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꽃이 피었습니다
백은하 글.그림 / 북스캔(대교북스캔) / 2007년 4월
평점 :
절판


꽃이 말을 걸어옵니다, 어떤 이야기인지 한 번 들어보실래요?
- 백은하,『이야기꽃이 피었습니다』를 읽고



 꽃잎을 떼어 아무렇게나 책 속에 넣고 말린다. 한참 시간이 지난 후 꺼내어 보면 반듯하거나 혹은 제멋대로인 각양각색의 모양을 갖추고 있다. 그 꽃들을 하얀 종이 위에 올려놓고 몇 개의 선을 그려 넣는다. 그러면 사람이 된다. 이야기가 된다.『이야기꽃이 피었습니다』는 ‘꽃도둑’이라는 별명을 가진 글그림 작가 백은하가 마른 꽃잎에 그림을 그려 넣고 이야기를 곁들여 만들어 낸 책이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마음이 설렌다. 숨을 내려놓은 지 오랜 된 꽃잎이 다시 살아나 움직이다니. 사람이 되어 조곤조곤 말을 걸어오는 꽃잎이 마냥 신기해 자꾸 들여다보게 된다. 나풀거리는 치맛자락이 제법 멋스럽다. 표정도 행동도 생기 넘쳐 보인다. 한 송이 꽃이었을 때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으로 환하게 만들더니, 한 잎 한 잎 떼어져 제각각 흩어져도 풍성한 이야기를 만들어 내고 있구나. 꽃에게 고마운 것인지 백은하 작가에게 고마운 것인지 여하튼 고마운 마음이 든다.

 시인 듯 에세이인 듯 써내려간 글들은 작가가 만들어낸 작품과 어우러져 읽는 이의 마음을 찬찬히 다독여 준다. 어른이 되고 나서야 어렴풋이 엄마의 마음을 알게 되고,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후 한참의 시간이 흘러서야 크신 사랑을 느낀다. 인생은 마라톤과 같은 거라서 호흡도 조절하고 에너지도 길게 나눠 써야한다고 충고도 해준다. 여름이면 기승을 부리는 모기가 가려움과 병균을 옮기는 대신 웃음을 전파하면 좋겠다는 재미난 상상을 하기도 한다. 사랑 웃음 위로 충고 휴식…… 그야말로 이야기가 몽글몽글 피어오르는 책이다.

 ‘내게 꽃은 전부 사람으로 보인다’는 백은하 작가를 보면 한 평생 정원을 가꾸며 살다간 타샤 튜더가 떠오른다. 정성스레 닥종이로 아이들을 빚어내는 인형 작가 김영희씨와 소담하고 정갈한 작품들을 만들어내는 한복 디자이너 이효재씨도 떠오른다. 그렇게 그녀는 스러져가는 꽃잎을 가져와 새 생명을 불어넣어 자신만의 세계를 꽃피워내고 있다.

 느긋하게 두 어 시간이면 충분히 읽을 수 있는 책을 나는 되도록 천천히 읽는다. 조금씩 아껴가며 읽는다. 글을 읽고 그림을 본다. 어느 순간 그림이 읽히기도 한다. 총천연색의 꽃잎에 취해, 앙증맞은 행동에 취해 절로 웃음이 난다. 좋은 날 좋은 사람을 만난 것처럼 책 한 권이 나를 설레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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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치고 동맹 문학동네 청소년문학 원더북스 11
미타 마사히로 지음, 심정명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8월
평점 :
절판


봄 햇살처럼 맑은 청춘들의 이야기
- 미타 마사히로, 『이치고 동맹』을 읽고

 사람은 누구나 살아가면서 삶과 죽음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해 볼 때가 있다. 특히 사춘기 예민한 시기에 접어든 아이에게 이러한 고민은 때로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어른들은 아이의 고민이라면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아이는 그 자체로 완벽한 인격체이며 스스로 짊어지고 있는 삶의 무게는 어른과 별반 다르지 않다. 살다보면 더 심각한 상황과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리라는 것을 그 또래 아이들은 미처 염두에 두지 못한다. 지금 현실의 문제가 가장 심각하므로.

