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산자 - 2009 제17회 대산문학상 수상작
박범신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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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여지도만을 남긴 채, 바람처럼 구름처럼 흔적도 없이
- 박범신,『고산자』를 읽고 



 김정호 하면 대동여지도, 대동여지도 하면 김정호가 떠오른다. 실은 이것밖에 없다. 김정호에 대한 생각은 자신의 두발로 국토 전역을 걸어 다니며 조선의 지도를 완성한 위대한 인물이라는 것에서 더 나아가지 않는다. 관심을 두지 않은 탓도 있거니와 역사적 고증이 거의 없는 인물이라는 점도 내 좁은 식견에 한 몫 한다. 어쩌면 ‘김정호’에 대해서는 평생 ‘대동여지도’외에는 모르고 살았을 것이다. 박범신 작가가 아니었다면.

 개인적으로 박범신 작가를 좋아한다. 그래서 주저 없이 선택한 책.『고산자』는 제목에서 이미 짐작할 수 있듯 김정호의 일대기를 그린 소설이다. 그가 언제 태어나 언제까지 살았는지, 고향이 어디인지, 어떤 과정으로 대동여지도를 완성하게 되었는지 객관적으로 확인할 길이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작가는 김정호에 대한 남다른 애정과 치열한 사명의식으로 침묵 속에 있던 그를 세상 밖으로 깨워낸 것이다.
 
 일단 소설은 대동여지도라는 대업을 이룬 인물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다는 것에서 출발하고 있는 듯하다. 지도는 한 나라의 영토를 결정짓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지도를 통해 국가의 안위는 물론 국제 관계 속에서의 여러 분쟁도 불식시킬 수 있다. 지금이야 유구한 역사를 거치는 동안 그 경계선이 명확해졌지만 김정호가 살았던 조선시대에만 해도 이권에 따라 그리거나 지우기를 번복했던 것 같다. 한 나라의 지도가 변화무쌍하게 변해가던 시점에 등장한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는 그 정밀함과 정확함이 최고 수준에 달한다(10리(2.5cm) 간격으로 점을 찍어 축척은 물론 거리를 직접 알려주므로 이용자에게 편리함을 제공한 지도라는 평가-해제 참고). 그런 대업을 이룬 인물에 대한 기록이 전무후무하다. 이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작가는 신중하게 고민했을 것이다. 그 고견의 결말이 마침내 소설『고산자』로 탄생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역사적 대업을 이룬 인물임에도 기록이 없다는 점에서 김정호는 지도 편찬 업무를 맡은 나라의 관료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지도를 완성하고자 하는 불굴의 의지와 동기만은 분명했을 것인데, 작가는 그것을 아버지의 허망한 죽음에서 찾았다. 나라를 부름을 받고 전장에 나갔다가 관아에서 나눠준 잘못된 지도 때문에 결국 목숨을 잃게 된 무고한 생명들. 그 생명들에 대한 수습과 보상조차 이뤄지지 않는 현실을 보며 어린 김정호는 백성을 위한 지도를 만들고자 결심한다.

 지도는 당연히 나라만이 소유할 수 있다는 편협한 생각 때문에 결국 아버지가 죽은 게 아니던가. 목판본 대동여지도로써, 온 백성이 이를 지녀 더 이상, 아버지 같은 억울한 죽음이 없도록 하자는 게 그의 오랜 꿈이다.(p.85)

 오늘날에도 차로 다니기 힘든 길, 차조차 통행이 불가능한 길을 김정호는 두 다리로 걷고 또 걸으며 지도를 완성해냈다. 그 우수성이 나라에서 만드는 여타 지도와 상이하게 차이를 보이는데도 나라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을 수 없었던 것은 김정호의 신분과 그의 공을 가로채려는 여러 이권이 개입되었기 때문인 듯하다. 다행인 것은 오랜 지기인 몇몇 관료들에 의해 지도 편찬에 필요한 자료와 자금을 일부 제공받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대동여지도는 조선전도 중 가장 큰 지도로서 전체 크기 세로 6,7m 가로 4.2m의 대형 지도이다. 대동여지도의 목판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총 11장(지도 25면), 숭실대학교 기독교박물관에 1장(2면)만이 전한다. 목판지도는 현재 국내외에 30여 질이 전한다.(p.350)   

