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철군화 잭 런던 걸작선 3
잭 런던 지음, 곽영미 옮김 / 궁리 / 2009년 3월
평점 :
품절


 

깜짝 놀랐다. 1908년에 첫 출간되었다는, 그게 백 년도 넘었다는 이야기인데, 그 과거의 사람이 쓴 책의 내용이 섬찟하리만큼 지금과 닮아 선득했다. 그 당시에 읽었던 사람들에게는 미래소설이었겠지. 지금 읽자니 백 년 전의 과거형이 아니라 현재형인 듯하여 오히려 놀랍다. 잭 런던이 대체 누구인가? 여기저기 인용되어 이미 이름만 익숙하던 저자의 책을 처음 만난 소감이라면, 그는 정말 귀신같다는 것이다.

도입부의 형식도 멋졌다. B.O.M.(인류형제애 시대, the Brotherhood of Man) 419년-서기 27세기-, 기적처럼 아름다운 도시 아디스에서, 메러디스라는 문헌학자가 에이비스 에버하드의 원고를 세상에 공개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에이비스 에버하드가 남편 어니스트 에버하드, 20세기 초 노동자 대중을 위한 투쟁에 목숨을 바친 한 치열한 사회주의자의 일대기를 기록한 원고다. 1906년경에 쓰인 이 책의 주요시기는 1912년과 1932년 사이, 런던으로서는 가까이는 이삼십년 안팎을, 멀리는 700년을 내다보고 썼다는 이야기다. 게다가 그 예견이 사실상 21세기 초의 극한 자본주의국가인 미국과 한국의 현재형에 다름 아니어서 전율이 일었다.

작가가 그리고 있는 그 시기는 소수의 집단이 사회의 정치, 경제적 권력을 독점하고 행사하는 정치 체제인 과두지배체제의 시대다. 그 시기  자본주의 모순이 첨예하게 드러나는 미국 사회, 자본가들은 끊임없이 잉여 자본을 축적하는 반면 실업과 빈곤에 시달리는 민중들 속으로는 불공평한 세상을 바로 잡겠다는 사회주의 사상이 확산된다. 선거에서 합법적으로 노동자들이 다수 의석을 확보하자 자본가들의 지배세력인 ‘강철군화’는 대책을 마련하는데, 그들의 대책이라는 것이 놀랄 만큼 우리가 이미 겪은 무대책한 자본주의의 징그러운 역사와 닮았다. 런던이 그리고 있는, 강철군화가 폭력단과 비밀경찰과 군대까지 동원하여 저항세력을 박살내는 장면들, 언론과 대학, 사법을 장악하고 의회마저 무산시키는 장면들, 노동자 계급의 분열을 일으키기 위해 몇몇 거대 노조에만 노동 조건을 개선하고 급여를 올려주어 우월한 노동자로 만들어버리는 장면들은 너무나 생생하여 현재와 그대로 겹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정말로 서글프다. 비극을 서술하는 런던의 예견이 너무나 정확하여, 그런데다 그의 예견에는 강철군화의 지배의 역사가 300년에 이어지니 앞으로도 200여년의 세월, 실은 그게 언제일지 알 수도 없는 미래에나 희망의 세기로 들어선다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맞아 떨어진 것처럼 앞으로도 맞아 떨어진다면 정말 두렵지 아니한가....

솔직히 고백하자면, 과두지배계급은 자신들도 놀랄 만큼 예기치 않은 발전을 이룬 것이다. 하나의 계급으로서 그들은 스스로를 단련시켰다. 그 세계에서는 모든 구성원에게 각자의 일이란 게 있었고, 그것은 반드시 수행해야 했다. 부유한 젊은이들 중에 게으름을 피우는 자는 더 이상 없었다. 그들의 힘은 과두지배체제의 단결된 힘을 보태는 데 이용되었다. 그들은 군대의 지휘관, 산업계의 상관이나 총수로 복무했다. 또한 응용과학 분야로 진출하여 많은 이들이 훌륭한 기술자가 되었다. 일부는 정부의 여러 세분화된 분야로 들어갔고, 식민지 속국에서 근무했으며, 수만 명이 다양한 비밀기관에 투입되었다. 다시 말해 그들은 교육, 예술, 성직, 과학, 문학의 도제가 되어 그 분야에서 과두지배체제를 영속시키는 방향으로 국가의 사고 체계를 주조하는 중요한 기능을 담당했다. 그들은 교육받았고, 나중에는 그들이 하고 있는 일이 옳다고 배웠다. 아이로서 이 세상의 그림을 받아들이기 시작하는 그 순간부터 귀족 사상을 흡수했다. 이 귀족 사상이 그들의 성장 과정으로 엮여 들어가 마침내는 그들의 뼈와 살이 되었다. 그들은 자신들을 야생동물 조련사, 즉 짐승들의 지배자로 간주했다.