 『이치고 동맹』은 늘 자살을 염두에 두고 사는 열다섯 살 기타자와가 또래 친구 데쓰야와 나오미를 만나면서 겪게 되는 심리변화를 잔잔하게 그려내고 있는 소설이다. 기타자와는 초등학교 5학년 시절 어느 동급생의 자살소식을 접한 후로 그 친구와 그가 남긴 유언의 문구를 마음에 새기며 살아간다. 더불어 19살에 생을 마감한 하라구치 도조의 ‘스무살의 에튀드’, 17살에 자살한 나가사와 노부코의 ‘친구여, 내가 죽는다 해도’, 21살에 자살한 오쿠 고헤이의 ‘청춘의 묘비’라는 책을 탐독하길 즐긴다. 한 마디로 기타자와는 살아있지만 늘 죽음을 생각하는 불안전한 영혼을 지닌 인물이다. 집안일에는 관심 없는 아버지, 자식의 관심사보다는 성적만을 중요시하는 어머니, 공부 운동 모든 면에서 자신보다 월등한 동생. 그 틈바구니 속에서 기타자와는 말없는 외톨이로 살아왔다. 중학교 3학년이 된 그에게 진로문제가 죽음이라는 단어를 더 자주 떠올리게 만드는 절체절명의 위기로 다가온 것은 어쩌면 자연스런 수순.
 
 그런 그의 삶에 같은 학교 야구부 에이스 데쓰야와 시한부 소녀 나오미가 등장한다. 데쓰야의 부탁으로 문병을 다니는 동안 기타자와의 마음에는 서서히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다. 죽음을 생각한다는 것과 죽음에 직면해 있다는 것은 염연히 다르다는 것을 인지하게 된 것일까. 생의 마지막 순간으로 다가서고 있는 나오미, 그녀를 오랫동안 좋아해온 데쓰야 그리고 한 소녀를 마음에 품게 된 기타자와. 이들의 이야기가 아직 찬 기운이 남아있는 봄 날, 온 힘을 다해 대지를 비추는 햇살처럼 나지막이 마음을 어루만진다. 나오미가 이 지상에 와서 살았다는 것을 오래도록 기억하자며 열다섯 살의 두 소년은 이치고(일본어로 1(이치) 고(5))동맹을 맺는다. 자살 같은 건 생각지도 말라며, 백 살까지 살아 나오미를 기억하자는 데쓰야의 제안. 살아야 할 이유는 그렇게 다가오기도 한다.

 이 소설은 상당히 절제되어 있다. 죽음을 소재로 하고 있지만 감정을 격하게 만들지 않는다. 요란하지도 유치하지도 않다. 인물들의 감정변화를 섬세하게 그려낸 수채화 같은 소설. 담담히 읽히며 묵직한 여운을 남긴다.
 
 청소년들의 자살은 일본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에게도 현실이다. 이미 1990년에 출간된 이 소설이 교과서에 수록되고 각종 분야의 추천 도서로 오랫동안 자리매김해 온 이유를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아직 어리다고만 생각한 우리의 청소년들이 얼마나 심각한 고민을 안고 살아가는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어른들 역시 아이였을 때가 있다. 어른의 잣대로 아이를 판단해서는 이해도 대화도 되지 않는다. 우리가 건너왔던 지난 시절로 돌아가 아이의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는 지혜가 필요하다. 결국 소통의 물꼬를 트는 이 책의 등장인물들처럼 우리도 늦지 않게 아이들의 마음을 헤아려 봐야 할 것이다.
 

"살아." 

"그래, 살게." 

 p.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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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의 추억
사이 몽고메리 지음, 이종인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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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되는 존재
- 사이 몽고메리, 『돼지의 추억』을 읽고

 어린 시절, 나는 시골에서 자랐다. 마당 가장 넓은 자리에 누렁이(개)가 살았고, 몇 마리의 닭들도 마당을 활보하고 다녔다. 집 뒤편으로 가면 돼지들로 혼잡한 이웃집의 축사도 있었다. 늘 어울려 지내던 동물들. 나는 그들에게 특별한 정을 느꼈을까. 그렇지는 않다. 누렁이의 촉촉한 콧망울과 깊은 눈매는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지만, 그 동물들을 가축 이상으로 생각하지는 않은 것 같다. 그런데 여기 동물 특히 돼지를 ‘가족’ 이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오지 정글을 탐험하며 야생 동물을 연구하는 동물학자 사이 몽고메리. 애완견(犬)도 아닌 애완돈(豚)이라니. 사실 그녀에게 돼지 크리스토퍼 호그우드(이하 애칭 ‘크리스’)는 애완의 개념도 넘어선 존재다. 그녀에게 동물은 안식처, 분신, 정신적인 쌍둥이이기 때문이다.(p.31 본문 인용)

