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촌스럽게, '가문'이라니?
 

SBS에서 주말 10시에 방영했던 <가문의 영광>이 막을 내렸다.

총 54회에 걸친 꽤 긴 호흡의 드라마였는데,

내가 재미를 붙여 보기 시작한 것은 한 중반쯤, 20회 즈음이 넘은 이후였다.

 

처음에 관심이 안 갔던 이유는 제목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재벌집 선남선녀들의 짝짓기 얘기인듯한데

제목까지 '가문'의 '영광'이라니, 이 무슨 시대착오적인 주제를 담으려 하는 것인가...싶었다.

 

지금, 한국에서 '가문'따위는 결국 부르주아 계층 내부에서

자신들의 밥그릇을 지키기 위해서나 동원되는 개념이 아닌가?

재벌들이 모자라든 잘났든 제 자식들에게 어떻게든 자신의 기업을 물려주는 일,

그 안이 썩고 곪았어도 자기끼리는 서로 잘났다며 추켜세우고 감싸주는 일,

그러는 과정에서 그 외부에 대해 그들이 보여주는 폭력적이고 이기적인 가족주의...

뭐, 그런것들밖에 상상이 안되는 어휘였기 때문이다, '가문'이란.

 

2. 연애를 통해 '재혼'하는 네 커플

 

주연급 남녀들의 러브스토리도 딱히 새롭지 않다.

대성건설 하사장(서인석 분)의 세 자녀-수영(전노민 분), 태영(김성민 분), 단아(윤정희 분)가

적당한 '갈등', '혼사장애'를 딛고 결혼에 골인하는 이야기이다.

 

이란성 쌍둥이인 수영과 태영은 둘 다 이혼남이다.

드라마 초반이 하회장(신구 분)의 아버지의 임종에서 시작되는데,

증조부의 장례를 치뤄야 하는 날,

수영은 아내의 불륜으로, 태영은 스스로가 바람을 피우다 들통나서 간통죄로 이혼을 하게 된다.

이후 수영은 자신보다 열 몇살이 어린 고아 아가씨이자 자신의 회사 청소부 직원인 진아(신다은 분)와 사랑에 빠지고,

태영은 자신이 간통죄로 경찰서에 끌려갔을 때 보게 된 가난한집 똑순이 여경 나말순(마야 분)과 티격태격하다 연애를 시작한다.

 

그들에게 닥치는 혼사장애는 흔한 것들이다.

신분의 차이, 계급의 차이, 나이의 차이.

거기에 태영의 바람기와 불임의 몸인 진아의 '종부'로서의 부족한 (생물학적)자질 정도가 덧붙여진다.

그러나 적당한 갈등과 장애 끝에 그들은 결혼을 결심하고, 결혼에 골인한다.

 

한편 막내딸인 단아도 결혼 경력이 있다.

그러나 결혼한 날 교통사고로 남편을 잃은 뒤

과거의 유물과 같은 '청상과부'로, 그녀가 일하는 학교의 박물관에서 늙어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졸부 집안의 아들로 카리스마 넘치는 냉혈한,

전형적인 '하이틴 로맨스' 주인공 같은(특히 그의 손발이 오그라드는 '당신, --였군.--였나?'말투, 딱 HR스탈이다^^;) 

남자 이강석(박시후 분)과

연극으로 시작된 가짜 연애를 하다 사랑에 빠진다.

 

이들의 혼사장애는 단아의 '서방 잡아먹을 팔자'.

강석의 부모는 단아가 강석까지 잡아먹을까봐 극구 결혼을 반대하지만,

강석이 자초한 위기의 순간에 목숨을 건 두 사람의 절절한 사랑 덕분에

강석의 부모는 결국 두 사람을 받아들인다.

 

이러한 내용들은 어떻게 보면 신선할 것 별로 없다.

그런데 한 가지 정도는 이미 이 지점에서도 특이함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하사장의 세 자녀가 모두 '재혼'을 한다는 설정.

 

심지어 이 드라마에서는 아버지인 하사장조차도 재혼을 한다.