이런, 잭 런던은 사실은 21세기를 살다가 타임머신을 타고 20세기 초로 되돌아가 이미 겪은 미래의 이야기를 써낸 것 아닐까? 그렇지 않고서는 이토록 구구절절 맞출 수 있을까. 그의 젊은 시절을 뜨겁게 달구었던 사회주의 공부는 대체 어떤 것이었길래.

 

책 중간중간 메러디스는 주를 달아 에버하드의 시대를 설명하는데, 미래인간이 원시 야만의 700년 전, 그러니까 20세기 초반을 서술하는 걸 읽는 재미가 아주 특별했다.

예를 들어 고명한 대학교수의 집 응접실에서 노동자 출신의 어니스트가 조심조심 움직이는 것에 대해 미래 세기의 문헌학자 메러디스는 이런 주를 달았다.

각주38: 당시에는 거실을 골동품으로 채우는 것이 관습이었다. 그들은 간소하게 사는 법을 알지 못했다. 이런 거실은 끝없이 청소를 해주어야 하는 박물관이었다. 먼지 귀신이 집안의 주인이었다. 먼지를 붙드는 장치는 수없이 많았지만, 그것을 없애는 장치는 몇 개뿐이었다.

 

허영으로 가득 찬 장식 취향을 능청스럽게 비꼬는 런던의 솜씨는 가히 일품이어서 자못 유쾌하기까지 하다.

243쪽에 달아놓은 각주88에서는 ‘Arthurization’이라는 단어의 어원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P. M. Arthur가 20년 간 대표로 있었던 기관사노조가 회사와 타협한 뒤 특혜 받은 노조가 되면서 나머지 노동조합과 별도로 독자적인 노선을 걷게 되는데, 나눠먹기를 의미하는 단어인 ‘아서화’의 배후에는 이런 이기적이면서도 성공적이었던 획책을 꾀한 아서라는 인물의 혁혁한 활동이 있었다는 것. ‘아서화’라는 말은 오랫동안 어원학자들의 머리를 아프게 했는데, 700년 전의 이 오래된 원고를 통해 그 어원이 밝혀지게 된 것이란다.

실은 이 대목에서 나는 이런 말이 정말 있나 싶어 인터넷에서 단어 검색에다 지식 검색까지 다 해보았지만 ‘Arthurization’이라는 단어는 오직 잭 런던의 강철군화 15장에 등장하는 말이었던지 모든 검색은 그리로 연결되었다. 그러니 참으로 실감나는 설명이 아닐 수 없다.

 

264쪽, ‘수백만 명이 굶어죽고 있는데도, 과두지배계급과 그 추종자들은 잉여로 포식하고 있었다.’라는 대목을 읽자면 비감하다. 유엔 식량기구의 자원활동가인 장 지글러의 책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의 의문 그대로가 아닌가. 거기에 대한 각주91은 위트인가 페이소스인가.

 

각주91: 같은 상황이 AD 19세기에 영국의 통치를 받고 있던 인도에서도 연출되었다. 원주민들이 수백만 명씩 굶어죽는데도, 통치자들은 그들의 노고로 얻은 결실을 빼앗아 화려한 허식과 하찮은 바보짓거리에 소비했다. 오늘날의 계몽된 시대를 사는 우리로서는 선조들의 그 같은 행동에 얼굴을 붉히지 않을 수 없다. 우리의 유일한 위안은 철학에 근거한다. 우리는 사회진화에서 자본주의 단계를 먼 옛날의 원숭이 시대와 똑같이 받아들여야 한다. 인간은 진창이나 진흙 속 하등생물에서 일어서기까지 그러한 단계들을 거쳐와야 했다. 그만큼 많은 진창과 진흙이 들러붙어 쉽게 떨쳐지지 않는 것은 부득이한 일이었다.