 혹시 돼지의 평균 수명을 알고 있는가? 놀랍게도 6개월이라고 한다. 몇 마리의 암퇘지와 종돈 수퇘지는 몇 년을 더 살 수 있지만 6, 7년 이상을 사는 경우는 없다고 한다. 대부분 식용으로 키워지기 때문에 100킬로그램이 넘어가면 여지없이 도축되고 만다. 그동안 아무 생각 없이 돼지고기를 먹으면서 살아온 나로서는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심하게 말하자면 인간에게 먹혀 없어지기 위해 태어나는 생명이지 않은가.
 『돼지의 추억』은 이러한 돼지의 평균 수명을 가볍게 뛰어넘어 무려 13년 6개월을 더 살다간 ‘크리스’에 관한 이야기이다. 동물학자 사이 몽고메리와 학자 겸 작가 하워드 부부가 크리스를 처음 만난 건 1990년 4월. 버려진 온갖 동물을 데려와 집을 흡사 동물대피소로 만들던 아내를 하워드는 늘 구박했다. 그런 그가 아내를 위해 특별히 크리스를 데려오기로 결정한 것은 이례적인 일. 그 당시 사이 몽고메리는 암에 걸린 아버지를 간호하느라 정신적인 위로가 절실히 필요하던 시기였다. 불행인지 다행인지(분명 다행은 아니지만) 크리스는 함께 태어난 형제들 중에서 덩치가 가장 작고 병약한 무녀리(무리 중 도태되는 새끼)였다. 애지중지 신경을 쏟을 수밖에 없는 조건을 두루 갖춘 연약한 생명. 하룻밤이나 제대로 넘길 수 있을지 의문이었던 크리스는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그것도 340킬로그램에 육박하는 거구이면서 인간과 교감을 나눌 줄 아는 특별한 돼지로 말이다.

 크리스는 영리하다. 일반 돼지들처럼 마구잡이로 섞여 있는 먹이를 우적우적 씹어 먹지 않는다. 가장 좋아하는 것부터 ‘골라먹는’ 재주가 있다. 돼지우리를 탈출하기 위해 육중한 몸을 들이밀기 전에 머리부터 쓴다. 사람이 열쇠로 문을 열듯 문을 고정해놓은 끈을 ‘풀고’ 탈출을 감행한다. 우리를 탈출한 돼지가 흔히 온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듯 크리스가 그럴 거라고는 상상하지 말라. 크리스는 마을 곳곳을 ‘탐험’하듯 유유자적 돌아다닌다. 곧잘 사람들을 사귀고 집으로 모여들게 만든다. 사교성 없는 사이 몽고메리에게 만남을 주선하기라도 하듯이. 크리스의 쇼에 해당하는 배 마사지 역시 인기가 높다. 특히 어린아이들은 사족을 못 쓸 정도로 좋아한다. 간혹 말썽을 부리긴 하지만 대부분 크리스에게 호감을 보인다. 각종 매스컴에 출연할 만큼 유명인사로까지 자리 잡는다. 일반 가정집은 물론 레스토랑에서도 크리스를 위해 음식찌꺼기를 기꺼이 내놓는다. 다소 과분할 정도로 많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돼지를 가축 이상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고, 동물 애호가도 아닌  나로서는 그들의 이런 문화가 신기하기만 하다(더구나 애완용과는 거리가 먼 돼지이지 않은가). 사람이 아닌 것과의 정신적인 교감. 많은 사람들이 보여준 완벽에 가까운 사랑이 무녀리로 태어난 크리스를 보통 돼지들보다 무려 13개월 6개월을 더 살게 한 힘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돼지의 추억』에는 크리스와 더불어 오랜 세월을 살다간 콜리라는 개와 온갖 동물들이 등장한다. 사이 몽고메리 개인사도 다분히 녹아들어 있다. 사위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끝까지 인정하지 않았던 부모님,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드러나는 가족의 비밀, 순다르반스 호랑이, 아마존의 분홍돌고래, 타란툴라 독거미 탐사 등 그녀의 삶 대부분을 기록하고 있다. 시종일관 기막히게 재미있지는 않다. 하지만 이 책은 마음을 따스하게 다독이는 매력이 있다. 사람과 동물간의 새로운 관계를 연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말 못하는 동물과의 잔잔한 교감이 가슴을 두드린다.

