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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요즘은 어떠하십니까 - 이오덕과 권정생의 아름다운 편지
이오덕.권정생 지음 / 양철북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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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해로 25살이 되어버린 나는 손편지보다 스마트폰으로 보내는 카카오톡 메시지가 익숙한 세대다. 이메일의 개념이 한국에 전해지기 전에 사람들 사이에서는 손으로 쓰는 편지를 언제나 주고받았고, 남몰래 가진 사랑의 감정을 전하기 위해서 연애편지를 쓰는 일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의 어른에게는 아련한 추억의 냄새가 나는 편지일지도 모르겠지만, 나와 같은 젊은 세대는 쉽게 이해하지 못하는 이야기다. 단순히 내가 머리로 이해하는 편지는 손으로 직접 글을 쓰는 글이기 때문에 거짓말을 쉽게 하지 못하고, 좀 더 솔직한 감정을 글로 옮기는 방법이라는 점이다.


 하지만 편지를 쓰지 않는다고 해서 요즘 젊은 세대가 솔직하지 못한 건 아니다. 비록 카카오톡 메시지를 통해 '사귀자', '헤어지자' 등의 말을 주고받는 가벼운 사람도 있다고 하지만, 스마트폰으로 할 수 있는 영상 촬영을 통해 이전과 달리 좀 더 시각적으로 감정을 전달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지난 목요일(16일)에 나는 페이스북을 통해 한국인과 사귀는 영국 여성의 사연을 접할 수 있었다. 펜팔로 만난 두 사람은 겨우 2주 동안 영국에서 만났지만, 서로에게 사랑하게 되었다. 한국 남성이 군대에 가 있는 2년 동안 그를 기다리다 마침내 영국 공항에서 재회하는 모습을 영상으로 보았다.


 이런 이야기를 보면 편지를 쓰지 않아도 요즘 세대는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의 마음을 전달하는 방법을 터득한 것 같다. 괜히 유튜브 영상을 통해 사랑을 고백하고,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일이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우리 일상 속에서 쉽게 볼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러나 이렇게 스마트폰으로 환경 자체가 바뀌었다고 해도 우리는 종종 손편지를 쓸 때가 있다. 여전히 군대에 가는 한국 남성들을 걱정하는 어머니와 연인이 손편지로 안부를 묻거나 전하는 것처럼, 첫사랑을 전하고 싶은 마음도 직접 손으로 쓴 편지와 글로 전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건 진심이다. 그리고 진심은 그저 화려한 말솜씨에 담을 수 있는 게 아니라 손으로 삐뚤삐뚤 쓴 짧은 글에서 더 애틋하게 담긴다. 그래서 사람들은 오늘날까지 손으로 직접 메시지 카드를 쓰거나 반성문을 작성할 때도 늘 손으로 쓰도록 훈계를 한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편지는 정말 대단한 것 같다. 단순히 연락용으로 사용되던 편지가 사람의 안부를 전하는 편지가 되고, 사랑을 속삭이는 편지가 되고… 편지가 없었다면 그 시절의 애틋한 사랑이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편지는 모든 게 전자 문서로 바꾸기 전까지 사람에게 떼놓을 수 없는 존재였다.


 오늘 갑작스레 오래된 '편지'이라는 단어를 말한 이유는 오늘 소개하려는 <선생님, 요즘은 어떠하십니까>이라는 책을 소개하기 위해서다. 이 책은 아동문학가 이오덕 선생님과 권정생 선생님이 주고받은 편지를 엮은 에세이로, 책을 읽어나가는 동안 두 사람의 이야기를 옆에서 듣는 기분이었다.


 나는 솔직히 책을 읽기 전까지 이오덕 선생님과 권정생 선생님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했다. 아니, 이름조차 알지 못했다. 책을 읽는 동안 권정생 선생님이 '강아지 똥'을 쓴 작가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이오덕 선생님은 권전생 선생님의 작품이 세상에 알려지도록 도와준 지기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죽마고우(竹馬故友)라는 말이 딱 맞는 두 사람이었다. <선생님, 요즘은 어떠하십니까>를 통해 읽은 두 사람이 주고 받은 편지 속에서 동화 '강아지 똥'의 등장인물이 처음에는 일본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글을 쓰는 권전생 선생님이 얼마나 힘겹게 글을 썼는지 알 수 있었다.


선생님은 저의 동화를 자꾸 좋게 보시려 하는데, 저는 아직 만족한 작품이 없다고 생각됩니다. 제 역량 가지고 지나친 욕심을 부리는 것 같지만, 어떻게 해서라도 일인(日人) 작가들의 작품을 능가할 수 있는 동화를 단 한 편이라도 쓰고 싶어요.

배우지 못한 것이 제일 슬프고 고통스럽습니다. 책 한 권을 읽는 데도 사전을 펼쳐 놓고 봐야 되니, 글 한 편 쓰는 데야 말할 나위 없지요. 그래도 자꾸 틀립니다. 어려운 말을 쓰는 것도 어렵지만, 쉬운 말로 쓰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계속 글은 쓰겠습니다. 앉아서 배길 수 있는 힘만 있으면, 무엇이곤 쓰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니까요. 아무와 얘기할 것이 없으니, 자연 책에 눈이 가고, 하고 싶은 말을 쓰지 않을 수 없지요.

세종문화사와는 공식적인 계약서가 없어도, 책만 팔리게 되면 적당히 생각할 테지요. 제 생각에도 그다지 기대는 못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독자들의 편지를 읽어 봐도 영 제 생각과는 엉뚱한 서신을 받을 때는 오히려 실망할 지경이니까요. 그토록 많은 편지 가운데, 단 몇 장이나 진짜 편지가 있을지? 가려내 보면 한심할 거예요.