 

물론 런던이 내세운 인물 어니스트 에버하드는 이 시대에 여러 비판을 받기도 한다. 노동자들이 자신의 권리를 찾기 위해 일으키는 혁명조차도 그는 지식인에 의해 주도되는 시혜와 계몽적 차원의 혁명을 꿈꾼다. 노동자들의 자생력을 믿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가 존엄성을 되찾아주고 싶은 노동자들은 그에게는 계몽되어야 하는 존재들이다. 우월적인 존재가 고결한 정신으로, 자선을 베풀듯이. 런던이 가진 그런 한계가 이 작품 이후 그의 행보를 설명하는 것 같기도 하다. 실제로 돈 잘 버는 유명작가의 삶을 살았던 런던이 말년에는 혁명에 대한 모든 기대를 저버린 채 생을 마감했다는 걸 알고는 씁쓸했다. 신념과 열정으로 써내려간 그의 작품은 세기를 넘어 이어지고 있으나 40년의 길지 않은 그의 인생에서는 이어지지 못한 셈이니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카스테라
박민규 지음 / 문학동네 / 2005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처음 읽었던 <삼미슈퍼스타즈>로 단박에 그의 팬임을 자처하게 된 나는 또한 전도사이기도 해서 부지런히 박민규를 소개하고 다니기도 했다. 물론 대상을 면밀히 고르는 것도 잊지는 않았다. 내 생각에, 도저히 박민규와는 어울리지 않아 역효과만 가져올 사람도 내 주변에 많지는 않지만 더러는 있어서이다.

그런데 <파반느>와 <삼미슈퍼스타즈>와 <핑퐁>만 해도 그건 현실이었던 거다. <카스테라>를 읽고 나니 단연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럼 <카스테라>...는? 책을 읽는 동안 공간은 전 우주적으로 확장되고 시간은 과거와 미래의 구분을 무의미하게 했으므로 가히 4차원이었다. 박민규 따라 유쾌한 4차원 여행, 게다가 너구리와 기린과 개복치와 펠리컨이라니!  대체 이게 뭐야, 할 것 없이 한 번 따라다녀 보는 거다. 

박민규를 읽는 건 내게 상당히 유쾌한 일이다. 그토록 분방하게 날아다니는 작가의 사고를 들여다보는 일도 즐겁고, 매이지 않은 정신의 현존을 보는 것도 신선한데다, 그의 작품들이 이 사회에 농담으로 버무려 툭, 던지는 문제의식들은 결코, 결코 가볍지가 않다. 아니 어쩌면 우리모두, 애써 외면하며 나랑은 상관없음, 그럼 내겐 문제 아님 하던 것들을 "아니 이거 문제 맞잖아" 하며 이쪽으로 불쑥 던진다. "받아, 받으라구! 재밌다구!!" 한다. 그래, 재밌다.. 

연천유원지를 떠다니던 오리배로 들어가는 '아, 하세요 펠리컨'을 봐도 작가가 소재로 삼는 것들의 새로움을 깨닫게 된다.  연천유원지, 유원지라고는 하지만 더 정확하게는 저수지다. 그저 열세 척의 오리배와 고장난 두더지잡기, 경품크레인이 전부다. 주말에는 32키로 떨어진 소읍 에서 그렇고그런 가족나들이를 오고, 주중에는 딱봐도 불륜인 묘령의 남녀들이 왠지는 모르겠지만 오리배를 타고 저수지로 나간다. 게다가 뭘 하든 계속 발로 페달을 돌리면서. 그런 상황인데, 유일한 직원인 주인공과 또 던져놓은 듯 만큼만 사업을 챙기는 정도인 사장이 주고받는 말. 

도대체 누가 이런 보트를 탈까?  

