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강머리 앤이 어렸을 적에 - 빨강머리 앤 100주년 공식 기념판
버지 윌슨 지음, 나선숙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08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닳지 않는 긍정의 배터리를 지닌 우리 친구, 앤

 [빨강머리 앤]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빨강머리 앤이 어렸을 적에]가 얼마 전 출간되었다. 원작에서 단 한 페이지 정도의 분량으로 묘사되어 있는 앤 셜리의 탄생과 열한 살 이전의 삶을 찾아 캐나다의 명망 높은 작가 버지 윌슨이 도전장을 내민 것이다. 이 책은 루시 M. 몽고메리 협회와 캐나다 정부가 공식 인정한 앤 탄생 100주년 기념 ‘앤 시리즈’의 마지막 작품이다. ‘앤’이 얼마나 대단한 존재이기에 협회와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작가를 선정해 집필을 의뢰하며 대대적으로 감사의 글을 남기는지 의문스러웠다. ‘앤’ 탄생 100주기가 다소 극성스럽게까지 여겨졌다. [빨강머리 앤]과 [빨강머리 앤이 어렸을 적에]를 읽고 난 후 이러한 마음은 완벽하게 사라졌다. 전혀 놀랍지 않을 정도로 자연스럽게!

 [빨강머리 앤] 서문에 루시 M. 몽고메리 상속자 대표가 감사의 글을 남겼다. 그 글에는 루시 M. 몽고메리를 통해 얼마나 많은 후손이 큰 은혜를 입었는지 언급되어 있다. 경제적인 풍요와 더불어 정신적인 충만감과 자부심까지. 처음에 그냥 읽고 지나쳤던 서문을 [빨강머리 앤]과 [빨강머리 앤이 어렸을 적에]를 다 읽고 난 후 이해할 수 있었다. 몽고메리는 그녀의 후손들에게 경제적 자유를 주었을 뿐 아니라, 전 세계 수많은 독자에게 마음의 안식처를 선물했다. 시대와 세월이 아무리 변해도 결코 변하지 않을 마음의 고향, 마음의 친구를 선사한 것이다. 이것은 그녀의 후손들이 대대로 자부심으로 삼기에 부족함이 없는 사실이다.

 [빨강머리 앤이 어렸을 적에]를 읽기 전에 다소 걱정이 앞섰다. 앤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불행’했다는 것이다. 친부모의 죽음과 두 집에서의 하녀와 다름없는 생활 그리고 고아원 입성까지 행복한 내용이라고는 하나 없는데 책의 두께는 만만찮기 때문이다. [빨강머리 앤]을 읽고 난 후의 충족감이 이 책을 통해 반감되지 않을까 걱정스러웠다. 다행히 이것이 기우에 지나지 않음을 곧 깨닫게 된다. 앤이 어떻게 해서 상상력이 풍부한 아이로 성장할 수 있었는지, 어떤 방식으로 온 몸을 긍정으로 무장할 수 있었는지 생생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앤이 선보이는 놀라운 언어 구사력 덕분에 책 읽는 재미까지 쏠쏠하다.

 앤이 태어난 지 석 달 만에 친부모님은 열병으로 목숨을 잃는다. 두 분 다 교사였지만 박봉의 월급과 남은 가재도구로 병원비와 장례비를 치르고 나니 앤이 물려받을 재산은 하나도 없었다. 앤의 집에서 일을 도왔던 조애너에게 입양된 앤은 이때부터 유년시절을 빼앗기게 된다. ‘더 크기 전에 제발 어린 아이다운 시절을 보내고 싶다’는 앤의 간절한 바람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엄마의 포근한 품속에서 단 잠을 자본 적도, 생일을 축하받은 적도, 마음껏 뛰어노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대 여섯 살이 될 무렵부터 집안일은 물론 다수의 갓난아기들을 돌보기 시작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심리적 좌절과 육체적 노동 속에서 어떻게 앤은 명랑한 영혼을 지니게 되었을까.

 앤에게는 특별한 재능이 있다. 상상과 공상, 긍정으로 똘똘 뭉쳐진 아이다. 어쩌면 이것들은 시련과 고난을 극복하는 그녀의 유일한 탈출구였는지 모른다. 앤은 언제나 행복한 미래를 꿈꾸며, 배움에 대한 왕성한 호기심을 발휘한다. 무엇보다 사람을 사랑할 줄 아는 깊고 따뜻한 마음을 지녔다. 어떠한 일이 닥치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행해지지 않는 특별한 아이가 바로 ‘앤’이다.  세상에 홀로 남겨진 듯 외로움에 빠져들 때면 상상의 친구 ‘케이트 모리스’와 ‘비올레타’를 불러낸다. 달걀 장수 존슨 씨(전직 교사)에게서 배운 단어를 통해 자신이 표현할 수 있는 최대한의 문장을 선보이며, 배움(학교)을 통해 최상의 행복을 경험한다. 열한 살도 되기 전에 수많은 아이와 돌봐야할 집안 일이 산더미처럼 쌓이지만 잠시라도 시를 외우고, 숲을 거닐고, 친구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면 닳지 않는 배터리를 장전한 것처럼 언제나 씩씩할 수 있는 것이다.

 [빨강머리 앤]에서 보여주는 사랑스런 ‘앤’으로 성장하기 위해 [빨강머리 앤이 어렸을 적에]는 필연적 요소를 결부시켜 억지스런 구석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허나 두 작품은 마치 한 명의 작가가 집필한 것처럼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룬다. 앤의 이야기도 놀랍지만 앤의 어린 시절 이야기 역시 놀라움으로 가득하다. 어떤 시련에도 굴하지 않고 밝고 맑게 자라는 앤을 통해 나에게도 때 묻지 않은 영혼이 어디쯤 남아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많은 것들을 희망하는 버릇을 지닌’ 앤처럼 나 역시 많은 것들을 희망하며 이루며 살고 싶어진다.

 사람은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 지대한 영향을 받는다. 나쁜 환경에 노출될수록 올바르지 않은 성품을 지니기 십상인데, 앤은 이러한 편견을 깨뜨린 대표적인 캐릭터가 아닐까 생각한다. 열악한 환경을 이겨내는 놀라운 호기심과 긍정의 마음이 모두에게 사랑받는 아이로 성장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된 것이다. 이 책을 통해 앤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얼마나 기특한 아이인지 감탄 또 감탄하게 된다. 이 가녀린 소녀가 보여주는 풍요로운 상상력과 밝은 성품이 한동안 내 삶을 지탱하는 힘이 되어 줄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