선생님, 그럼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p61)


 책을 읽는 동안 여러 부분에 밑줄을 긋고, 포스트잇을 붙이고, '대단하다' '나는 이런 자세로 한 번이라도 글을 써본 적이 있는가?'는 생각을 했다. 언제나 글을 쓰면서 블로그에 올리는 삶이 '내 삶'이라고 말하지만, 정작 권전생 선생님처럼 절실하게 한 편의 글을 써본 적이 없어 부끄러웠다.


 뭐,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권전생 선생님께서는 글을 통해 일본 사람보다 더 좋은 동화를 쓰고 싶어 하셨고, 평생 아이들을 위한 글을 쓰기 위해서 노력하셨으니까. 마음속에 품은 본질이 너무 다르다. 내가 글을 쓰는 이유와 방향은 오직 블로그를 통해 내 이야기를 전달하고 싶은 것뿐이니까.


 그런 부분을 비교하면 당연히 글이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책을 읽는 동안 나는 '한 사람의 글이 만들어지는 과정은 그 사람의 인간 혼이 얼마나 깊이 있는가에 달라진다.'는 생각을 했다. 책을 읽으면서 느낀 권전생 선생님의 순도 깊은 문학은 선생님이 가진 선한 영혼에서 나왔음을 알 수 있었다.


 책을 읽는 동안 문득 '나는 이렇게 계속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서로 지탱해주는 친구가 있는가?', '내가 어떤 사람에게 감사 혹은 특별한 감정을 전하고자 편지를 쓴 적이 있는가?' 등의 질문을 해보았다. 이윽고 나는 역시나 어정쩡하게 '잘… 모르겠다.'는 답을 낼 수밖에 없었다.


 분명히 이메일로 연락을 주고받던 친구가 한 명 있었고, 쓸데없는 말을 카카오톡 메시지를 통해 주고받는 친구가 한 명 있고, 가끔 연락해도 아무렇지 않게 답해주는 친구가 한 명 있다. 그리고 연락처에 등록은 되어 있지만, 평소에 종종 이야기하지 않아도 안부를 물으면 답해주는 사람도 있기는 있다.


 그런데 이오덕 선생님과 권정생 선생님 같은 친구가 있는지 묻는다면 확실히 답을 할 수가 없다. 그저 내가 부족하므로 나 혼자 그렇게 생각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막상- 이런 질문을 맞닥뜨리게 된다면 대체로 많은 사람이 스마트폰의 연락처를 훑어보다 '잘… 모르겠다.'고 답하지 않을까?


 단순히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가벼워진 것이 문제일지도 모르지만, 여기에는 서로 진실함을 담아 존경하거나 함께 하는 사람을 사귈 기회가 줄어든 탓일지도 모르겠다. 학교에서는 언제나 친구를 경쟁자로 만들고, 사회에서도 술을 마시며 취하지 않는 이상 친구라 부르기 어렵게 되었으니까.


 책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을 해보니 친구가 별로 없다고 말하는 나 같은 사람이 늘어나는 것도 특이한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 즐기는 생활에 익숙해지는 건 함께 술을 마시면서 신세 한탄을 할 수 있는 친구보다 우리가 진실하게 믿고 의지하는 친구가 줄어들었기 때문이 아닐까?


 <선생님, 요즘은 어떠하십니까>는 제목 그대로 편지에서 서로의 안부를 묻는 이오덕 선생님과 권전생 선생님의 아름다운 편지를 읽을 수 있는 책이다. 단순히 개인과 개인의 편지 속에서 느껴지는 존경 그 이상을 읽으며 나는 현실에서 점차 사라지는 진실한 존경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언젠가 책을 만나볼 기회가 있다면 책을 읽어보는 것을 추천하는 동시에 가끔 친한 사람에게 편지 한 통을 써보는 일도 권하고 싶다. 말만 하는 게 아니라 나도 실천해야 하는데, 역시 사람은 머리로 아는 것보다 실천하는 게 더 어렵다. (아아, 이러니 내가 아직 일본 펜팔 친구를 만들지 못하지. 에휴)


 마지막으로 책에 기록된 권전생 선생님의 마지막 편지를 옮겨본다. 내가 이 마지막 편지를 옮기는 이유는 진실한 존경이 드러나는 동시에 학교에 대한 한탄이 와 닿았기 때문이다. '학교가 있어야 할 이유가 뭔지 모르겠습니다.'이라는 말이 그냥 마음속에서 오랫동안 맴돈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이지호 교수의 글 읽었습니다. 세상엔 생각도 느낌도 다르게 보는 사람도 있으니 별로 감정 상할 이유가 없다고 봅니다. 살아온 것이 다르고 배운 것이 다르니 어쩔 수 없지 않겠습니까. 북극지방 사람들은 세상은 춥다 할 것이고, 열대지방 사람들은 세상이 덥다고 할테니 그걸 나무라서 어쩌겠습니까. 경험하지 못한 것은 아무리 설명해도 이해 못 합니다. 선생님도 앞으로 그리 생각하시면 편해질 것입니다.
이제야 세상이 어떤 건지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빨리 달려가면 버스 좌석을 차지할 수 있고, 늦게 가더라도 새치기를 하거나 완력을 써서 차지하기도 할 테고요.
얼마나 고통스러우면 열두 살 아이가 자살을 할까요? 그 아이한테는 교육이 오히려 죽음을 가져다 준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학교가 있어야 할 이유가 뭔지 모르겠습니다.
추위에 건강 조심해주시기 바랍니다.
2002년 11월 28일 , 권정생 올림. (p3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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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한 편견
손홍규 지음 / 교유서가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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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에서 새롭게 선보인 브런치를 이용하면서 나는 매일 문득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생각을 글로 옮기고 있다. 비록 내가 적는 글이 진짜 작가의 글처럼 다른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거나 글을 읽는 짧은 시간 동안 여운을 느끼게 해주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열심히 적고 있다. (→노지 브런치 바로가기)


