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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링크로스 84번지 (20주년 기념판 양장본)
헬렌 한프 지음, 이민아 옮김 / 궁리 / 2024년 10월
평점 :
채링크로스 84번지
(20주년 기념판 양장본)
저자 _ 헬렌 한프
출판 _ 궁리
"혹 채링크로스 가 84번지를
지나가게 되거든,
나 대신 입맞춤을 보내주겠어요?
제가 정말 큰 신세를 졌답니다."
클릭 한 번이면 손쉽게 책을 구할 수 있는 시대에 '종이 책'이 전해주는 가치와 향수를 건네주는 책을 만났습니다. 책마저도 아름다운 《채링크로스 84번지》.
이 책은 1949년에서 1969년까지 약 20년간 서점 직원과 어느 애서가가 주고받은 편지글을 모은 책입니다. 일종의 도서 주문서와 청구서에 해당하는데요, 짧은 서신들 속에는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다단한 감정과 인간적인 교류가 담겨 있습니다.
책을 구하려는 사람과 책을 구해주려는 사람이 책을 넘어 서로의 삶에 스며드는 과정을 아름답게 수놓은 책. 의도된 바 없는 팩트라는 사실이 읽는 이에게 더 큰 감동을 안겨주는 책. '사랑' 아니죠. '우정'입니다. 무려 20년간 서로의 주변 사람들까지 보듬어 나가는 이야기, 지금부터 살펴봐 드릴게요.
제가 절박하게 구하는 책들의 목록을 동봉합니다. 목록 중 깨끗하면서 한 권당 5달러가 넘지 않는 중고책이라면 어느 것이라도 구매 주문으로 여기고 발송해 주시겠습니까?
뉴욕에 사는 가난한 희곡 작가 헬렌 한프는 런던의 '희귀 고서점' 마크스 서점에 연락을 취합니다. 문학평론지에 실린 서점 광고를 본 후 원하는 희귀본을 구하기 위해서지요.
입어본 옷을 구매하듯 읽어본 책만 구매하는 이 작가는 소설이라면 질색이고요, 현실에 굳건하게 발붙인 사실적인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희곡 작가로서의 삶은 녹록지 않아 곤궁하게 살아가는 듯 보여요. 그럼에도 원하는 책을 손에 넣기 위해 뉴욕에서 런던까지 직접 편지를 보내는 열정을 20년간 이어갑니다.
책이 무사히 도착했어요. 스티븐슨은 너무 훌륭하여 제 누런 골동품 책장이 부끄러울 정도랍니다. 이 부드러운 고급 피지와 뽀얀 상앗빛 책장은 함부로 만지지도 못하겠고요. 미국 책들의 창백한 백지와 딱딱한 마분지 표지만 보아온 저로서는 책을 만지는 일이 이런 즐거움도 줄 수 있다는 것은 미처 몰랐답니다.
『채링크로스 84번지』 p.12
비슷한 판형
비슷한 종이
비슷한 디자인의 책들이
주를 이루는
요즘의 출판문화에서는
쉽게 상상이 가지 않아요.
헬렌 한프가 받아들었을
저 책이 어떤 모습일지!
그런데요
책을 읽다 보면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아름다운 고서들이
눈앞에 그려질 듯
신비로운 상상을 안겨주곤 해요.
편지를 읽고 있는 제 마음이 이럴진대
직접 주문하고
기다리는 여정은
얼마나 설레고 행복했을까요?
주문하면
24시간 내 책이 도착하는
지금은 도저히 느낄 수 없는
기다림의 애틋함이 책장 가득 수 놓여 있답니다.
저는 전 주인이 즐겨 읽던 대목이 이렇게 저절로 펼쳐지는 중고책이 참 좋아요. 해즐릿이 도착한 날 '나는 새 책 읽는 것이 싫다'는 구절이 펼쳐졌고, 저는 그 책을 소유했던 이름 모를 그이를 향해 '동지!'하고 외쳤답니다.
《채링크로스 84번지》 p.18
맞아요.
저도 그랬던 것 같아요.
책을 구매하면
슬쩍 슬쩍 책장을 넘겨보며
누군가 어떤 메시지를
남겨 놓지 않았을까 설레했었고
저 역시
구매한 날짜와 읽은 소감 등을
짧은 메모로 남겼던 기억이 있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중고책마저도
아무 흔적 없는 최상급만
구매하고 있고요
책에 따라서 최대한 흔적 없이
깨끗하게 읽으려 노력하고 있답니다.
아마도
우리나라 중고책 매매 정책에
완벽하게 길들여진 탓이겠지요.
그나마
소장하고 있는 오래된 책에서
그 옛날 저의 흔적을 찾아보는 것으로
위안을 얻을 따름입니다.
누군가
나와 같은 문장에서 오래 서성였을
그 시간을 상상해 볼 수 있다는 건
중고책만이 전해 줄 수 있는 향수니까요.
봄날도 다가오고 해서 연애시집 한 권을 주문합니다. 키츠나 셸리는 사양이고요, 넋두리 없이 사랑할 줄 아는 시인으로 부탁드려요. 와이엇이나 존슨 같은 시인으로 당신이 직접 판단해 주었으면 해요. 그냥 아담한 책이면 되겠는데, 이왕이면 바지 주머니에 꽂고 센트럴파크로 산책 나갈 만큼 작은 책이면 더 좋겠고요.
