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딴방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1999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화해로 가는 길
- 신경숙, 『외딴방』을 읽고


 사람은 인생의 어느 한 시기쯤 침묵으로 일관하게 되는 절망의 순간을 경험하게 된다. 누군가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일, 누구에게라도 아픔을 주는 어떤 일을 가슴에 묻은 채 전전긍긍하며 살아간다. 쉽사리 지워지지 않는 주홍글씨처럼 영혼의 밑바닥에 깊이 각인된 잔인한 기억! 살아가는 동안 불쑥불쑥 찾아와 평온했던 일상을 온통 엉망으로 뒤흔들어 버린다. 정면으로 승부하기 전에는 설령 정면 승부를 펼친다 해도 온전히 자유로워질 수 없는 잔혹한 상처는 살아가는 내내 고통을 안겨 준다.

『외딴방』은 열여섯에서 열아홉에 이르는 생애 가장 꽃다운 나이에 천형과도 같은 끔직한 일을 겪은 작가가 오랜 내적 방황 끝에 스스로와 화해해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소설이다. 열여섯,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구로공단의 동남전기주식회사 컨베이어와 영등포여자고등학교 야간반 그리고 자그마한 외딴방 한 칸이다. 그곳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을 온전히 지켜내기 위해 소녀는 작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훗날, 살아가는 피로와 관계의 부재 속에 처절하게 외로워졌을 때도(p.49)’ 무언가를 열망하는 꿈이 있다면 살아갈 수 있다고 믿었던 소녀. 열여섯에서 열아홉으로 건너오는 사년의 시간을 온통 침묵하게 만든 사건은 그녀의 열망과는 상관없이 벌어지고 만다. 그녀를 비밀스런 아이로, 내성적이며 타인과 관계 맺기를 두려워하는 사람으로 바꿔놓고만 사건. 딸깍하고 잠궈 버린 희재언니 방의 열쇠통은 언젠가 우물에 빠뜨린 쇠스랑처럼 그녀의 마음 밑바닥에 가라앉아 묵직하고 깊은 상흔을 남기고 말았다.

 다 나은 줄 알았다. 상처가 아물어 새 살이 돋은 지 이미 오래다. 그런데도 예전과 비슷한 상처를 입게 되면 그때의 고통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그녀에게 희재언니 사건이 그랬듯 나에게도 그런 일이 있었을까, 있었던 것 같다. 나를 침묵하게 만들고 나의 한 시절을 온통 암흑으로 바꿔버린 힘겨운 시련, 이 나에게도 있었던 것 같다. 있었다, 라고 단정 지으면 그 때의 일이 금세 생생하게 떠오를 것 같아 있었던 것 같다, 라고만 말해 두련다. 상처 난 자리에 약을 바르고 딱지가 앉고 그 딱지를 밀어 올리는 붉은 속살을 보기도 전에 붕대를 칭칭 감아 다시는 풀지 않았던 내 스물 한 살의 상처. 그래서 곪았을까, 그래서 더 빨리 아물었을까. 아직 나는 그 일을 정면으로 마주할 용기도 의욕도 없다. 그 때를 생각하면 머릿속이 그저 멍해져온다. 잃은 것과 얻은 것이 분명 있을진대 어떤 쪽으로든 생각이 정리되지 않는다. 그냥 도망치듯 잊은 채 살았다. 그럼에도 생활의 자잘한 파편들에 의해 끊임없이 상기되는 그 날의 사건들, 사람들……. 멀리 오면 될 줄 알았다.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줄 알았다.

