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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귀한 풍경이다. 화제의 장편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 <월래스와 그로밋: 거대토끼의 저주>와 <유령신부>가 나란히 세상에 나와 극장에 걸렸다. 디지털 애니메이션의 세례 속에 찾아온 손맛 나는 애니메이션의 향연, 함께 음미할 가치가 있다.
클레이메이션의 명가 아드만 스튜디오가 <치킨 런> 이후 5년 만에 내놓은 장편 <월래스와 그로밋: 거대토끼의 저주>(이하 <거대토끼의 저주>)와 <크리스마스의 악몽> 이후 무려 10년 만에 등장한 팀 버튼의 신작 애니메이션 <유령신부>가 11월 4일 함께 국내 개봉했다. 두 편 모두 전세계 극장용 애니메이션계를 점령한 3D 애니메이션의 틈바구니에서 수공예 애니메이션의 가치를 온몸으로 증명하고 있는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이다. 사물을 약 1인치씩 움직이며 촬영해 그것을 이어 붙였을 때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한 효과를 주는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은 웬만한 끈기와 노력으론 시작도 못할 험난한 예술이다. 하지만 흙으로 사람을 빚은 조물주의 능력을 맛볼 만큼 무형의 세계에 생기를 불어넣을 수 있다는 점에서 수많은 아티스트들을 끌어들이고 있는 영역이기도 하다. <화려한 외출> <전자바지 소동> <양털도둑>까지 세 개의 단편으로 이루어진 <월래스와 그로밋> 시리즈가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 중에서도 점토를 이용한 클레이메이션의 전설을 이룩해냈다면, 팀 버튼이 제작한 <크리스마스의 악몽>은 인형을 움직여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의 혁신을 이룬 작품이다. 이제 점토와 인형의 업그레이드 버전이 공개된다. 시간이 곧 생명이라는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 세계에서 아드만의 <거대토끼의 저주>와 팀 버튼의 <유령신부>는 어떻게 태어나 성장했을까? 두 편의 극장용 장편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이 기이하게 조우하는, 10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한 기회. 그들을 꼼꼼히 뜯어보지 않을 수 없다.
거대토끼, 킹콩을 닮았다!
2001년 <치킨 런>이 개봉하기 전. 아드만 스튜디오의 간판스타 감독 닉 파크는 <월래스와 그로밋> 시리즈의 각본가였던 밥 베이커와 어느 선술집에서 한 잔 하다 문득 이런 생각을 떠올렸다. '월래스와 그로밋이 등장하는 장편을 30년대 유니버설 스튜디오가 제작했던 <늑대인간>류의 고딕 호러 스타일로 만들면 어떨까?' 다만 피와 살이 튀지 않는, 육식이 아니라 채식주의에 가까운 영화로 포장해서 말이다. 올해 나이 47세인 닉 파크에겐 월래스와 그로밋이 대학 시절 만든 자식 같은 존재들이니 얘들을 당연히 장편 데뷔시키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엄청난 일이었다. 닉 파크와 <거대토끼의 저주>를 공동 감독한 스티브 박스는 "월래스와 그로밋을 주인공으로 85분짜리 영화를 만드는 건 성냥개비로 만리장성을 쌓는 것과 같다"고 비유했을 정도니까. 여하튼 <거대토끼의 저주>는 '슈퍼 야채 경연대회'를 쑥밭으로 만들어 놓은 거대토끼와 이 괴물을 막으려는 월래스와 그로밋의 활약상을 그리는 일명 '베지테리언(vegetarian) 호러 무비'가 됐다.
동급 최강의 귀여운 콤비 월래스(피터 살리스 목소리)와 그로밋은 마을의 야채들을 습격하는 토끼들을 인도주의적으로 잡아들이는 '해충박멸특공대'를 운영하고 있다. 곧 마을에서 열릴 '슈퍼 야채 경연대회'를 주최하는 레이디 토팅톤(헬레나 본햄 카터 목소리)의 저택에서 토끼들을 대량 포획한 월래스와 그로밋은 집으로 돌아와 토끼들에게 세뇌 실험을 한다. 월래스는 자신이 고안해낸 세뇌 장치를 머리에 쓰고 토끼들을 향해 "나는 야채가 싫다, 싫어!"라는 말을 되뇌인다. 언뜻 성공한 듯싶었는데, 아뿔싸! 토끼 한 마리가 월래스의 머리와 도킹하면서 거대토끼의 저주가 서막을 드리운다. <더 플라이> 같은 설정인데, 그 이후 밤마다 거대토끼가 등장해 마을 채소밭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는다.