그러니까, 그냥 멍하니 앉아 있지만 말고, 뭔가를 좀 찾아보라고요! 그 서점이 어떻게 계속 돌아가는지 정말이지 알 수가 없군요.
《채링크로스 84번지》 p.23
책을 구해주지 않는다고 책망하는 편지를 보고 처음엔 아연실색했습니다.
책을 읽어가며 깨달았어요. 이건 그들만이 주고받을 수 있는 일종의 유머에 가까운 문장이라는걸. 우정의 깊이에 따라 스스럼없이 내뱉을 수 있는.
그나저나 바지 주머니에 책을 꽂고 센트럴파크로 산책을 나가다니요. 어디 없나 그런 책. 당장 한 권 들고 신천 강변에라도 나가고 싶어집니다.
당신의 수많은 자상한 선물에 과연 보답할 길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언젠가 영국 여행을 결심하신다면, 머물고 싶은 한 언제까지나 쓰실 수 있는 침대가 오크필드 코트 37호에 있다는 것뿐입니다. _ 모두의 기원을 담아 프랭크 도엘
『채링크로스 84번지』 p.76
이들이 편지를 주고받았던 그 시절, 아마도 영국은 식료품을 구하는 것이(미국보다) 녹록지 않았을 것으로 보입니다. 미국에 사는 헬렌 한프는 서점 가족들에게 실질적으로 필요할 만한 선물들을 종종 보내곤 했어요. 생활을 하고 책을 구매하는 것마저 여유롭지 않은 형편인데 말이지요.
달걀이 자주 등장해요. 그걸 대체할 만한 분말 달걀도 보이고요. 통조림 제품도 있고, 나일론 양말도 있어요. 그걸 받은 서점 가족들은 어땠을까요? 한프의 친절에 보답하고 싶어 어쩔 줄 몰라 보입니다.
책에는 서점 직원의 가족들까지 한프에게 보낸 편지를 수록하고 있어요. 그들이 얼마나 오랜 세월 서로의 마음을 헤아리고 보듬어 나갔는지 가늠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단순히 책을 구매하고 구해주는 사무적인 관계가 아니라는 사실.)
서신을 교환한지 20년의 세월이 흐르다 보니 그들에게는 많은 일들이 일어납니다. 간혹 누군가 죽음을 맞이하기도 하고요, 누군가는 어린아이에게 성인으로 성장하기도 합니다.
놀라워라. 이 책에 인생이 담겨 있었어요!
마지막 편지를
여기에 옮길까 고민하다
적지 않기로 합니다.
마지막 편지인 걸
모르고 읽어 내려가다
마지막 편지라는 걸 직감했고
저도 모르게 울컥했어요.
영국 문학 속의 영국을 찾으러
영국에 가고 싶어 했던 헬렌은
마침내 영국에 갈 수 있었을까요?
다정하게 주고받은 서신들이
여전히 채링크로스 84번가와 그 주변을
온기로 가득 채워주고 있겠지요.
서점 직원과
책을 구하려는
어느 애서가의 편지가
이토록 마음을 그득하게 채워줄 줄이야.
책은
서점은
사람과의 인연은
이런 것이군요.
마음과 마음이 하나로 이어지는
마법 같은 일들이 펼쳐지는 곳
채링크로스 84번지
진심을 담아
서로의 안부를 전하기
힘든 세상에서
채링크로스 84번지를 둘러싼
이 이야기는 더 빛이 납니다!
부디 이 책을 늦은 밤 홀로 있는 시간에 읽어주세요. (언제든 상관없이 오롯이 이 책만을 마주할 수 있는 그 시간에 읽어주세요.)
서점 주인과 책을 구하려는
어느 애서가의 사연을 넘어선 이야기
'편지'만이 전할 수 있는 기다림의 미학이, 책을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따스한 온기가, 책으로 맺어진 인연의 견고함이, 고단한 삶 속에서도 책을 놓지 않으려는 열정이 조용히 가슴을 두드립니다.
+
저는 지금 채링크로스 84번지 초록색 판형의 책을 구해보려 합니다.
이미 절판이 되었더라고요. 중고서점을 찾아봐야겠지요. 누군가 책에 메모를 남겨 중고 시장에 내놓을 리는 만무하니 어쩔 수 없이 습관처럼 최상~상 버전의 책을 구매하겠지요. 혹시라도 서점 직원이 미세한 메모를 놓쳤더라도 용서해 드릴게요.
누군가의 흔적을 원하는 애서가도 있다는 걸 우리나라 중고책 시장이 알아주면 좋겠어요. 혹시 알아요? 누군가의 메모가 적힌 중고책을 특별 등급으로 매겨 판매한다면, 그 나름대로 독서 문화를 견인하는 새로운 트렌드가 될지?
중고책 속 끄적임의 흔적을 인증하는 문화가 자리 잡는다면? 아날로그적 감성에 푹 빠질 준비되어 있는데? 가능할까요? 이 아이디어 나쁘지 않은 듯!
+ 출판사 협찬 도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