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브? 슈퍼! 문학동네 청소년문학 원더북스 9
에를렌 루 지음, 손화수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3월
평점 :
절판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
 - 에를렌 루, [나이브? 슈퍼!]를 읽고

 당신은 누구인가요? 무엇을 위해 지금 그 일을 하고 계신가요? 오늘 하루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무엇인가요? 행복한가요? 당신을 기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언제 화가 나나요? 화가 나면 어떻게 푸시나요? 아무 걱정 없이 웃어본 적은 언제인가요?

 가끔 질문이 끝도 없이 쏟아질 때가 있다. 나에 대한 질문인 건 분명한데 마땅한 해답을 찾을 수 없다. 막상 어제 무슨 일을 했는지조차 기억이 나질 않는다. 마치 시간의 일부를 날카로운 가위로 싹둑 잘라낸 것처럼 지나온 삶이 가물거린다. 뭔가에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멍하다. 답답하고 먹먹한 느낌. 혼란스럽다. 내가, 이 사회가, 온 우주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모르겠다.

 어느 날 문득 세상의 모든 것들이 무의미하게 다가올 때. 누군가는 여행을 계획하고, 누군가는 잘 다니던 회사에 사표를 던진다. 또 누군가는 홀로 칩거에 들어가기도 한다. 삶이란 그저 그렇게 하룻밤 고민하고 끝낼 문제가 아닌데 이것만큼 깊숙이 파고들어가기 힘든 것도 없다. 삶의 본질적인 문제에 늘 정면승부를 피한 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사는 대로, 살아왔던 대로, 살아지는 대로 살아가기에 이미 익숙해져 있으므로.

 [나이브? 슈퍼!]는 평범한 청년의 자아(본질) 찾기 과정을 보여주는 소설이다. 주인공 ‘나’는 스물다섯 생일날 아침, 문득 그동안 썩 잘 살아오지 못했음을 깨닫게 된다. 갑자기 모든 것이 무의미하며 엉망인 듯 혼란스럽다. 뭔가 달라져야 할 시기, 앞으로의 인생에 대해 심사숙고하기 위해 지나온 삶의 흔적들을 하나씩 지워나간다. 마침 출장을 떠난 형의 집에 한 달 동안 틀어박힌 채 앞으로의 인생을 계획해 나갈 생각이다.

 ‘나에게로 떠나는 여행’이라는 말이 잘 어울리는 소설! 이 책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평범한 일상의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등장인물도 좋은 친구 킴, 나쁜 친구 켄트, 그리 착하지 않은 형, 이웃집 꼬마 뵈레, 어쩌다 생긴 여자 친구 리세 정도다. 부모와 조부모도 잠깐 등장한다. 주인공이 말하고 행동하고 생각하는 것들은 어떻게 보면 무덤덤하기까지 하다. 그런데 무슨 마법에라도 걸린 것처럼 키득키득 웃으며 읽게 된다. 지극히 일상적이어서 무심코 지나쳤던 것들, 무심코 방치해 두었던(어쩌면 잊고 있었던) 감정들을 톡톡 건드려 주기 때문이다. 진지한 가운데 가끔 엉뚱한 재치를 선보이기도 한다. 책을 읽고 있으면 내 몸의 웃음 감각이 되살아나는 기분이다.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 않아도 관심만 기울인다면 충분히 특별할 수 있는 것이 인생이다. 고맙게도 이 책은 평범하지만 위대한 이 진리를 깨닫게 해준다.

 ‘나’는 지나온 인생을 정리해 보기 위해 목록을 만들어 나간다. 갖고 있는 것들, 갖고 있지 않은 것들을 시작으로 자신과 일상을 되돌아 볼 수 있는 수많은 목록을 작성한다. 기분 전환과 생각을 단순하게 정리하는데 도움이 되는 물건도 마련한다, 공과 망치 놀이 판자가 그것이다. 종종 자전거를 탄다. 가끔은 고층 호텔의 엘리베이터도 탄다. 오르고 내리기를 쉼 없이 반복하며 사람들에게 말 걸기를 시도한다. 공원 벤치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관찰하며 질문을 건네기도 한다. 마침내, 모든 일은, 제자리를 찾아, 잘 돌아갈 거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여행을 통해 삶에 대한 통찰력을 얻은 셈이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깨달은 ‘나’는 틈새시장을 노린 사업도 구상해 놓았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면 사람들은 인생이라는 또 다른 의미의 여행을 시작하게 된다. 떠나기 전과 같을 수도 있지만 여행에서 돌아오면 이미 많은 것들이 달라져 있음을 알게 된다. 마음이 상황까지 바꾸어 놓는 것이다. 여전히 수많은 의문과 숙제를 품고 살아가겠지만 받아들이는 마음과 해결하는 방법에서는 분명 차이가 생겨난다.