처음엔 그것이 의문이었다. 말 그대로 <오리배>다. 우선 앉으면 기분이 이상해진다. 오리라니. 절대 찬성할 수 없다. 게다가 끊임없이 발로 페달을 돌려야한다. 퐁당퐁당 퐁당 또 그 소리가 그렇게 이상할 수 없다. 하여간에 그걸 타고 퐁당퐁당 퐁당 물 위를 떠다닌다. 그럴 리가 싶지만, 그게 전부다. 그렇게 한 바퀴 돌고 오니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21세기인데 이걸 타는 사람들이 있을까요? 그래도 꽤 타더라구. 나도 놀랐다니까. 사장은 정말이지 놀란 눈치였다. 놀랍게도, 사장의 말은 사실이었다.  

휴일이 되자 이럴 수가 싶은 수의 사람들이 오리배를 타러 왔다. .... 그것은 뭐랄가, 저렴한 인생들 사이에 흐르는 심야전기와 같은 것이었다.  

정말이지, 있을 법한 곳이고, 아니, 실제로 어디에나 그런 데가 엄연히 있다. (안 가봤지만) 에버랜드 같은 곳이 인공의 다양한 파도를 만들고 광대한 시설을 자랑하며 어드벤쳐, 하고 있는 세상인데, 없어지지도 않고 오리배 열세 척을 두고 여기도 유원지, 라는 곳이 있지 않은가. 누가 그걸 봐도 박민규처럼 저렇게 꼭 찍어서 쓰지는 않겠지만, 우리 모두 알기는 안다. 마음 속으로 이제 저런 걸 얘기할 시점은 아니지, 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 생경함, 그 낯섬을 무시하며 살아간다. 그런데 박민규가 얘기를 하니까, 내겐 그 '과거에 머물고 있는 현재의'장소가 그렇게 신선할 수가 없는 거다. 그래, 믿을 수 없는 일이야, 여전하잖아! 그렇게 우선 그 유원지라는 존재를 다시 들여다보게 한다. 

그 유원지에서 참 별 일들도 많다. 몰래 보트를 훔쳐 타는 사람도 있다. 혼자 살짝, 즐기다가 호루라기를 불면 그저 강 건너편 기슭에 보트를 대고는 달아나버리면 그만이다. 허참. 오리배를 타기엔 조금 아까운 양복을 입고왔던 한 남자는, 퐁당퐁당 배를 타고 나가 저수지 한가운데서 그만 약을 먹어버린다. 생을 마감하는 장소로 고른 오리배 위. 어때? 별일도 다 있다 싶지만, 그게 또 분명 누군가 겪어본 일들처럼 생각되는 거다. 어쩌면 작가가 직접 겪었을지도 모르는 일들이다. 무규칙 이종 소설가를 자처하는 작가야말로, 글로써 화려하게 데뷔하기 전에 온갖 종류의 직업을 두루 섭렵했다지 않는가. 누군가 겪어서 말해주기 전에는, 그 한적한 저수지 위 오리배에서 뭐 그런 일들까지 일어나랴고 생각이나 했을까 말이다. 신기하고 생생한 이런 이야기들은 글에 생명력을 불러넣는다. 삶의 변방을 들여다보는 일, 변방의 존재를 새삼 긍정하게 되는 일. 그런 경험을 하며 읽어가는 일이 어찌 즐겁지 아니한가.  

이야기가 '오리배 세계시민연합'으로 넘어가면 슬슬 웃음이 나온다.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그것이 숨은 기능입니다', 란다. 페루의 페르난이 우연히 오리배에 앉아 신문을 읽고 있었다는군요. 마침 뉴멕시코 농장의 기사가 났는데 거긴 일할 사람이 없어 난리였답니다. 아르헨티나엔 일자리가 없어 난린데 말입니다. 가면 얼마나 좋을까, 가면 먹고 살 텐데.. 그리고 발을 저었는데 순간 오리배가 공중으로 뜬 것입니다. 그 다음은 모든 게 쉬워진 거죠.  