 소녀는 작가가 되었다. 작가가 되어 끊임없이 작품을 발표했다. 자신의 모든 것을 소진하려는 듯 숨 가쁘게 달려온 시간. ‘너는 우리랑 다른 삶을 살고 있는 것 같다’고 말하는 하계숙의 한마디가 그녀를 뒤흔들어놓기 전까지는. 그녀는 그녀의 옛 친구가 생각하듯 정말 다른 삶을 살고 있는 것일까, 무엇이 그녀를 다른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을까. 결코 자유로워질 수 없는 사년간의 잔인한 기억, 그것 때문이었다. 공장 야간학교 외딴방 그리고 희재언니. 이 중 어느 하나만 떠올려도 동시다발적으로 차오르는 기억 때문에 그녀는 그 시절의 일을 한마디도 내뱉지 못했으리라. 내내 아파만 했으리라. 노조와 회사의 극한 대립보다 유신말기의 혼란한 사회 상황보다 더 힘들게 자신을 옥죄여오는 희재언니가 있던 외딴방의 기억…….
 자신도 모르게 휘말려 버린 그날의 일과 화해를 하기 위해 그녀는 힘겹게 한 걸음 내딛고 있다. 작가의 아주 세밀한 감정들까지 고스란히 녹아있는 『외딴방』은 그래서 읽는 중간 자꾸만 멈칫, 하게 된다. 서서히 마음이 내려앉는 느낌이랄까. 직접 겪은 일도 아닌데 자꾸만 마음을 후벼 파고 들어와 아프게 한다. 쉽사리 다음 장을 넘기기 힘들다. 후-하고 심호흡 한 번. 그녀는 그렇게 나의 상처를 서서히 들여다보게 만들었다. 내 지난날의 상처를 아직 ‘그 일’이라고 밖에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다. 그녀처럼 정면 승부를 펼친 것이 아니라 이제 겨우 본질을 바라볼 용기를 얻었기 때문이다.

 언젠가 『외딴방』을 읽은 적이 있는 것 같다. 나도 그녀처럼 문예창작학을 전공한 문학도였고, 신경숙이라는 이름 역시 오래전부터 깊이 각인되었던 터. 그럼에도 처음 읽는 것처럼 생경하다. 방금 상처가 난 것처럼 구석구석 쓰리고 아프다. 그 때 나에게는 ‘외딴방’이 없어서였을까. 그저 타인의 일이기만 해서였을까. 한 해를 살고 또 한 해를 사는 동안 많은 일들이 곁에 머물렀다 사라져간다. 어떤 것은 흔적도 없는가 하면 어떤 것은 너무나 생생하다. 떠올리기 싫은 기억일수록 선명한 잔상을 남기는 법.
 
 우리는 누구나 자신만의 ‘외딴방’ 을 하나쯤 간직하며 살아간다. 이미 오래전에 잃어버린 열쇠는 찾을 길 없고 자물쇠도 녹슨 지 오래다. 할 수 있는 건 있는 힘껏 문을 부수고 들어가 보는 것뿐이다.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다. 오직 자신이 해야 할 일. 잔인한 상처들이 물밀듯이 밀려오겠지만 정면으로 마주해야 한다. 우리는 바로 이 순간 오늘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시시때때 찾아오는 지난날의 고통에서 자유로워질 이유가 분명히 있는 것이다. ‘외딴방’을 활짝 열어놓고 보면 알 수 있겠지. 영혼이 더욱 견고해지고 앞으로의 삶이 더욱 값져 질 수 있다는 사실을.

 작가의 고백처럼 『외딴방』은 사실도 픽션도 아닌 그 중간쯤 되는 글일 것이다. 분명한 것은 그녀에게 글쓰기가 ‘외딴방’을 뚫고 나올 용기를 주었다는 사실이다. 작가의 내면을 치유하는 동시에 책을 읽는 수많은 독자들에게 각자의 외딴방과 화해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준 셈이다. ‘문학’이 맞다. ‘문학으로 인해 내가 꿈을 꿀 수 있다면 사회도 꿈을 꿀 수 있(p.206)’을 거라는 그녀의 생각에 동의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이어트의 여왕
백영옥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7월
평점 :
절판


발랄한 웃음 뒤에 숨겨진 냉혹한 진실
- 과연 무엇을 위해 아름다워지기를 바라는가?
 

