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랑한 밤길
공선옥 지음 / 창비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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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과 희망 사이, 용기를 발견하다
- [명랑한 밤길]을 읽고
 

 절망과 희망 사이, 그 어디쯤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가고자하는 용기가 자리하고 있다. 그 용기를 끄집어내 희망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건 오로지 각자의 몫이다. 우리는 종종 이 같은 사실을 망각한다. 자신을 뒤덮어오는 삶의 무게에 허덕이며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도 희망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명랑한 밤길]에는 누가 봐도 녹녹할 게 하나 없는 인생들이 등장한다. 한 번쯤 악다구니 치고 싶은 사연을 간직한 사람들과 악다구니조차 마음 놓고 칠 수 없는 사람들이 바로 주인공이다. 우리는 이들을 흔히 ‘사회적 약자’로 분류한다. 가진 것이 별로 없고, 평범하게 사는 것조차 어려운 사람들. 어느 한 쪽으로 기울어진 채 불균형한 삶을 살아가는 그들의 공통점은 하나쯤 가슴 아픈 사연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이다.
 작가를 꿈꾸지만 생활이 우선인 문희가 그렇고, 이국에서 남편을 잃고 홀로 된 도넛이 그렇고, 공원 잔디밭에 몰래 토마토를 심는 노숙자가 그렇다. 한데, 이들이 살아가는 모습은 결코 허망하지 않다. 팍팍한 인생에도 나름의 생존 법칙은 존재하는 법. 그들은 남들이 하찮고 사소하게 여길지라도 저마다의 희망을 일구며 살아간다. 힘에 겨워도 앞으로 한 발 내디딜 줄 아는 사람들인 것이다. 비록 앞이 보이지 않는 슬픔 속에 허덕이고 있을 때일지라도.
 온 몸이 진저리 쳐질 만큼 슬픔에 녹아들어도 자기가 울어야 할 때를 아는 영희의 슬픔은 고단하다. 졸지에 남편을 잃고 속절없이 울음을 토해내는 인자의 슬픔은 외로운 메아리가 되어 가을 산천을 가득 메운다. 제발 떠나달라고 남편의 공공연한 비밀이 된 여자 기화 앞에서 눈물 삼킨 분노도 쏟아낸다. 울음! 끝없이 터져 나오는 주체할 수 없는 울음, 막막하고도 기막힌 울음. 혹은 민망한 울음, 출처 없는 울음일지라도 울기 시작한 다음에는 모두 쏟아내야 한다. 다 울고 나면 속이 후련해진다. 슬픔의 밑바닥까지 모두 비워내야 살아갈 힘이 생긴다. 마른 울음까지 모두 걷어 내고 나면 살아야 할 이유들이 눈에 들어온다. 힘껏 울어 새롭게 살아갈 힘을 얻으라고 [명랑한 밤길]은 말해주고 있다.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은 잃을 것도 별로 없다. 반대로 지켜야 할 것, 꼭 지켜내야 하는 것이 있다. 하나를 잃으면 전부를 잃는 것과 같은 것, 바로 가족이다. 가족은 곧 나를 대변하는 것과 다름없기에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내야 한다. 가족은 내가 누구인지 말해주며, 나를 바로 세울 길이기 때문이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굵은 빗속에서 달아올랐던 몸을 식히며 가족에게로의 귀가를 서두른다. 가벼운 일탈조차 스스로 허락하지 않은 것은 가족이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버려졌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버려졌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또 다른 한 명, 엄마의 얼굴이 떠올라 정신이 번쩍 든다. 멸시와 경멸의 대상으로 여겼던 외국인 노동자가 희망가를 부른다. 내가 미처 보지 못한 어둠 속의 달을 볼 줄 아는 그들이 어찌 나와 다른 부류의 사람들이겠는가? 그들처럼 희망가를 부르며 명랑하게 밤길을 헤쳐 엄마에게로 간다.
 달은 그대로 있는데 비가 올 뿐인데, 달은 빗속에 숨어(p.194) 있을 뿐인데,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우리는 달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달을 볼 수 없는 추석날 밤에는 소원조차 빌지 않는다. 어디 하늘에만 구름이 있겠는가. 마음에 한 가득 먹구름이 몰려오면 갈피를 잡지 못한다. 무엇을 위해 살고 무엇을 바라며 살고 무엇을 하며 사는지 도무지 방향이 잡히지 않는다. 그래도 [명랑한 밤길]에 나오는 주인공들처럼 돌아갈 곳을 알고 있다면 흔들렸다가도 다시 중심을 잡을 수가 있다. 자신의 위치를 망각하지 않는다는 것은 얼마나 고맙고 또 감사한 일인지!