그렇게 오리배의 숨은 기능을 최초로 찾아낸 페루의 페르난은 최초의 오리배 세계시민이 된 거고. 이내 많은 사람들이 그 숨은 기능을 활용하여 세계의 일자리를 찾아 떠나기도 하고 돌아오기도 하고 여행하기도 하고, 뭐 그렇단다. 그렇게 다니다가 오리배가 있는 저수지에서 잠시 머물기도 하면서. 그 상황을 젊은 주인공은 그렇다치고, 나이 많은 사장은 한술 더떠 아예 오리배 세계시민연합의 일원이 되어 가족을 만나러 미국으로 떠나더니 아예 가족과 함께 오리배를 타고 돌아다닌다. 생필품도 그렇고 물건들이 늘어나 수납을 위해 아예 오리배는 이제 펠리컨이 되었다, 는 이야기이다. 

뭐지? ㅋㅋ 유쾌하게 오리배 세계시민연합 이야기를 읽다가 그렇게 펠리컨으로 끝이 나니 유쾌한 중에도 궁금하다. 엄연히 존재하지만 실제로는 없는 것처럼 기억하지 않고 살아가는 많은 존재들이 중심에 있다. 그 존재들은 엄연한 일상성을 가지고 돌아가고 있다는 걸 깨닫는 순간, 그걸 깨닫게 해 놓고는 금세 이야기는 구름 저 위로 훌쩍 날아오른다. 그래도 좋고, 실은 그게 좋다. 작가가 솜씨 좋게 펼쳐놓는 그 이야기 보따리에는 땅을 딛고 있는 발과 구름 위에 걸친 머리와, 그 사이 어딘가 어떻게든 이어져 있을 몸뚱이가 있으리라 상상되는 그런 기분, 생각만 해도 유쾌하다. 머리를 구름에 두자니 발이 땅에서 떨어지고, 발을 땅에 딛고 있자니 머리가 땅에서 겨우 2미터도 안되는 현실을 이렇게 가볍게 넘어서버리는 게 누구나 풀어낼 수 있는 썰은 아닐 터, 박민규가 있어 즐겁다. 나도 가끔, 발은 땅에 두고 머리는 구름 위에 두는 상상이라도 훔쳐보고 싶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파란 2010-03-15 17: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랫만에 다시 보네요. 이 책이 많이 마음에 드셨나 봐요. 처음 삼미슈퍼스타즈..에 열광하던때가 오래 안된거 같은데. 그거 만큼의 아니었어요. 이 책을 한번 들여다보고 싶게 쓰셨네요. 즐거운 책읽기 하세요.

2010-03-17 05: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카스테라
박민규 지음 / 문학동네 / 2005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박민규를 통한 4차원적 사고 영역의 확장에 때로 즐겁게 두근두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강철군화 잭 런던 걸작선 3
잭 런던 지음, 곽영미 옮김 / 궁리 / 2009년 3월
평점 :
품절


잭 런던이 1908년에 통찰해버린 '강철군화', 언제 과거형으로 읽을 수 있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빗방울처럼 나는 혼자였다
공지영 지음 / 황금나침반 / 2006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살아야 했다구, 알아들었어?
물론 너나 나나 도대체 어디에 쓸모가 있었겠니?
그래도 살아야 할 걸 그랬다구.
뭣 때문이냐구? 아무것 때문에도 아니지
그냥 여기 있기 위해서라도
파도처럼 자갈돌처럼
파도와 함께 자갈돌과 함께
빛과 함께
모든 것과 다 함께

-「인생의 어떤 노래」앙드레 도텔

 

바로 이 시와 함께 작가는 두어 장 분량의 짧은 생각을 펼치고 이 책을 마무리한다. 그 짧은 생각 중에 이런 내용.    

 

이제 아이들의 엄마로서, 사회의 중년으로서 내 아이들뻘 되는 젊은이들에게 말해주고 싶어요. 괜찮다고, 그래도 괜찮다고, 어떻게든 살아 있으면 감정은 마치 절망처럼 우리를 속이던 시간들을 다시 걷어가고, 기어이 그러고야 만다고, 그러면 다시 눈부신 햇살이 비치기도 한다고, 그 후 다시 먹구름이 끼고, 소낙비 난데없이 쏟아지고 그러고는 결국 또 해 비친다고. 그러니 부디 소중한 생을, 이 우주를 다 준대도 대신해줄 수 없는 지금 이 시간을, 그 시간의 주인인 그대를 제발 죽이지는 말아달라고.

