만 들려도 주머니를 뒤지곤 했는데, 그렇게 기르던 어린 것들이 그만 죽어버리고 나면 그 아픈 마음을 어찌 추스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지금도, 행여 남의 집에 가서  살아있는 것들을 보면 좋아 어쩔 줄 모르는 아이들의 간절한 희망을 계속 접어두는지도 모른다.



   이 책의 주인공도 참새 둥지를 뒤져 찾은 새끼 참새를 하룻밤 데리고 재우면서,  내일이면 아이들에게 자랑하며 새끼참새랑 맘껏 재밌게 놀 상상을 한다. 그러나 정작 어미 품을 떠난 새끼 참새는 몸을 떨며 어미만을 찾을 뿐이다.  아이가 밤새 따뜻한 이불 속에서 내가 찾은 새끼참새와 노는 단꿈을 꾸는 그 순간에 현실의 새끼 참새가 밤새 창호지 문에 어린 어미의 그림자를 어미인 양 좇으며 안타깝게 파닥거리고 있는 한 장의 그림은, 그 이야기가 숨이 막힐만큼 가파른데도 놀랍게도 고요하다.  


  그리고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새끼 참새를 찾는 아이와 이미 차갑게 식어버린 새끼 참새…. 아이의 놀람과 실망, 후회가 가득 담긴 얼굴.  마음 안에서 팽팽하던 무엇인가 '툭!'하고 떨어져버린다.  양지바른 곳에 새끼 참새를 묻어주고 학교로 가는 길 내내, 하루 종일 새끼 참새가 마음속에서 떠나지 못한다. 이제 처마 밑에 모여드는 참새들을 보고도 “우리 집에서 나가!”라고 소리치지 못하게 된 아이를 보며 어린 시절 그토록 아프던 내 마음이 겹친다. 



   이 책의 주인공처럼, 어린 시절 초가집에서 살면서 처마를 뒤져 새끼 참새를 꺼냈다가 죽게 한 일이 있던 지은이가 어린 시절의 실수와 그로 인한 가슴앓이를 기억하며 만들었다고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는 우는 것들을 사랑합니다
임길택 지음 / 보리 / 2004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은 동화작가이자 시인이고, 97년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거창에서 일곱 해 동안 아이들을 가르치신 임길택 선생님이 남긴 산문과 교단일기를 모은 책이다.  예전에 <하늘숨을 쉬는 아이들>이라는 제목으로 나왔던 책에서 고른 글과 선생님이 돌아가신 뒤 남은 식구들이 가지고 있던 선생님의 일기에서 고른 글들인데, 거창에서 특수학급을 맡고 계시던 때의 이야기들이 들어있다. 소박하고 맑았던 선생님의 품성대로, 언제나 작고 여린 것들에 더 눈과 마음을 주었던 선생님의 마음이 그대로 드러나는 이야기들이라, 읽다보면 아무래도 마음 한켠이 아릿해지는 걸 어찌할 수가 없다.

  ‘내가 만난 아이들’ ‘교사로 누린 행복’ ‘다시 하늘로 땅으로’ ‘민들레반 아이들’이라는 작은 제목을 달아 4부로 엮어놓았다.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과 농사일을 제일로 중요하게 생각하신 이답게 이 책에 담긴 그의 삶 이야기는 아이들, 학부모, 동료선생님과 농사일에 대한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그 이야기들이 하도 세세하고 진솔해서, ‘교육철학’이라고 뭉뚱그려 말해버리고 나면 그만 한걸음 물러가버리는 듯하다.



  스무 해쯤 아이들 곁에서 지내는 동안 담임다운 대접을 받아 본 게 나에겐 한 번 있다.  탄광 마을에서 지낼 때였다.  나는 굴 속이 무엇보다도 궁금했다.  그러나 어떻게 가 볼 수 있단 말인가!  그런데 마침 우리 반 반장 아이 아버지가 광업소에서 높은 자리에 있었다.  '항장'으로 굴 하나를 책임지고 있던 분이었다.  다른 선생님들께 물으니 항장 자리에 있으면 그 굴 속에선 임금이나 다름없다고 했다.  나는 그분께 사정을 해 보기로 했다.


  웬 걸, 생각과는 달리 반장 아버님은 알맞은 날만 잡으면 언제라도 굴 속 구경을 시켜 주겠다고 했다.  나는 좋아라 하면서 다른 한 사람을 더 데리고 가도 되겠느냐고 했다.  같은 사택에 사는 분으로 내가 따르는 선생님이었다.  아버님은 괜찮다면서 함께 오라고 했다.