 이 책은 ‘오래 살다간 돼지가 있었다’라고 말하는 책이 아니다. 돼지로 인해 변화된 인간의 삶과 특별한 교감에 관한 이야기다. 크리스는 릴라 가족에게 희망의 메시지가 되어준다. 암에 걸린 켈리와 특별한 우정을 나누는가 하면 정원에 관심 없던 사이 몽고메리에게 멋진 정원을 선물하기도 한다. 용서와 화해를 가능하게 하고, 소통하지 않던 세계로 길을 내어주기도 한다. 무엇보다 그 누구라도 크리스를 만나면 소소한 행복에 빠져들게 된다. 크리스가 뭔가 특별한 일을 했냐고? 천만에! 단지 오랜 세월 사람들 곁에 있어 줬을 뿐이다.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에 위안이 되는 존재. 꼭 사람일 이유는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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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딴방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199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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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해로 가는 길
- 신경숙, 『외딴방』을 읽고


 사람은 인생의 어느 한 시기쯤 침묵으로 일관하게 되는 절망의 순간을 경험하게 된다. 누군가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일, 누구에게라도 아픔을 주는 어떤 일을 가슴에 묻은 채 전전긍긍하며 살아간다. 쉽사리 지워지지 않는 주홍글씨처럼 영혼의 밑바닥에 깊이 각인된 잔인한 기억! 살아가는 동안 불쑥불쑥 찾아와 평온했던 일상을 온통 엉망으로 뒤흔들어 버린다. 정면으로 승부하기 전에는 설령 정면 승부를 펼친다 해도 온전히 자유로워질 수 없는 잔혹한 상처는 살아가는 내내 고통을 안겨 준다.

『외딴방』은 열여섯에서 열아홉에 이르는 생애 가장 꽃다운 나이에 천형과도 같은 끔직한 일을 겪은 작가가 오랜 내적 방황 끝에 스스로와 화해해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소설이다. 열여섯,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구로공단의 동남전기주식회사 컨베이어와 영등포여자고등학교 야간반 그리고 자그마한 외딴방 한 칸이다. 그곳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을 온전히 지켜내기 위해 소녀는 작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훗날, 살아가는 피로와 관계의 부재 속에 처절하게 외로워졌을 때도(p.49)’ 무언가를 열망하는 꿈이 있다면 살아갈 수 있다고 믿었던 소녀. 열여섯에서 열아홉으로 건너오는 사년의 시간을 온통 침묵하게 만든 사건은 그녀의 열망과는 상관없이 벌어지고 만다. 그녀를 비밀스런 아이로, 내성적이며 타인과 관계 맺기를 두려워하는 사람으로 바꿔놓고만 사건. 딸깍하고 잠궈 버린 희재언니 방의 열쇠통은 언젠가 우물에 빠뜨린 쇠스랑처럼 그녀의 마음 밑바닥에 가라앉아 묵직하고 깊은 상흔을 남기고 말았다.

 다 나은 줄 알았다. 상처가 아물어 새 살이 돋은 지 이미 오래다. 그런데도 예전과 비슷한 상처를 입게 되면 그때의 고통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그녀에게 희재언니 사건이 그랬듯 나에게도 그런 일이 있었을까, 있었던 것 같다. 나를 침묵하게 만들고 나의 한 시절을 온통 암흑으로 바꿔버린 힘겨운 시련, 이 나에게도 있었던 것 같다. 있었다, 라고 단정 지으면 그 때의 일이 금세 생생하게 떠오를 것 같아 있었던 것 같다, 라고만 말해 두련다. 상처 난 자리에 약을 바르고 딱지가 앉고 그 딱지를 밀어 올리는 붉은 속살을 보기도 전에 붕대를 칭칭 감아 다시는 풀지 않았던 내 스물 한 살의 상처. 그래서 곪았을까, 그래서 더 빨리 아물었을까. 아직 나는 그 일을 정면으로 마주할 용기도 의욕도 없다. 그 때를 생각하면 머릿속이 그저 멍해져온다. 잃은 것과 얻은 것이 분명 있을진대 어떤 쪽으로든 생각이 정리되지 않는다. 그냥 도망치듯 잊은 채 살았다. 그럼에도 생활의 자잘한 파편들에 의해 끊임없이 상기되는 그 날의 사건들, 사람들……. 멀리 오면 될 줄 알았다.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줄 알았다.