백영옥,『다이어트의 여왕』을 읽고 



 

 

 

 

 

 

 

 다이어트 여왕을 가리는 서바이벌 경쟁에서 살아남은 최후의 1인에게 주어지는 상금은 자그마치 1억 원. 『다이어트의 여왕』은 치열 혹은 치졸한 경쟁이 예상되는 TV쇼의 화려한 간판을 내건 스펙타클한 칙릿 한 편이라 생각했다. 누구나 보면서 불만을 토로하지만 매 방송시간마다 본방을 사수하게 만드는 중독성 강한 버라이어티 쇼라고 해야 할까. 이런 예상은 살짝 빗나갔다. 사람들의 말초적인 감정을 자극하는 ‘다이어트의 여왕’이라는 TV쇼는 일종의 징검다리 역할을 한다. 대신 책 전반은 주인공 ‘연두’가 겪어나가는 심리변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세 번의 연애와 세 번의 실연, 인경이 만들어 낸 가상의 인물 김민정, 다이어트 여왕 준우승자에게 날아든 갑작스런 유명세, 셰프로서의 사망 선고에 가까운 신경성 식욕부진증까지 불과 몇 개월 만에 수많은 일들이 벌어진다. 처음에는 이 책을 스물여덟 여자의 혹독한 성장통을 다룬 소설이라 생각했다.

 마지막 11장을 읽고 나서 생각이 달라졌다. 한 여자의 성장통이라고 단정하기에 이 소설은 조금은 더 심오한 주제의식을 담고 있다. 복잡하게 얽혀있는 등장인물 개개인의 심리를 따라가는 동안 마주하게 되는 예기치 못한 진실. 서서히 드러나는 인간의 잔혹한 내면을 통해 오늘의 현실을 직시하게 만든다. 반전이라 할 수 있는 ‘잔혹한 진실’과 만나는 순간, 내 안에도 숨어있을지 모를 가장 근원적인 본성을 찾아보게 만든다. 시기, 질투, 음모 같은……. 그런 면에서『다이어트의 여왕』은 트렌드를 쫒는 소설을 가장해 누구든 쉽게 접근하게 만든 다음, 현재 우리가 안고 있는 시대의 문제점을 정면으로 직시하게 만드는 책이라 할 수 있다. ‘날씬한 것을 넘어 보다 메마르게’로 변질되어가는 이상 다이어트 열풍. 오늘날 건강을 위해 몸을 만들어가는 여성보다 아름다움을 위해(그것도 천편일률적인 말라깽이가 되기 위해) 몸을 혹사시키는 여성들이 갈수록 늘어가고 있다. 혼자만의 처절한 투쟁이라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개인으로 인해 결국 누군가의 인생이 송두리째 흔들린다면 분명 문제가 있을 터. 소설은 이런 현실에 대해 경고의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겉으로는 평온해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인간의 내면에 얼마나 위험한 독이 도사리고 있는지 섬뜩함마저 든다. 타인의 아름다움과 성공에 대한 질투가 한 사람의 혀를 마비시키고 기억력 감퇴를 동반한 끔찍한 거식증에 걸려들게 만든다. 그로 인해 그동안 쌓아올렸던 셰프로서의 자격이 박탁되고 삶은 온통 내리막길로 치닫게 된다. 시련을 극복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 육체적 정신적 고통의 터널에 갇혀 신음해야하는지 모른다. 이런 모든 고통의 시작이 ‘그녀’들의 세치 혀에서 시작된 것이라니.
 다이어트 여왕이 되기 위해 피땀 흘리며 노력하는 도전자들의 숭고한 열정을 미화하기보다 경쟁자를 물리쳐야 비로소 살아남을 수 있는 서바이벌 게임의 냉혹한 현실을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는 『다이어트의 여왕』. ‘공개적으로 타인을 비난’하는 것이 허용되는 비극의 산실을 들여다보는 동안 우리는 깨닫게 된다. 몸에서 살이 빠져 나가는 것보다 더 빠른 속도로 정신이 맥없이 빠져나가는 도전자들을 통해 인간의 잔인한 본성을.