 이 책의 주인공 ‘나’처럼 언제 갑자기 인생이 무의미하게 다가올지 모른다. 삶의 방향을 잃고 헤매는 것은 청소년만의 문제가 아니다. 젊은 세대들, 중장년층, 노인이 되어서도 ‘인생’은 언제나 의문투성이일수 있기 때문이다. 그때 얼마나 정확하게 현실을 직시하느냐에 따라 앞으로의 인생이 달라질 수 있다. 한 번쯤은 자신의 내면을 순수하게 바라볼 필요가 있다. 지극히 일상적이고 평범한 것들 중 어떤 것에 반응을 하며 살아가는지 알게 되면 삶은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게 된다.

 책을 읽는 동안 무척이나 행복했다. 많이 웃었고, 진지하게 생각도 해봤다. 아무리 많은 시간이 주어진다 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면 발견하지 못할 자잘한 일상의 풍경들. 그 일상들이 모여 한 사람의 역사가 만들어진다고 생각하니 소홀히 보아 넘길 것이 없다. 그렇다고 심각해질 필요는 없다. 그저 무심하게 대했던 것들에 관심을 기울여 볼 것. 그것만으로도 남은 인생이 충분하게 차오르는 느낌이다. 
  주인공처럼 나도 목록 만들기를 시작해봐야겠다. 그 중에서도 매일 빼먹지 않고 해보고 싶은 것은 ‘오늘 본 광경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들’이다. 이 세상에 똑같은 것은 없다. 매일 지루한 일상이 반복되는 것 같지만 따지고 보면 같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단지 미묘한 차이를 발견하지 못할 뿐이다. 목록을 작성하다 보면 자연스레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게 된다. 방향을 잃고 살아가는 것 같다면 수시로 자신을 되돌아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나아가야할 방향과 통찰력은 그렇게 생겨나는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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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cteur 2009-04-14 2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주인공이 틈새시장을 노려 구상한 사업 아이템 너무 웃기지 않던가요? ㅋㅋ
묘하게 코믹한 소설이더라고요...

soulnote 2009-04-21 09:56   좋아요 0 | URL
lecteur님 말씀에 절대 공감합니다^^
이 책을 읽는 중 여러 번 자지러질뻔 했답니다ㅎㅎ
 
오두막
윌리엄 폴 영 지음, 한은경 옮김 / 세계사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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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덧나지 않게 상처를 치료해주는 기적의 오두막
 - 윌리엄 폴 영, [오두막]을 읽고 

 사람은 누구나 마음속에 아픔을 묻어 둔 오두막을 한 채씩 간직하며 살아간다. 은밀하고 비밀스런 구석에 숨겨둔 이 오두막은 빛조차 스며들지 않아 으스스하다. 혼자서는 열어볼 엄두조차 내기 힘든 다 쓰러져가는 오두막. 그렇다고 누군가 대신 열어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위태로운 오두막의 문을 이제 그만 열어 보라. 삐걱대며 열리는 문 사이로 한 줄기 빛이 번져올 것이다. 평생 느껴보지 못한 온화한 그 기운에 얼어붙었던 마음도 녹아내릴 준비를 한다.
 아픔을 씻어낸 자리에는 그만큼 기쁨이 들어찬다. 살아가면서 경험하게 되는 일상의 소소한 행복에 비로소 눈을 뜨게 되는 것이다. 슬픔은 묻어둔다고 해서 저절로 치유되는 것이 아니다. 괴롭고 힘들더라도 한번은 정면으로 바라봐야 한다. 치유와 화해는 그렇게 시작되는 것이다.

 살아가는 동안 누구나 한번쯤 불가사의한 경험을 하게 된다. 이성적 판단과 과학적 논리로는 도저히 증명되지 않는 신비한 현상을 겪고 나면 보이지 않는 힘의 존재를 어느 정도 인지하게 된다. 굳이 종교인이 되지 않더라도 그러한 경험은 삶에 작은 변화를 몰고 온다. 느낌표보다 더 많은 물음표를 던지는 초자연적 현상들을 나는 어디까지 긍정하고 어디까지 부정해야 하는 것일까.

 [오두막]을 읽는 내내 수많은 물음표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어느 날, 맥에게 날아든 파파(맥의 아내는 하나님을 ‘파파’라 부른다)의 편지 한 통. 미시(막내 딸)가 살해된 오두막으로 오라는 하나님의 메시지다. 하나님이 편지를?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하면서도 어느 새 맥은 오두막을 향해 가고 있다. 그때부터 시작되는 환상적인 경험과 대화들. 믿기 힘든 이 일들을 작가는 실화라고 밝히고 있다. ‘뒷이야기’를 읽고 나서야 대필 작가라는 소설적 장치가 사용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작가가 픽션임을 밝혔음에도 나는 이 소설이 픽션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실재와 실재하지 않음의 모호한 경계에 걸려들고 만 것이다.