   항장님이 내준 '굴 옷'으로 갈아입고, 등 달린 모자도 쓰고, 목이 긴 검정 장화도 신고 선생님은 굴 속으로 들어간다.  당신이 가르치는 탄광마을 아이들의 부모님들, 어쩌면 세상에서 제일 힘든 일을 하며 탄가루 땀방울로 아이들을 키우고 먹이고 가르치고 있지만, 세상 어느 누구에게서도- 스스로는 물론이고 심지어는 아이들에게서조차 존경받지 못하는 탄광마을의 아버지들.  그러나 그 아버지들의 땀방울의 뜻과 가치를 아이들에게 가르치기 위해 막장을 보아야 했던 선생님. 



   사다리를 오르니 탄받이 왼쪽으로 엎드려야만 기어오를 수 있는 조그만 길이 나 있었다.  온통 까만 것투성이 속에 탄받이만은 유난히도 반짝거렸다.  그 동안 지나온 길과는 달리 습기라곤 없엇다.  나는 맨몸으로도 숨이 헉헉 차올랐다.  땀도 온몸에서 흘러내렸다.  우리 바로 뒤에선 한 분이 등에다 긴 나무 토막 네 개를 걸머진 채 따라오고 있었다. 



  막장에 이르러서는 일하던 아저씨 두 분을 만난다.  인사를 나눈 뒤, 그분들은 부탁대로 곡괭이를 들어 탄 벽을 찍어 보여주고, 지렛대로 두들겨 보이기도 하지만, 끝내 아무 말이 없었고, 눈길을 피해 검디검은 벽만 바라보고 있다.  바깥에선 지금 비가 오는 줄도 모르고 탄을 캐다가, 뜻밖의 손님들을 맞고 어쩔 줄 몰라 하는 그분들한테 더없이 미안해서 선생님은 얼른 그곳에서 나오고만 싶다.



  막장에서 이름 모를 광부 아저씨들을 만난 걸 나는 여태껏 가장 큰 행운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내가 교사로서 누린 행복이기도 하다.  그 경험 하나만으로도 지금 나는 내가 걷고 있는 이 길을 누구와 바꿀 생각이 없다.



  이런 선생님과 함께 지내면서, 아이들은 우리 아버지가 부끄러운 아버지가 아니라 실은 자랑스런 아버지로구나, 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게 되었다.  선생님이 이 탄광마을의 아버지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선생님의 시집 <탄광마을 아이들>에 고스란히 실려있다.  아이들이 아버지를 얼마나 부끄럽게, 안타깝게, 그러다 자랑스럽게 여기는지도 가슴 아플만큼 나와있다.  바라보고 살 수만 없어서 함께 살아갔던 선생님의 이야기들도 들어있다.



   지난해 내가 사는 거창, 내가 공부하고 있는 <동화읽는어른모임>에서 <임길택 문학의 날>을 처음 열면서 선생님의 삶의 흔적들을 자세히 볼 기회가 있었다. (고인이 된 선생님의 남은 식구들은 지금도 거창에 살고 있다.)  책으로 나온 이야기들이야 골라서 낸 것이니 또 그렇다 치더라도, 그냥 살다가 두고 떠나신 것들에서 묻어나오는 이야기들이 한결같이 여리고 소박하면서도 진실했던 삶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들이어서 준비하던 사람들이 함께 숙연해지던 기억이 난다. 그만큼 치열하고도  그토록 소박해서 그랬다.



  힘겨운 삶을 사는 이들의 세상살이를 함께 지고 싶었던 선생님의 마음이 책의 갈피마다 담겨있어 몇 번이나 책을 덮어두어야 했는지 모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늦은 설거지를 하고 있는데 승현이 잘거라고 책을 읽어주란다.

 

승현: 엄마, 저 잘래요.  책 읽어주시면 안돼요?

엄마: 승현아, 엄마 설거지가 덜 끝나서... 아빠한테 읽어주라고 하면 안될까?

승현: (잠시 생각) 

승현: 저 그냥 잘께요.

엄마: ?? !!

 




 




 


참, 가지가지 모습으로 잡니다. 