월래스와 그로밋을 보고 있으면 바보 같은 남편과 그런 남편 시중들기에 도가 튼 아내가 떠오른다. 맞춰 놓은 알람이 울리면 그로밋이 일어난다. 아직도 코끝에 치즈를 갔다 대야 냄새를 맡고 잠이 깨는 월래스는 침대에서 미끄러져 내려와 기계가 입혀주는 옷을 입고 식탁에 앉는다. 월래스네 아침 식탁 풍경은 여전히 정겹고 단편 시절보다 훨씬 정교하다. 월래스의 야심 찬 발명품 기억 조종 장치나 해충 박멸을 위해 출동할 때 그로밋과 타고 다니는 자동차, 대형 진공청소기처럼 생긴 토끼 수거 장치 등 귀엽고 흥미로운 메카닉들도 등장한다. <양털도둑>에서 보였던 그로밋과 펭귄의 추격 신은 그로밋과 거대토끼의 추격 신으로 버전 업 시킨다. 거대토끼가 레이디 토팅톤을 손에 움켜쥐고 건물 위로 올라가며 <킹콩>에 오마주를 바치는 장면에서 거대토끼를 쫓는 그로밋의 비행 추격 신까지 스케일이 커진 월래스와 그로밋의 활약은 단편 시절과의 고리를 끊지 않으며 사뭇 눈길을 끈다. 거대토끼의 정체가 밝혀지기까지 히치콕식 스릴러의 기운과 고딕 호러의 어둠을 끌어들이는 <거대토끼의 저주>는 중간중간 느슨한 스토리의 고비를 넘어가며 클레이메이션의 진수를 펼쳐 보인다.
시체들의 땅에서 결혼하다
1995년 헨리 셀릭이 연출한 <크리스마스의 악몽>을 제작한 이후 팀 버튼은 언젠가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을 또다시 해볼 작정이었다. 물론 그 중노동의 무서움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예술적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팀 버튼은 "실제로 캐릭터들을 만질 수 있고, 움직일 수 있고, 그들의 세계를 직접 볼 수 있다는 건 마법과 같다"라고 말한다. 아무튼 기회를 노리고 있던 팀 버튼에게 친구 조 랜트가 러시아 민간 설화를 들려줬는데 버튼은 그 얘기가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의 양식에 딱 맞는다고 생각했다. 낭만적이면서도 비극적이면서 무시무시한 이야기 <유령신부>를 78분짜리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으로 옮기는 데엔 촬영 기간만 52주, 전체 제작 기간은 10년이 걸렸다.
빅토리아풍의 어느 마을에서 일면식도 없던 두 남녀가 정략결혼을 하게 생겼다. 생선 통조림을 팔아 벼락부자가 된 넬과 윌리엄 반 도르트 부부는 신분을, 세습 귀족이지만 빈털터리인 모드린과 피니스 에버글롯 공작 부부는 돈을 얻고 싶어 한다. 반 도르트 부부의 수줍은 몽상가 아들 빅터(조니 뎁 목소리)와 에버글롯 공작가의 똑똑한 딸 빅토리아(에밀리 왓슨)는 부모들의 이런 꿍꿍이 때문에 웨딩 리허설 전날 처음 만난다. 어색하지만 은근히 서로가 맘에 든 두 사람. 하지만 웨딩 리허설에서 혼인 서약 도중 실수를 연발한 빅터는 교회에서 쫓겨나 어두운 숲에 들어간다. 숲에서 맘 잡고 서약을 외운 빅터는 땅바닥에서 솟아나온 나무뿌리에 반지를 끼워주는데, 그게 알고 보니 나뭇가지가 아니라 시체의 손가락이었다. 갑자기 땅바닥에서 누더기 웨딩드레스를 입은 여자의 시체가 솟아난다. 대체 누구? 썩어가는 푸른 얼굴에 달빛을 받아 기괴한 미모를 자랑하는 유령신부(헬레나 본햄 카터 목소리)다. 빅터는 그가 자신의 남편이라고 주장하는 유령신부에게서 벗어나 어떻게든 빅토리아가 있는 지상으로 돌아가려 애쓴다.