 공선옥 작가를 통해 나는 소외의 밑바닥까지 가로질러 내려가 보았다. 그 속에서 내가 만나게 된 것은 절망이 아닌 ‘희망’이다. 희망을 말할 줄 아는 ‘용기’있는 가슴이다. 가진 것이 많은 사람은 욕망을 품고 살지만 가진 것이 얼마 없는 사람은 희망을 품고 산다. 희망을 발견하는 길은 멀지 않다. 우리 눈이 가장 먼저 닿는 가족, 이웃들 곁에 소소한 희망이 떠다니고 있다. 그것을 내 것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추운 겨울에만 몸과 마음이 움츠러드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타인이 무심코 던진 말 한마디, 사소한 행동 하나에 시시각각 얼어붙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 또한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인 셈이다. 남을 나와 다르게 바라보는 편견이 얼마나 많은 가슴에 생채기를 내는지 되돌아보게 된다. 마음에 상처가 생기고 아물기를 반복하면 처음보다 더 단단해질 것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 상처에 단련된 몸과 마음은 세상사 모든 희로애락에 무뎌질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희망을 품고 살아야 한다. 미역국조차 삼키지 못한 열다섯 살의 생일을 훌훌 털어버리고, 나를 낳고 미역국도 먹지 못했다는 엄마의 한 맺힌 지난날을 날려버리고, 엄마에게 동생을 낳아달라고 미역을 사러 가는 ‘악아’처럼 사랑으로 보듬을 수 있는 희망을 품고 살아야 한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인생에도 언젠가는 볕들 날이 있다. 그 한 줄기 빛을 발견하기 위해서라도 악착같이 살아야 한다. 악착같은 인생을 사는 나를 그들을 사랑해야 한다. 지긋지긋한 인생일지라도 그래도 사는 게 더 나은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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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에게 가는 길
밥 그린 지음, 강주헌 옮김 / 푸른숲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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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추억을 산책하는 동안에

 겨울의 한 가운데 들어서면 종종 매서운 한파가 몰아쳐 병약한 강줄기 어딘가를 시작으로 강 전체를 꽁꽁 얼어붙게 만들 때가 있다. 작은 돌팔매질 하나에 쉽게 금이 가는가 하면, 어떠한 물리적 충격에도 좀처럼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얼어붙은 겨울 강. 세상이 아무리 급변해도 얼음 아래 흐르는 물은 제 갈 길을 한시도 쉬어 본 적이 없다. 모진 풍파가 얼음 위에서 잦아드니 오히려 여유롭고 온화한 표정이다. 멈춰있는 듯 소리 없이 흐르는 얼음 아래 세상. 우리의 마음도 꼭 이랬으면 좋겠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저마다의 인생에서 모질고 힘든 시기를 지나게 된다. 세월에 휘둘리는 동안 생각지 못한 방향으로 변해갈지도 모른다. 어린 시절, ‘나는 저런 어른이 되지 말아야지.’ 다짐하던 어른의 모습과 닮아 있을 수도 있다.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마음 한 자리는 늘 깊고 고요하게 비워두고 싶다. 삶에 지쳐 한 번씩 뒤돌아보면 가만히 지켜보고 있을 본연의 자신과 마주하기를 바란다. 궂은 날씨에도 한 치의 망설임 없이 흘러가는 강물의 내공을 배우고 싶다.