 [오두막]은 내 마음에 회오리를 몰고 왔다. 회오리는 작은 티끌조차 남기지 않고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쓸어간 후 텅 빈 폐허만을 던져준다. 그러나 나에게 몰아닥친 회오리는 마음속에 부유하던 찌꺼기들을 몰아내고 깨끗한 세상을 안겨 주었다. 오해와 불신, 시기와 질투, 원망과 분노, 두려움과 조급함을 몰아낸 자리에 봄 햇살처럼 따사로운 온기가 들어찬다.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가 끝도 없이 이어질 줄 알았다면 애초에 펼쳐들지 않았을 이 책이 신비한 마법을 부리고 있는 중이다.
 짐작대로 나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 [오두막]을 읽고 어떤 깨달음을 얻었다고 해서 당장 기독교인이 될 것도 아니다. 단 하나, 마음에 미세한 변화가 찾아온 것만은 확실하다. 큰 의미 없이 여겨졌던 용서 관계 사랑 믿음 등의 단어가 새로운 의미로 다가옴을 느낀다.

 자식을 죽인 범인을 진정으로 용서할 수 있을까. 용서란 어떤 의미이며, 거기에 진정성이 더해진다는 것은 또 어떤 느낌일까. 몇 해 전 희대의 살인마 유영철에 관한 짤막한 신문 기사를 본 기억이 난다. 유영철에게 잔인하게 살해된 자식의 부모가 그를 양자로 받아들였다는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믿을 수 없고 믿기지도 않으며 내 상식과 도덕적 판단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찬찬히 되짚어보니, 그 알 수 없는 일 배경에는 ‘하나님’이라는 존재가 투영되어 있었던 것도 같다.
 그때 잠깐 스쳤던 물음표가 [오두막]을 통해 어느 정도 느낌표로 바뀌는 듯하다. [오두막]의 주인공 맥 역시 비슷한 상황에 놓여있다. 딸의 시신조차 찾지 못한 상황에서 맥은 범인을 용서하게 된다. 용서함과 동시에 자신을 짓누르고 기쁨을 파괴하던 것으로부터 해방된다. 맥은 어린 시절 자신을 학대하던 아버지도 용서한다. 미시의 죽음을 자책하던 케이트의 아픔도 어루만져 준다. 용서가 화해를 불러오고 사람 사이의 소통과 관계의 물꼬를 열어준 셈이다.

 지금까지 나는 사람들과 어떤 관계를 맺으며 살아왔는지 되돌아보게 된다. 의무와 책임, 구속과 복종이 없는 ‘자유로운 관계’를 유지해 왔던가. 아닌 것 같다. 어떤 관계든 불필요한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오직 믿음과 사랑으로 충만한 관계, 진심으로 관심을 기울일 수 있는 관계는 아니었던 것 같다. 관계의 회복을 위해 해야 할 일이 서서히 떠오른다.

 이 책을 읽기 전 나는 잔악무도한 연쇄살인범에게 아이를 빼앗긴 아비가 고통의 긴 수렁을 건너오는 과정에서 ‘오두막’이 하나의 전환점이 되리라 생각했다. 예상은 적중했으며, 이 단순한 논리로는 감당하지 못할 엄청난 비밀 또한 숨겨져 있다. 직접 읽어보지 않는다면 이해하지 못할 이야기들. 읽어본다고 한들 모두 다 이해할 수는 없는 이야기들. 그럼에도 나는 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어보길 바란다. 비종교인인 나로서는 읽는 중간에 덮어버리고 싶을 때도 있었지만 차마 그러지 못했다. 절대자에 대해 막연히 의구심을 품은 채 한 쪽 구석에 던져놓기에는 절절하게 다가오는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처절한 고통을 겪는 맥을 따라 걷다보면 어느 덧 치유의 길로 들어선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고백하건대 나는 이 책에 나오는 대화 전부를 이해하지는 못한다. 아마 평생이 가도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대신 마음 한 자리가 누군가 어루만진 것처럼 따스해져 온다. 그 온기로 내 마음의 오두막에 불을 지필 수 있을 것 같다. 어둠 속에 몰아넣고 잊은 듯 살았던 크고 작은 상처들. 이제 그 상처들을 끄집어내 소독을 하고 약도 발라줘야겠다. 딱지가 앉고 새 살이 돋는 동안 경험하게 될 일들을 떠올려 보니 벌써부터 설렌다.
 
 [오두막]을 통해 나는 수없이 덧나고 곪아있는 내 안의 상처를 돌아보게 되었다. 그 상처를 어떻게 치료해야 할지 조금은 알 것 같다. 나 자신과 먼저 화해를 한 후 사람들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생각해 봐야겠다. 방법은 이미 나와 있다. 그 방법을 따라 실천하는 일만 남아있을 뿐이다.
 
    덧나지 않게 상처를 치료해 줄 자신만의 오두막을 지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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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음의 탄생 (양장) - 젊음의 업그레이드를 약속하는 창조지성
이어령 지음 / 생각의나무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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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왜, 젊음을 업그레이드해야 하는가
  - 이어령, [젊음의 탄생]을 읽고

 배우는 것에서 즐거움을 느껴본 적이 있었던가? 있었던 것 같다. 처음으로 한글을 깨우칠 때는 세상이 달라보였을 것이다. 고요하던 세계가 일제히 말을 걸어오듯 눈과 귀가 소란스러웠을 것이다. 호기심에 질문도 많이 했을 것이다. 답을 얻었거나 얻지 못했거나 한 번 생긴 궁금증은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았으리라. 알아갈수록 세상은 점점 더 흥미진진한 탐험의 대상으로 바뀌어 간다. 짐작건대, 나는 분명 그러한 시기를 지나왔을 것이다.

