뻔한 얘기 - 2


뻔한 얘기지만
까만 밤이 있어서
별이 아름다운 거야.
 
정말 뻔한 얘기지만
별이 뜨기를 기다리기 전에
먼저 밤이 되기를 기다려야 해.

그러니
지금 어둠속에 갇혀 있다면

별을 보게 될거라는 걸 잊지마.

정말
뻔한 얘기지?

 
- 서툰여행, 최반, culturegraphics 중에서 -


 


여름과 겨울 사이, 가을이 있다는 건

정말 뻔한 이야기지요?

아침 저녁 찬바람과 한 낮의 더위에 어정쩡해지는 옷차림.

칠부 소매 옷을 꺼내 입다, 어느 새 두 세 겹 겹쳐입고...

그러다 두꺼운 옷으로 자연스레 갈아입곤 합니다.

계절이 오고 가는 것은 뻔한 이치지만

우리는 매번 낯선 가을을 맞이하고

낯설게 가을을 보내는지도 모릅니다.

 

세상에는 뻔하지만 뻔하지 않은 진실이 참으로 많은 것처럼!

 

+

 

아껴 읽고 싶은 책 한권을 만났습니다.  

서툰여행... 참으로 좋은 느낌!

다른 어떤 말을 더 할 수 있을까요... 좋은 책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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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Q84 1 - 4月-6月 1Q84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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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비밀이 몰려오고 있다, 책 읽기를 멈추지 말라!
- 무라카미 하루키, 『1Q84 1권』을 읽고


 이 세상에는 가끔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는 일들이 일어났다 사라지곤 한다. 가끔도 아닌 자주, 인지하지 못한 것이 아닌 관심 밖의 일들이. ‘나랑은 상관없어’라고 생각하면 그만이지만 어느 순간 어떤 일들은 자신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일로 발전해 버리기도 한다. 그때부터는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지금 눈앞에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과거의 사건을 낱낱이 파헤쳐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벌어진 일 혹은 모두가 알만한 떠들썩했던 일을 자신만 모르고 있을 때, 그때의 당혹감이란. 그러나 달리 방법이 없다. 이미 어떤 식으로든 자신과 연관이 되어버린 ‘그 일’을 알아내기 위해 총력을 기울일 수밖에.

『1Q84』에는 두 명의 핵심 주인공이 등장한다. 유명 스포츠클럽의 강사로 일하는 아오마메(여)와 입시학원 수학강사로 일하는 덴고(남). 어쩌면 이들의 공식적인 직업은 한낱 포장에 불과하다. 아오마메는 여자에게 몹쓸 짓을 하는 남자를 저 세상으로 보내는 킬러이며, 덴고는 소설가 지망생이다. 

 아오마메가 킬러의 길에 들어선 것은 유일했던 친구 다마키의 자살 때문이다. 표면적으로는 아무 문제없이 살아온 다마키. 그러나 그녀의 평온한 웃음 뒤에는 남편의 잦은 폭력과 몹쓸 학대가 그림자처럼 따라붙었었다. 이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아오마메는 자신이 직접 고안한 아이스픽을 그 남자의 뒷목덜미에 꽂아 넣어 깔끔하게 저 세상으로 보내버린다. 아무런 증거도 아무런 의문도 남기지 않은 채. 그 후 우연히 알게 된 노부인을 통해 그녀는 본격적으로 킬러의 길을 걸어가게 된다. 이전에도 그랬지만 다마키가 죽은 후로 그녀의 인생에 남자는 없다. 그저 욕구를 발산할 상대를 골라 다닐 뿐이다.
 그렇다면 덴고는? 유명 출판사 문예지 편집자 고마쓰의 제안으로 열일곱 살 소녀 후카에리의 소설 <공기 번데기<를 고쳐 쓰게 된다. 문장은 출중하나 이야기 거리가 부족한 덴고, 이야기 거리는 풍부하나 문장력이 결핍된 후카에리. 고마쓰는 이 둘의 합작품을 만들어낸다면 분명 엄청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킬만한 역작이 탄생하리라는 것을 오래된 편집자의 직감으로 알아차렸던 것! 후카에리의 소설에 누구보다도 강력하게 이끌렸던 덴고는 도덕적인 문제를 차치하고 결국 이 엄청난 사기극에 동참하게 된다. 그것도 아주 긴밀하게. 

