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의 추억
사이 몽고메리 지음, 이종인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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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되는 존재
- 사이 몽고메리, 『돼지의 추억』을 읽고

 어린 시절, 나는 시골에서 자랐다. 마당 가장 넓은 자리에 누렁이(개)가 살았고, 몇 마리의 닭들도 마당을 활보하고 다녔다. 집 뒤편으로 가면 돼지들로 혼잡한 이웃집의 축사도 있었다. 늘 어울려 지내던 동물들. 나는 그들에게 특별한 정을 느꼈을까. 그렇지는 않다. 누렁이의 촉촉한 콧망울과 깊은 눈매는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지만, 그 동물들을 가축 이상으로 생각하지는 않은 것 같다. 그런데 여기 동물 특히 돼지를 ‘가족’ 이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오지 정글을 탐험하며 야생 동물을 연구하는 동물학자 사이 몽고메리. 애완견(犬)도 아닌 애완돈(豚)이라니. 사실 그녀에게 돼지 크리스토퍼 호그우드(이하 애칭 ‘크리스’)는 애완의 개념도 넘어선 존재다. 그녀에게 동물은 안식처, 분신, 정신적인 쌍둥이이기 때문이다.(p.31 본문 인용)

 혹시 돼지의 평균 수명을 알고 있는가? 놀랍게도 6개월이라고 한다. 몇 마리의 암퇘지와 종돈 수퇘지는 몇 년을 더 살 수 있지만 6, 7년 이상을 사는 경우는 없다고 한다. 대부분 식용으로 키워지기 때문에 100킬로그램이 넘어가면 여지없이 도축되고 만다. 그동안 아무 생각 없이 돼지고기를 먹으면서 살아온 나로서는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심하게 말하자면 인간에게 먹혀 없어지기 위해 태어나는 생명이지 않은가.
 『돼지의 추억』은 이러한 돼지의 평균 수명을 가볍게 뛰어넘어 무려 13년 6개월을 더 살다간 ‘크리스’에 관한 이야기이다. 동물학자 사이 몽고메리와 학자 겸 작가 하워드 부부가 크리스를 처음 만난 건 1990년 4월. 버려진 온갖 동물을 데려와 집을 흡사 동물대피소로 만들던 아내를 하워드는 늘 구박했다. 그런 그가 아내를 위해 특별히 크리스를 데려오기로 결정한 것은 이례적인 일. 그 당시 사이 몽고메리는 암에 걸린 아버지를 간호하느라 정신적인 위로가 절실히 필요하던 시기였다. 불행인지 다행인지(분명 다행은 아니지만) 크리스는 함께 태어난 형제들 중에서 덩치가 가장 작고 병약한 무녀리(무리 중 도태되는 새끼)였다. 애지중지 신경을 쏟을 수밖에 없는 조건을 두루 갖춘 연약한 생명. 하룻밤이나 제대로 넘길 수 있을지 의문이었던 크리스는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그것도 340킬로그램에 육박하는 거구이면서 인간과 교감을 나눌 줄 아는 특별한 돼지로 말이다.

 크리스는 영리하다. 일반 돼지들처럼 마구잡이로 섞여 있는 먹이를 우적우적 씹어 먹지 않는다. 가장 좋아하는 것부터 ‘골라먹는’ 재주가 있다. 돼지우리를 탈출하기 위해 육중한 몸을 들이밀기 전에 머리부터 쓴다. 사람이 열쇠로 문을 열듯 문을 고정해놓은 끈을 ‘풀고’ 탈출을 감행한다. 우리를 탈출한 돼지가 흔히 온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듯 크리스가 그럴 거라고는 상상하지 말라. 크리스는 마을 곳곳을 ‘탐험’하듯 유유자적 돌아다닌다. 곧잘 사람들을 사귀고 집으로 모여들게 만든다. 사교성 없는 사이 몽고메리에게 만남을 주선하기라도 하듯이. 크리스의 쇼에 해당하는 배 마사지 역시 인기가 높다. 특히 어린아이들은 사족을 못 쓸 정도로 좋아한다. 간혹 말썽을 부리긴 하지만 대부분 크리스에게 호감을 보인다. 각종 매스컴에 출연할 만큼 유명인사로까지 자리 잡는다. 일반 가정집은 물론 레스토랑에서도 크리스를 위해 음식찌꺼기를 기꺼이 내놓는다. 다소 과분할 정도로 많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돼지를 가축 이상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고, 동물 애호가도 아닌  나로서는 그들의 이런 문화가 신기하기만 하다(더구나 애완용과는 거리가 먼 돼지이지 않은가). 사람이 아닌 것과의 정신적인 교감. 많은 사람들이 보여준 완벽에 가까운 사랑이 무녀리로 태어난 크리스를 보통 돼지들보다 무려 13개월 6개월을 더 살게 한 힘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돼지의 추억』에는 크리스와 더불어 오랜 세월을 살다간 콜리라는 개와 온갖 동물들이 등장한다. 사이 몽고메리 개인사도 다분히 녹아들어 있다. 사위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끝까지 인정하지 않았던 부모님,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드러나는 가족의 비밀, 순다르반스 호랑이, 아마존의 분홍돌고래, 타란툴라 독거미 탐사 등 그녀의 삶 대부분을 기록하고 있다. 시종일관 기막히게 재미있지는 않다. 하지만 이 책은 마음을 따스하게 다독이는 매력이 있다. 사람과 동물간의 새로운 관계를 연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말 못하는 동물과의 잔잔한 교감이 가슴을 두드린다.

 이 책은 ‘오래 살다간 돼지가 있었다’라고 말하는 책이 아니다. 돼지로 인해 변화된 인간의 삶과 특별한 교감에 관한 이야기다. 크리스는 릴라 가족에게 희망의 메시지가 되어준다. 암에 걸린 켈리와 특별한 우정을 나누는가 하면 정원에 관심 없던 사이 몽고메리에게 멋진 정원을 선물하기도 한다. 용서와 화해를 가능하게 하고, 소통하지 않던 세계로 길을 내어주기도 한다. 무엇보다 그 누구라도 크리스를 만나면 소소한 행복에 빠져들게 된다. 크리스가 뭔가 특별한 일을 했냐고? 천만에! 단지 오랜 세월 사람들 곁에 있어 줬을 뿐이다.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에 위안이 되는 존재. 꼭 사람일 이유는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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