<유령신부>는 어둡지만 아름답고 생생한 러브스토리다. 유령신부에게 이끌려 저승으로 간 빅터는 얼마 후 저승 세계가 인간이 사는 지상 세계보다 더 흥미진진하고 활기찬 곳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팀 버튼이 설계한 세계에서 지상은 고딕 풍의 음산한 이미지로, 지하의 저승 세계는 오히려 오페라를 연상시키는 무질서하고 화려한 이미지로 부활한다. 무기력하고 단조로운 삶을 사는 사람들의 지상 세계가 무채색 이미지로 그려지는 데 비해 저승은 이미 떠나온 생에 대한 욕망 때문에 오히려 더 생기 넘치게 살아가는 시체들의 세계다. 그리고 이 산 자와 죽은 자의 세계를 관통하는 건 역시 생생한 질감을 지닌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의 미학이다. 빅터가 유령신부와 함께 피아노를 듀엣으로 연주하는 장면에선 그 손가락과 몸짓의 정교함에 감탄이 새어나온다. 오래 전에 죽어 뼈만 앙상한 빅터의 강아지가 귀엽게 왈왈거리고 신나게 춤을 추는 해골들의 댄스가 알록달록한 조명, 종횡무진 움직이는 카메라에 담긴다. 썩은 눈알에서 구더기가 튀어나오긴 해도 길고 가는 다리와 도톰한 입술을 지닌 푸른 얼굴의 시체 신부는 섹시한 몸짓으로 살아 움직이듯 다가온다.
1주일에 8분짜리 점토 vs. 1주일에 5분짜리 인형
2만4천 장의 스토리보드를 바탕으로 21개월의 촬영 기간을 거쳐 완성된 <거대토끼의 저주>는 미치지 않고서야 할 수 없는 일들이 제작 과정 속에 산재해 있다. 월래스는 거대토끼 사건이 마무리된 후 폴라로이드 사진을 찍으며 '치이이이이즈'라고 말한다. '아드 믹스'라는 별명이 붙은 특수 찰흙 '플래스티신'으로 만든 월래스의 입이 옆으로 쭈욱 늘어난다. 목소리를 연기한 피터 살리스의 입 모양을 따라 만든 것이다. 만든 건 알겠는데 어떻게 움직이는 걸까? 앞서 본지 252호에 실린 '아드만 스튜디오 탐방기'에서 밝히긴 했지만 모든 과정을 좀 더 더듬어볼 필요가 있다. 클레이메이션의 첫 단계는 찰흙 인형을 디자인하면서부터 시작된다. 디자인을 완성하고 촬영에 들어가기 전에 제작진은 배우들의 목소리를 녹음한다. 배우들의 목소리 연기로 인해 찰흙 인형 캐릭터의 성격이 만들어지고, 그에 따라 의상과 헤어스타일이 결정될 수 있기 때문이다. <거대토끼의 저주>에서 찰흙 인형들을 제조한 책임자 얀 생거는 주요 배역들의 목소리 녹음이 끝난 후 그들의 캐릭터와 함께 다양한 나이와 모양, 크기를 지닌 월래스네 마을 주민들과 동물들을 디자인하고 제작했다. 거기에 개개 인형들의 머리카락과 옷들을 틀로 뜨고 손으로 색칠했다. 의상 디자이너와 헤어 스타일리스트까지 겸한 것이다. 찰흙 인형들을 만들 때는 각 캐릭터에 맞는 금속 뼈대를 만들고, 그 위에 플래스티신으로 살을 붙이게 된다. 참, 거대토끼는 금속 뼈대 위에 점토가 아니라 털을 덮는데 이게 또 어렵다. 손가락으로 거대토끼를 움직이면 털에 자국이 남기 때문에 털을 건드리지 않고 등 뒤에 레버를 달아 작동시켰다. 자, 캐릭터만 만들어서 끝나면 좋게?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에서는 주요 캐릭터들을 만듦과 동시에 세트와 배경 소품들도 일일이 다 만들어야 한다. 프로덕션 디자이너 필 루이스가 엄청나게 꼼꼼한 디테일을 갖춘 30개의 세트를 디자인했다. 월래스와 그로밋의 집, 거대토끼가 등장하는 숲, 넓은 정원과 낙원 같은 옥상 온실을 갖춘 레이디 토팅톤의 럭셔리한 저택 안으로 몸을 굽혀 1주일에 8분을 촬영하는 스케줄 속에서 피가 마르는 애니메이터들의 집중력. 그건 정말 측정이 불가능하다.