 

 한국 고전 지도의 금자탑이라 칭송받는 대동여지도가 왜 이것 밖에 남아있지 않을까. 작가는 그 물음에 김정호를 둘러싼 고단한 삶으로 답한다. 아버지의 죽음에 침묵만 하고 있을 수 없었던 소년 김정호. 그로 인해 파면에 이른 현감과의 끈질긴 악연이 그를 떠돌이 생활로 내몰았다. 어느 한 시절 만났던 혜련 스님과의 사이에서 딸 순실이 태어났다. 오랜 세월 집을 비우는 사이 딸은 천주학을 믿게 되었고, 조정의 탄압이 시작되면서 종국에도 떠돌이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 대동여지도 몇 장만을 남긴 채 바람처럼 구름처럼 영원히 기록에 남지 않는 그런 인물이 되어버린 것이다.

 작가의 전작『촐라체』를 기억하는 독자라면『고산자』에서 축약된 내레이션을 듣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촐라체』는 ‘6박 7일’간의 촐라체 등반 상황을 세 등장인물의 교차된 시선으로 숨소리 하나까지 세밀하게 들려준다. 한마디로 생동감과 박진감이 넘친다. 반면 『고산자』는 김정호라는 사료가 미미한 인물에 대한 ‘일대기’를 다루다 보니 특징적인 사건 외에는 몇 줄의 설명으로 상황을 축약하고 있다. 지도 편찬을 위해 나라 곳곳을 답사하는 장면이 특히 그러한데 세세한 사족을 덧붙이는 것이 지나친 픽션을 조장하는 것이라 조심스러웠을 것이다. 그렇다고 시종일관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 진지함만을 전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의 인생 자체가 한 편의 드라마이듯 이 소설 역시 그런 위기와 클라이맥스가 등장한다.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어린 김정호가 죽음의 초입에서 만나게 된 동굴 속 여인에 관한 대목이다. 혜련 스님과의 인연으로 이어지는 이 숙명 같은 장면은『촐라체』에서도 등장한다. 죽음에 직면했던 영교가 크레바스 속에서 맞닥뜨린 어느 주검. 꺼져가는 혹은 다 꺼진 생명이 위험에 처한 또 다른 생명을 위해 모든 것을 내어주는 이러한 장면은 한 사람의 인생을 더욱 고귀하게 이끌어준다. 사명을 다해 살아야 함을 일깨워주는 큰 지침이 된다.

 오랜만에 묵직한 소설 한 편을 만났다. 대동여지도가 역사상 최고의 지도라는 것 외에 백성의 편의를 위해 기능적인 면 또한 고려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김정호를 둘러싼 역사적 소용돌이 속에서 마음이 내내 무겁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보여준 강건한 삶은 어떤 것에도 휘둘리지 않고 자신의 의지대로 굳건하게 살아야할 필요성을 되새기게 한다. 작가는 김정호를 떠나보내며 속내를 조심스럽게 내비쳤다. 그가 고증해 나갈 다음 인물이 누구일지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조정과 양반이 틀어쥔 강토를 골고루 백성에게 나눠주자는 것이고, 조선이라는 이름의 본뜻이 그러하듯, 강토를 세세히 밝혀 그곳에서 명줄을 잇고 잇는 사람살이를 새롭게 하고자 한 것뿐이다. 바른 지도가 있어 고루 백성들에게 나누었다면 아버지도 그렇게 죽지 않았을 것이고, 그의 평생이 풍진의 길로 나앉지 않았을 것이다. 땅의 흐름과 물의 길을 잘 몰라 떠도는 사람은 더 이상 없어야 한다. 그뿐이다.(p.2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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