 [친구에게 가는 길]에는 고즈넉한 산사를 걷듯 찬찬히 추억을 되짚어가는 두 남자가 등장한다. 다섯 살 때 처음 만나 친구의 연을 맺은 지 어느 덧 오십 해를 넘긴 밥과 잭. 쉰여섯 두 남자의 지칠 줄 모르는 산책은 흐르는 강물처럼 고요하고 잔잔하게 이어진다. 떠나야할 시간이 정해져 있는 잭은 얼음 아래 흐르는 강물과 닮아있다. 자신의 생이 다해가는 순간에도 남아서 생을 이어갈 부인과 딸을 위해 손에서 일을 놓지 않는다. 아무 일 없다는 듯 평소 모습 그대로 마지막 날까지 살아가기를 바란다. 절망을 선언하는 의사들 앞에서 매번 희망을 꿈꾸지만 절규도 보챔도 없다. 오직 어제와 같은 오늘을 살아갈 뿐이다. 암이 몸속으로 퍼져가는 속도에 따라 눈에 띄게 노쇠해져 가지만 그의 바람대로 생활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산책을 하고, 전화로 거래를 성사시키고, 친구들과 자주 가던 레스토랑에서 즐거운 한 때를 보낸다.

 이 책에는 반전이 숨어있지 않다. 큰 위기나 작은 변화도 없다. 시종일관 잔잔한 일상과 소소한 추억이 이어진다. 최대의 위기라 할 수 있는 잭의 죽음을 이미 서두에 밝혀두었으므로 독자는 책을 읽는 동안 슬픔을 은연중에 받아들이게 된다. 불안 불안하지만 어느 덧 고통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위기가 없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순간순간이 위기인지도 모른다. 잭의 주변 인물들은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언제나 노심초사한다. 안부를 확인하는 순간에만 잠시 마음을 놓을 뿐이다. 현실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주인공만이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을 평온한 일상으로 바꾸어 놓고 있다.
 ‘베프(베스트 프렌드)’ 혹은 ‘절친(절친한 친구)’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잭과 밥 외에 척, 앨런, 댄이 등장한다. 일명 ABCDJ, 말하자면 이들은 오총사다. 사회에 뿌리를 내리고 가정을 꾸려가는 동안 각자의 위치와 생활은 조금씩 달라졌다. 만나는 사람과 하는 일에서 공통점을 찾을 수는 없지만 그들에겐 ‘추억’이라는 끈끈한 매개체가 있다. 예민한 감성을 주고받으며 꿈을 키웠던 시절의 우정이란 찰나에 굳어져 끝끝내 떨어지지 않는 순간접착제처럼 강력하다. 시간이 갈수록 더 견고해지는 우정. 사람은 이 ‘우정’에 기대어 한 평생 살아가는지도 모르겠다. 

 “오늘 아침 첫 비행기를 탔어.” 전화도 없이, 마중을 나오라는 말도 없이 시카고행 비행기를 타고 날아왔던 것이다. 그가 다시 말했다. “자네가 아무도 만나고 싶어 하지 않으리란 걸 알아. 상관없네. 방금 호텔에 들어왔어. 계속 여기 있을 테니까 내가 자넬 위해 할 일이 있다면 언제라도 연락하게. 네가 원하면 어떤 짓이라도 할게. 죽은 듯이 있으라면 그렇게 하겠어, 여하튼 자네가 연락할 때까지 여기 있겠네.”(p.102)

 아내와 사별하고 크나큰 절망에 빠져 있는 밥을 위해 잭이 찾아왔다. 아무런 연락도 없이 생업조차 미뤄둔 채, 도움이 필요한 순간 언제라도 달려갈 수 있는 거리에 와 준 것이다. 마음이 심하게 요동쳤다. 시계 초침 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것 같은 이들의 잔잔한 우정 어디쯤, 이렇게 마음을 훑고 지나가는 한 때가 존재한다. 이제, 밥은 그 옛날 잭이 그랬듯 잭이 자신을 필요로 할 때 언제라도 달려갈 수 있는 거리에서 잭을 지켜주려 한다.