 소녀는 작가가 되었다. 작가가 되어 끊임없이 작품을 발표했다. 자신의 모든 것을 소진하려는 듯 숨 가쁘게 달려온 시간. ‘너는 우리랑 다른 삶을 살고 있는 것 같다’고 말하는 하계숙의 한마디가 그녀를 뒤흔들어놓기 전까지는. 그녀는 그녀의 옛 친구가 생각하듯 정말 다른 삶을 살고 있는 것일까, 무엇이 그녀를 다른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을까. 결코 자유로워질 수 없는 사년간의 잔인한 기억, 그것 때문이었다. 공장 야간학교 외딴방 그리고 희재언니. 이 중 어느 하나만 떠올려도 동시다발적으로 차오르는 기억 때문에 그녀는 그 시절의 일을 한마디도 내뱉지 못했으리라. 내내 아파만 했으리라. 노조와 회사의 극한 대립보다 유신말기의 혼란한 사회 상황보다 더 힘들게 자신을 옥죄여오는 희재언니가 있던 외딴방의 기억…….
 자신도 모르게 휘말려 버린 그날의 일과 화해를 하기 위해 그녀는 힘겹게 한 걸음 내딛고 있다. 작가의 아주 세밀한 감정들까지 고스란히 녹아있는 『외딴방』은 그래서 읽는 중간 자꾸만 멈칫, 하게 된다. 서서히 마음이 내려앉는 느낌이랄까. 직접 겪은 일도 아닌데 자꾸만 마음을 후벼 파고 들어와 아프게 한다. 쉽사리 다음 장을 넘기기 힘들다. 후-하고 심호흡 한 번. 그녀는 그렇게 나의 상처를 서서히 들여다보게 만들었다. 내 지난날의 상처를 아직 ‘그 일’이라고 밖에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다. 그녀처럼 정면 승부를 펼친 것이 아니라 이제 겨우 본질을 바라볼 용기를 얻었기 때문이다.

 언젠가 『외딴방』을 읽은 적이 있는 것 같다. 나도 그녀처럼 문예창작학을 전공한 문학도였고, 신경숙이라는 이름 역시 오래전부터 깊이 각인되었던 터. 그럼에도 처음 읽는 것처럼 생경하다. 방금 상처가 난 것처럼 구석구석 쓰리고 아프다. 그 때 나에게는 ‘외딴방’이 없어서였을까. 그저 타인의 일이기만 해서였을까. 한 해를 살고 또 한 해를 사는 동안 많은 일들이 곁에 머물렀다 사라져간다. 어떤 것은 흔적도 없는가 하면 어떤 것은 너무나 생생하다. 떠올리기 싫은 기억일수록 선명한 잔상을 남기는 법.
 
 우리는 누구나 자신만의 ‘외딴방’ 을 하나쯤 간직하며 살아간다. 이미 오래전에 잃어버린 열쇠는 찾을 길 없고 자물쇠도 녹슨 지 오래다. 할 수 있는 건 있는 힘껏 문을 부수고 들어가 보는 것뿐이다.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다. 오직 자신이 해야 할 일. 잔인한 상처들이 물밀듯이 밀려오겠지만 정면으로 마주해야 한다. 우리는 바로 이 순간 오늘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시시때때 찾아오는 지난날의 고통에서 자유로워질 이유가 분명히 있는 것이다. ‘외딴방’을 활짝 열어놓고 보면 알 수 있겠지. 영혼이 더욱 견고해지고 앞으로의 삶이 더욱 값져 질 수 있다는 사실을.

 작가의 고백처럼 『외딴방』은 사실도 픽션도 아닌 그 중간쯤 되는 글일 것이다. 분명한 것은 그녀에게 글쓰기가 ‘외딴방’을 뚫고 나올 용기를 주었다는 사실이다. 작가의 내면을 치유하는 동시에 책을 읽는 수많은 독자들에게 각자의 외딴방과 화해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준 셈이다. ‘문학’이 맞다. ‘문학으로 인해 내가 꿈을 꿀 수 있다면 사회도 꿈을 꿀 수 있(p.206)’을 거라는 그녀의 생각에 동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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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어트의 여왕
백영옥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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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발랄한 웃음 뒤에 숨겨진 냉혹한 진실
- 과연 무엇을 위해 아름다워지기를 바라는가?
 