 

이 책 전체에서 그는 이와 같이 한 편의 시를 고르고 그 시와 함께 인생을 이야기한다. 대체로 그녀 자신의 인생에 연관된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펼쳐지는 자신의 삶은 날것 그대로 드러나지 않고 온갖 다른 삶의 모습들과 어우러져 종횡무진의 사유를 넘나든다. 때로는 소개된 바로 그 시인의 삶이기도 하고 때로 작가와 가까운 지인들의 삶, 때로 맹렬한 독서가로서의 작가에게 축적된 타인의 경험들이 그 사유를 이루는 질료들이다. 그것들이 작가 자신의 인생에 드리운 빛과 그늘을 공유한다. 빛과 그늘을 공유하면서 작가는 어느새 듬직해졌다.

 

이미 공지영 작가의 책 여러 권을 읽은 이래 그에게 여러 번의 큰 시련이 있었음을, 그리고 무엇보다 그는 지나칠 만큼 예민한 감성의 소유자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 반면 ‘아주 가벼운 깃털 하나’와 같은 생의 순간들도 허투루 놓치지 않는다는 것도. 그의 책을 읽는 권수가 늘어날수록 나는 그에게 점점 더 공감하게 된다. 무엇보다 그가 썩 훌륭한 작가이기 이전에 아주 괜찮은 사람이라는 걸 느끼게 되어서일 거다. 소설에 이어 <수도원 기행>이라든가, 이 책 <빗방울...>을 읽으면서도 그런 느낌이 더 깊어졌다. 그러니까 어쩌다보니, 어느새  공지영 작가의 팬이 되어있는 것이다.

 

이 책에서 처음 보는 시들을 여럿 만났다. 체 게바라가 쓴 <나의 삶> 중의 짧은 발췌문은, 오래 전 읽었던 체 게바라 평전 전체의 느낌보다 더 강렬했다. 여러 편 등장하는 자끄 프레베르의 시편들은 시집 전체에서보다 이 책에서 더 빛나는 것처럼 느껴져서 잠깐 얼떨떨했다. 이 책이 아니었으면 만나기 어려웠을 압둘 와합 알바야티의 시들에도 마음이 머물렀다. 어느새 나는 지은이가 소개하는 시를 마치 나의 책장에서 즐겨 꺼내 읽듯 깊이 음미하고 있었다. 그렇게 향기롭게 책을 읽었다. 읽던 중에 서울 여행길에 나서게 되어 가방에 챙겨 갔더니, 기차에서도 아무 데나 펼쳐 읽었고 숙소에서도 보고 지하철에서 이십분 남짓 읽기도 했다. 여행 내내 비가 왔고, 차창을 긋는 빗줄기를 보며 그래서 나도 가끔은, ‘빗방울처럼 혼자다’ 고 생각했다. 
 

비교적 최근작인 <아주 가벼운 깃털 하나>를 읽을 때는 너무나 자주 유쾌했다. 신문의 목요섹션에 실릴 때는 한 주일을 기다렸다 먼저 읽곤 했는데 나중에 단행본으로 출판되어 그때의 유쾌함을 가끔 누리고 싶어 책을 샀다. 그의 이야기 중에는 어쩌면 희비극이고 어쩌면 블랙 코미디 같은 상황도 꽤 있었지만, 그래도 그런 상황조차도 유쾌했다. 마치 슬픔을 참으려 이를 꽉 깨물어도 스멀스멀 웃음이 피어나오고는 결국 그 슬픔이 펑 터지듯 날아가버리는 그런 상황 말이다. 하여간 그 책을 읽으며 이 작가의 멀쩡함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어쩐지 그 유쾌함 속에 치열함이 느껴지는 게 의아했다. 그게,

먼저 씌어진 책 두 권, <수도원 기행>과 <빗방울...>을 읽고 난 나중에야 <깃털>의 치열함이 쓱 이해가 되었다. <깃털>은 결코 앞서 써지지 못했을 것이다. 그때는, 아직은 생의 슬픔을 이해하고 바라보아야 할 시간이었을 테니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