 나는 한 사람의 말하기를 보면 그 사람의 인품을 알 수 있고, 한 사람의 글쓰기를 보면 그 사람의 깊이를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자신의 머리에 있는 언어로 말하고, 자신의 가슴에 있는 언어로 글을 쓰는 일은 그렇게 나도 모르게 혹은 일부러 자신의 내면을 겉으로 드러내는 일이다.


 블로그를 오랫동안 운영하면서 상당히 개인적인 이야기를 많이 했다. 가끔 블로그에 적는 글을 읽어보시는 어머니가 '우리 집 이야기 좀 그만해라.'고 말씀하실 정도로 나는 내가 살아오면서 겪은 이야기를 책을 읽고 쓰는 감상 후기와 사회. 정치 그리고 사는 이야기를 하는 데에 인용했다.


 이런 모습은 어떻게 보면 편견이다. 개인적인 편견에 사로잡혀 글을 작성하고, 사회를 내가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이야기하는 행동의 연장선이기 때문이다. 그런 편견이 있기에 내가 쓰는 글은 언제나 '내 글'이 되고, 언제나 '부족한 부분이 눈에 띄는 글'이 된다. 그렇게 글을 쓰고 있다.


 알라딘 서평단 활동을 통해 만난 <다정한 편견>이라는 산문집은 작가 손홍규의 사는 이야기를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처음 책을 펼쳐서 읽기 시작하면서 과거에 읽은 이사카 코타로의 <그것도 괜찮겠네> 산문집을 떠올릴 수 있었는데, 역시 글을 쓰는 작가는 이런 이야기를 기록하는 법인가 싶었다.


 일반적으로 한 사람의 에세이는 그 사람이 당시 어떤 상황에 관해 어떤 편견을 가지고 엿볼 수 있는 솔직함이 묻어 나는 글이다. 특히 작가는 우리가 '저건 빨간 사과'라고 인식하는 사과에 대해서도 '사과 속에 숨어서 살기 위해 사과를 먹는 애벌레' 같은 보이지 않는 것을 끌어낸다.


 그래서 평범한 이야기이지만, 그들이 쓰는 에세이는 책으로 만들어지는 것 같다. <다정한 편견> 이야기 또한 손홍규 씨가 경향신문에 연재한 칼럼을 정리한 글을 묶어 책으로 만든 작품이었다. <다정한 편견> 책을 읽어나가는 동안 가벼운 총총걸음으로 책 속의 풍경이 들어왔다.


새벽 서너 시 무렵 누군들 졸음이 쏟아지지 않을까. 내가 갈 때마다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은 어김없이 잠들어 있었다. 곤히 자는 누군가를 깨우는 일은 무척 곤혹스럽다. 이처럼 곤히 자는 누군가를 깨워야 할 만큼 대단한 일로 찾아온 게 아닌 것 같아 무안하기까지 하다. 잠든 사람은 예외 없이 앳될 만큼 젊다. 멀지 않은 곳에 대학이 있어서인지 낮에도 편의점을 지키는 사람은 대학생처럼 보이는 젊은이들 뿐이다. 반만 뜬 눈으로 바코드를 찍고 내가 구입한 물품을 영수증과 함께 봉지에 넣어준 뒤 내가 문을 열고 나가기도 전에 다시 풀썩 카운터 위로 그 젊은이는 쓰러진다. 번화가가 아니어서 다행이다. 주택가 골목의 편의점이라 뜨내기손님이 적을 테니 잠깐이나마 방해받지 않고 눈을 붙을 수 있겠지. 이런 생각을 하며 돌아오면 아르바이트라는 낱말이 입속에서 까슬까슬하게 맴돈다. 부업이라는 뜻으로 쓰는 아르바이트는 본래 독일어로 직업, 노동을 뜻한다. 아우슈비츠 수용소 정문에도 'Arbeit Macht Frei'(노동이 자유케 하리라)라고 쓰여 있었다. 날이 밝아 야간 근무를 마치고 돌아간다 해도 그 아르바이트생을 기다리는 건 그날 밤 다시 시작되는 야간 근무일 것이다. 내가 그 나이였을 때 등록금 투쟁을 하다 길거리에서 한 대학생이 죽었다. 아르바이트를 수용소에 가둔 채 편히 잠든 자들의 파렴치한 밤에 죽지 않고 살아남은 내가 잠들지 못하는 이유다. (p101)


 만약 이 책에 연필로 그린 듯한 삽화가 있었다면, 좀 더 우리는 이야기에 들어가 작가의 시선으로 그때의 풍경과 생각을 읽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림 그리기와 피아노, 글쓰기를 좋아하는 나는 '넌 정말 예술 쪽으로 타고났구나!' 하는 말도 들었지만, 전부 뛰어나게 잘 하지 못했다.