<유령신부>도 만만치 않다. 팀 버튼이 그린 몇 장의 컨셉 아트 스케치에서 모든 게 시작됐다. 이 스케치를 캐릭터 디자이너 카를로스 그란젤이 발전시키고 각본이 완성되면 스토리보드 스케치 아티스트들이 다시 컨셉 아트 스케치를 받아 영화 전체를 장면별로 구성하고 카메라 각도를 계획한다. 그 다음 비로소 대사 녹음을 하고 스토리보드에 맞춰 편집하면 구체적인 비주얼 맵이 완성된다. 개별적인 세트와 각각의 인형은 그와 동시에 제작한다. <유령신부>의 인형 관리 전문가 그래함 메이든은 "처음의 예상과 달리 촬영에 들어갈 때까지도 유령신부 인형을 만들고 있을 만큼 시간이 많이 걸렸다"고 말한다. 주요 캐릭터 인형들을 만드는 데 거의 18개월에서 2년 정도의 기간이 소요됐다. 기가 막힐 따름이다. <유령신부>에서 인형 제작 전문가들은 다양한 인형의 금속 골격을 만들고 그 위에 피부를 입힌다. 여기서 점토로 살을 붙이면 클레이메이션이, 합성 물질로 피부를 입히면 <유령신부>처럼 인형 애니메이션이 된다. <유령신부>의 인형들 피부는 특별히 실리콘 합성 물질로 만들어졌다. 뜨거운 조명 아래에서 녹아내리지 않고 몇 달 동안 생기 있는 상태를 유지할 수 있도록 제작진이 고안해 낸 것이다.
팀 버튼이 <크리스마스의 악몽>을 제작하던 시절엔 각각 다른 표정을 한 대체용 머리를 십여 개 제작해 놓고 장면마다 바꿔 표정 변화를 꾀했지만 아무래도 한계가 있었다. <유령신부>에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인형 머릿속에 기계 전동 장치를 심었다. 귀와 머리에 숨겨진 지점을 작은 렌치를 통해 조종해 얼굴 표정을 무제한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었다. 그 효과가 대단하다. 반 도르프 부부가 말을 할 때 입가가 실룩이거나, 애처로운 표정을 짓는 빅터의 눈꼬리가 처지거나 모든 캐릭터가 몇 번씩 눈꺼풀을 깜빡이는 모습은 이들이 정말 살아 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거의 공학의 승리다. 그런데 머릿속에 기계 장치를 심어놓으려니 인형 사이즈가 커질 수밖에 없다. 보통의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 인형들보다 큰 12인치 정도 사이즈의 무려 3만 달러짜리 인형을 제작하다 보니 세트와 소도구들도 커지면서 전체적인 프로덕션 규모가 일반적인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의 두세 배에 이르게 됐다. <유령신부> 촬영장에서는 팀마다 촬영감독, 전기 담당자, 세트 디자이너가 소속된 8개 촬영팀이 35개의 세트를 돌며 촬영했는데, 모든 세트에서 전부 촬영이 진행될 때도 있었다. 그렇게 촬영해도 1주일에 5분 분량을 찍었다니 그 생고생, 더 이상 말해 무엇하랴.