 추억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은 얼마나 잔인한 일인가. 암 선고를 받은 남자와 그 남자를 지켜주는 네 명의 친구들. 이들의 우정이야기는 봄 햇살처럼 나른하고 포근하다. 겨우내 언 땅을 뚫고 올라오는 새싹을 지켜 본 것처럼 경이로움과 애잔함이 마음에 들어찬다. 이제 추억으로밖에는 추억할 수 없는 시간들. 책을 읽을 때보다 책장을 덮고 난 뒤 마음이 더 저릿해져 온다. 입술을 지그시 깨물어 본다. 어느 틈엔가 고통이 밀려온다. 지긋한 아픔. 사랑하는 친구를 떠나보내는 일이란 이렇듯 녹록치 않다.

 하늘 아래 당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는 친구가 있다면 당신은 이미 충분히 행복한 사람이다. 내가 앞서건 그가 앞서건 함께 나눌 수 있는 추억이 있다면 이별의 순간이 마냥 슬프지만은 않을 것이다. 떠올릴 수 있는 추억이 얼마 없다면 지금 당장 친구와의 시간을 가져보길 바란다. 오늘, 내일, 언제가 마지막이 될지 알 수 없는 것이 우리들 인생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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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마음을 사로잡는 스무 가지 플롯
로널드 B.토비아스 지음, 김석만 옮김 / 풀빛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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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롯, 명작을 만들다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결코 잊을 수 없는 명장면과 명대사가 있다. 마치 내 일 인양 감정이 이입되어 주인공과 함께 희로애락을 경험하기도 한다. 사람들은 누구나 저마다의 인생에서 최고라 말할 수 있는 소설이나 영화 한 편 쯤은 간직한 채 살아간다. 스스로를 위로했듯 비슷한 처지의 타인을 위로하기 위해 추천해 주기도 하고, 때로는 입에 침이 마르도록 찬사를 쏟아내기도 한다. 이렇게 독자나 관객으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구전광고를 하게 만드는 원동력은 무엇일까? 모험이건, 복수건, 사랑이건 장르는 상관없다. 분명한 것은 이야기가 사람들의 마음속으로 완벽하게 파고들었다는 것이다. 경험, 지식, 생활환경 등 모든 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비슷한 감정을 느끼도록 만드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사람들은 어떤 작품에 환호하고 어떤 작품에 감동을 받는 것일까? 한 마디로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방법은 분명히 존재한다. 바로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는 스무가지 플롯]안에 그 해답이 있다.

 이 책은 작가를 꿈꾸거나 글과 관련된 직업을 갖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매우 유용한 책이다. 독자나 관객의 입장이라면 작품을 보고 감동을 받았거나 혹은 실망했던 이유를 알아차리게 도와줄 것이다. 제 1부에서는 플롯을 이론적으로 정리하였고, 제 2부에서는 가장 성공적인 플롯의 패턴 스무 가지를 소개하고 있다. 플롯을 이해하는 것은 창작의 첫걸음이다. 플롯을 잘 알고 활용해야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있다. 