 그래서 이렇게 책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 '어떤 부분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하기가 상당히 조심스럽다. 브런치에서 연재하는 글도 독자가 많지 않을 정도로 그저 그런 글이고, 블로그에 작성해서 발행하는 글도 그냥 막무가내로 쓴 것보다 나은 수준이니까. 내가 뭐라고 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다.


 하지만 마냥 '좋은 책'이라고 말하기보다 한 번은 '했으면 좋을 텐데.'이라는 말을 한다. 책의 저자가 내 글을 읽을 접점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고, 이렇게 적는 글이 내가 책을 집필할 때 '그때 난 어떤 책이 좋았더라?'라며 되돌아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정한 편견>을 읽는 동안 편안한 기분이었고, 선풍기의 약풍에 페이지가 넘겨지는 기분이었다. 이 이상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는 작가 손홍규 씨의 산문집. 단순히 나도 꾸준히 연재하는 글을 누군가 '책으로 내보시지 않겠습니까?'이라며 발굴할 가치가 있어지기를 조용히 바라본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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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사적인 도시 - 뉴욕 걸어본다 3
박상미 지음 / 난다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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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사는 도시 김해는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고향으로 많은 사람에게 알려졌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전의 시절에는 학생 시절 지리 교과서를 통해 한 번쯤 들어보았을 '김해평야'를 통해 사람들이 대충 아는 도시에 불과했었지만, 지금 그 도시 김해는 인구가 52만 명이 넘는 큰 도시로 발전하고 있다.


 그런데 그 발전이 마냥 반가운 일은 아니다. 왜냐하면, 무분별하게 투자가 이루어진다는 느낌도 솔직히 지울 수가 없기 때문이다. 김해는 '사람 살기 좋은 도시'를 슬로건으로 내세웠었지만, 지금은 그 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녹색 풍경이 잿빛 건물로 인해 밀려나고 있다. 과연 이게 정말 최선인 걸까?


 많은 사람이 '개발이 되어 땅값이 올라가고, 일자리가 창출되고, 사업이 커진다.' 하고 말하면서 누구나 개발을 반기는 모습이 정상이다. 나도 우리 집 근처에 신세계 백화점이 들어오는 모습을 보면서 '와 점점 더 발전하는구나!' 하고 반겼었고, 앞으로 더 많은 투자를 받아 문화 시설이 생기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녹색의 풍경이 점점 잿빛으로 시드는 도시를 보는 마음은 조금 불편하다. 조금 더 걸음을 옮기면, 나가면 연지 공원과 해반천, 봉황동 유적지 등 녹색 속에서 휴식을 취하거나 자전거를 탈 수 있는 공간이 있지만, 사람의 마음이 간사해서 두 개의 선택지를 모두 선택하고 싶어진다.



 갑작스럽게 내가 사는 도시 '김해'를 이야기한 이유는 얼마 전에 읽은 도서 <나의 사적인 도시>의 영향이다. <나의 사적인 도시>는 한국과 뉴욕을 오가는 저자가 매일 개인 블로그에 일기 형식으로 적었던 글을 엮어서 만든 책인데, '뉴욕'에 살면서 겪는 일상의 생각과 여러 가지 일을 담고 있다.


 이 책을 문학 평론가 이광호 씨는(책의 표지 뒤에서 읽을 수 있다.) 뉴욕이라는 도시를 다녀온 사람이라 책을 상당히 좋게 말하였는데, 뉴욕은커녕 미국도 가보지 않은 나에게는 '그냥 평범한 에세이'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솔직히 나는 공감이 어려웠다.


 책을 읽는 동안 김해에는 비가 오락가락했었는데, 마치 그 날씨와 같은 느낌이었다. 뭔가 빗소리가 들리는 듯하면서도 빗소리가 들리지 않는, 어쩌면 이런 변덕스러운 날씨가 책에서 내가 느낀 뉴욕의 풍경이자 저자의 이야기가 아닐까? 무엇보다 책에서 종종 나오는 그림과 작품을 모르기도 했고….


 그런데도 책을 읽는 동안 '아, 이런 부분 마음에 든다. 나도 이 도시에 사는 동안 그때 떠오르는 생각을 기록하는 일을 꾸준히 한다면, 몇 년 후에 빛을 발할 수 있을까?'는 생각도 해볼 수 있었다. 마음을 움직이는 부분이 있기에, 좋다고 생각한 부분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난 생각한다.


희열.


이따금씩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있다. 모든 사람들은 지금 이 순간 너무 기뻐 팔짝팔짝 뛰어야 한다고/ 누구나 이 순간 자신의 마음을 소유하고 있기에. 어떤 행동을 하건, 어떤 말을 하건, 나의 마음만은 아무도 알 수가 없다. 내 키만한 초록색 덤불로 빙 둘러진, 넘볼 수 없는 정원이다. 누군가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는 순간, 권태로운 표정을 짓고 있는 순간, 혐오로 치를 떠는 순간조차 나의 마음은 나만의 것이다. (p254)


 아직 글을 쉽게 쓰지 못해 어려움을 겪고, 난해한 책을 읽는 데에 서툴러서 책을 제대로 읽어 보지 못했을지도 모르겠다. 만약 언젠가 미국 뉴욕을 방문해볼 기회가 생긴다면, 다시 그때 이 책을 읽어보고 싶다. 그때가 된다면, 뉴욕이 내게 전해준 느낌을 바탕으로 책의 맛을 더 알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모두 저마다 자신의 이야기가 있는 도시에 살고 있다. 그리고 분명히 그 도시에는 오직 '나'만이 이야기할 수 있는 이야기가 있을 것이다. <나의 사적인 도시>는 저자가 블로그에 자신이 뉴욕에서 보내는 생활과 하는 생각을 기록한 과정을 통해 책으로 만들어질 수 있었다. 지금 우리도 적어보자.