30년 전에 상처한 하사장은 같은 회사의 홍보실장이자 후배인 이영인(나영희 분)과 사랑에 빠진 것이다.

이미 두 번 이혼한 경험이 있는 영인은 결혼을 두려워했으나

하사장의 아이를 갖게 되고 낙태를 하려하지만

하사장네 가족의 따뜻한 마음에 감복해 그와 결혼을 하게 된다.

 

 

3. 새로운 가문, '패치워크' 가족되기

 

즉, 이 드라마는 네 커플의 재혼이야기이다.

이들이 각각 사랑에 빠져 결혼을 하기까지의 과정은 드라마 트루기적이다.

그러나 그들의 결혼이 재혼이기 때문에,

이 하사장네 '가문'은 매우 복잡한 가족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다는 것에서

이 드라마만의 독특한 색깔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영인은 갑자기 30대의 자식이 셋이나 생겼고, 손자가 된 동동이보다 9살이나 어린 아이를 낳는다.

태영과 결혼한 말순은 태영의 전처와의 사이에 낳은 아들인 동동으로부터

"우리 아빠, 바람기 많은 건 아시고 결혼할 결심하셨어요?"라는 질문을 받으며 결혼에 골인한다.

종손인 수영은 진아가 불임의 몸이기 때문에 결혼 후 아이를 공개입양한다.

 

이처럼 이들은 고상하고 족보있는 '장성 하씨 가문'이라고 하기엔 꽤나 '콩가루' 스타일의 가족인 것이다.

혈족, 순혈주의같은 것은 도무지 지키기 힘든 그런 가족.

그러나 그런 겉으로 보기에 '콩가루'인 이 가족은,

가족간의 연대, 배려, 소통을 통해 그 어느 '혈통 좋은' 가문보다 훌륭하게 '가문'을 이루며 살아간다.

 

종부인 자신이 아이를 낳을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결혼을 거부하는 진아에게

이 사실을 아는 하회장과 영인, 그리고 수영은 '가문은 꼭 혈통으로만 이어지는 것이 아니다.'라며,

종손을 낳을 수 없다는 사실때문에 결혼을 할 수 없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진아의 그 '진실함'만으로

종부로서의 자격이 충분하다며 결혼을 적극 추진한다.

그리고는 아이를 공개입양한다.

 

한편, 영인(나영희 분)은 '쿨한 새로운 종부상'을 제대로 구현한다.

종부가 되었지만 그녀는 집안일보다는 회사일에서 훨씬 두각을 나타내고,

그러나 집안의 대소사에 대해서는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정치적 올바름의 감각으로

성별로 등급이 나뉘어져 있던 식사 문화를 세대별로 나눈다거나

집안일에서 남성들의 참여를 적극적으로 끌어내는 등

가문의 고루한 관습을 적당히 개혁하면서도,

가족 구성원들 각자의 노고와 고민을 해결해 주는 등 

그 가족 내부의 소통에는 가장 주도적 인물로 역할한다.

 

또한 그러한 그녀를 가족들은 제대로 이해하고 대우해준다.

아이를 낳은 뒤부터는 집안일을 거들 사람이 부족하니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했을때

시아버지 하회장과 남편 하사장은 그녀처럼 유능한 사람을 집에 두는 것도 낭비이며,

아이 낳은 뒤 그녀처럼 일 좋아하는 사람은 집에만 있으면 산후우울증에 걸릴 수도 있다며 반대한다.

그러면서 하회장이 며느리 대신 아이를 돌본다.

 

태영과 말순은 어른스러운 아홉살 짜리 아들 동동이에게서

매일같이 훈화말씀과 반성문 숙제를 받으며 철이 들어가고,

동동은 의로운 경찰인 새엄마가 자랑스러워서 학교에 가면 자랑하기 바쁘다.

새로 태어난 동생도 누구보다 열심히 보살피며, 자신의 적성이 '신생아 돌보기'임을 자처한다.

 

이처럼 새롭게 맺어진 가족들이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보다 더 훌륭하게 가족을 이루며 사는 모습은(그것도 한꺼번에 네 커플이나!!!)