 작가는 ‘추구, 모험, 추적, 구출, 탈출, 복수, 수수께끼, 라이벌, 희생자, 유혹, 변신, 변모, 성숙, 사랑, 금지된 사랑, 희생, 발견, 지독한 행위’라는 스무 가지 플롯을 소개하고 있다. 각 플롯별로 구체적인 작품을 예로 들어 설명하고 있어 이해하기 수월하다. 흔히 알고 있는 감독의 영화나 유명한 작가의 고전소설이 실례로 자주 등장한다. 흥미로운 것은 작품의 내용을 전혀 모르더라도 각 플롯에 맞게 요약 설명한 부분을 읽다보면 작품 전체의 느낌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플롯을 이해하기 위해 작품을 예로 들었는데 작품까지 보고 싶게 만드는 묘한 매력을 지닌 책이다. 이 책에서 정의한 플롯을 좀 더 공부해 보고 싶다면 작가가 소개한 책이나 영화를 보는 것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플롯 당 예로 든 몇 편의 작품을 살펴본다면 플롯을 보다 정확하게 이해하고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수많은 작품들이 예로 등장하다 보니 일반적인 이론서보다 지루하지 않다. 오히려 간략 간략하게 묘사된 작품을 보면 감질이 날 정도다. 각 플롯마다 마지막에 점검사항을 넣어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둔 것도 이 책의 장점이다. 공부하는 기분으로 중요 부분에는 밑줄을 긋고 노트에 따로 정리를 해 두었다. 작법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이론서는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하지만 이론서보다 더 값진 것은 좋은 작품을 많이 만나는 것이라 생각한다. 시간이 나면 플롯별로 소개된 작품들을 목록으로 만들어 찬찬히 읽어 봐야겠다.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는 스무가지 플롯]을 읽다보면 ‘아, 그 소설, 그 영화!’ 라고 말할 수 있는 작품을 여럿 만나게 된다. 그리고 깨닫게 된다. 위대한 작품은 저마다의 플롯 안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바로 이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스무 가지 플롯 안에서 대부분의 이야기는 완성된다. 물론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작가 스스로 플롯을 꾸며내라. 플롯은 끊임없이 변하는 공작용 점토와도 같다(p.360)." "무엇을 쓰든지 어떻게 쓰든지 플롯의 노예는 되지 말아야 한다. 작가는 플롯을 위해서 존재하지 않는다. 플롯이 작가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다. 플롯이 작가를 돕게 하라(p.362)."라고.

 글은 쓰고 싶은데 방법을 몰라 막막했던 분들이라면 이 책을 읽어 보길 바란다. 영감에 따라 무작정 써내려가도 좋은 작품이 나올 수 있지만, 누구나 영감을 얻는 천재는 아니다. 가야할 방향을 안다면 잘못된 길에 들어설 확률도 그만큼 낮아진다.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는 작품은 그럴 수밖에 없는 필연적 장치가 숨어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 책에 그 방법들이 있다. 활용하고 안 하고는 각자의 선택사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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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강머리 앤 - 빨강머리 앤 100주년 공식 기념판
루시 M. 몽고메리 지음, 강주헌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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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복을 전해주는 특별한 아이

 잘 기억나진 않지만, 나에게도 어린 시절이 있었다. 큰 걱정 없이 하루하루가 즐겁기만 했을 어린 날의 한 때. 떠올려보면 그 시절의 친구들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친구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무슨 이야기를 하며 무슨 일들을 벌이며 지냈는지 가물 가물거린다. 그래도, 잠시만이라도, 어린 날 나와 함께 했던 친구들을 생각하면 미소가 지어진다. 아무것도 모르기에 욕심낼 것도 질투를 느낄 틈도 없었으리라. 어린 날의 추억을 떠올리다 보면 마음이 말갛게 게이는 느낌이다. 구름 한 점 없이 높고 푸른 가을 하늘처럼.

 얼마 만에 앤을 만나는 것인지 기억나질 않는다. 내가 앤을 만나기는 했었던가? 희미해진 추억, 어느 언저리에서 다시 만난 앤은 설렘 그 자체다. 어린 시절, 나는 앤과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고 어떤 공상을 주고받았는지 도무지 떠오르지 않지만 앤은 그렇게 내 유년의 한 부분과 맞닿아 있다.

 빼빼 마른 몸에 도드라진 주근깨, 무엇보다 눈에 띄는 빨강머리는 ‘앤’을 무심코 지나칠 수 없게 만든다. 앤이 이렇게 수다스러웠었나? 잠시 고개를 갸웃하다 금방 익숙해진다. 마치 초등학교 때 전학 간 친구를 십 여 년이 지난 어느 날 우연히 만난 것처럼, 첫 대면은 낯설지만 곧 편안해지는 느낌이랄까! 앤의 지칠 줄 모르는 수다에 기분이 좋아진다. 시끄럽지도 않다. 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잠잠하던 마음이 설레기 시작한다. 분명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는데 내 눈에 보이지 않는 풍경까지 세세하게 그려내 듯 들려준다. 조금 더 파릇하고, 조금 더 경쾌하고, 조금 더 자연스러운 새로운 세상을. 모난 구석이라곤 없다. 두려움도 없고, 상상도 끝이 없다. 앤에게 이 세상은, 오늘은, 환희 그 자체인 것이다.