몸 사리지 않는 애니메이터들의 명연기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은 연출자의 상상에만 의존해 무에서 유를 창조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사투가 없다. 캐릭터가 한 번 움직일 때 거의 0.5mm 정도인데 이게 대체 움직인다고 할 수나 있나? 그 포즈로 일단 한 프레임을 촬영한 후 인형을 다시 조금 움직이고 또 촬영한다. 그 과정을 반복해 하루 12시간 작업이 끝나면 1초나 2초의 장면을 얻는다니 설명하는 것만으로도 진짜 속 터진다. <거대토끼의 저주>는 하루에 3초 정도 촬영을 했다. 이럴 때 하루 종일 찍은 분량의 동선이 엉뚱하거나 배경의 소품이 움직여 화면에 문제가 생기면 어쩌나? 소도구들은 인형이 움직이는 동안 덩달아 움직이지 않도록 무게감 있게 제작되긴 하지만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나중에 화면에서 위치가 바뀐 게 확연히 드러나 흉한 꼴을 연출하게 된다. 그럼 유령신부와 거대토끼의 저주를 한꺼번에 받고도 모자라다.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에선 늘 이 전 과정을 통제하고 감시하는 사람, 키 애니메이터가 필요하다. 여러 그룹을 통솔해 촬영을 진행하며 페이스를 조절하고 그때그때 애니메이터들의 영감을 끌어내는 것이 키 애니메이터의 역할이다. <유령신부>에선 공동감독 마이크 존슨이 26개의 무대와 수백 개의 인형들을 관리하고 전체 작업의 일관성을 유지하는 책임을 맡았다. <거대토끼의 저주>에서 그 역할을 한 멀린 크로싱햄은 "애니메이터 혼자서 월래스와 그로밋을 만들 순 없다. 어떤 표정이나 행동을 만들지 모두의 동의가 필요했다"고 말한다.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의 생명은 캐릭터에 온기를 불어넣는 배우들의 목소리와 각 캐릭터 모형을 정확하게 움직이는 애니메이터들의 개인기에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보통 애니메이터들은 등장인물의 동작을 그리지만 스톱 모션 애니메이터들은 그들 스스로 연기자가 돼야 한다. 정해진 순서에 따라 캐릭터를 정해진 수치만큼 움직여야 하니 애니메이터들은 매 초, 일생일대의 명연기를 펼쳐야 한다. 아드만 스튜디오의 창립자인 애니메이터 피터 로드는 "1주일 정도 걸리는 작업 막바지쯤엔 실수로 1주일간의 작업을 망치지 않게 필사적이 된다. 작업은 느려도 몸 안의 긴장감은 팽팽하다"고 말한다. 거기에 30개 정도의 소품들이 동시에 움직이는 장면을 촬영한다 치자.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으, 거의 미쳐 돌아버릴 판이다. <거대토끼의 저주>에서 이 어마어마한 미친 짓의 백미는 바로 거대토끼가 마을을 가로질러 난동을 벌이다 레이디 토팅턴을 들고 건물 지붕에 올라가고, 마을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그로밋이 항공 추격전을 벌이는 클라이맥스 시퀀스에서 확인할 수 있다.
또 한 가지. 촬영 전에 캐릭터들의 모든 동작을 이해하고 상황을 알아야 하지만 그걸 일일이 월래스나 그로밋을 시키다간 애써 만들어 놓은 점토 모형이 망가지기 십상. 애니메이터들이 제 몸을 던져 직접 동작을 연기해 본다. 하지만 시간이 생명인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이다 보니 월래스와 그로밋의 연기는 아무리 많아 봤자 최대 세 번의 테이크를 넘지 않는 게 아드만의 철칙이다. 세간엔 닉 파커나 팀 버튼의 이름으로 알려진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에는 작은 세트 안을 향해 하루 종일 몸을 구부리고 일하는 위대한 일꾼들이 너무 많다. 핸드메이드 퀄리티 사수를 위해 몸을 던진 <거대토끼의 저주>와 <유령신부>의 수많은 애니메이터들이 있다는 사실, 잊으면 그들은 무진장 억울하다.