발랄한 웃음 뒤에 숨겨진 의뭉스러운 미소를 보았다. 현재를 살아가는 자연스런 방어기제, 나 혹은 당신의 모습일지도 모를 그런 현실을 직시하게 된다. 단, 오해는 마시길. 이 책이 시종일관 무거운 주제의식을 드러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한 손에 들고 읽기에는 다소 방대한 분량이지만 순식간에 읽힌다. 한 마디로 재미있다. 자꾸만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지는 소설. 리뷰도 소설만큼 재미있게 쓰고 싶었으나 장황한 사족만 늘어놓은 것 같다. 아무쪼록 읽어보더라도 후회는 안할 만한 매력있는 소설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죽도록 책만 읽는
이권우 지음 / 연암서가 / 2009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디에서 살아갈 힘을 얻으시나요?
- 이권우, 『죽도록 책만 읽는』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원하는 것만 가려보고 들으려는 습성이 있다. 이것이 하나로 모아지면 개인적인 취향이 된다. 좋게 말하면 취향이고 살짝만 비틀어 놓으면 편협한 사고를 지닌 외골수로 오인받기 십상이다. 책 읽기에 대한 나의 취향은 어떨까. 한마디로 외골수에 가깝다. 소설과 에세이를 주로 읽는다. 간혹 자기계발서도 읽는다.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생각했다. 몸소 체험한 것보다 더 다양한 경험들을 책을 통해 얻어 왔다. 그 간접 경험들이 쌓이고 쌓여 내 사고의 전반을 이루어왔다. 그렇게 형성된 사고를 바탕으로 내 자신은 물론 타인과 사회를 판단해 왔던 것 같다. 상당히 제한적이고 위험한 발상, 이라는 사실을 이권우의『죽도록 책만 읽는』을 접하고 나서 깨닫게 되었다.

 『죽도록 책만 읽는』은 책만 읽고 싶어 회사를 그만둔 도서평론가 이권우가 써낸 서평집이다. 그간 읽어온 책들을 일곱 가지 주제로 분류해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 있다. ‘문학의 숲을 거닐다/참 사람의 향기에 취하다/인문의 바다에서 헤엄치다/무엇이 세상을 변화시키는가/생명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다/열정과 냉정 사이/희망을 읽고 쓰다’가 그것이다. 이미 목차에서 알 수 있듯 저자의 책읽기 범위는 제한이 없다. 다양하다 못해 방대하기까지 하다. 물론 그것 역시 개인적인 취향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가 고백한 것처럼 다양한 책읽기를 통해 ‘사고의 균형의식(p.198)’을 회복해 나간 것만은 확실하다. 그는 책을 통해 오늘의 현실을 직시하고 시대적 고민을 함께 나누려 하며 깊이 있는 성찰을 이끌어내려 노력한다. 그로인해 앞으로 나아갈 방향과 미래를 가늠해 볼 안목도 겸비하고 있는 듯하다.

 이 나라의 민주주의는 여럿이, 함께 하는 걸음에서 비롯되었다. 뜨거운 아스팔트를 밟으며 더 큰 자유와 더 많은 평등을 요구해왔지 않던가.(p.157)

 합리적 의사소통을 통해 사회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역서에서 서재필은 좌절했지만, 오늘 다시 그의 꿈을 주목해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p.160)


 이 글귀가 언제 완성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지금의 우리 현실을 그대로 반영한 것 같은 인상을 받았다. 각계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시국선언은 나와 상관없는 이야기가 아니다. 매일 뉴스에서 목격되고 있는 민주주의 후퇴에 대한 양상은 우리의 아픈 현실이며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지 고민하게 만든다. 그 해답이 책 속에 있다면 비약이 심하다 할 수도 있겠지만 역사를 담고 고증하는 책을 통해 조금의 실마리를 찾게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죽도록 책만 읽는』이 무거운 이야기만 다룬 책이냐면 그건 아니다. 가벼운 책읽기를 통해서 쉽게 공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이미 지나간 이야기, 현재 벌어지고 있는 이야기, 앞으로 일어날법한 이야기를 다룬 책을 통해 우리는 스스로를 위로하기도 한다. 때로는 절망도 하고 동기부여도 받는다. 종국에는 자신이 나아갈 방향을 가늠해 볼 수도 있다. 
 책은 저자 혼자만의 독백이 아니다. 독자들 속으로 들어가 끊임없이 작용한다. 상승효과를 얻기 위해서는 ‘허영심이나 경쟁심 또는 호기심 같은(p.198)’ 거품을 거둬내고 책을 읽어야 한다. 저자가 어느 시점에서 말했듯 나 역시 이런 사사로운 감정이 복합된 ‘거품 독서’를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자문해 보게 된다. 많은 시간을 들여 책을 읽는 이유를 생각해 보면 답은 간단하다. 담백하면서도 지혜로운 책읽기! 스스로를 바로 세우고 영혼을 골고루 살찌우게 하는 그런 책읽기를 해야 한다.