 때로는 원치 않는 인연도 받아들여야 할 때가 있다. 상상할 거리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고아원을 벗어나 상상만 해도 기분 좋아지는 초록색 지붕 집으로 앤의 삶이 옮겨지던 날. 매슈 커스버트와 마릴라 커스버트 남매가 입양을 원한 건 ‘앤’과 같은 여자 아이가 아니라, 일을 도와 줄 남자아이였음을 알게 된다. 열 한 해, 길지 않은 인생을 살아오면서 쉬운 게 하나도 없었던 앤 셜리. 온 몸에 실수 장전, 과도한 감정 남발, 지나친 상상력을 지녔지만 동시에 오묘한 매력을 소유한 앤은 결국 정교하게 닫혀있던 마릴라의 마음을 열게 된다. 원치 않는 인연도 ‘인연’인 법. 이렇게 그들의 동거가 시작된다.

 보이는 모든 것에 가장 어울릴 만한 이름을 새롭게 붙여주는 앤은 타고난 이야기꾼이다. 가만히 있는 사물에게 말걸기, 모든 상황을 긍정으로 반전시키는 상상력, 공부에 대한 남다른 열정은 앤의 장점이다. 한 번 이야기를 시작하면 끝이 없다. 분명 책을 읽고 있는데도 앤의 이야기가 바로 옆에서 들리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그 수다스러움에 귀가 윙윙 거리다가도 잠시라도 조용해지면 곧바로 앤의 목소리가 그리워진다. 아, 이 중독성 강한 소녀 몽상가에게서 나는 벗어날 수 있을까!
 세상으로부터 받은 상처를 마음에 새기는 대신 곪아갈 그 자리에 상상력을 동원해 즐거움으로 가득 채운다. 앤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어느 순간 숨이 턱까지 차오른다. 그래도 입가에 미소를 머금게 된다면 당신도 이미 ‘앤의 폐인’ 일지 모른다.

 초록색 지붕 집을 둘러싼 자연 경관은 마치 그림 속 풍경과 같다. 계절에 따라 미세하게 변하는 작은 움직임 하나까지 놓치지 않고 앤의 눈을 통해 그대로 펼쳐진다. 앤의 상상력에 날개를 달아준 것은 바로 초록색 지붕 집을 중심으로 펼쳐진 캐번디시의 수려한 자연 경관 이다. 숲 속 작은 동물들을 바라보며 어디든 내달릴 수 있고, 꽃과 나무속을 매일 거닐곤 하는데 어떻게 마음이 열리지 않겠는가. 그 마음가득 상상이 차올라 앤의 감성은 한없이 풍성해진다. 앤의 유년 시절을 벅차게 만들어준 대자연이 한없이 부럽다. 앞으로 자라날 우리의 아이들에게 자연의 경이로움 대신 도시의 팍팍함을 안겨줘야 한다는 사실이 미안하지만!

 앤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가장 큰 이유는 가끔 대책 없을 정도로 ‘긍정’을 타고 났다는데 있다. 앤에게 하루하루는 진실하고, 절실하며, 축복으로 가득하다. 아니 앤 스스로가 그런 날들로 만들어 버린다. 또 매사에 얼마나 열심인지. 이야기도 공부도 앤을 따라올 사람이 없을 정도다. 그녀만의 긍정과 해피 바이러스를 만나 얼마나 많은 사람의 유년이 행복했을지, 앞으로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앤을 통해 밝은 마음을 간직하게 될 지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벅차오른다. 원망과 고통이 채워야 할 자리를 온통 긍정으로 무장한 앤 셜리. 누구라도 앤을 만나면 이 소녀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가녀린 몸의 작은 소녀 한 명이 세상에 지친 어른의 마음까지 다독여주다니 그 재주 한 번 부럽다! 수줍은 많지만 극진한 사랑을 보여준 매슈 커스버트와 앤의 바른 길을 위해 늘 노심초사하며 감정을 절제했던 마릴라 커스버트에게도 ‘앤’을 사랑스런 아이로 키워준 데 감사를 전하고 싶다.
 