댓글(3)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실비 2005-04-10 2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의자가 너무 편해보여서 갖고싶어요. >_<

실비 2005-04-10 2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데 자는모습이 귀엽네요.ㅋㅋ

sprout 2005-04-12 0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드뎌 저 의자에 관해 얘기해주신 분이 나오네요. 결혼하던 그해 16평 집에 맞춰 산 앉은뱅이 의자가 이제 우리 온 가족의 친구가 되어버렸네요. 의자의 나이는 열여섯, 껍질을 벌써 멏번 째 바꿔쓰는지 모른답니다. 넘 편해요... 눕기도 좋고 앉기도 좋은데.. 요즘도 저런 것 나오는지? ^^
 


며칠 전, 이미 거둘 것 다 거두고 이제 휴식에 들어간 빈들을 지나가는데 갑자기 늦여름 생각이 났다.

늦은 여름, 이 길을 걷기 시작했다.  해저물녘이기도 하고 달 뜬 밤이기도 했다.  무작정 집을 나섰다가 건계정 가는 길로 발길을 잡기도 했다.  그럴 때면 가던 길 그 무겁던 발걸음과, 둥근 달을 바라보며 오던 길에 한발짝마다 무겁던 것들을 한줌씩 털어내듯 홀가분하던 마음이 들던 생각이 난다.  그런 생각들이 시가 되어 나와서 집에 오면 어느 쪽지엔가 적어두기도 했는데...

그러다가 일삼아 자전거를 타고 건계정을 다니기 시작했다.  바깥 볼일을 보러 나갈 때 예전과 달리 자전거로 집을 나서니, 들어오는 길에 항상 들러 눈인사를 주고 오면 되는 일이었다.  갑갑한 시내 공기와 달리 공기가 벌써 조금이라도 다르고, 오며가는 길에 물색이 풀색이 하늘색이 달라진다는 걸 느끼게 되니 그 일이 즐거워서 좀 늦다 싶어도 내 욕심을 내어서 다녀오곤 했다.  낮에 조금 여유있게 갈 때는 언제나 옆을 보며 달린다.  들판을 느끼고 밭이랑 옆집이랑, 산자락을 느낀다.  그들은 언제나 가만 있는 듯 하지만, 실은 언제나 변했다.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겨우 올 여름과 가을을 거치며 나는 그들이 가르쳐주는 것을 배웠고, 받았다.

내 가방에는 언제나 카메라가 있었다.  내 눈에 들어오는 것들을 나는 자전거를 세우고 자세히 보곤 했다.  그러다보면 가는 길은 언제나 오래이고, 오는 길은 바람을 맞으며 씽씽 달려오곤 했다.  삼십분이며 가고 올 그 길을 대부분 한시간을 훌쩍 넘어 빠져나오곤 했으니...  내가 건계정에서 보내는 그 시간, 나는 그것이 건계정에 대한 내 사랑이겠거니, 생각한다.  내가 그와 함께 솔찮은 시간을 보내는 동안 건계정은 나에게 그 몸을 열었고 거기에 나는 내 마음을 담았다.  나는 그 속에서 노닐었다.

사진은,

그런 것들을 잡아내지 못한다.  하지만 내가 찍어낸 이 사진들 속에도 어김없이 건계정이 있다.  내 손톱이 내가 아니지만 내 손톱이 또한 나이듯, 그것이 그러하다.  지금 나는 내 사진을 통해 건계정을 본다. 아름다운 건계정... 오직 나와 함께, 나와 둘이었던 그 순간, 너는 내게 너무나 아름다왔지.   

 

 

늦늦여름이었나. 아직 푸른기가 화사한 벼들판.


황금빛 들판이 출렁인다. 나는 몇번이고 자전거를 세우고 그들을 들여다보곤 하였다.


그리고... 들판은 휴식에 들어간다.


봄에 그 잎을 보았는데, 여름에 이런 꽃을 피우다니! 박주가리 덩굴에 핀 꽃을 보고 한참 신비로왔다. 책에서 본 사진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논가, 논둑에 심어놓고는 가을에 거두는 콩이, 여름내 이런 꽃을 피우고 지는지를 새삼스럽게 보면서.


올해 건계정 산책로에는 군에서 마음먹고 조롱박이니 호박이니 쑤세미 같은 것들을 넘칠만큼 심었다. 가고오는 길에 문득, 수줍은 웃음이 느껴지곤 했으니... 어둑해질 때면 하마 달밤을 느끼게 하는 하얀 박꽃이라.


내가 자길 좋아한다는 걸 알았던지, 인심좋게 이리 예쁜 것도 보여주는 후한 호박꽃.


