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우는 것들을 사랑합니다
임길택 지음 / 보리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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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동화작가이자 시인이고, 97년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거창에서 일곱 해 동안 아이들을 가르치신 임길택 선생님이 남긴 산문과 교단일기를 모은 책이다.  예전에 <하늘숨을 쉬는 아이들>이라는 제목으로 나왔던 책에서 고른 글과 선생님이 돌아가신 뒤 남은 식구들이 가지고 있던 선생님의 일기에서 고른 글들인데, 거창에서 특수학급을 맡고 계시던 때의 이야기들이 들어있다. 소박하고 맑았던 선생님의 품성대로, 언제나 작고 여린 것들에 더 눈과 마음을 주었던 선생님의 마음이 그대로 드러나는 이야기들이라, 읽다보면 아무래도 마음 한켠이 아릿해지는 걸 어찌할 수가 없다.

  ‘내가 만난 아이들’ ‘교사로 누린 행복’ ‘다시 하늘로 땅으로’ ‘민들레반 아이들’이라는 작은 제목을 달아 4부로 엮어놓았다.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과 농사일을 제일로 중요하게 생각하신 이답게 이 책에 담긴 그의 삶 이야기는 아이들, 학부모, 동료선생님과 농사일에 대한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그 이야기들이 하도 세세하고 진솔해서, ‘교육철학’이라고 뭉뚱그려 말해버리고 나면 그만 한걸음 물러가버리는 듯하다.



  스무 해쯤 아이들 곁에서 지내는 동안 담임다운 대접을 받아 본 게 나에겐 한 번 있다.  탄광 마을에서 지낼 때였다.  나는 굴 속이 무엇보다도 궁금했다.  그러나 어떻게 가 볼 수 있단 말인가!  그런데 마침 우리 반 반장 아이 아버지가 광업소에서 높은 자리에 있었다.  '항장'으로 굴 하나를 책임지고 있던 분이었다.  다른 선생님들께 물으니 항장 자리에 있으면 그 굴 속에선 임금이나 다름없다고 했다.  나는 그분께 사정을 해 보기로 했다.


  웬 걸, 생각과는 달리 반장 아버님은 알맞은 날만 잡으면 언제라도 굴 속 구경을 시켜 주겠다고 했다.  나는 좋아라 하면서 다른 한 사람을 더 데리고 가도 되겠느냐고 했다.  같은 사택에 사는 분으로 내가 따르는 선생님이었다.  아버님은 괜찮다면서 함께 오라고 했다.



   항장님이 내준 '굴 옷'으로 갈아입고, 등 달린 모자도 쓰고, 목이 긴 검정 장화도 신고 선생님은 굴 속으로 들어간다.  당신이 가르치는 탄광마을 아이들의 부모님들, 어쩌면 세상에서 제일 힘든 일을 하며 탄가루 땀방울로 아이들을 키우고 먹이고 가르치고 있지만, 세상 어느 누구에게서도- 스스로는 물론이고 심지어는 아이들에게서조차 존경받지 못하는 탄광마을의 아버지들.  그러나 그 아버지들의 땀방울의 뜻과 가치를 아이들에게 가르치기 위해 막장을 보아야 했던 선생님. 



   사다리를 오르니 탄받이 왼쪽으로 엎드려야만 기어오를 수 있는 조그만 길이 나 있었다.  온통 까만 것투성이 속에 탄받이만은 유난히도 반짝거렸다.  그 동안 지나온 길과는 달리 습기라곤 없엇다.  나는 맨몸으로도 숨이 헉헉 차올랐다.  땀도 온몸에서 흘러내렸다.  우리 바로 뒤에선 한 분이 등에다 긴 나무 토막 네 개를 걸머진 채 따라오고 있었다. 



  막장에 이르러서는 일하던 아저씨 두 분을 만난다.  인사를 나눈 뒤, 그분들은 부탁대로 곡괭이를 들어 탄 벽을 찍어 보여주고, 지렛대로 두들겨 보이기도 하지만, 끝내 아무 말이 없었고, 눈길을 피해 검디검은 벽만 바라보고 있다.  바깥에선 지금 비가 오는 줄도 모르고 탄을 캐다가, 뜻밖의 손님들을 맞고 어쩔 줄 몰라 하는 그분들한테 더없이 미안해서 선생님은 얼른 그곳에서 나오고만 싶다.



  막장에서 이름 모를 광부 아저씨들을 만난 걸 나는 여태껏 가장 큰 행운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내가 교사로서 누린 행복이기도 하다.  그 경험 하나만으로도 지금 나는 내가 걷고 있는 이 길을 누구와 바꿀 생각이 없다.



  이런 선생님과 함께 지내면서, 아이들은 우리 아버지가 부끄러운 아버지가 아니라 실은 자랑스런 아버지로구나, 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게 되었다.  선생님이 이 탄광마을의 아버지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선생님의 시집 <탄광마을 아이들>에 고스란히 실려있다.  아이들이 아버지를 얼마나 부끄럽게, 안타깝게, 그러다 자랑스럽게 여기는지도 가슴 아플만큼 나와있다.  바라보고 살 수만 없어서 함께 살아갔던 선생님의 이야기들도 들어있다.



   지난해 내가 사는 거창, 내가 공부하고 있는 <동화읽는어른모임>에서 <임길택 문학의 날>을 처음 열면서 선생님의 삶의 흔적들을 자세히 볼 기회가 있었다. (고인이 된 선생님의 남은 식구들은 지금도 거창에 살고 있다.)  책으로 나온 이야기들이야 골라서 낸 것이니 또 그렇다 치더라도, 그냥 살다가 두고 떠나신 것들에서 묻어나오는 이야기들이 한결같이 여리고 소박하면서도 진실했던 삶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들이어서 준비하던 사람들이 함께 숙연해지던 기억이 난다. 그만큼 치열하고도  그토록 소박해서 그랬다.



  힘겨운 삶을 사는 이들의 세상살이를 함께 지고 싶었던 선생님의 마음이 책의 갈피마다 담겨있어 몇 번이나 책을 덮어두어야 했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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