 앤의 입을 통해 쏟아지는 이야기와 앤의 눈을 통해 펼쳐지는 풍경은 정말이지 사랑스럽다. [빨강머리 앤]이 100년이 넘도록 사랑 받는 비결은 루시M. 몽고메리가 그리고자 했던 세상이 앤을 통해 모든 사람의 마음에 가닿았기 때문이 아닐까. 누구나 마음에 한 자리쯤 품고 있을 고향, 영원히 변하지 않기를 바라는 그 낙원 같은 고향이 [빨강머리 앤]을 펼치면 어김없이 나타난다. 지치고 힘들면 어디서든 어깨를 내어주는 단짝 친구처럼 다정한 모습으로. 그 속에 한결같은 모습의 앤이 있다. 누구보다도 희망차게 삶을 살아내는 경쾌하고 명민한 작은 아이 한 명이 늘 우리를 반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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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강머리 앤이 어렸을 적에 - 빨강머리 앤 100주년 공식 기념판
버지 윌슨 지음, 나선숙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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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닳지 않는 긍정의 배터리를 지닌 우리 친구, 앤

 [빨강머리 앤]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빨강머리 앤이 어렸을 적에]가 얼마 전 출간되었다. 원작에서 단 한 페이지 정도의 분량으로 묘사되어 있는 앤 셜리의 탄생과 열한 살 이전의 삶을 찾아 캐나다의 명망 높은 작가 버지 윌슨이 도전장을 내민 것이다. 이 책은 루시 M. 몽고메리 협회와 캐나다 정부가 공식 인정한 앤 탄생 100주년 기념 ‘앤 시리즈’의 마지막 작품이다. ‘앤’이 얼마나 대단한 존재이기에 협회와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작가를 선정해 집필을 의뢰하며 대대적으로 감사의 글을 남기는지 의문스러웠다. ‘앤’ 탄생 100주기가 다소 극성스럽게까지 여겨졌다. [빨강머리 앤]과 [빨강머리 앤이 어렸을 적에]를 읽고 난 후 이러한 마음은 완벽하게 사라졌다. 전혀 놀랍지 않을 정도로 자연스럽게!

 [빨강머리 앤] 서문에 루시 M. 몽고메리 상속자 대표가 감사의 글을 남겼다. 그 글에는 루시 M. 몽고메리를 통해 얼마나 많은 후손이 큰 은혜를 입었는지 언급되어 있다. 경제적인 풍요와 더불어 정신적인 충만감과 자부심까지. 처음에 그냥 읽고 지나쳤던 서문을 [빨강머리 앤]과 [빨강머리 앤이 어렸을 적에]를 다 읽고 난 후 이해할 수 있었다. 몽고메리는 그녀의 후손들에게 경제적 자유를 주었을 뿐 아니라, 전 세계 수많은 독자에게 마음의 안식처를 선물했다. 시대와 세월이 아무리 변해도 결코 변하지 않을 마음의 고향, 마음의 친구를 선사한 것이다. 이것은 그녀의 후손들이 대대로 자부심으로 삼기에 부족함이 없는 사실이다.