 이어령 작가는 [젊음의 탄생]에서 아홉 개의 매직카드를 이용해 젊은이들에게 ‘새로운 청년상’을 제시하고 있다. 책을 읽기 전 늘 하던 습관대로 목차부터 살펴보았다. 어려웠다. 제시된 아홉 장의 카드는 생소했고, 한자어와 신조어도 한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목차 훑어보기를 그만두고 첫 장을 펼쳤다. 그때부터 손에서 책을 놓을 수가 없었다. 이 책은 자칫 어려울 수 있는 ‘젊음의 업그레이드를 약속하는 창조지성 9’ 라는 주제를 수많은 예시를 통해 알아듣기 쉽게 알려주고 있다. 일일이 언급하기에는 담아야 할 내용이 방대하므로 핵심적인 아홉 가지 카드에 대해서만 정리를 해보도록 하겠다.

 첫 번째 카드는 카니자 삼각형(Kanizsa Triangle)이다. 이것은 실재하지 않지만 뇌와 마음을 통해 보여지는 가상공간의 삼각형을 말한다. 상상력에 의해 탄생하는 이 공간은 개인이 활용하기 나름이다. 우리에게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 남이 시키는 대로(타율)만 살아가다보면 타인에 의존한 소극적인 삶을 살기 쉽다. 젊은이라면 자유 의지(자율)에 따라 추진력을 갖고 가능성을 향해 높이 날아올라야 한다. 목표를 향해 더 즐겁고 신명나게 창조지성의 날개를 펼쳐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가상의 공간을 잘 활용해야 한다.
 두 번째 카드는 물음느낌표(interrobang)다. 물음 느낌표란 물음표안에 느낌표가 자리한 것으로 생각과 행동을 하나로 합쳐 창조적 지성에 도달하라는 의미이다. 질문만 늘어놓다보면 정작 중요한 순간에는 행동으로 옮기지 못해 낭패를 볼 수가 있다. 젊은이라면 끊임없이 질문하되 감동받은 것을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결단력을 길러야 한다.

 세 번째 카드는 개미의 동선(Ant's Trace)이다. 개미는 먹이를 찾기 위해 사방팔방 헤매고 다닌다. 그 동선을 따라가 보면 방향성 없이 어지럽게 뒤엉켜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먹이를 찾은 개미는 곧장 집으로 돌아간다. 어느 곳에 있든 집에 이르는 최단거리 직선코스를 알아낸다고 한다. 돌아가는 길에는 페르몬을 뿌려 다른 개미들이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즉각 집으로 돌아올 수 있게 만든다고 한다. 본능에 따라 움직이는 자연현상을 가만히 관찰해 보면 그 속에 해답이 들어 있는 경우가 의외로 많다. 젊은이들도 이 개미처럼 원하는 것을 찾을 때까지 끊임없이 탐색을 해야 한다. 열정을 갖고 탐구하고 노력하다 보면 우연 속에서 운명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자신을 어지럽히는 수많은 잡음 속에서도 올곧은 방향을 찾게 되는 것이다.
 네 번째 카드는 오리-토끼(Duck-Rabbit Illusion)로 일명 ‘애매도형’ 혹은 ‘다의도형’으로 불린다. 이 카드 한 면에 오리와 토끼 그림이 모두 들어있다. 하지만 오리라고 인지하게 되면 토끼의 모습은 사라지고, 토끼라고 인지하게 되면 오리의 모습은 사라진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다. 하나를 선택하면 다른 하나는 포기해야 한다. 당장 점심 메뉴부터 고민을 해야 한다. 퇴근 후 친구와 약속을 잡을 것인지, 곧장 집으로 향할 것인지, 좀 더 나은 미래를 위해 과감히 사표를 던질 것인지, 현 직장에서 눈치껏 살아남을 것인지. 선택은 사소한 것에서부터 인생을 뒤흔드는 중대한 문제에 이르기까지 한 순간도 주저할 틈을 주지 않는다. 저자는 이제 이 같은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이냐 저것이냐’가 아닌 ‘이것도 저것도’의 ‘균형’과 ‘융합’의 시대를 열어야 한다는 것이다. 양면성을 인정할 때 나아가야할 방향을 설정할 수 있고, 모두가 만족할만한 합일점 창출할 수 있는 것이다.