 비록 잘 적을 수 없겠지만, 할 수 있는 말은 '우리 아파트 앞에 버스 주차장이 생겨 교통 혼란이 예상된다.'는 말뿐이지만, 그래도 그런 것을 남 몰래 적어보자. 요즘 스마트폰 어플에도 하루하루 기록할 수 있는 어플이 있고, 블로그에 비밀글로 적을 수도 있으니까. 뭐, 어떤가! 내 사적인 도시인데!


'오늘 내가 사는 도시 김해에는 비가 오락가락하고 있다. 자전거를 타고 떡볶이를 사러 가야 할지, 아니면 그냥 집에서 라면이나 끓여먹어야 할지 무척 애간장이 타는 하루다. 만약, 집에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메이드'가 있었다면, 이런 고민 없이 맛있는 것을 먹을 수 있을 텐데! 아, 너무 아쉽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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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훈의 나는 왜 쓰는가
한창훈 지음 / 교유서가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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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 내가 마음을 단단히 먹고 글을 썼던 때는 언제였을까? 아마 중학교 시절에 어떤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하고 싶은 말을 하기 위해서 그렇게 글을 썼다고 생각하지만… 당시의 기억이 제대로 나지 않는다. 단순히 나는 남들 앞에서 과감히 하지 못하는 말을 하고 싶어 글을 쓰기 시작했다고 생각한다.


 보통 어떤 아이가 처음 글을 쓰는 때는 학교에서 선생님의 강요로 시작한다고 생각한다. 학교 과제로 매일 일기장을 써오라고 하고, 어버이날을 맞아 부모님께 편지를 쓰라고 하고, 숙제로 책을 읽고 독서 감상문을 써오라고 한다. 아마 대체로 처음 글쓰기를 본격적으로 접하는 일은 이런 일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과정을 통해 시작하는 글쓰기는 '내 글쓰기'가 아니다. 왜냐하면,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시작한 글쓰기에는 '내 의지'가 없기 때문이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내가 왜 이 글을 쓰는지 이유가 없다면 그건 내가 쓴 글이 아니다. 단순히 숙제와 의무를 하기 위해 연필을 닳게 할 뿐이다.


 처음 내가 내 의지로 썼던 글에는 어릴 때부터 항상 사회에 대한 비판을 담았었다. 물질적 가치를 사람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우리 사회를 비꼬았고, 남을 괴롭히면서도 자각을 하지 못하는 주변 사람의 모습을 비판했다. 왜냐하면, 어릴 적에 내가 겪은 세상의 모습이 그랬었기 때문이다.


 일부 사람은 처음 자신의 의지를 갖추고 좋은 글을 쓰기 위해 노력하는 때는 바로 좋아하는 사람에게 연애편지를 쓸 때라고 한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이 좋아하는 아이에게 고백 편지를 쓰기 위해서 단어를 고르는 모습을 상상하면 저절로 미소가 지어지지만, 나는 전혀 그런 동기가 아니었다.


 처음 내가 의지를 갖고 쓴 글에는 한탄과 비난만이 가득했다. 세상을 향해 욕을 했고, 내가 이렇게 괴로워하며 하루하루 연명해야 하는 삶에 대해 저주했었다. 겨우 초등학생이, 겨우 중학생이 무슨 세상에 그렇게 불만이 으냐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그 당시의 나는 속에 오직 독기만 품고 있었다.


 독기만 가득했던 내 글은 '단순히 강하게 비판한다고 해서 말하고자 하는 뜻을 글에 제대로 담을 수 없다.'는 것을 책을 읽으며 알게 되어 변하기 시작했다. 직설적으로 비판하지 않고, 은유적으로 사회를 풍자하여 비판하는 소설을 읽으면서 글의 모습을 조금씩 가다듬기 시작했던 거다.


 그리고 처음 그렇게 다듬어 접근한 글로 지역 백일장 대회에서 상을 받았고, 교내 백일장 대회에서도 상을 받기도 했다. 이건 잠시 자랑하려고 한 말이다. 당시 상을 받았음에도 나는 내 글이 좋은 글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지금도 나는 그때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너무 나 자신을 향해 부족하다고 말하기만 하면 주눅이 든다. 그래서 나는 종종 글이 좋지 않다는 비평을 들을 때마다 과거에 좋은 글로 선정된 글을 보며 '그래도 개선의 여지는 있다.'고 믿으면서 조금 더 내가 쓰는 글에 자신을 갖고자 노력한다. 어쩌면 오늘 이 글도 그렇게 나를 응원하는 글일지도.


 오늘 글쓰기에 관해 갑작스럽게 이야기를 꺼내게 된 이유는 알라딘 서평단으로 만난 <한창훈의 나는 왜 쓰는가>이라는 책을 읽었기 때문이다. 서평단으로 만난 책이라 책을 소개하는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어떻게 이야기를 해야 할지 몰라 먼저 내가 글을 쓰기 시작했던 이야기로 서평을 쓰고자 했다.





 이 책 <한창훈의 나는 왜 쓰는가>는 작가 한창훈이 거주하는 남쪽 섬에서, 그리고 그가 겪었던 과거의 이야기를 통해 사람의 이야기를 하는 책이다. 책의 제목에 쓰인 '나는 왜 쓰는가'에 대해 직설적인 대답을 읽을 수는 없었지만, 그의 이야기를 통해 무엇이 그의 삶을 채웠는지 읽을 수 있었다.