 [빨강머리 앤이 어렸을 적에]를 읽기 전에 다소 걱정이 앞섰다. 앤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불행’했다는 것이다. 친부모의 죽음과 두 집에서의 하녀와 다름없는 생활 그리고 고아원 입성까지 행복한 내용이라고는 하나 없는데 책의 두께는 만만찮기 때문이다. [빨강머리 앤]을 읽고 난 후의 충족감이 이 책을 통해 반감되지 않을까 걱정스러웠다. 다행히 이것이 기우에 지나지 않음을 곧 깨닫게 된다. 앤이 어떻게 해서 상상력이 풍부한 아이로 성장할 수 있었는지, 어떤 방식으로 온 몸을 긍정으로 무장할 수 있었는지 생생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앤이 선보이는 놀라운 언어 구사력 덕분에 책 읽는 재미까지 쏠쏠하다.

 앤이 태어난 지 석 달 만에 친부모님은 열병으로 목숨을 잃는다. 두 분 다 교사였지만 박봉의 월급과 남은 가재도구로 병원비와 장례비를 치르고 나니 앤이 물려받을 재산은 하나도 없었다. 앤의 집에서 일을 도왔던 조애너에게 입양된 앤은 이때부터 유년시절을 빼앗기게 된다. ‘더 크기 전에 제발 어린 아이다운 시절을 보내고 싶다’는 앤의 간절한 바람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엄마의 포근한 품속에서 단 잠을 자본 적도, 생일을 축하받은 적도, 마음껏 뛰어노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대 여섯 살이 될 무렵부터 집안일은 물론 다수의 갓난아기들을 돌보기 시작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심리적 좌절과 육체적 노동 속에서 어떻게 앤은 명랑한 영혼을 지니게 되었을까.

 앤에게는 특별한 재능이 있다. 상상과 공상, 긍정으로 똘똘 뭉쳐진 아이다. 어쩌면 이것들은 시련과 고난을 극복하는 그녀의 유일한 탈출구였는지 모른다. 앤은 언제나 행복한 미래를 꿈꾸며, 배움에 대한 왕성한 호기심을 발휘한다. 무엇보다 사람을 사랑할 줄 아는 깊고 따뜻한 마음을 지녔다. 어떠한 일이 닥치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행해지지 않는 특별한 아이가 바로 ‘앤’이다.  세상에 홀로 남겨진 듯 외로움에 빠져들 때면 상상의 친구 ‘케이트 모리스’와 ‘비올레타’를 불러낸다. 달걀 장수 존슨 씨(전직 교사)에게서 배운 단어를 통해 자신이 표현할 수 있는 최대한의 문장을 선보이며, 배움(학교)을 통해 최상의 행복을 경험한다. 열한 살도 되기 전에 수많은 아이와 돌봐야할 집안 일이 산더미처럼 쌓이지만 잠시라도 시를 외우고, 숲을 거닐고, 친구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면 닳지 않는 배터리를 장전한 것처럼 언제나 씩씩할 수 있는 것이다.

 [빨강머리 앤]에서 보여주는 사랑스런 ‘앤’으로 성장하기 위해 [빨강머리 앤이 어렸을 적에]는 필연적 요소를 결부시켜 억지스런 구석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허나 두 작품은 마치 한 명의 작가가 집필한 것처럼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룬다. 앤의 이야기도 놀랍지만 앤의 어린 시절 이야기 역시 놀라움으로 가득하다. 어떤 시련에도 굴하지 않고 밝고 맑게 자라는 앤을 통해 나에게도 때 묻지 않은 영혼이 어디쯤 남아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많은 것들을 희망하는 버릇을 지닌’ 앤처럼 나 역시 많은 것들을 희망하며 이루며 살고 싶어진다.

 사람은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 지대한 영향을 받는다. 나쁜 환경에 노출될수록 올바르지 않은 성품을 지니기 십상인데, 앤은 이러한 편견을 깨뜨린 대표적인 캐릭터가 아닐까 생각한다. 열악한 환경을 이겨내는 놀라운 호기심과 긍정의 마음이 모두에게 사랑받는 아이로 성장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된 것이다. 이 책을 통해 앤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얼마나 기특한 아이인지 감탄 또 감탄하게 된다. 이 가녀린 소녀가 보여주는 풍요로운 상상력과 밝은 성품이 한동안 내 삶을 지탱하는 힘이 되어 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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