  ‘세상을 살아가는 힘이 현실에만 있지 않(p.28)'다는 저자의 생각에 동의한다. 때때로 살아갈 힘은 책 속에 은밀하게 숨어 우리가 알아봐주기를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것이 이권우가 말하는 책읽기의 목적 중 하나이며 내가 책을 읽고 또 읽고 싶은 이유 중 하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고산자 - 2009 제17회 대산문학상 수상작
박범신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대동여지도만을 남긴 채, 바람처럼 구름처럼 흔적도 없이
- 박범신,『고산자』를 읽고 



 김정호 하면 대동여지도, 대동여지도 하면 김정호가 떠오른다. 실은 이것밖에 없다. 김정호에 대한 생각은 자신의 두발로 국토 전역을 걸어 다니며 조선의 지도를 완성한 위대한 인물이라는 것에서 더 나아가지 않는다. 관심을 두지 않은 탓도 있거니와 역사적 고증이 거의 없는 인물이라는 점도 내 좁은 식견에 한 몫 한다. 어쩌면 ‘김정호’에 대해서는 평생 ‘대동여지도’외에는 모르고 살았을 것이다. 박범신 작가가 아니었다면.

 개인적으로 박범신 작가를 좋아한다. 그래서 주저 없이 선택한 책.『고산자』는 제목에서 이미 짐작할 수 있듯 김정호의 일대기를 그린 소설이다. 그가 언제 태어나 언제까지 살았는지, 고향이 어디인지, 어떤 과정으로 대동여지도를 완성하게 되었는지 객관적으로 확인할 길이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작가는 김정호에 대한 남다른 애정과 치열한 사명의식으로 침묵 속에 있던 그를 세상 밖으로 깨워낸 것이다.
 
 일단 소설은 대동여지도라는 대업을 이룬 인물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다는 것에서 출발하고 있는 듯하다. 지도는 한 나라의 영토를 결정짓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지도를 통해 국가의 안위는 물론 국제 관계 속에서의 여러 분쟁도 불식시킬 수 있다. 지금이야 유구한 역사를 거치는 동안 그 경계선이 명확해졌지만 김정호가 살았던 조선시대에만 해도 이권에 따라 그리거나 지우기를 번복했던 것 같다. 한 나라의 지도가 변화무쌍하게 변해가던 시점에 등장한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는 그 정밀함과 정확함이 최고 수준에 달한다(10리(2.5cm) 간격으로 점을 찍어 축척은 물론 거리를 직접 알려주므로 이용자에게 편리함을 제공한 지도라는 평가-해제 참고). 그런 대업을 이룬 인물에 대한 기록이 전무후무하다. 이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작가는 신중하게 고민했을 것이다. 그 고견의 결말이 마침내 소설『고산자』로 탄생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역사적 대업을 이룬 인물임에도 기록이 없다는 점에서 김정호는 지도 편찬 업무를 맡은 나라의 관료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지도를 완성하고자 하는 불굴의 의지와 동기만은 분명했을 것인데, 작가는 그것을 아버지의 허망한 죽음에서 찾았다. 나라를 부름을 받고 전장에 나갔다가 관아에서 나눠준 잘못된 지도 때문에 결국 목숨을 잃게 된 무고한 생명들. 그 생명들에 대한 수습과 보상조차 이뤄지지 않는 현실을 보며 어린 김정호는 백성을 위한 지도를 만들고자 결심한다.