 이 한편의 소설에는 음모와 스릴, 에로스와 로맨스 사이의 아슬아슬한 경계, 신흥종교에 얽힌 거대한 비밀 등이 녹아들어 있다. 그리고 서서히 드러나는 아오마메와 덴고와의 관계. 이미 운명적으로 만날 수밖에 없는 그들이 하나의 사건으로 인해 어느 지점에선가 극적으로 상봉(?)하게 되리라는 여운은 읽는 내내 독자를 긴장하게 만든다. 이제 인지하지 못했거나 관심 밖에 있던 일련의 사건에 대해 깊숙이 관여해야 할 때다. ‘몇 가지 변경된 1Q84년’을 살고 있는 아오마메와 <공기 번데기<를 개작한 덴고는 각각 현실과 소설에서 만난 두 개의 달이 떠 있는 세상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한다. 의문의 존재 리틀 피플에 대해서도. 

 아오마메와 덴고의 이야기는 24장에 걸쳐 번갈아 가며 펼쳐진다. 홀수 장은 아오마메, 짝수 장은 덴고의 이야기다. 종종 아오마메의 이야기를 읽고 나면 덴고의 장을 뛰어넘어 아오마메의 이야기를 읽고 싶고, 덴고의 이야기를 읽다보면 아오마메의 장을 넘어 덴고의 이야기를 읽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히곤 한다. 그 강력한 유혹을 뿌리치고 순서대로 읽다보면 마치 톱니바퀴가 돌아가듯 서서히 맞물려가는 거대한 이야기 하나를 발견하게 된다. 빠른 전개와 상당한 흡입력으로 시종일관 호기심을 자극하는 소설. 주인공을 포함한 등장인물들이 지닌 독특한 이력과 사연은 읽는 재미와 속도를 배가 시키는 매력이 있다. 한밤중에 읽다 잘 시간을 놓쳐버렸다. 불현듯 ‘당신의 하늘에는 몇 개의 달이 떠있습니까’라는 반복되는 질문에 새벽녘 잠을 뒤척이기도 했다. 참으로 신기한 경험. 무엇이 나의 잠재의식을 붙들고 놓지 않는 것일까. 그 실체는 곧 2권에서 만나게 되리라 생각한다.

 이 책과 관련해 각 인터넷서점별로 진행하고 있는 이벤트가 과도하다 생각했었다. 이벤트는 때로 책의 가치와는 상관없이 판매부수에 일정부분 영향을 미치기기도 하므로. 그러나 1권을 다 읽고 난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다. 다소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홍보할만한 가치가 있는 작품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작가의 명성을 보고 이 작품을 선택했지만, 이제 이 작품으로 인해 하루키의 전작들을 꼼꼼히 읽어보고 싶어졌다. 작가의 내공은 한 순간 빚어지는 것이 아니기에 지난 작품들의 면면을 모두 만나보고 싶어졌다. 

 어떤 형태로든 변질된 사랑에 집착하고 있는 두 주인공. 이들이 진정한 사랑에 눈떠가는 과정도 지켜볼 만 할 것이다. 아직은 단정할 수 없지만 어쩌면 이 책의 핵심인지도 모를 일.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궁극에는 합일된 하나의 이야기를 담고 있을 것 같은 『1Q84』. 이미 내 손에는 2권이 들려져 있다. 책 읽기를 멈추지 마라. 거대한 비밀이 몰려오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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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꽃이 피었습니다
백은하 글.그림 / 북스캔(대교북스캔)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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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꽃이 말을 걸어옵니다, 어떤 이야기인지 한 번 들어보실래요?
- 백은하,『이야기꽃이 피었습니다』를 읽고



 꽃잎을 떼어 아무렇게나 책 속에 넣고 말린다. 한참 시간이 지난 후 꺼내어 보면 반듯하거나 혹은 제멋대로인 각양각색의 모양을 갖추고 있다. 그 꽃들을 하얀 종이 위에 올려놓고 몇 개의 선을 그려 넣는다. 그러면 사람이 된다. 이야기가 된다.『이야기꽃이 피었습니다』는 ‘꽃도둑’이라는 별명을 가진 글그림 작가 백은하가 마른 꽃잎에 그림을 그려 넣고 이야기를 곁들여 만들어 낸 책이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마음이 설렌다. 숨을 내려놓은 지 오랜 된 꽃잎이 다시 살아나 움직이다니. 사람이 되어 조곤조곤 말을 걸어오는 꽃잎이 마냥 신기해 자꾸 들여다보게 된다. 나풀거리는 치맛자락이 제법 멋스럽다. 표정도 행동도 생기 넘쳐 보인다. 한 송이 꽃이었을 때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으로 환하게 만들더니, 한 잎 한 잎 떼어져 제각각 흩어져도 풍성한 이야기를 만들어 내고 있구나. 꽃에게 고마운 것인지 백은하 작가에게 고마운 것인지 여하튼 고마운 마음이 든다.