길가집 쥔 누군가, 들고가던 나팔꽃씨를 쏟았으리... 울타리를 따라 나팔꽃이 작은 불꽃처럼 일어난다.

 


이파리는 이리 완전한 하트- 가만 들여다보는 이에게는 사랑을 노골적으로 내비치고.


햇봉오리는 이파리 뒤에 이리 살짝 숨었다가


 


불꽃으로 화들짝 피고 싶어서 이리 몸을 배배 꼬아대는지.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웃음이 났다.


길가 작은 꽃밭에 부러 심어둔 듯, 찾아보니 꽃범의꼬리였다.


꼬리라는 이름 탓인가, 이녀석도 가만 보고 있으면 실실 웃음꼬리를 친다.


도라지꽃은, 언제나 나를 세운다. 도저히 그 부름에 답하지 않을 수가 없다...


가을이 드니, 열매조차 나를 잡아끈다. 너- 신비로운 파랑으로 남았구나.


늦여름내내 하늘을 배경으로 서있던 해바라기, 누군가 내려다본다 싶으면 어김없다.


작은 개울을 따라 지천으로 흐드러져 눈부시던 고마리꽃들. 분홍이고, 희고, 끝만 발간 녀석들이 무리져 뭉쳤다가 벌어지곤 했다. 벌어지면 웬걸, 모르는 척 다른 꽃이 되어버리곤 한다.


고마리 옆에 며느리배꼽이 연두빛 꽃을 달고 있더니 어느덧, 파란 열매로 낯색을 바꾼다. 가을이다.


참취가 가을을 알린다. 봄에는 애푸른 빛 향그러운 이파리로 솟더니.. 그때나 지금이나 향그럽긴 마찬가지라.


봄에는 별꽃 하염없더니, 늦여름 초가을에 별꽃아재비가 하염없다.


문득, 건계정의 하늘이 높고 짙다.


물 흐름도 차가와지고...


가을을 모르는지 삼색제비꽃이 물정모르고 피었다. 처음보는 너지만, 너 이름을 알겠다. (도대체 삼색제비꽃이 아니면 뭐겠니?..) 이야기를 트고는 묻는다. "그런데 니 친구들은 봄에 일찍들 피던데...?"


길가집을 지나다 길가집 할머니를 만났다. 올여름 팔을 다쳐 대체 거두지를 못했더니 국화가 이모양이네.. 라시는 푸념이 뭔 말인가? 이리 속속들이 예쁜 국화를 내, 이때까지 본 적이 없거늘.


그녀들, 하나같이 예뻐서 모두 보고 있으면 어질어질해진다. 남자들이 길가에 넘어져 널부러져있지 않는게 이상하지...

너 안에 하얀 꽃잎 백합을 품고 있었나. 이제 삭풍을 견딜 듯, 단촐하구나.


오호라, 여기가 대체 어디였으며 그대는 누구였던고? ...아주까리 한 그루가 한마리 타조처럼 지는 해를 지킨다. 그 자태를 심상히 넘길 수 없다.


가까이가면, 잎은 이리 우걱하고 열매는 요리 조콩한데.


수크령이 가을 물살을 물끄러미 보고 있네.


산자락을 돌기만해도 내게 찰싹 붙어오던 숱한 녀석들, 도깨비바늘로 붙을 준비를 한 모습들이 심히 공고하여 굳은 결심을 한 듯 기특해뵌다.


담쟁이가 연두였다가, 초록이었다가, 이제 주홍으로 다홍으로 마지막 선을 보인다. 벌써 마지막 인사를 할 준비를 마쳤구나... 너의 파란 열매 앞에서 내 숨을 고른다.


건계정 두고 오는 길이 너와 함께여서 노래가 흘러나오곤 했었지. 내 발끝에서 흘러나와 길을 만나고는 그 길을 내 발끝으로 다시 흘려넣어주던, 신비로운 힘을 간직한 친구라는 것을 안다.


댓글(3)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실비 2005-04-10 2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이쁘고 아름다워요^^
꽃들이 아기자기 하고 색깔이 너무 이뻐요^^

sprout 2005-04-12 0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실비님, 저랑 같은 마음이어서 기뻐요. 꽃을 사랑하는 분일 것 같은 생각이 드네요. 이제 봄이 되어 다시 건계정을 자전거로 다니기 시작했답니다. 아름다운 건계정에.

실비 2005-04-16 2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두 꽃을 좋아한답니다. 가까이 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