 일반적으로 한 사람의 글에는 언제나 그 사람의 삶이 들어간다고 한다. 그 사람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에 따라 글의 문체가 다르고, 풍기는 냄새가 다르다. 그래서 우리 사회에서 소설가, 시인… 즉 소위 말하는 문학가가 되기 위해서는 다사다난(多事多難)한 삶을 살면서 소박한 맛을 알아야 가능하다고 한다.


 뭐, 고작 26살의 내가 말하기는 뭣하지만 나도 솔직히 내 인생은 다사다난(多事多難)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래도 나는 문학가가 될 수 없었고, 앞으로도 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겪은 일을 받아들이는 태도 자체가 문학가와 조금 다르기 때문이다. 나는 수긍이 아니라 언제나 반항을 했다. (재능도 없고,)


 그래서 내가 처음 내 의지로, 내가 전하고 싶은 의도를 가진 글이 우리 사회를 비판하는 글이었다. 백일장 대회에서 나온 '안개'라는 소재를 통해 뿌옇게 흐려진 안개 같은 우리 사회의 양심과 비통한 눈물을 이야기했었는데, 그 글로 상을 받게 된 것이 지금의 나로 이어지는 출발점이었다고 생각한다.


 작가 <한창훈의 나는 왜 쓰는가> 책을 읽어보면 어떤 남자아이나 생각해보았을 좋아하는 여자아이와 키스를 하고 싶다는 감정이라던가, 자신이 지내던 마을의 평범하지 않은 사람의 이야기라던가, 알고 지내는 다른 문학가의 이야기가 있다. 평생을 가더라도 나는 이런 이야기를 하지 못하지 않을까?

 

 책을 읽는 동안 느꼈던 건… 솔직히 잘 모르겠다. 딱 꼬집어서 말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피식'하며 웃음이 나온 부분도 있었고, '옛날에는 이런 모습도 있었구나'고 생각하며 읽은 부분도 있었고, '나는 과연 언제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우리 키스할래?'이라는 말을 할 수 있을까?'는 조금 부끄러우면서도 웃긴 생각을 했던 부분도 있었다.


 어떻게 보면 우스운 일이다. 그냥 읽는 것으로 충분한 이야기에 어떤 의미를 담아 글을 연재해야 한다는 일이 말이다. 처음 내가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우리 사회에서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무시하는 우리 사회를 비판하고자 했던 것인데, 이런 책을 읽다 보면 좀 더 일상 속의 행복을 말하고 싶어진다.


 작가가 사는 남쪽 바다의 냄새와 소리가 들리는 듯한 착각이 들었던 <한창훈의 나는 왜 쓰는가>. 책을 읽고 있노라면 나쁜 기억밖에 나지 않던 어릴 적의 기억 속에서 흐릿하게 웃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괜히 내가 미안했던 일도 있었고, 남에게 함부로 말하기 부끄러운 일도 있었다.


 아무쪼록 오늘 내 글을 읽는 사람이 <한창훈의 나는 왜 쓰는가>이라는 책의 제목을 알고, 글을 쓰기 시작한 내 이야기를 읽다가 문득, '나는 어떤 글을 과거에 썼었지?'이라는 질문 한 가지만 할 수 있으면 나는 충분히 소득을 거두었다고 생각한다. 결국, 어떤 이야기라도 모두 자신의 이야기로 완성되니까.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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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내가 사는 게 재미있는 이유 - 30년간 정신과 의사로 일하고 15년간 파킨슨병을 앓으며 비로소 깨달은 인생의 지혜 42
김혜남 지음 / 갤리온 / 2015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성공한 삶이란 무엇일까? 30대가 되었을 때 내 집이 있고, 차가 있고, 어디에 함께 가더라도 자신 있게 '이 사람이 제 여자친구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연인이 있고, 명함을 내밀 때 상대방이 훨씬 더 깊숙이 허리를 숙이는 직책에 있는 것을 우리는 보통 성공한 삶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 일반론에 불과하다. 사실 우리가 언제나 추구하는 '성공한 삶'은 우리가 머릿속으로 그리는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다. 아무리 경제적으로 성공했다고 해도 행복하지 않은 사람이 있고, 집과 차가 있어도 가지지 못한 것에 욕심을 내게 되면 성공은 먼 단어에 불과하니까.


 오늘 소개할 책 <오늘 내가 사는 게 재미있는 이유>에서는 성공을 이렇게 정리한다.


인생에서의 성공이란 경쟁에서의 승리를 말하는 게 아니라, 당신이 자신에게 얼마나 충실했으며 가족과 친구들에게 얼마나 사랑받고 필요한 존재였느냐 하는 데 있다.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희망을 품으며 살아가는 모습이야말로 당신이 아이들에게 물려줄 수 있는 최고의 유산이다. - p101_ 오늘 내가 사는 게 재미있는 이유


 윗글을 우리는 눈으로 읽고 머릿속으로 의미를 이해할 수 있지만, 가슴으로 진정 받아들이기는 조금 어렵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지금 당장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으면서 '사랑은 사치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사람과 사랑의 의미를 잘 모르는 나 같은 사람은 마냥 고개를 끄덕일 수 없기 때문이다.


 인생을 사는 데에 있어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고, 가족을 사랑한다는 것이 얼마나 멋진 일인지 알고 있다. 하지만 그건 머릿속으로 '사랑'이라는 단어의 개념을 이해하는 것에 불과하다. 가슴으로 '사랑'이라는 단어의 개념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스물여섯의 내 삶은 아직도 그런 삶이다.