 지도는 당연히 나라만이 소유할 수 있다는 편협한 생각 때문에 결국 아버지가 죽은 게 아니던가. 목판본 대동여지도로써, 온 백성이 이를 지녀 더 이상, 아버지 같은 억울한 죽음이 없도록 하자는 게 그의 오랜 꿈이다.(p.85)

 오늘날에도 차로 다니기 힘든 길, 차조차 통행이 불가능한 길을 김정호는 두 다리로 걷고 또 걸으며 지도를 완성해냈다. 그 우수성이 나라에서 만드는 여타 지도와 상이하게 차이를 보이는데도 나라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을 수 없었던 것은 김정호의 신분과 그의 공을 가로채려는 여러 이권이 개입되었기 때문인 듯하다. 다행인 것은 오랜 지기인 몇몇 관료들에 의해 지도 편찬에 필요한 자료와 자금을 일부 제공받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대동여지도는 조선전도 중 가장 큰 지도로서 전체 크기 세로 6,7m 가로 4.2m의 대형 지도이다. 대동여지도의 목판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총 11장(지도 25면), 숭실대학교 기독교박물관에 1장(2면)만이 전한다. 목판지도는 현재 국내외에 30여 질이 전한다.(p.350)   

 

 한국 고전 지도의 금자탑이라 칭송받는 대동여지도가 왜 이것 밖에 남아있지 않을까. 작가는 그 물음에 김정호를 둘러싼 고단한 삶으로 답한다. 아버지의 죽음에 침묵만 하고 있을 수 없었던 소년 김정호. 그로 인해 파면에 이른 현감과의 끈질긴 악연이 그를 떠돌이 생활로 내몰았다. 어느 한 시절 만났던 혜련 스님과의 사이에서 딸 순실이 태어났다. 오랜 세월 집을 비우는 사이 딸은 천주학을 믿게 되었고, 조정의 탄압이 시작되면서 종국에도 떠돌이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 대동여지도 몇 장만을 남긴 채 바람처럼 구름처럼 영원히 기록에 남지 않는 그런 인물이 되어버린 것이다.

 작가의 전작『촐라체』를 기억하는 독자라면『고산자』에서 축약된 내레이션을 듣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촐라체』는 ‘6박 7일’간의 촐라체 등반 상황을 세 등장인물의 교차된 시선으로 숨소리 하나까지 세밀하게 들려준다. 한마디로 생동감과 박진감이 넘친다. 반면 『고산자』는 김정호라는 사료가 미미한 인물에 대한 ‘일대기’를 다루다 보니 특징적인 사건 외에는 몇 줄의 설명으로 상황을 축약하고 있다. 지도 편찬을 위해 나라 곳곳을 답사하는 장면이 특히 그러한데 세세한 사족을 덧붙이는 것이 지나친 픽션을 조장하는 것이라 조심스러웠을 것이다. 그렇다고 시종일관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 진지함만을 전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의 인생 자체가 한 편의 드라마이듯 이 소설 역시 그런 위기와 클라이맥스가 등장한다.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어린 김정호가 죽음의 초입에서 만나게 된 동굴 속 여인에 관한 대목이다. 혜련 스님과의 인연으로 이어지는 이 숙명 같은 장면은『촐라체』에서도 등장한다. 죽음에 직면했던 영교가 크레바스 속에서 맞닥뜨린 어느 주검. 꺼져가는 혹은 다 꺼진 생명이 위험에 처한 또 다른 생명을 위해 모든 것을 내어주는 이러한 장면은 한 사람의 인생을 더욱 고귀하게 이끌어준다. 사명을 다해 살아야 함을 일깨워주는 큰 지침이 된다.