스톱 모션 속에 스며든 CG
인간의 손으로 만물을 창조하는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의 세계에도 CG가 존재한다. 혁신적인 디지털 카메라 기술과 디지털 편집, CG의 사용이 시간을 아끼고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이 지닌 표현의 한계를 살짝(!) 극복하는 데 이용되고 있다. <거대토끼의 저주>에서 제작진은 안개나 연기, 물 등을 표현할 때 CG를 동원했다. 찰흙을 더 찰흙답게 보이도록 손질하는 데도 디지털 공정이 이용됐고 거대토끼가 숲으로 달아날 때 그 뒤를 따르는 안개, 월래스가 발명한 기억 조종 장치에서 새어나오는 빛 역시 CG의 결과물이다. <유령신부>는 더 도전적이다. 인형 애니메이션으로서 너무나 매끈한 화면을 자랑하는데, 여기엔 몇 가지 디지털 비기가 있다. <유령신부>는 최초로 디지털 SLR 스틸 카메라를 사용해 촬영했고, 애플 사의 디지털 편집 프로그램 파이널 컷 프로를 통해 편집됐다. 처음엔 필름 카메라를 쓰려던 제작진은 테스트를 해본 후 캐논 디지털 스틸 카메라를 24대 구입해 촬영했다. 필름 카메라로 촬영했을 때 한 장면을 찍으면 잘 나왔는지 다음날 아침에야 확인이 가능했지만 디지털 스틸 카메라로는 두 시간 후에 촬영분을 확인하고 바로 편집을 할 수 있어 촬영에 속도가 붙었다. 카메라 사이즈가 작아지면서 인형들에 더 근접해 촬영하게 됐고 촬영된 디지털 이미지는 확대해도 큰 손상이 없었다. 공동 감독 마이크 존슨은 "사람들은 컴퓨터와 디지털 테크놀로지가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을 몰아낼 거라 했지만 실제로는 큰 도움이 됐다"고 말한다.
팀 버튼은 <유령신부> 편집 과정에서 "이 장면 확 잘라!"를 서슴없이 내뱉었다. 수십 명 애니메이터들이 달라붙어 실성한 듯 만들어낸 1분, 1초의 장면이 그렇게 날아갔다. 만드는 입장에서야 모든 프레임이 다 주옥같겠지만, 그러다 보면 배가 산으로 가는 법이다. <거대토끼의 저주>와 <유령신부>는 그런 함정을 유유히 피해 나간다. <치킨 런> 때에 비하면 <거대토끼의 저주>의 완성도엔 다소 이견이 있지만 보기 드물게 낙천적인 두 캐릭터 월래스와 그로밋을 데리고 히치콕식 스릴러와 고딕 호러의 향수를 뒤섞었다는 건 대담한 도전이다. <유령신부> 역시 신분 갈등, 산 자와 죽은 자의 화해, 사랑이 만들어낸 삼각관계, 시체들의 흥겨운 노래와 댄스 등 아기자기한 요소들로 러닝타임의 매순간을 가치 있게 한다. 블루 스크린을 등지고 만들어졌다면 결코 존재할 수 없는 질감과 감동이 <거대토끼의 저주>와 <유령신부>에 서려 있다.
두 편의 스톱모션 애니메이션 <거대토끼의 저주>와 <유령신부>는 할리우드에서 한 달 차이로 개봉했다. 기이한 우연이고, 유례가 없는 일이다. 애니메이션의 대권을 3D에 넘겨줬다고 믿었던 이들에게 <거대토끼의 저주>와 <유령신부>는 전통과 장인정신이 디지털 세계와 어깨동무할 수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 디지털 기술을 과감히 영입한 도전정신과 무궁한 인내심으로 10년 만에 성공적인 결실을 본 팀 버튼의 <유령신부>는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이 제작될 새로운 길을 열어놓았다. "월래스와 그로밋을 장편에 출연시키면서 마치 오랜만에 다시 고향에 돌아온 느낌"이라고 말한 닉 파크는 휴식을 취한 후 클레이의 수준을 뒤흔드는 후속작을 5년 뒤쯤 내놓겠다는 작정이다. 두 작품 모두 픽사나 디즈니, 드림웍스의 애니메이션에 비하면 꽤 어두운 감성을 소유하지만 그 때문에 더욱 즐길 만하다. 손때 묻은 미래가 이렇게나 밝다.
여기서 스톱!