기존의 드라마들이 보여주지 않던 미덕이었다.

 

이들 하씨 집안 '가족되기'의 장애는

대부분 사랑과 결혼을 결심하는 당사자들 내부에서 비롯된 갈등이다.

자신이 부족해서, 상대방에게 너무 미안해서, 차마 마음을 못 연다.

그러나 그들이 그 고민을 딛고 결혼을 결심하면 가족들은 그 결정을 무조건 받아들인다.

 

보통 드라마의 혼사장애는 당사자들 스스로의 갈등이 아니라, 부모세대의 반대에서 비롯된다.

정말 지긋지긋하지 않은가....머리싸매고 드러누워 아들의 결혼을 반대하는 시어머니.

(최근 배우 윤여정이 <여우비>라는 다큐에서 이런 드라마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런 드라마 속 역할이 나 스스로도 하도 지겨워서 우리 아들에게 그랬어요. 네가 어떤 여자를 데려와도 난 절대로 반대 안하겠다고요.")

 

그런 점에서 이 드라마는 시대착오적이기는 커녕, 훨씬 이 시대에 걸맞는 가치관을 갖고 있다.

결혼이나 가족맺기에서 제일 중요한 의사결정의 주체는 본인들이라는 것.

그렇게 해서 맺어진 새로운 가족은 서로의 개성과 차이를 인정하고 노력하여 맞춰나간다.

엘리자베트 벡이 말한 '패치워크' 가족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4.판타지라도 어디냐-재벌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그 외에도 이 드라마의 미덕은 아주 많다.

하회장 가족은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정신을 실현하는 재벌이다.

그들은 강석이 회사를 인수합병하려 했을때, 회사를 양도하는 조건으로 직원들의 고용보장 한 가지만을 요구한다.

또한 하회장은 자신의 재산을, 평생을 자신의 집에서 일한 몸종 할머니 삼월에게만 남겨주고

자신의 자녀들, 손자들에게는 한푼의 재산도 상속시키지 않는다.

자신의 나머지 재산은 모두 회사 직원들의 복지를 위해 내 놓는다.

 

이러한 하회장 집안의 정신에 동화되어 가는

졸부사돈 이천갑(강석의 아버지, 연규진 분)도 자신의 재산을 사회에 환원한다.

졸부가 되었지만 넝마주이 출신인 탓에 늘 '가문'과 '족보'에 대한 컴플렉스를 가졌던 천갑의 모습과

식모 출신으로 허영심 많고 무식하긴 해도 정 많고 순수한 천갑의 처 영자는

그들의 눈에 비친 '족보있는 집안', '뼈대 있는 가문'의 대명사인 하회장 일가에 대해

존경의 마음을 갖게 되면서 돈이면 다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돈을 제대로 쓰는 법을 차츰 깨달아가는 것이다.

 

강석이 공격적으로 사업을 확장하던 과정에서 자살하게 만든 한 재벌가의 아들 문제로 사회에서 지탄을 받게 되자

자신의 재산을 내놓는다는 걸 발표하면 어떻겠냐는 생각을 아들 강석에게 말하자,

"정말 사회에 환원하고 싶으시면, 익명으로 하세요. 저 구할 생각으로 하지 마시구요."라며 아버지의 생각을 조금 더 교정한다.

천갑은 그러자 "그래, 내가 또 '거래'를 하려 들었구나. 여전히 장삿꾼 기질을 못버렸어."라며 반성한다.




물론 꿈같은 스토리이다. 지나치게 착한 드라마다.

드라마의 막판으로 갈 수록 등장인물들이 하나같이 착해져서 약간은 보기 민망할 지경이었다.

이 세상에 이렇게 욕심없는, 이렇게 착하기만 한 자본가가 있겠는가?

그러나 어차피 꿈을 그리는 게 드라마라면,

재벌이 "내 돈을 거절한 여자는 네가 처음이야!"라며

내숭9단의 재투성이 아가씨를 선택해

신분상승시켜 준다는 꿈보다는 바람직하지 않은가?

