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올레 여행 - 놀멍 쉬멍 걸으멍
서명숙 지음 / 북하우스 / 2008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와랑와랑한 햇살을 따라 걷는 올레 길
- 서명숙, 『제주걷기여행』을 읽고

 코끝을 시리게 하는 찬바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말갛게 높아만 가는 하늘을 그냥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나서는 길. 밖으로 나왔지만 당장 어디로 걸음을 옮겨야 할지 주춤거리게 된다. 오늘이 아니면 볼 수 없는 하늘, 오늘이 아니면 느낄 수 없는 바람을 가까이 두고도 막상 한 발 떼어놓기가 쉽지 않다. 그래 이왕 나온 거 동네 한 바퀴라도 돌고 가자 마음먹는다. 그러다 곧 언제 뒤따라올지 모르는 차 소리에 신경이 곤두선다. 매캐한 매연에 입을 틀어막는다. 어느 순간 두발은 종종걸음을 친다. 집에 돌아와서야 긴장이 풀린다. 기분 전환 차 나섰던 길에서 애먼 긴장만 그러안고 돌아왔다. 마음 놓고 산책 한 번 하기 힘든 도시의 삶. 제주도, 그 곳으로 떠나고 싶은 날이다.

 『제주걷기여행』의 저자 서명숙은 기자로 재직하는 25년 동안 언론계에서 쌓아올린 화려한 이력을 뒤로 하고, 어느 날 훌쩍 산티아고 순례 길에 오른다. ‘이대로 살다가는 죽겠다’라는 절절함이 그녀 나이 쉰 즈음에 일탈 아닌 일탈을 감행하게 만든 것. 800여 킬로미터에 달하는 순례 길을 걷는 동안 군더더기 살이 빠져나간다. 검게 그을려가는 얼굴과는 달리 정신은 한없이 투명해져 간다. 한 달여의 시간이 흐른 후 그녀가 마주한 것은 맑은 영혼이 깃든 자신의 얼굴과 깨달음 하나. 고향 제주에 산티아고 순례 길과 같은 길을 내어 그녀가 느낀 행복을 많은 이들과 함께 나누고 싶다는 것!

 자기 집 마당에서 마을의 거리 길로 들고나는 진입로를 뜻하는 ‘올레’. 너와 나를 이어주는 근원이 되는 것이 올레, 즉 ‘길’인 것이다. 어딘가는 끊어져버렸고, 어느 쯤에서는 사라져 버린 길들을 잇고 찾아가는 동안 제주의 아름다운 풍광이 하나 둘 베일을 벗는다. 차를 타고 휙 지나쳐서는 절대로 마주할 수 없는 풍경이 한 발 한 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배시시 수줍은 얼굴을 드러낸다. 제주의 속살과 만나는 순간이다. 책에는 제주 올레는 물론 제주 올레의 씨앗이 된 산티아고 순례 길과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의 다양한 사연이 녹아들어 있다. 더불어 양념처럼 가미된 그러나 결코 빠질 수 없는 그녀의 솔직한 가족사도 만나볼 수 있다. 제주의 맛과 말(제주도 방언), 토박이들의 삶은 제주를 더욱 살가운 섬으로 보듬어 주게 만든다.

 쉼 없이 걷는 동안 그녀가 만난 사람들, 마주한 풍경들은 그녀안의 많은 것들을 바꾸어 놓았다. 주어진 하루를 정신없이 살아내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누리며 사는 방법도 깨닫게 해주었다. 그녀의 마음 가득 차오른 충만한 행복이 이제 올레 길을 따라 많은 이들의 마음에 가닿고 있다. 길이 아름다워서만은 아닐 것이다.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걸음을 옮기는 동안 오롯이 마주할 수 있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이다. 어쩌면 기억조차 할 수 없는 태고적 순수한 영혼을 만나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러한 경험이 삶에 미세한 파장을 일으켜 결국 거대한 변화를 이끌어내는 것이다.

 책을 읽노라면 걷지 않으면 결코 느낄 수 없는 소중한 경험들이 아직 걸어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얼른 첫 걸음을 떼어놓으라고 재촉한다. 단, 잊지 말아야 할 것. 길 위에서는 간세다리(게으름뱅이)가 되어야 한다. 느릿느릿 걷다보면 바람의 속삭임을, 작은 풀잎의 싱그러움을 온 몸으로 느낄 수 있다. 살아있음을 깨닫고 살아가야 할 길을 가늠하게 한다. 2007년 9월 8일 제주올레 1코스 개장을 시작으로 현재까지 꾸준히 새로운 길들이 이어지고 있다. 더불어 올레폐인이 생겨날 정도로 많은 이들이 그 길을 걷고 있다. 여러 지자체에서 답사를 다녀갔다고 하니 머지않아 제주가 아닌 다른 곳에서도 마음 놓고 걸을 수 있는 길이 생겨나기를 바란다. 물론 제주 올레처럼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최대한 살리는 것이 우선이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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