 그러나 나는 조금 다른 의미의 사랑이라면 조금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위 사진은 올해 3월 부산 신세계 백화점에서 열렸던 에세이 출간 사인회에서 류승수씨와 함께 찍은 사진이다. 진정 '내 삶을 사랑한다'이라고 말할 수 있는 건 지금 보내는 시간을 웃으면서 즐기면서 보내는 것이 아닐까?


 비록 슬픔을 가린 채 웃는 것이 거짓 행복과 사랑일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삶을 살면서 삶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면 충분한 것이 아닐까? 아무리 질문을 던지고, 책을 읽고, 강연을 들어도,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도 알 수 없는 '사랑과 행복'은 내 머리와 가슴은 그렇게 정리했다.


사막에서도 저를 버리지 않는 풀들이 있고

모든 것이 불타버린 숲에서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믿는 나무가 있다

화산재에 덮이고 용암에 녹은 산기슭에도

살아서 재를 털며 돌아오는 벌레와 짐승이 있다

내가 나를 버리면 거기 아무도 없지만

내가 나를 먼저 포기하지 않으면

어느 곳에서나 함께 있는 것들이 있다

돌무더기에 덮여 메말라 버린 골짜기에

다시 물이 고이고 물줄기를 만들어 흘러간다

내가 나를 먼저 포기하지 않는다면


'폐허 이후'라는 도종환의 시다. 나도 시에 나오는 '저를 버리지 않는 풀'이 되고 싶고,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믿는 나무'가 되고 싶다. 이대로 포기해 버리기엔 너무 아까운 인생이기 때문이다.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먼저 떠나기도 하고 더 큰일을 당하기도 하면서 살아가는데 내가 이렇게 살아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게다가 나에게는 고통을 대신 겪어 주지 못해도 "많이 아프냐"며 손잡아 주고 같이 울어주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니 내가 절망할 이유가 없다. 앞으로 병이 다시 악화된다고 하더라도 나는 그때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 하면서 재미있게 살고 싶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어차피 사는 거 재미있게 살다 가면 좋지 아니한가. (p33)


 윗글은 <오늘 내가 사는 게 재미있는 이유>에서 읽을 수 있는 글 일부분이다. 도종환의 시도 정말 매력적이지만, 이 시를 만날 수 있었던 책 또한 매력적이었다. 내가 나를 먼저 포기하지 않으면 분명 언젠가 '사랑과 행복'을 머리로 이해하는 게 아니라 가슴으로 공감하는 날이 올 수 있지 않을까?


 오늘은 그 과정에서 만난 작은 책 한 권을 소개하려고 한다. 이미 앞에서 두 번이나 책의 이야기를 인용하였는데, 그 책은 알라딘 서평단 활동을 통해 만난 <오늘 내가 사는 게 재미있는 이유>이라는 책이다. 한마디로 정리하는 책의 주제는 '내 삶을 조금 다르게 보자'는 의미였다.



<오늘 내가 사는 게 재미있는 이유>의 저자는 정신과 의사를 직업으로 가지고 있다. 종종 심리학을 말하는 책 중에서 정신과 의사를 직업으로 하는 사람이 자신과 만난 환자들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적은 것들이 더러 있었는데, 이 책은 과거에 내가 읽은 그런 책과 분위기가 달랐다.


 왜냐하면, 책의 저자는 단순히 정신과 의사가 아니라 일을 하던 도중에 마흔세 살에 '파킨슨병'이라는 희소병에 걸린 환자였기 때문이다.


 파킨슨병은 도파민이라는 신경 전달 물질을 생산하는 뇌 조직의 손상으로 손발이 떨리고, 근육이 뻣뻣해지며, 몸이 굳고, 말소리가 잘 나오지 않는 등의 증상이 나타나는 신경 퇴행성 질환이다. 파킨슨병은 아직까지 딱히 치료법이 없어 희귀성 질환으로 분류되며 발병하고 15~17년 정도 지나면 사망이나 심각한 장애가 나타난다.


 <그래도 괜찮은 하루>의 저자도 청각 장애인이었는데, 서서히 눈의 시력을 잃어버리는 질환을 앓고 있었다. 이렇게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병을 앓음에도 꾸준히 글을 쓰면서 살아가려는 의지와 자신이 배운 것을 말하는 사람이 난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 책 <오늘 내가 사는 게 재미있는 이유>는 과거 정신과 의사를 직업으로 하면서 심리학과 삶에 대한 이야기를 적은 책과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책은 저자가 파킨슨병을 통해 배우게 된 삶에 대한 작은 의미, 그리고 아픔에 대한 고백과 깨달음 등에 관한 이야기였다.


구로야나기 테츠코의 소설 <창가의 토토>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어쩌면 세상에서 진실로 두려운 것은 눈이 있어도 아름다운 것을 볼 줄 모르고, 귀가 있어도 음악을 듣지 못하고, 마음이 있어도 참된 것을 이해하고 감동하지 못하며 가슴의 열정을 불사르지 못하는 사람이 아닐까." 나도 파킨슨병이 아니었다면 여전히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을 다 놓치고 살면서도 그걸 왜 굳이 알아야 하느냐고 반문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지는 해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옆 사람의 손이 얼마나 따스하고 위안이 되는지, 삶이 얼마나 소중하고 경이로운지 알고 있다. (p47)


 윗글은 <오늘 내가 사는 게 재미있는 이유>에서 접할 수 있는 부분이다. 자기계발서에서 조금 강요가 섞인 목소리로 이런 말을 읽을 때와는 달리 저자의 아픔이 전해져 오면서 크게 마음이 술렁거렸다. 그게 이 책을 읽은 내게 책이 준 큰 감동이었다.