 

뭐...이 드라마를 과연 재벌들이 봤을까는 의심스럽지만(시청률은 꽤 높아 늘 주말시청률 1~2위를 다퉜다),

봤다면, 분명 자본가들에게 '계몽'이 될만한 드라마임은 분명하다.

 

 

5. 하씨 핏줄 아닌 사람들이 성취해 낸 하씨 가문의 영광

 

그런데...이게 끝이 아니었다.

이 드라마의 마지막 반전.

이 드라마는 종반부에 가서 한 가지 더 놀라운 진실을 밝힘으로써

또 한번 '가문의 영광'의 새로운 의미를 구성해냈다.

 

그것은 바로, 하회장(신구 분)이 사실은 하씨 집안의 자손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하회장의 모친은 하회장의 아버지가 일제 강제징용에 끌려간 사이

동네의 부랑배에게 겁욕을 당해서 하회장을 임신했던 것.

하회장의 부친은 징용때 끌려가서 불임의 몸으로 돌아왔었다.

몸을 더럽힌 종부인 하회장의 모친은 하회장을 낳은 뒤 자살을 했고,

그런 하회장은 부친의 극진한 사랑으로 자라났다는 것이다.

 

이 사실을 어렸을 때 알게 된 하회장은 '자신은 더러운 피이다. 하씨 집안 사람이 아니다'며

집을 나가려 했지만, 그때마다 부친은 하회장을 붙잡아 안으며 말했다고 했다.

'너는 내가 사랑한 아내의 자식이니 내 자식이다. 내 자식이니 하씨 집안 종손이다.'라고.

그 뒤로 자신은 하씨 집안 사람이라는 사실을 더이상 의심하지 않았다고

하회장은 모든 가족을 불러 앉혀놓고 말한다.

(이러한 '비밀'은 작가가 처음 드라마를 구상할때부터 마련해놓았던 장치였다.

그만큼 처음부터 이러한 주제의식은 작가에 의해 면밀히 의도되고 계획된 것이었다는 점에서 특히 훌륭하다.)

 

즉, 그 자리에 있던 사람은, 사실 그 누구도 하씨 집안의 피를 이어받지 않았던 것.

(하회장의 늦둥이 여동생(박현숙 분) 도 물론 업둥이다.)

그들은 그러한 하회장의 말을 엄숙히 듣고난 뒤 충격을 받기는 하지만,

다음날에도 매일 아침 올리던 상식을 올리며 하씨 가문의 조상들에게 예를 다한다.

 
이처럼 이 드라마는 매우 독특한 가치관을 가진, 정치적으로 올바른 드라마다.

가문, 가족을 이루는 힘이 이처럼 인간에 대한 순수한 애정과 연대의식이라면,

오늘날의 가족주의가 가진 수많은 병폐들은 생겨나지 않을 것이다.

서로 사랑하고, 이해하고, 배려한다면 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피로 맺어지지 않아도 훨씬 더 좋은 '가문'으로, '영광'을 누리며 살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이 드라마가 협찬 때문에 거론한다는 혐의는 있음에도

실버타운을 건설해서 그 안에서 노인들이 새로운 가족을 형성하는 모습을 여러 차례 보여준 것도 무척 인상깊었다.)

 

 

그러니, 이 드라마를 보며 우린 이런 정도의 생각은 기억해 둘 수 있지 않을까?

"가문이란, 그 가문 내부의 사람들을 외부로부터 배타적으로 보호하기 위한 울타리가 아니라

더 많은 외부의 사람들까지 새롭게 연결하기 위한 끈이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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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짱녜 2009-08-22 0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아 이 드라마가 최근까지 하고 있었던 것이로군여! 몇 달 전 몇 번 봤던 기억이 다인데.. 신구 영감을 수장으로 하는 그 가문의 인적 구성이 무척 황당하면서 흥미로웠던.. 원수 집안(?) 간의 로맨스는 좀 낯간지럽더라는..ㅋ 그런데 한가인 남편 연정훈의 아버지 연규진의 졸부 속물 연기가 정말 지대로더라는..ㅋ