 다섯 번째 카드는 매시 업(Mash card)이다. 매시 업은 원래 음악 용어로 다른 장르에 속한 두 개의 노래를 혼합한 새로운 곡을 의미한다. 이 카드를 제시한 이유는 세상에 존재하는 여러 장르간의 벽을 허물고, 시너지 효과를 발휘할만한 크로스오버를 연출하라는 것이다. 이미 세계는 통합과 융합의 시대로 나아가고 있다. 그 속에서 새로운 가치가 싹트고 있다. 지금 당장 그 싹을 틔울 수도 있다. 어디에도 벽은 없다. 경계를 넘어 가치를 창출하는 것은 개인과 사회 나아가 시대의 흐름까지 바꿔놓을 수 있다. 누가 이 같은 일을 해낼 수  있는가. 바로  젊은이들이다.
 여섯 번째 카드는 연필의 여섯모꼴(Hexagon)이다. 연필의 단면을 상징하는 이 카드는 벌집 모양과 동일하다. 최소의 재료로 최대의 면적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육각형. 사람은 세모, 네모, 동그라미 등 무수한 시행착오 끝에 비로소 육각형의 안정적이고 효율적인 구조를 발견해냈다. 반면, 벌은 인류가 시작되기 수십 만 년 전부터 이미 육각형의 구조를 알고 있었다. 순전히 본능에 의해서. 우리는 자라오면서 자연을 ‘보호’의 대상으로 인식하도록 교육받아왔다. 끊임없이 ‘보호’만을 외쳤지, 자연을 통해 무언가를 배우려는 노력은 게을리 한 것 같다. 이제 생명과 자연으로부터 지혜를 빌려와야 한다. 더 이상 ‘보호’가 아닌 ‘학습’의 대상으로 자연을 대해야 한다. 연필 끝에 달린 지우개를 이용하듯 경직된 사고에서 벗어나 유연한 사고를 꾀해야 하는 것이다.

 일곱 번째 카드는 빈칸 메우기(Blank)이다. 우리의 인생은 빈칸을 채워나가는 것과 닮아 있다. 사람이면 누구나 완벽하지 않다. 가진 것이 없거나 일부만을 가졌다. 부족한 부분을 채우기 위해서는 자신만의 상상력과 창의력을 총동원해야 한다. 결핍은 동기부여와 목표의식을 심어준다. 목표는 창조력의 근원이 된다. 살아가면서 만나게 되는 수많은 빈칸을 개인의 사사로운 이득보다는 타인과 소통할 수 있는 ‘공감’의 차원에서 채우려 노력해야 한다. 여백의 무한한 가능성을 독창적으로 채워나간다면 차별화를 실현할 수 있다.
 여덟 번째 카드는 지(知)의 피라미드(Knowledge Pyramid)다. 지(知)-호(好)-락(樂) 즉 ‘아는 자와 좋아하는 자 그리고 즐기는 자 중 제일은 즐기는 자’라는 논리다. 하루를 살더라도 생동감 있게 살기 위해서는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아야 한다. 진정으로 즐기는 자만이 정상에 등극할 수 있다. 넘버원을 뛰어넘는 온리원, 프로를 넘어선 그레이트 아마추어가 되는 길을 찾아야 한다. (아마추어란 ‘사랑하다’라는 라틴어에서 유래. 원래는 수준이나 기량의 측면이 아닌 일을 대하는 태도를 의미함.) 오늘 날, 즐기는 자들이 늘어나고 있다. 소프트파워, 공감 네트워크로 이어지는 길은 열려 있다. 그 위에서 마음껏 소통을 꿈꾸면 된다.
 마지막 아홉 번째 카드는 둥근 별 뿔난 별(Form of stars)이다. 현재 그 경계와 출처가 모호하지만 원래 동양과 서양의 별모양은 서로 달랐다고 한다. 자세히 따지고 들어가 보면 완벽하게 다르지도 않다. 서로 간에 합일점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은 로컬과 글로벌이 공존하는 시대가 되었다. 어떤 것도 로컬 차원에서 단정 지을 수 없다. 모든 일은 시대와 세대를 거쳐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변화의 속도는 앞으로 점점 더 빨라질 것이다. 로컬에 국한되지 않고 글로벌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융합을 시도해야 한다. 지오컬쳐, 글로컬리즘을 통해 세계를 향해 뻗어가는 창조지성이 되어야 한다.
 
 [젊음의 탄생]을 통해 ‘배움’이 즐거운 일임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처음 한글을 깨치며 세상을 알아갈 때의 호기심처럼 여전히 배워야 할 것이 많은 세상에 호기심이 생긴다. 배워가는 것의 즐거움, 알아가는 것의 즐거움을 얼마 만에 느껴본 것일까. (이제 즐기는 즐거움을 터득해야할 차례다.)
 이어령 작가는 이 책의 독자를 ‘대학생’으로 한정하고 있지만, 어느 누가 읽더라도 가슴이 두근거릴 것이다. 책을 읽는 동안 정보를 전달받는 것이 아니라 깨달음을 얻게 된다. 고개를 갸웃거릴 만큼 어렵고 딱딱한 이야기지만 사실 그런 대목은 얼마 없다. 과장을 조금 더하면 순간순간 깨달음의 탄성이 터져 나온다. 왜, 젊음을 업그레이드해야 하는지 큰 흐름을 통해 이야기하고 있다.