 시인 듯 에세이인 듯 써내려간 글들은 작가가 만들어낸 작품과 어우러져 읽는 이의 마음을 찬찬히 다독여 준다. 어른이 되고 나서야 어렴풋이 엄마의 마음을 알게 되고,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후 한참의 시간이 흘러서야 크신 사랑을 느낀다. 인생은 마라톤과 같은 거라서 호흡도 조절하고 에너지도 길게 나눠 써야한다고 충고도 해준다. 여름이면 기승을 부리는 모기가 가려움과 병균을 옮기는 대신 웃음을 전파하면 좋겠다는 재미난 상상을 하기도 한다. 사랑 웃음 위로 충고 휴식…… 그야말로 이야기가 몽글몽글 피어오르는 책이다.

 ‘내게 꽃은 전부 사람으로 보인다’는 백은하 작가를 보면 한 평생 정원을 가꾸며 살다간 타샤 튜더가 떠오른다. 정성스레 닥종이로 아이들을 빚어내는 인형 작가 김영희씨와 소담하고 정갈한 작품들을 만들어내는 한복 디자이너 이효재씨도 떠오른다. 그렇게 그녀는 스러져가는 꽃잎을 가져와 새 생명을 불어넣어 자신만의 세계를 꽃피워내고 있다.

 느긋하게 두 어 시간이면 충분히 읽을 수 있는 책을 나는 되도록 천천히 읽는다. 조금씩 아껴가며 읽는다. 글을 읽고 그림을 본다. 어느 순간 그림이 읽히기도 한다. 총천연색의 꽃잎에 취해, 앙증맞은 행동에 취해 절로 웃음이 난다. 좋은 날 좋은 사람을 만난 것처럼 책 한 권이 나를 설레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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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치고 동맹 문학동네 청소년문학 원더북스 11
미타 마사히로 지음, 심정명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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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봄 햇살처럼 맑은 청춘들의 이야기
- 미타 마사히로, 『이치고 동맹』을 읽고

 사람은 누구나 살아가면서 삶과 죽음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해 볼 때가 있다. 특히 사춘기 예민한 시기에 접어든 아이에게 이러한 고민은 때로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어른들은 아이의 고민이라면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아이는 그 자체로 완벽한 인격체이며 스스로 짊어지고 있는 삶의 무게는 어른과 별반 다르지 않다. 살다보면 더 심각한 상황과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리라는 것을 그 또래 아이들은 미처 염두에 두지 못한다. 지금 현실의 문제가 가장 심각하므로.

 『이치고 동맹』은 늘 자살을 염두에 두고 사는 열다섯 살 기타자와가 또래 친구 데쓰야와 나오미를 만나면서 겪게 되는 심리변화를 잔잔하게 그려내고 있는 소설이다. 기타자와는 초등학교 5학년 시절 어느 동급생의 자살소식을 접한 후로 그 친구와 그가 남긴 유언의 문구를 마음에 새기며 살아간다. 더불어 19살에 생을 마감한 하라구치 도조의 ‘스무살의 에튀드’, 17살에 자살한 나가사와 노부코의 ‘친구여, 내가 죽는다 해도’, 21살에 자살한 오쿠 고헤이의 ‘청춘의 묘비’라는 책을 탐독하길 즐긴다. 한 마디로 기타자와는 살아있지만 늘 죽음을 생각하는 불안전한 영혼을 지닌 인물이다. 집안일에는 관심 없는 아버지, 자식의 관심사보다는 성적만을 중요시하는 어머니, 공부 운동 모든 면에서 자신보다 월등한 동생. 그 틈바구니 속에서 기타자와는 말없는 외톨이로 살아왔다. 중학교 3학년이 된 그에게 진로문제가 죽음이라는 단어를 더 자주 떠올리게 만드는 절체절명의 위기로 다가온 것은 어쩌면 자연스런 수순.
 
