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에게 가는 길
밥 그린 지음, 강주헌 옮김 / 푸른숲 / 2008년 12월
평점 :
절판


추억을 산책하는 동안에

 겨울의 한 가운데 들어서면 종종 매서운 한파가 몰아쳐 병약한 강줄기 어딘가를 시작으로 강 전체를 꽁꽁 얼어붙게 만들 때가 있다. 작은 돌팔매질 하나에 쉽게 금이 가는가 하면, 어떠한 물리적 충격에도 좀처럼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얼어붙은 겨울 강. 세상이 아무리 급변해도 얼음 아래 흐르는 물은 제 갈 길을 한시도 쉬어 본 적이 없다. 모진 풍파가 얼음 위에서 잦아드니 오히려 여유롭고 온화한 표정이다. 멈춰있는 듯 소리 없이 흐르는 얼음 아래 세상. 우리의 마음도 꼭 이랬으면 좋겠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저마다의 인생에서 모질고 힘든 시기를 지나게 된다. 세월에 휘둘리는 동안 생각지 못한 방향으로 변해갈지도 모른다. 어린 시절, ‘나는 저런 어른이 되지 말아야지.’ 다짐하던 어른의 모습과 닮아 있을 수도 있다.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마음 한 자리는 늘 깊고 고요하게 비워두고 싶다. 삶에 지쳐 한 번씩 뒤돌아보면 가만히 지켜보고 있을 본연의 자신과 마주하기를 바란다. 궂은 날씨에도 한 치의 망설임 없이 흘러가는 강물의 내공을 배우고 싶다.

 [친구에게 가는 길]에는 고즈넉한 산사를 걷듯 찬찬히 추억을 되짚어가는 두 남자가 등장한다. 다섯 살 때 처음 만나 친구의 연을 맺은 지 어느 덧 오십 해를 넘긴 밥과 잭. 쉰여섯 두 남자의 지칠 줄 모르는 산책은 흐르는 강물처럼 고요하고 잔잔하게 이어진다. 떠나야할 시간이 정해져 있는 잭은 얼음 아래 흐르는 강물과 닮아있다. 자신의 생이 다해가는 순간에도 남아서 생을 이어갈 부인과 딸을 위해 손에서 일을 놓지 않는다. 아무 일 없다는 듯 평소 모습 그대로 마지막 날까지 살아가기를 바란다. 절망을 선언하는 의사들 앞에서 매번 희망을 꿈꾸지만 절규도 보챔도 없다. 오직 어제와 같은 오늘을 살아갈 뿐이다. 암이 몸속으로 퍼져가는 속도에 따라 눈에 띄게 노쇠해져 가지만 그의 바람대로 생활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산책을 하고, 전화로 거래를 성사시키고, 친구들과 자주 가던 레스토랑에서 즐거운 한 때를 보낸다.

 이 책에는 반전이 숨어있지 않다. 큰 위기나 작은 변화도 없다. 시종일관 잔잔한 일상과 소소한 추억이 이어진다. 최대의 위기라 할 수 있는 잭의 죽음을 이미 서두에 밝혀두었으므로 독자는 책을 읽는 동안 슬픔을 은연중에 받아들이게 된다. 불안 불안하지만 어느 덧 고통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위기가 없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순간순간이 위기인지도 모른다. 잭의 주변 인물들은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언제나 노심초사한다. 안부를 확인하는 순간에만 잠시 마음을 놓을 뿐이다. 현실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주인공만이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을 평온한 일상으로 바꾸어 놓고 있다.
 ‘베프(베스트 프렌드)’ 혹은 ‘절친(절친한 친구)’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잭과 밥 외에 척, 앨런, 댄이 등장한다. 일명 ABCDJ, 말하자면 이들은 오총사다. 사회에 뿌리를 내리고 가정을 꾸려가는 동안 각자의 위치와 생활은 조금씩 달라졌다. 만나는 사람과 하는 일에서 공통점을 찾을 수는 없지만 그들에겐 ‘추억’이라는 끈끈한 매개체가 있다. 예민한 감성을 주고받으며 꿈을 키웠던 시절의 우정이란 찰나에 굳어져 끝끝내 떨어지지 않는 순간접착제처럼 강력하다. 시간이 갈수록 더 견고해지는 우정. 사람은 이 ‘우정’에 기대어 한 평생 살아가는지도 모르겠다. 

 “오늘 아침 첫 비행기를 탔어.” 전화도 없이, 마중을 나오라는 말도 없이 시카고행 비행기를 타고 날아왔던 것이다. 그가 다시 말했다. “자네가 아무도 만나고 싶어 하지 않으리란 걸 알아. 상관없네. 방금 호텔에 들어왔어. 계속 여기 있을 테니까 내가 자넬 위해 할 일이 있다면 언제라도 연락하게. 네가 원하면 어떤 짓이라도 할게. 죽은 듯이 있으라면 그렇게 하겠어, 여하튼 자네가 연락할 때까지 여기 있겠네.”(p.102)

 아내와 사별하고 크나큰 절망에 빠져 있는 밥을 위해 잭이 찾아왔다. 아무런 연락도 없이 생업조차 미뤄둔 채, 도움이 필요한 순간 언제라도 달려갈 수 있는 거리에 와 준 것이다. 마음이 심하게 요동쳤다. 시계 초침 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것 같은 이들의 잔잔한 우정 어디쯤, 이렇게 마음을 훑고 지나가는 한 때가 존재한다. 이제, 밥은 그 옛날 잭이 그랬듯 잭이 자신을 필요로 할 때 언제라도 달려갈 수 있는 거리에서 잭을 지켜주려 한다.

 추억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은 얼마나 잔인한 일인가. 암 선고를 받은 남자와 그 남자를 지켜주는 네 명의 친구들. 이들의 우정이야기는 봄 햇살처럼 나른하고 포근하다. 겨우내 언 땅을 뚫고 올라오는 새싹을 지켜 본 것처럼 경이로움과 애잔함이 마음에 들어찬다. 이제 추억으로밖에는 추억할 수 없는 시간들. 책을 읽을 때보다 책장을 덮고 난 뒤 마음이 더 저릿해져 온다. 입술을 지그시 깨물어 본다. 어느 틈엔가 고통이 밀려온다. 지긋한 아픔. 사랑하는 친구를 떠나보내는 일이란 이렇듯 녹록치 않다.

 하늘 아래 당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는 친구가 있다면 당신은 이미 충분히 행복한 사람이다. 내가 앞서건 그가 앞서건 함께 나눌 수 있는 추억이 있다면 이별의 순간이 마냥 슬프지만은 않을 것이다. 떠올릴 수 있는 추억이 얼마 없다면 지금 당장 친구와의 시간을 가져보길 바란다. 오늘, 내일, 언제가 마지막이 될지 알 수 없는 것이 우리들 인생이므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