 책 말미에는 아홉 장의 카드에 대한 개념이 정리되어 있어 이해를 돕는다. 나의 옹졸한 시선으로 정리해본 위의 내용이 이 책의 진가를 발견하는데 방해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책에는 아홉 장의 카드에 담긴 이야기보다 훨씬 더 흥미진진하고 재미있는 내용들이 많이 수록되어 있다. 읽는 내내 정신이 번쩍 드는 이유는 이러한 수많은 예들과 마주하기 때문이다. 깨달음이 당신의 마음과 정신을 연속적으로 강타할지 모르니 주의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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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샤 튜더 클래식 03: 코기빌 마을 축제 - 코기빌 시리즈 1 타샤 튜더 클래식 3
타샤 튜더 지음, 공경희 옮김 / 윌북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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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 같은 타샤 할머니의 동화 마을 코기빌
 - 타샤 튜더, [코기빌 마을 축제]를 읽고

 지난 겨울, 꼼짝도 하기 싫던 어느 추운 날, 창밖으로 비치는 햇살이 유난히 밝고 싱그럽게 느껴졌다. 뭔가에 홀린 듯 외투를 껴입고 밖으로 나갔다. 쌩하고 바람이 불었다. 머리카락이 제멋대로 흩날리기 시작했다. 그래도 이왕 나왔으니 광합성이나 해볼 요량으로 햇볕 드는 자리를 골랐다. 도저히 바람을 맞고 서 있을 자신이 없어 뒤돌아섰는데 태양까지 등지고 말았다. 두 손과 얼굴이 금세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그만 들어가 봐야겠다’ 라고 인내심이 얼마 못 버티고 바닥을 드러내는 순간, 어디선가 따스한 기운이 감도는 듯했다. 겨울 햇살이 칼바람을 뚫고 등으로 다닥다닥 내려앉고 있었던 것이다. 한번 점화된 온기는 체온과 맞닿아 어느 정도 훈훈함을 유지시켜 주었다. 온 몸이 떨려오는데 등허리에서는 온기가 느껴지다니. 신기한 경험이었다. 겨울날, 한 줄기 햇살의 위력이 그렇게 강할 줄은 몰랐다. 마치 타샤 할머니를 처음 만난 날처럼 마음까지 따스해져왔다.

 [코기빌 마을 축제]는 [코기빌 납치 대소동]과 [코기빌의 크리스마스]로 이어지는 ‘코기빌 시리즈’ 중 첫 번째 책이다. 타샤 튜더의 대표적인 그림동화로 코기, 토끼, 고양이, 보거트 등이 함께 모여 사는 평화로운 시골마을 코기빌의 축제 풍경을 담고 있다. 주인공은 당연히 타샤 할머니가 생전에 가장 사랑했던 동물 코기다. 다리가 짧고 꼬리가 없는 여우 빛깔의 개라고 한다. 첫 장을 펼치기 전부터 독자를 반기는 것 역시 코기 가족들이다. 타샤 할머니는 50여 년 간 이 개를 길렀다고 하는데 그에 대한 애정이 곳곳에서 묻어난다. 표정이 어찌나 천진난만하고 귀여운지 이 녀석만 보면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슬쩍 올라간다.

 어느 곳이든 불청객이 있기 마련. 코기빌 마을에도 톰캣이라는 고양이 한 마리가 말썽이다. 축제날 하이라이트로 염소 경주 대회가 열린다. 상금과 트로피가 걸려 있는 만큼 경쟁 또한 치열하다. 이 경기의 최대 라이벌은 톰캣과 칼렙이다. 칼렙은 코기를 모델로 한 브라운 가족의 사랑스런 아들로 순진무구하고 열정적인 캐릭터다. 마을 사람들 모두 축제로 들떠 있을 때 톰캣만이 우승을 위해 은밀하게 음모를 꾸민다. 칼렙은 과연 이 난관을 잘 헤쳐나갈 수 있을까. 결론을 미리 밝히면 재미없으니 이쯤에서 함구!

 [코기빌 마을 축제]는 타샤 할머니가 옛날 미국의 어느 시골 마을에서 열렸던 축제를 회상하며 쓴 작품이라고 한다. 그래서일까. 그림을 보면 직접 경험해본 일처럼 생동감이 넘쳐난다. 특히 축제날의 오밀조밀한 풍경은 정밀묘사처럼 세밀한데, 어느 각도에서 들여다봐도 모두가 주인공인 마냥 표정들이 살아있다. 한 발만 들여놓으면 나도 축제를 즐길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풍성하게 피어오른 꽃과 푸른 나무, 유유히 흐르는 강물과 한가로이 노니는 오리들. 자연에 둘러싸인 평화로운 시골 마을로 당장 달려가고 싶어진다.
 
 이 책은 십여 분 정도면 다 읽을 수 있지만 최대한 느리게 읽어 나갔다. 세 번 정도 읽고는 그림을 따라 내용을 찬찬히 떠올려 보았다. 등장인물의 표정에 따라 즉석에서 이야기를 만들어 보기도 했다. 활자를 쫒아갈 때는 발견하지 못했던 작은 표정까지 모두 눈에 들어온다. 글을 위한 그림이 아닌, 그림만으로도 충분히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타샤 할머니.

