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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하기에 부족하지 않은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9년 3월
평점 :
그것은 아주 소중한 발견
- 에쿠니 가오리, 『취하기에 부족하지 않은』

‘좋아한다’는 감정은 마음을 충만하게 만든다. 떠올리기만 해도 기분 좋아지는 것들. 모든 사람에게 경계가 없지만 지극히 개인적일 수 있는 것들. 아무나 소유할 수 있지만 누구도 특별하게 여기지 않는 것들. 그 중 어떤 대상을 유달리 좋아한다는 것은 은밀한 즐거움을 선사한다. 에쿠니 가오리는 이를 ‘취하기에 부족하지 않은’ 것이라 말한다.
『취하기에 부족하지 않은』은 에쿠니 가오리가 지극히 좋아하는 60가지 대상을 기록한 에세이집이다. 말하자면, 에쿠니 가오리의 편애 리스트! 책에 실린 모든 것은 그녀만의 개인적인 취향이다. 동시에 그녀를 속속들이 채워주는 근원이자 그녀를 이루는 역사이기도 하다. 작고 사소하지만 늘 곁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것들. 그녀의 일부이자 전부인 모든 것이 책에 담겨 있다.
어떤 것을 특별히 좋아하는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일단 좋아하기 시작하면 그것은 단순한 대상을 넘어 하나의 의미가 된다. 오래 전, 김춘수 시인이 말하지 않았던가.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라고. 어떤 대상을 어떤 의미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존재로 거듭난다는 사실을 에쿠리 가오리도 알고 있는 듯하다.
욕조에 몸을 담그고 책을 읽거나 생각을 한다. 그래서 생각의 결과인 ‘결심’은 모두 욕조에서 이루어졌다. 소설의 제목과 결말, 나 자신의 행동까지- 여행을 떠날까, 결혼을 해야겠어, 이혼할까 봐, 아니 역시 이혼은 하지 말자- 모두 욕조에서 결정했다.(욕조, p.47)
그런데, 바로 얼마 전, 중대한 발견을 했다. 핑크색을 보면 왠지 무턱대고 기뻐진다는 것이다.(……) 핑크색은 나를 기습적으로 공격하는 복병 같다. 어찌 된 일인지 그 색 앞에서, 나는 늘 무기력하게 움쩍달싹 못한다.(핑크색, p.111)
그녀가 좋아하는 60가지 편애 리스트는 단순히 사물이나 현상을 나열한 것이 아니다. 하나하나 그녀의 경험과 추억이 녹아들어가 있다. 에쿠니 가오리만의 ‘의미’로 새롭게 태어난 것들인 셈이다. 그래서 더없이 특별하고 소중해 보인다.
이 책을 읽는다고 해서 벅찬 감동이나 환희가 밀려드는 것은 아니다. 대신 내가 좋아하는 것들에 관심을 기울여 보게 된다. 나도 모르는 사이, 나를 이루고 있는 ‘그것’들을 향해 마음을 열어 놓다 보면 내가 누구인지 자각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것은 아주 소중한 발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