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강머리 앤 - 빨강머리 앤 100주년 공식 기념판
루시 M. 몽고메리 지음, 강주헌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08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행복을 전해주는 특별한 아이

 잘 기억나진 않지만, 나에게도 어린 시절이 있었다. 큰 걱정 없이 하루하루가 즐겁기만 했을 어린 날의 한 때. 떠올려보면 그 시절의 친구들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친구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무슨 이야기를 하며 무슨 일들을 벌이며 지냈는지 가물 가물거린다. 그래도, 잠시만이라도, 어린 날 나와 함께 했던 친구들을 생각하면 미소가 지어진다. 아무것도 모르기에 욕심낼 것도 질투를 느낄 틈도 없었으리라. 어린 날의 추억을 떠올리다 보면 마음이 말갛게 게이는 느낌이다. 구름 한 점 없이 높고 푸른 가을 하늘처럼.

 얼마 만에 앤을 만나는 것인지 기억나질 않는다. 내가 앤을 만나기는 했었던가? 희미해진 추억, 어느 언저리에서 다시 만난 앤은 설렘 그 자체다. 어린 시절, 나는 앤과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고 어떤 공상을 주고받았는지 도무지 떠오르지 않지만 앤은 그렇게 내 유년의 한 부분과 맞닿아 있다.

 빼빼 마른 몸에 도드라진 주근깨, 무엇보다 눈에 띄는 빨강머리는 ‘앤’을 무심코 지나칠 수 없게 만든다. 앤이 이렇게 수다스러웠었나? 잠시 고개를 갸웃하다 금방 익숙해진다. 마치 초등학교 때 전학 간 친구를 십 여 년이 지난 어느 날 우연히 만난 것처럼, 첫 대면은 낯설지만 곧 편안해지는 느낌이랄까! 앤의 지칠 줄 모르는 수다에 기분이 좋아진다. 시끄럽지도 않다. 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잠잠하던 마음이 설레기 시작한다. 분명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는데 내 눈에 보이지 않는 풍경까지 세세하게 그려내 듯 들려준다. 조금 더 파릇하고, 조금 더 경쾌하고, 조금 더 자연스러운 새로운 세상을. 모난 구석이라곤 없다. 두려움도 없고, 상상도 끝이 없다. 앤에게 이 세상은, 오늘은, 환희 그 자체인 것이다.

 때로는 원치 않는 인연도 받아들여야 할 때가 있다. 상상할 거리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고아원을 벗어나 상상만 해도 기분 좋아지는 초록색 지붕 집으로 앤의 삶이 옮겨지던 날. 매슈 커스버트와 마릴라 커스버트 남매가 입양을 원한 건 ‘앤’과 같은 여자 아이가 아니라, 일을 도와 줄 남자아이였음을 알게 된다. 열 한 해, 길지 않은 인생을 살아오면서 쉬운 게 하나도 없었던 앤 셜리. 온 몸에 실수 장전, 과도한 감정 남발, 지나친 상상력을 지녔지만 동시에 오묘한 매력을 소유한 앤은 결국 정교하게 닫혀있던 마릴라의 마음을 열게 된다. 원치 않는 인연도 ‘인연’인 법. 이렇게 그들의 동거가 시작된다.

 보이는 모든 것에 가장 어울릴 만한 이름을 새롭게 붙여주는 앤은 타고난 이야기꾼이다. 가만히 있는 사물에게 말걸기, 모든 상황을 긍정으로 반전시키는 상상력, 공부에 대한 남다른 열정은 앤의 장점이다. 한 번 이야기를 시작하면 끝이 없다. 분명 책을 읽고 있는데도 앤의 이야기가 바로 옆에서 들리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그 수다스러움에 귀가 윙윙 거리다가도 잠시라도 조용해지면 곧바로 앤의 목소리가 그리워진다. 아, 이 중독성 강한 소녀 몽상가에게서 나는 벗어날 수 있을까!
 세상으로부터 받은 상처를 마음에 새기는 대신 곪아갈 그 자리에 상상력을 동원해 즐거움으로 가득 채운다. 앤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어느 순간 숨이 턱까지 차오른다. 그래도 입가에 미소를 머금게 된다면 당신도 이미 ‘앤의 폐인’ 일지 모른다.

 초록색 지붕 집을 둘러싼 자연 경관은 마치 그림 속 풍경과 같다. 계절에 따라 미세하게 변하는 작은 움직임 하나까지 놓치지 않고 앤의 눈을 통해 그대로 펼쳐진다. 앤의 상상력에 날개를 달아준 것은 바로 초록색 지붕 집을 중심으로 펼쳐진 캐번디시의 수려한 자연 경관 이다. 숲 속 작은 동물들을 바라보며 어디든 내달릴 수 있고, 꽃과 나무속을 매일 거닐곤 하는데 어떻게 마음이 열리지 않겠는가. 그 마음가득 상상이 차올라 앤의 감성은 한없이 풍성해진다. 앤의 유년 시절을 벅차게 만들어준 대자연이 한없이 부럽다. 앞으로 자라날 우리의 아이들에게 자연의 경이로움 대신 도시의 팍팍함을 안겨줘야 한다는 사실이 미안하지만!

 앤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가장 큰 이유는 가끔 대책 없을 정도로 ‘긍정’을 타고 났다는데 있다. 앤에게 하루하루는 진실하고, 절실하며, 축복으로 가득하다. 아니 앤 스스로가 그런 날들로 만들어 버린다. 또 매사에 얼마나 열심인지. 이야기도 공부도 앤을 따라올 사람이 없을 정도다. 그녀만의 긍정과 해피 바이러스를 만나 얼마나 많은 사람의 유년이 행복했을지, 앞으로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앤을 통해 밝은 마음을 간직하게 될 지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벅차오른다. 원망과 고통이 채워야 할 자리를 온통 긍정으로 무장한 앤 셜리. 누구라도 앤을 만나면 이 소녀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가녀린 몸의 작은 소녀 한 명이 세상에 지친 어른의 마음까지 다독여주다니 그 재주 한 번 부럽다! 수줍은 많지만 극진한 사랑을 보여준 매슈 커스버트와 앤의 바른 길을 위해 늘 노심초사하며 감정을 절제했던 마릴라 커스버트에게도 ‘앤’을 사랑스런 아이로 키워준 데 감사를 전하고 싶다.
 
 앤의 입을 통해 쏟아지는 이야기와 앤의 눈을 통해 펼쳐지는 풍경은 정말이지 사랑스럽다. [빨강머리 앤]이 100년이 넘도록 사랑 받는 비결은 루시M. 몽고메리가 그리고자 했던 세상이 앤을 통해 모든 사람의 마음에 가닿았기 때문이 아닐까. 누구나 마음에 한 자리쯤 품고 있을 고향, 영원히 변하지 않기를 바라는 그 낙원 같은 고향이 [빨강머리 앤]을 펼치면 어김없이 나타난다. 지치고 힘들면 어디서든 어깨를 내어주는 단짝 친구처럼 다정한 모습으로. 그 속에 한결같은 모습의 앤이 있다. 누구보다도 희망차게 삶을 살아내는 경쾌하고 명민한 작은 아이 한 명이 늘 우리를 반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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