 할머니를 처음 만난 건 [탸샤의 특별한 날]을 통해서이다. 이 책은 1월부터 12월까지 가족과 마을 사람들이 함께 만들어가는 축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어린 아이들이 직접 만들고 기르고 참여해서 선보이는 갖가지 축제들. 우리에게도 몇몇 축제가 있다. 생각해보면 직접 참가해 본 전통방식의 축제는 단 하나도 없다. 기억에 남는 거라곤 학교에서 주최하는 운동회가 전부다. 그런데 타샤 할머니는 후손들에게 자신이 어린 시절 해 오던 축제를 손수 가르쳐 주셨고 또 책으로 남기셨다. 텔레비전을 통해 축제를 이어가는 그녀의 자녀와 손주들을 본 적이 있다. 그 아이들의 어린 시절은 추억으로 가득할 것이다. 축제를 준비하는 동안 추억이 쌓이고, 그 추억 속에서 공동체 의식과 상상력을 키워나갈 것이다. 나에게는 없는 어린 시절. 내 아이에게도 없을지 모를 그 어린 시절. 책을 읽고 텔레비전을 보는 내내 부러웠다.

 그러는 동안 한 가지 목표가 생겼다. 내 아이에게는 ‘이야기’를 만들어주자고. 어른이 되어서도 추억할 수 있는 ‘이야기 거리가 있는 어린 시절’을 만들어주자고. 타샤 할머니만큼은 할 수 없겠지만 노력해 볼 생각이다. 내 아이가 자라서 혼자 지낸 시간보다 아이들과 함께 어울렸던 한 때를 떠올릴 수 있다면 좋겠다. 컴퓨터 게임보다는 자연을 가까이하는 아이로 키우고 싶다. 그 속에서 할 수 있는 놀이를 아이와 함께 만들어가고 싶다.

 타샤 할머니를 생각하면 마음 한 자리에 햇살이 들어차는 것만 같다. 맨발로 정원을 가꾸시던 그 느릿한 걸음과 다정한 손길이 떠오른다. 자연과 동물을 사랑한 타샤 할머니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책들. 언제 만나더라도 기분이 좋아진다. 타샤 튜더는 나에게 작가이기보다 한 사람의 ‘할머니’이다. 체구는 가녀리지만 마음만큼은 온 세상을 다 품고도 남을만한 분. 할머니가 만들어준 코기빌 마을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이제 이 마을에서 어떤 납치 소동이 벌어질지, 크리스마스에는 어떤 이야기들이 펼쳐질지 기대된다. 얼른 다음 책들을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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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 마음으로 찍은 풍경 - 문인 29人의 춘천연가, 문학동네 산문집
박찬일 외 엮음, 박진호 사진 / 문학동네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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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도 추억할만한 도시가 있었으면 좋겠다
-박찬일 외 [춘천, 마음으로 찍은 풍경]을 읽고

 누군가 인연을 마무리한 자리에서 당신은 새로운 인연을 시작하겠지요.
 누군가 함박웃음을 터트렸던 곳에서 당신은 깊은 슬픔을 토해내겠지요.

 가고 옴이 정해져 있지 않은 곳. 사랑과 이별, 기쁨과 슬픔, 희망과 좌절을 일정한 비율로 나눌 수 없는 곳. 도시는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쉴 새 없이 받아들이고 또 흘려보낸다. 사연이 만들어지고 쌓이고 묻히고, 또 다른 사연이 생겨나는 동안 도시는 차츰 변해간다. 어떤 도시든 하나의 이미지로 단정 지을 수 없다. 같은 곳에 살아도 같은 일을 경험해도 사람은 수십 개의 퍼즐 조각 중 자신에게 들어맞는 오직 한 조각만을 마음에 새기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는 그리움, 누군가에게는 아픔, 누군가에게는 환희의 순간으로 기억되는 ‘도시’라는 이름. 도시는 그 곳에 살고 있거나 혹은 스쳐지나간 사람들 모두의 이야기를 그러안은 채 오랜 비밀을 지켜내느라 때로는 의뭉스럽고 때로는 신비롭기까지 하다. 춘천 역시 그러한 곳!

 [춘천, 마음으로 찍은 풍경]은 스물아홉 명의 문인들이 써내려간 스물아홉 가지의 춘천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 문인들은 춘천(혹은 강원도)에서 태어났거나, 춘천을 스쳐지나갔거나, 한때 춘천에 살았거나, 현재 춘천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 한 자리에 다 모이기조차 힘들 것 같은 저명한 문인들이 오직 ‘춘천’만을 생각하며 한 권의 책으로 만나게 된 것은 춘천시청의 제안 때문이다. 언뜻 생각하기에 시청이 춘천에 관한 책을 기획하고 문인들에게 제안한다는 것은 보통의 시청다운(?) 발상과는 거리가 먼 듯하다. 그러나 찬찬히 되짚어보면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수많은 문인을 배출한 고향이 ‘춘천’이고, 수많은 문인이 제2의 고향으로 삼은 곳 또한 '춘천'이다. 바로 ‘춘천’이기에 가능한 일인 것이다.