 그런 그의 삶에 같은 학교 야구부 에이스 데쓰야와 시한부 소녀 나오미가 등장한다. 데쓰야의 부탁으로 문병을 다니는 동안 기타자와의 마음에는 서서히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다. 죽음을 생각한다는 것과 죽음에 직면해 있다는 것은 염연히 다르다는 것을 인지하게 된 것일까. 생의 마지막 순간으로 다가서고 있는 나오미, 그녀를 오랫동안 좋아해온 데쓰야 그리고 한 소녀를 마음에 품게 된 기타자와. 이들의 이야기가 아직 찬 기운이 남아있는 봄 날, 온 힘을 다해 대지를 비추는 햇살처럼 나지막이 마음을 어루만진다. 나오미가 이 지상에 와서 살았다는 것을 오래도록 기억하자며 열다섯 살의 두 소년은 이치고(일본어로 1(이치) 고(5))동맹을 맺는다. 자살 같은 건 생각지도 말라며, 백 살까지 살아 나오미를 기억하자는 데쓰야의 제안. 살아야 할 이유는 그렇게 다가오기도 한다.

 이 소설은 상당히 절제되어 있다. 죽음을 소재로 하고 있지만 감정을 격하게 만들지 않는다. 요란하지도 유치하지도 않다. 인물들의 감정변화를 섬세하게 그려낸 수채화 같은 소설. 담담히 읽히며 묵직한 여운을 남긴다.
 
 청소년들의 자살은 일본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에게도 현실이다. 이미 1990년에 출간된 이 소설이 교과서에 수록되고 각종 분야의 추천 도서로 오랫동안 자리매김해 온 이유를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아직 어리다고만 생각한 우리의 청소년들이 얼마나 심각한 고민을 안고 살아가는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어른들 역시 아이였을 때가 있다. 어른의 잣대로 아이를 판단해서는 이해도 대화도 되지 않는다. 우리가 건너왔던 지난 시절로 돌아가 아이의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는 지혜가 필요하다. 결국 소통의 물꼬를 트는 이 책의 등장인물들처럼 우리도 늦지 않게 아이들의 마음을 헤아려 봐야 할 것이다.
 

"살아." 

"그래, 살게." 

 p.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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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의 추억
사이 몽고메리 지음, 이종인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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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되는 존재
- 사이 몽고메리, 『돼지의 추억』을 읽고

 어린 시절, 나는 시골에서 자랐다. 마당 가장 넓은 자리에 누렁이(개)가 살았고, 몇 마리의 닭들도 마당을 활보하고 다녔다. 집 뒤편으로 가면 돼지들로 혼잡한 이웃집의 축사도 있었다. 늘 어울려 지내던 동물들. 나는 그들에게 특별한 정을 느꼈을까. 그렇지는 않다. 누렁이의 촉촉한 콧망울과 깊은 눈매는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지만, 그 동물들을 가축 이상으로 생각하지는 않은 것 같다. 그런데 여기 동물 특히 돼지를 ‘가족’ 이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오지 정글을 탐험하며 야생 동물을 연구하는 동물학자 사이 몽고메리. 애완견(犬)도 아닌 애완돈(豚)이라니. 사실 그녀에게 돼지 크리스토퍼 호그우드(이하 애칭 ‘크리스’)는 애완의 개념도 넘어선 존재다. 그녀에게 동물은 안식처, 분신, 정신적인 쌍둥이이기 때문이다.(p.31 본문 인용)