 오랜만에 묵직한 소설 한 편을 만났다. 대동여지도가 역사상 최고의 지도라는 것 외에 백성의 편의를 위해 기능적인 면 또한 고려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김정호를 둘러싼 역사적 소용돌이 속에서 마음이 내내 무겁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보여준 강건한 삶은 어떤 것에도 휘둘리지 않고 자신의 의지대로 굳건하게 살아야할 필요성을 되새기게 한다. 작가는 김정호를 떠나보내며 속내를 조심스럽게 내비쳤다. 그가 고증해 나갈 다음 인물이 누구일지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조정과 양반이 틀어쥔 강토를 골고루 백성에게 나눠주자는 것이고, 조선이라는 이름의 본뜻이 그러하듯, 강토를 세세히 밝혀 그곳에서 명줄을 잇고 잇는 사람살이를 새롭게 하고자 한 것뿐이다. 바른 지도가 있어 고루 백성들에게 나누었다면 아버지도 그렇게 죽지 않았을 것이고, 그의 평생이 풍진의 길로 나앉지 않았을 것이다. 땅의 흐름과 물의 길을 잘 몰라 떠도는 사람은 더 이상 없어야 한다. 그뿐이다.(p.245-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취하기에 부족하지 않은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9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그것은 아주 소중한 발견
- 에쿠니 가오리, 『취하기에 부족하지 않은』 



 ‘좋아한다’는 감정은 마음을 충만하게 만든다. 떠올리기만 해도 기분 좋아지는 것들. 모든 사람에게 경계가 없지만 지극히 개인적일 수 있는 것들. 아무나 소유할 수 있지만 누구도 특별하게 여기지 않는 것들. 그 중 어떤 대상을 유달리 좋아한다는 것은 은밀한 즐거움을 선사한다. 에쿠니 가오리는 이를 ‘취하기에 부족하지 않은’ 것이라 말한다.

 『취하기에 부족하지 않은』은 에쿠니 가오리가 지극히 좋아하는 60가지 대상을 기록한 에세이집이다. 말하자면, 에쿠니 가오리의 편애 리스트! 책에 실린 모든 것은 그녀만의 개인적인 취향이다. 동시에 그녀를 속속들이 채워주는 근원이자 그녀를 이루는 역사이기도 하다. 작고 사소하지만 늘 곁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것들. 그녀의 일부이자 전부인 모든 것이 책에 담겨 있다.

 어떤 것을 특별히 좋아하는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일단 좋아하기 시작하면 그것은 단순한 대상을 넘어 하나의 의미가 된다. 오래 전, 김춘수 시인이 말하지 않았던가.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라고. 어떤 대상을 어떤 의미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존재로 거듭난다는 사실을 에쿠리 가오리도 알고 있는 듯하다.

 욕조에 몸을 담그고 책을 읽거나 생각을 한다. 그래서 생각의 결과인 ‘결심’은 모두 욕조에서 이루어졌다. 소설의 제목과 결말, 나 자신의 행동까지- 여행을 떠날까, 결혼을 해야겠어, 이혼할까 봐, 아니 역시 이혼은 하지 말자- 모두 욕조에서 결정했다.(욕조, p.47)

 그런데, 바로 얼마 전, 중대한 발견을 했다. 핑크색을 보면 왠지 무턱대고 기뻐진다는 것이다.(……) 핑크색은 나를 기습적으로 공격하는 복병 같다. 어찌 된 일인지 그 색 앞에서, 나는 늘 무기력하게 움쩍달싹 못한다.(핑크색, p.111)

 그녀가 좋아하는 60가지 편애 리스트는 단순히 사물이나 현상을 나열한 것이 아니다. 하나하나 그녀의 경험과 추억이 녹아들어가 있다. 에쿠니 가오리만의 ‘의미’로 새롭게 태어난 것들인 셈이다. 그래서 더없이 특별하고 소중해 보인다. 
 
 이 책을 읽는다고 해서 벅찬 감동이나 환희가 밀려드는 것은 아니다. 대신 내가 좋아하는 것들에 관심을 기울여 보게 된다. 나도 모르는 사이, 나를 이루고 있는 ‘그것’들을 향해 마음을 열어 놓다 보면 내가 누구인지 자각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것은 아주 소중한 발견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