 춘천하면 낭만이라는 단어가 먼저 떠오른다. 춘천을 노래하는 대중가요를 듣고 자란 탓이기도 하거니와 이름에서부터 느껴지는 봄기운이 마음을 설레게 한다. 시청에서 이 같은 프로젝트를 기획했다는 것도 호기심을 자극한다. 대체 춘천에 스며있는 자부심과 대중성이 어느 정도이기에 책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려는 것일까.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을 것 같은 도시 춘천은 스물아홉 명의 문인을 만나 비로소 그 은밀하고 농도 깊은 속내를 보여주기 시작한다.

 이 책은 대부분 회상에 근거하고 있다. 젊은 날의 꿈과 낭만, 사랑의 환상과 추억을 노래한다. 때로는 죽음과 같은 고통과 억압 회한이 쓸쓸하게 그려지기도 한다. 춘천은 아무 자리에서나 쉽게 털어놓을 수 없는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추억(p.82)’의 집결체다. '팬터마임처럼 말하지 않아도 수많은 의미를 쏟아내(p.317)'는가 하면, ‘천년을 산 것보다 더 많은 추억(p.269)’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문학의 원천이 되고 정서를 키워낸 곳. 겉모습은 변해가지만 한 번 기록된 추억은 ‘언제나 진행형(P.51)'이기에 수많은 문인들이 춘천을 떠올리고 춘천에 머무르기를 원하는 것이 아닐런지.

 춘천에 대한 추억담을 따라 거닐어 보았다면, 익숙한 지명을 따라 책장을 넘겨보는 것도 잊지 말자. 이 책에는 한 번쯤 들어봄직한 유명한 곳이 많이 등장한다. 더불어 지금은 사라져버린 서점과 다방, 지금까지도 유명세를 이어오고 있는 레스토랑과 카페,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꼭 한 번 가볼만한 곳들이 곳곳에 숨어 있다. 특히 청춘의 보금자리, 낭만의 근원지 역할을 했던 ‘전원다방’이 마음을 사로잡는다. 내가 대학시절을 보낸 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에는 찾아볼 수 없는 풍경이라 부럽기까지 하다. 청춘의 별 볼일 없음과 가난함까지도 보듬어주던 ‘그곳’들은 차츰 개인의 놀이를 담당하는 소위 ‘방’문화(노래방, PC방, 비디오 DVD방 등)로 변모해 왔다. 오래 추억할만한 낭만보다는 일회성으로 그칠 흥미만을 제공하는 셈이다. 이런 문화적 차이 때문일까. 생각해보면 우리 세대는 동시대적인 공감이 부족한 것도 같다.

 공지천과 팔호광장, 소양호, 청평사, 실레마을, 문배마을도 기억에 남는다. 그중에서도 춘천에 가게 되면 꼭 한 번 찾아가고 싶은 곳이 생겼다. 바로 효자1동 신동아아파트 옆에 위치하고 있다는 ‘담 작은 도서관’. 이곳은 보통의 도서관처럼 책을 진열하는데 치중하기보다 아이들의 꿈과 상상력을 키워줄 디자인 요소를 도입했다고 한다. 단순히 책만 읽는 공간이 아니라 책을 통해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는 곳! 어린이 도서관이긴 하지만 그 곳에 가면 어린 시절 뭉게구름처럼 피어오르던 나의 꿈과도 만나게 될 것 같아 설렌다.

 [춘천, 마음으로 찍은 풍경]은 제목에서부터 시(詩)적 이미지가 느껴진다. 본문에 들어서면 한 번쯤 각 소제목의 배열을 눈여겨보자. 마치 시가 흐르듯 마음속으로 제목이 흘러들 것만 같다. 문인들의 글귀 역시 춘천과 맞닿으니 한층 더 깊고 풍부해진 느낌이다. 감상적인 문장들을 따라 밑줄 긋다보면 어느새 이야기가 끝나버린다. 이 책은 기획에서부터 출판까지 시간이 그리 넉넉지 않았다고 한다. 사진을 담당한 박진호 작가의 말처럼 사계절을 모두 담아내지 못했지만, 춘천하면 떠오르는 아련한 물안개 같은 고즈넉함이 사진 곳곳에서 묻어난다.
 
 스물아홉 명의 문인을 따라 추억을 거니는 동안 춘천의 거리와 건물들이 친숙한 실체처럼 다가옴을 느낀다. 이 책은 나를 춘천으로 떠나고 싶게 만든다. 훗날 추억할 수 있는 도시를 하나쯤 갖고 싶게 만든다.

 하나의 이미지로 규정할 수 없는 도시 그리고 사람들. 오늘을 사는 우리의 이야기, 우리를 지탱해온 이야기가 이 책 속에 담겨 있다. 나의 사연과 당신의 사연이 더해져 도시는 오늘도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가고 있다. 당신이 살고 있는 도시에 어떤 이야기가 기록되기를 바라는가. 오늘, 당신이 추억을 만들어가기 나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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