Q) 이건 혹시 CG? 유령신부의 면사포가 나부끼는 장면 A) 시체 신부의 길게 늘어뜨린 웨딩 베일. 바람에 나부낄 때 감탄스럽다. 베일 천의 질감이 생생하지만 CG가 아니라면 저렇게 자연스러울까 싶어 마구 의심이 간다. 아무리 인형을 한 프레임씩 움직였어도 베일이 저렇게 날렸을까. 알고 보니 제작진은 투명한 천의 움직임을 표현하기 위해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는 철사들을 천에 넣어 필요한 동작들을 표현했다. 이 머리 장식을 고안하는 데만 10개월 걸렸다. 정말 미치지 않고서야.
Q) 이건 정말 클레이? 해충 박멸 기계 안에서 토끼들이 둥둥 떠 다니는 장면 A) <거대토끼의 저주>에서 CG가 가장 적나라하게 쓰인 장면은 진공청소기 같은 기계 안에서 토끼들이 둥둥 떠다니는 장면이다. 아드만 스튜디오 인형 제작자들이 만든 토끼 모형들을 디지털 스캔하고 그 이미지를 컴퓨터상에서 작업한 것이다. 월래스가 포획한 토끼들이 진공관 안에서 떠다니며 손을 흔들거나 귀를 동그랗게 말거나 하는데, 이건 CG 팀에서 무작위로 움직임을 첨가한 것이다. 클레이 모형을 촬영한 것과 구별이 안 갈 만큼 이질감이 없다. 닉 파크의 한마디. "처음엔 수작업으로 하려 했지만 한계가 있었다. 그러다 보니 CG로 하면 안 될 건 또 뭐야? 라는 생각이 들었다."
<거대토끼의 저주> 목소리 출연진
피터 살리스(월래스) | "1983년에 닉 파크에게 섭외 당해 그가 다니는 비컨스필드 영화학교에 가서 <화려한 외출>을 녹음했다. 대사를 말하면 닉이 끼어들어 이래라 저래라 했다. 기껏 대학교 학생 주제에 극단에 몇 년이나 몸 담아온 내 연기를 참견하는 게 좀 괘씸했었다. 파크는 당시 내게 스토리보드만 보여 주더니 6년 후 '끝냈습니다'라고 전화했다."
헬레나 본햄 카터(레이디 토팅턴) | "원래 월래스와 그로밋의 팬이었다. 레이디 토팅턴은 약간 맛이 간 괴상한 여자인데 인도주의자라 사랑스럽다. 틀니를 끼고 씩 웃는 모습으로 설정하면 좋을 것 같아서 그런 모습을 보여 줬더니 닉이 아주 좋아했다."
랄프 파인즈(빅터 쿼터메인) | "폼생폼사형 빅터는 어처구니없게 비열한 불량배로, 레이디 토팅턴에게 구혼하지만 얕보던 월래스에게 밀리자 분노한다. 나도 월래스와 그로밋의 팬이고 클레이메이션을 워낙 좋아해 기꺼이 이 역을 맡았다. 이건 정말 굉장한 코미디다."
<유령신부> 목소리 출연진
조니 뎁(빅터 반 도르트) | "<찰리와 초콜릿 공장> 때문에 한창 바쁠 때 팀 버튼이 와서 ‘오늘은 <유령신부> 녹음을 좀 하지’라고 했다. 준비 없이 갔지만 15분 만에 끝냈다. 녹음할 때 카메라가 계속 따라다니더니 내 눈썹 움직임과 표정 변화를 빅터가 닮게 됐다."
헬레나 본햄 카터(유령신부) | "어쩌다 보니 두 편에 다 나왔다. 팀 버튼 영화지만 난 <유령신부> 목소리 오디션을 봤다. 서로의 처지에 공감하는 선량한 캐릭터들이 모두 딜레마에 빠진다는 게 매력적이다. 유령신부가 날 닮아서 보기 좋다. 입술에 콜라겐 넣고 보톡스 맞은 거 같은데 섹시하다."
에밀리 왓슨(빅토리아 에버글렛) | "목소리 연기는 처음이라 긴장했다. 스튜디오에 가니 사람들이 할 일을 알려줬지만 너무 정신없어 보였다. 빅토리아는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한다는 꿈을 지닌 로맨티스트다. 고딕 양식이 반영된 인형 디자인이 우울하고 기괴한 게 팀 버튼다와서 좋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