백영옥,『다이어트의 여왕』을 읽고 



 

 

 

 

 

 

 

 다이어트 여왕을 가리는 서바이벌 경쟁에서 살아남은 최후의 1인에게 주어지는 상금은 자그마치 1억 원. 『다이어트의 여왕』은 치열 혹은 치졸한 경쟁이 예상되는 TV쇼의 화려한 간판을 내건 스펙타클한 칙릿 한 편이라 생각했다. 누구나 보면서 불만을 토로하지만 매 방송시간마다 본방을 사수하게 만드는 중독성 강한 버라이어티 쇼라고 해야 할까. 이런 예상은 살짝 빗나갔다. 사람들의 말초적인 감정을 자극하는 ‘다이어트의 여왕’이라는 TV쇼는 일종의 징검다리 역할을 한다. 대신 책 전반은 주인공 ‘연두’가 겪어나가는 심리변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세 번의 연애와 세 번의 실연, 인경이 만들어 낸 가상의 인물 김민정, 다이어트 여왕 준우승자에게 날아든 갑작스런 유명세, 셰프로서의 사망 선고에 가까운 신경성 식욕부진증까지 불과 몇 개월 만에 수많은 일들이 벌어진다. 처음에는 이 책을 스물여덟 여자의 혹독한 성장통을 다룬 소설이라 생각했다.

 마지막 11장을 읽고 나서 생각이 달라졌다. 한 여자의 성장통이라고 단정하기에 이 소설은 조금은 더 심오한 주제의식을 담고 있다. 복잡하게 얽혀있는 등장인물 개개인의 심리를 따라가는 동안 마주하게 되는 예기치 못한 진실. 서서히 드러나는 인간의 잔혹한 내면을 통해 오늘의 현실을 직시하게 만든다. 반전이라 할 수 있는 ‘잔혹한 진실’과 만나는 순간, 내 안에도 숨어있을지 모를 가장 근원적인 본성을 찾아보게 만든다. 시기, 질투, 음모 같은……. 그런 면에서『다이어트의 여왕』은 트렌드를 쫒는 소설을 가장해 누구든 쉽게 접근하게 만든 다음, 현재 우리가 안고 있는 시대의 문제점을 정면으로 직시하게 만드는 책이라 할 수 있다. ‘날씬한 것을 넘어 보다 메마르게’로 변질되어가는 이상 다이어트 열풍. 오늘날 건강을 위해 몸을 만들어가는 여성보다 아름다움을 위해(그것도 천편일률적인 말라깽이가 되기 위해) 몸을 혹사시키는 여성들이 갈수록 늘어가고 있다. 혼자만의 처절한 투쟁이라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개인으로 인해 결국 누군가의 인생이 송두리째 흔들린다면 분명 문제가 있을 터. 소설은 이런 현실에 대해 경고의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겉으로는 평온해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인간의 내면에 얼마나 위험한 독이 도사리고 있는지 섬뜩함마저 든다. 타인의 아름다움과 성공에 대한 질투가 한 사람의 혀를 마비시키고 기억력 감퇴를 동반한 끔찍한 거식증에 걸려들게 만든다. 그로 인해 그동안 쌓아올렸던 셰프로서의 자격이 박탁되고 삶은 온통 내리막길로 치닫게 된다. 시련을 극복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 육체적 정신적 고통의 터널에 갇혀 신음해야하는지 모른다. 이런 모든 고통의 시작이 ‘그녀’들의 세치 혀에서 시작된 것이라니.
 다이어트 여왕이 되기 위해 피땀 흘리며 노력하는 도전자들의 숭고한 열정을 미화하기보다 경쟁자를 물리쳐야 비로소 살아남을 수 있는 서바이벌 게임의 냉혹한 현실을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는 『다이어트의 여왕』. ‘공개적으로 타인을 비난’하는 것이 허용되는 비극의 산실을 들여다보는 동안 우리는 깨닫게 된다. 몸에서 살이 빠져 나가는 것보다 더 빠른 속도로 정신이 맥없이 빠져나가는 도전자들을 통해 인간의 잔인한 본성을.

발랄한 웃음 뒤에 숨겨진 의뭉스러운 미소를 보았다. 현재를 살아가는 자연스런 방어기제, 나 혹은 당신의 모습일지도 모를 그런 현실을 직시하게 된다. 단, 오해는 마시길. 이 책이 시종일관 무거운 주제의식을 드러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한 손에 들고 읽기에는 다소 방대한 분량이지만 순식간에 읽힌다. 한 마디로 재미있다. 자꾸만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지는 소설. 리뷰도 소설만큼 재미있게 쓰고 싶었으나 장황한 사족만 늘어놓은 것 같다. 아무쪼록 읽어보더라도 후회는 안할 만한 매력있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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