 혹시 돼지의 평균 수명을 알고 있는가? 놀랍게도 6개월이라고 한다. 몇 마리의 암퇘지와 종돈 수퇘지는 몇 년을 더 살 수 있지만 6, 7년 이상을 사는 경우는 없다고 한다. 대부분 식용으로 키워지기 때문에 100킬로그램이 넘어가면 여지없이 도축되고 만다. 그동안 아무 생각 없이 돼지고기를 먹으면서 살아온 나로서는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심하게 말하자면 인간에게 먹혀 없어지기 위해 태어나는 생명이지 않은가.
 『돼지의 추억』은 이러한 돼지의 평균 수명을 가볍게 뛰어넘어 무려 13년 6개월을 더 살다간 ‘크리스’에 관한 이야기이다. 동물학자 사이 몽고메리와 학자 겸 작가 하워드 부부가 크리스를 처음 만난 건 1990년 4월. 버려진 온갖 동물을 데려와 집을 흡사 동물대피소로 만들던 아내를 하워드는 늘 구박했다. 그런 그가 아내를 위해 특별히 크리스를 데려오기로 결정한 것은 이례적인 일. 그 당시 사이 몽고메리는 암에 걸린 아버지를 간호하느라 정신적인 위로가 절실히 필요하던 시기였다. 불행인지 다행인지(분명 다행은 아니지만) 크리스는 함께 태어난 형제들 중에서 덩치가 가장 작고 병약한 무녀리(무리 중 도태되는 새끼)였다. 애지중지 신경을 쏟을 수밖에 없는 조건을 두루 갖춘 연약한 생명. 하룻밤이나 제대로 넘길 수 있을지 의문이었던 크리스는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그것도 340킬로그램에 육박하는 거구이면서 인간과 교감을 나눌 줄 아는 특별한 돼지로 말이다.

 크리스는 영리하다. 일반 돼지들처럼 마구잡이로 섞여 있는 먹이를 우적우적 씹어 먹지 않는다. 가장 좋아하는 것부터 ‘골라먹는’ 재주가 있다. 돼지우리를 탈출하기 위해 육중한 몸을 들이밀기 전에 머리부터 쓴다. 사람이 열쇠로 문을 열듯 문을 고정해놓은 끈을 ‘풀고’ 탈출을 감행한다. 우리를 탈출한 돼지가 흔히 온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듯 크리스가 그럴 거라고는 상상하지 말라. 크리스는 마을 곳곳을 ‘탐험’하듯 유유자적 돌아다닌다. 곧잘 사람들을 사귀고 집으로 모여들게 만든다. 사교성 없는 사이 몽고메리에게 만남을 주선하기라도 하듯이. 크리스의 쇼에 해당하는 배 마사지 역시 인기가 높다. 특히 어린아이들은 사족을 못 쓸 정도로 좋아한다. 간혹 말썽을 부리긴 하지만 대부분 크리스에게 호감을 보인다. 각종 매스컴에 출연할 만큼 유명인사로까지 자리 잡는다. 일반 가정집은 물론 레스토랑에서도 크리스를 위해 음식찌꺼기를 기꺼이 내놓는다. 다소 과분할 정도로 많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돼지를 가축 이상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고, 동물 애호가도 아닌  나로서는 그들의 이런 문화가 신기하기만 하다(더구나 애완용과는 거리가 먼 돼지이지 않은가). 사람이 아닌 것과의 정신적인 교감. 많은 사람들이 보여준 완벽에 가까운 사랑이 무녀리로 태어난 크리스를 보통 돼지들보다 무려 13개월 6개월을 더 살게 한 힘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돼지의 추억』에는 크리스와 더불어 오랜 세월을 살다간 콜리라는 개와 온갖 동물들이 등장한다. 사이 몽고메리 개인사도 다분히 녹아들어 있다. 사위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끝까지 인정하지 않았던 부모님,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드러나는 가족의 비밀, 순다르반스 호랑이, 아마존의 분홍돌고래, 타란툴라 독거미 탐사 등 그녀의 삶 대부분을 기록하고 있다. 시종일관 기막히게 재미있지는 않다. 하지만 이 책은 마음을 따스하게 다독이는 매력이 있다. 사람과 동물간의 새로운 관계를 연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말 못하는 동물과의 잔잔한 교감이 가슴을 두드린다.

 이 책은 ‘오래 살다간 돼지가 있었다’라고 말하는 책이 아니다. 돼지로 인해 변화된 인간의 삶과 특별한 교감에 관한 이야기다. 크리스는 릴라 가족에게 희망의 메시지가 되어준다. 암에 걸린 켈리와 특별한 우정을 나누는가 하면 정원에 관심 없던 사이 몽고메리에게 멋진 정원을 선물하기도 한다. 용서와 화해를 가능하게 하고, 소통하지 않던 세계로 길을 내어주기도 한다. 무엇보다 그 누구라도 크리스를 만나면 소소한 행복에 빠져들게 된다. 크리스가 뭔가 특별한 일을 했냐고? 천만에! 단지 오랜 세월 사람들 곁에 있어 줬을 뿐이다.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에 위안이 되는 존재. 꼭 사람일 이유는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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