 책을 계속 읽어나가면서 저자의 어려움에 어느 정도 공감하게 되고, 저자가 만난 환자의 이야기를 토대로 저자가 덧붙이는 삶에 대한 작은 이야기는 따뜻함이 느껴졌었다. 아래에서 읽을 수 있는 글은 그렇게 읽은 책의 일부분인데, 이 말은 지금의 내가 명심해야 할 말이라고 여겼다.


누구나 부족한 구석이 있지만 찾아보면 좋은 구석도 많다. 그런데 부족한 것만 너무 커 보여서 주눅이 든다면, 그것은 내가 진짜로 그런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 얽매여 있어서다. 예를 들어 "너는 왜 이렇게 못 생겼니?"라는 얘기만 듣고 자라면 자기가 정말 못생긴 줄 안다. 그런데 알고 보면 그건 여자 형제들과 비교해서 한 말일 뿐, 밖에 나가면 예쁘지는 않아도 평범한 축에 속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다. 그러므로 자존감이 낮다면 우선 잘못된 시각부터 교정해야 한다. 열등감이 너무 깊어 모든 것이 두렵다고 말하는 환자에게도 그렇게 이야기했다.


"당신이 스스로를 바라보는 시각으로 인생은 흘러가게 되어 있어요. 당신이 스스로를 긍정적으로 보면 인생도 그렇게 흘러가고, 당신이 스스로를 실패자로 보면 인생도 그렇게 흘러가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이 당신을 바라보는 시각 말고, 당신이 자신을 어떻게 바라볼지 그것부터 결정하세요." (p154)


 열등감은 나의 나약한 마음이 만든 괴물이라고 말한다. 과거 강연100℃의 '하버드생 이주호의 열등감은 내가 만든 괴물' 강의를 통해서도, 혜민 스님께서 말씀하신 '열등감을 넘어서는 방법'에서도 들었던 말과 같았다. 자신에게 가지는 열등감은 내가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는지에 달라지는 것이니까.


 글의 앞부분에 내가 류승수씨와 함께 찍은 사진을 첨부한 것도 어느 정도 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한 작은 노력에 해당한다. 오래 전부터 블로그에서 나는 열등감을 넘어서기 위한 노력을 하나둘 실천하고 있는데, '못생긴 놈' '아무것도 안 되는 놈'이라고 울리는 보이지 않는 목소리를 이겨내기 위한 그 과정이었다.


 확실히 나는 못생겼고, 명문대를 졸업하지도 못한 주제에 글을 통해 잘난 체하는 작은 블로거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게 어때서? 이렇게 내 의견을 말하는 것을 통해 꿈을 향해 발을 내디딜 수 있다면, 그것으로 이미 자신감을 가지고 삶을 사는 데에 부족함이 없지 않을까? 난 그렇게 생각한다.


 내가 최근에 읽은 여러 책은 다 그렇게 말해주었다. 오늘 소개한 책 <오늘 내가 사는 게 재미있는 이유>도 다르지 않았다. 저자는 파킨슨병에 걸린 것에 낙담하면서 남은 삶을 부정적으로 한탄하며 살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저자는 그 아픔 속에서 할 수 있는 것과 하고 싶은 것을 찾아냈다.


 <오늘 내가 사는 게 재미있는 이유> 책이 담은 이야기는 저자의 그 이야기였다. 이 책이 삶을 즐길 수 있도록 확 바꿔준다고 말할 수 없지만, 적어도 내 삶을 다르게 보려는 시도는 할 수 있게 해줄 수 있다고 믿는다. 사는 데에 재미가 없다면, 얼마나 끔찍한가. 난 그것을 잘 알고 있다.


 10명의 사람이 있다면, 10명 모두 다른 사람에게 쉽게 말할 수 없는 상처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모두 울기만 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내내 울지만, 어떤 사람은 웃으면서 슬픔을 극복하고 지금을 즐기려고 한다. 나는 삶을 울면서 지내기보다 웃으면서 지내고 싶다. 모두 그렇지 않을까?


 마지막으로 책의 마지막 장을 향해 가면서 만난 인상적인 한 부분을 남긴다. 부디 오늘 이 글을 읽은 사람이 재미있게 삶을 볼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다.


내 재미 목록 중에는 사진도 들어 있다. 원래 사진 찍기를 좋아해서 나는 여행가면 늘 '찍사'를 맡았다. 그런데 우연히 찍은 물방울 사진을 크게 확대해 인화해 봤는데, 물방울 안에 온 세상이 비춰져 담겨 있음을 발견했다. '이렇게 작은 물방울 안에 내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세상이 있구나.' 그때부터 나는 물방울 사진 찍기에 취미를 붙였다. 온갖 물방울들이 내 눈에 포착되었다. 아스팔트 사이에 고인 빗물부터 꽃잎에 맺힌 이슬까지. 찍어도 찍어도 소재가 고갈되지 않으니 참 신이 났다. 그리고 사진을 찍으면서 또 한 번 깨달았다. 세상은 내가 보고 싶어 하는 만큼 보여 준다는 걸, 그러니까 재미있게 살고자 마음먹은 사람에게 이 세상은 재미투성이라는 걸. (p283)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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